[106] 디지털 혁명(Digital 革命) ==============================
#67-1
콘퍼런스장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유재원이 나름 분위기를 가볍게 이끌어 가긴 했지만, 콘퍼런스의 주제는 암호화에 대한 이야기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돈과 명예가 걸린 일이기 때문에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의 태도도 무척이나 진지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세련된 모습의 에그 PC가 모습을 드러내자, 실리콘밸리의 그 자유로운 분위기가 행사장에 살아났다.
유재원이 카트에 올려져 있던 에그 PC를 직접 설치하자 그 분위기는 배가 되었다.
상단의 손잡이를 잡고 처음부터 설치된 데스크로 옮긴 다음, 전원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고 키보드도 연결하니 세팅은 끝이다.
일체형이라 모니터와 VGA 카드를 연결하는 작업도 필요 없었고, 모니터가 별도의 전원도 요구하지 않는다. 유재원 같은 국민학생이 혼자 설치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것이다.
전원을 누르기 전에 살짝 긴장되는 유재원이다. 만약 에러라도 뿜으면 대망신 아니겠는가. 다행히 전원 버튼을 누르자 무사히 부팅이 완료되었다.
“이렇게 세련된 모습이지만, 성능은 무시무시한 괴물입니다. 486과 스카시(SCSI) 인터페이스의 하드디스크, 4메가 메모리를 가지고 있죠. 부팅이 순식간에 끝나버렸습니다.”
고성능 하드디스크가 설치되어 있어서, 몇 초 만에 안드로이드 알파의 바탕화면이 나타났다.
매끄러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프로토타입의 에그 PC 중에서도 가장 고성능 모델을 이 자리에 가지고 나왔다.
유재원의 설명에 객석에서 오오 하는 반응이 자동으로 나왔다. 탄성밖에 나오지 않는 거다. 그도 그럴 것이 에그 PC는 보기엔 간단해 보였지만, 스펙은 컴퓨터 전문가도 감탄할 만큼 높았기 때문이다.
보통 겉이 번지르르 하면 속은 좀 부실한데, 에그 PC는 해당사항이 없다. 486이라는 최신 최강의 CPU를 확실히 받쳐주는 스카시 하드 디스크는 웬만한 개인용 PC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급 부품이었다.
애플의 출판 전문가용 고급 기종이나 선마이크로시스템스의 서버 모델에서나 찾아볼 확장 기능인데, 개인용 PC에 채용된 건 처음일 거다.
모니터도 최강 스펙이다.
14인치 크기의 일본 에이조사 모니터로 성능은 SVGA로 기존의 640*480에서 두 단계 더 상승한 1024*768의 해상도에 256 컬러를 지원한다. 해상도와 색상이 높아지면 느려질 수도 있는데, 안드로이드 알파에서는 글라이드 X 라이브러리를 통해 가속된 상태여서 메뉴를 누르거나 문서를 열 때, 도스의 텍스트 모드보다 더 빨랐다.
“이제껏 컴퓨터 업계의 많은 모델이 빛깔 좋은 개살구였습니다. 겉은 번드르르한데 내실은 없었다는 거였죠. 하지만 우리 ID 테크놀로지의 제품이 그 트렌드를 바꿔 보겠습니다. 앞으로는 보기도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말입니다. 둘 다 한국의 속담입니다만, 기억하고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박수가 쏟아졌다.
유재원은 미국인들이 모르는 한국의 속담을 쓰면서도 공감대를 끌어냈다. 불과 5년 전에 아타리 쇼크가 일어났었다. 그 여파는 지금도 남아서 박스는 크고 화려한데, 속은 부실한 것들이 많았다.
ID 테크놀로지가 나서서 그러한 트렌드를 깨버리겠다고 천명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물론 속이 꽉 찬 만큼, 에그 PC의 가격도 무척이나 높아졌다.
스카시 확장 카드 하나가 2백만 원은 했고, 하드디스크 120메가도 비쌌다. 일제 브라운관 모니터도 백만 원이라서 웬만한 사람들은 사용할 수 없는 가격이니 삼보 컴퓨터에서 양산할 모델엔 기본형 부품들이 들어갈 거다.
당연히 이러한 부품이 프로토 타입에 들어가게 된 건, 하나부터 끝까지 유재원 개인의 주문이었기 때문이다. 인텔이 보내준 컴퓨터는 그래픽이나 사운드 등의 리소스 개발용으로 쓰고, 오늘 소개한 에그 PC는 집으로 가져가서 프로그래밍이나 컴파일용으로 쓸 거다.
일반인을 위한 모델은 386 CPU에 적당한 크기의 하드디스크를 장착한 모델도 있다.
“에그 PC를 만져보고 싶은 분은 내일부터 컴덱스의 ID 테크놀로지 부스를 방문하시거나, 컴덱스가 종료된 후에는 ID 테크놀로지 플래그쉽 스토어를 방문하시면 됩니다. 구매에 관한 견적문의도 그곳에서 하시거나, 전국 트라이젬 대리점에서 하실 수 있습니다.”
유재원이 삼보 컴퓨터를 언급할 때, 무대 뒤 라이브 스크린에 삼보컴퓨터의 로고가 떴고, 미국 대표 대리점의 전화번호도 명시되어 있었다.
무대에 집중된 조명 때문에 콘퍼런스장 객석은 앞의 몇 줄 보이는 수준이지만, 다들 열심히 받아 적는 모습이 유재원의 눈에 들어왔다. 이거 하나로 에그 PC는 성공했다는 게 딱 보였다.
“친구 소개는 이쯤으로 마무리하고, 이제 보안과 AES 256의 소스코드를 직접 보여드리면서 해설을 하겠습니다.”
잠깐 여유 시간을 둔 유재원은 앞줄의 메모가 끝나자 본격적인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바탕화면에 등록된 터보 C 아이콘에 커서를 놓고 엔터를 치자, 곧바로 파란색의 터보 C 특유의 편집화면이 나타났다.
우두득!
에그 PC 앞에 앉은 유재원은 손을 꺾으며 긴장을 풀었다. 라이브 스크린과 연결된 카메라도 이제 유재원이 아니라 에그 PC의 모니터에 고정했다.
유재원의 신들린 코딩이 시작되었다.
한 시간.
AES-256의 소스코드를 현장에서 직접 코딩하고, 각 함수의 기능을 자세히 설명하는 데 걸린 시간이 한 시간이었다.
현장에 모인 이들의 모습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수백만의 전문가와 해커들이 도전해서, 아직도 난공불락의 단단함을 자랑하는 암호 체계의 구조가 생각보다 단순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 차라리 사람을 해킹해서 암호화에 사용된 키를 토해내게 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시큐리티 챌린지의 1천만 달러를 노리는 사람 중엔 악독한 범죄자도 있었고,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유재원이나 ID 테크놀로지의 임원들이 무사한 건, 정신적 신체적 위해가 있으면 대회는 취소한다는 발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목표가 돈인데, 협박하면 그 돈 자체가 사라지니 현실 PK가 나올 수가 없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구조는 간단해도 성능은 확실한 AES 알고리즘은 특허로 등록했습니다. 혹시 암호화 기능이 필요한 분들은 ID 테크놀로지로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AES 알고리즘의 로열티는 탄력적으로 설정했다.
사용의 목적과 범위에 따라 로열티의 크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만약 은행과 같이 거대한 기관이 상업적으로 사용한다면 무척이나 비쌀 것이고, 비영리 연구소에서 데이터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거라면 적은 비용으로 내줄 거다.
가장 저렴한 비용은 ID 오피스를 사용하는 거다. 120달러면 AES-256의 안전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물론 위의 케이스는 기존에 사용하는 프로그램에 AES-256의 알고리즘을 추가해 기존 데이터도 무난히 활용하는 방식을 위한 거니 성격이 좀 다르긴 하다.
콘퍼런스장 분위기는 처음과 달라졌다.
에그 PC가 나올 땐 환호성이 가득했다면, 지금은 고개를 절래절래 젓는 사람들이 종종 보였다.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재원이 보여준 소스 코드만 보고 암호화의 수준을 헤아려 볼 수 있는 건 무척이나 유능하다는 증거였고, 그 숫자는 적었으니 말이다.
반면 과반수 이상은 이렇게 소스코드가 공개되었으니 이제 연구실이나 작업실로 돌아가 가열차게 시큐리티 챌린지에 도전하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두 부류의 공통점이라면 유재원을 보고 혀를 내두르는 것이다. 설마 했는데, 소스코드를 써내려가는 속도나 완성도는 엘리트 개발자 수준 이상이었으니 말이다.
행사장에 슬슬 파장 분위기가 드리워질 때. 유재원은 다시 마이크를 잡고 앞으로 나섰다.
“아쉬워하는 여러분을 위해 한 가지 더 준비한 게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 보너스가 빠지면 섭섭하다.
터보 C를 종료해서 안드로이드 알파의 바탕화면으로 돌아간 유재원은 바탕화면에 있는 전화기 아이콘으로 커서를 옮겼다.
“여기, 전화기 한 대만 가져다주세요.”
준비된 대사를 외치자, 이번에도 레밍턴이 카트에 전화기를 태우고 나타났다. 긴 전홧줄까지 연결된 진짜 전화였다.
“고맙습니다!”
전화를 가져온 레밍턴에게 찰진 엄지척 하나를 날려준 유재원은 능숙하게 전화기와 연결된 전화선을 뽑아서, 에그 PC의 뒤쪽 모뎀에 연결했다. 게이츠처럼 제대로 연결하지 않고 프로그램을 실행했다가 컴퓨터가 다운되는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꼼꼼히 점검했다.
준비가 끝나자 바로 전화기 아이콘을 실행했다. 그것은 모뎀의 다이얼을 돌려 인터넷으로 접속하는 연결 프로그램이었다.
“조직과 조직, 개인과 개인의 소통이 중요해지는 요즘입니다. 특히 컴퓨터 기술이 고도화되고 있는 지금, 컴퓨터의 디지털 데이터를 그대로 옮길 수 있는 다양한 통신 서비스가 난립하고 있습니다. PC 통신, FTP는 이제 안정적인 서비스죠. 하지만 PC 통신은 보안성이 부족하고, FTP로는 양방향 통신이 어렵죠.”
대신 인터넷이 있다. 하지만 WWW가 개발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활발하게 쓰이진 않는 상태다. 유재원은 이번 기회에 인터넷 사용법 하나를 보여줄 생각이다.
“이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한 다중접속 메신저 ID TALK(톡)를 소개합니다.”
모뎀의 다이얼 업을 인터넷 접속이 끝난 상태에서 ID톡을 실행했다. 그러자 유재원이 레밍턴이나 개발팀의 프로그래머 심지어 텍사스의 ID 소프트웨어 직원들과 라이브로 메시지를 주고받았던 메신저 프로그램이 에그 PC 위에 떠올랐다.
오오!
파장 분위기였던 객석이 다시 한 번 열기가 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선과 면으로만 대충 만들어졌던 메신저 프로그램이 현대의 메신저 프로그램처럼 깔끔한 모습으로 탈바꿈되었기 때문이다. 사용자들의 아이디 왼쪽엔 아이콘도 생겼고, 접속자 목록을 친구나 회사 동료, 사장님 따위로 분류하는 기능도 생겼다.
“ID 하나로 친구들, 동료들과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친구로 등록한 사람들은 여기 보이는 접속 창에 온라인, 혹은 오프라인으로 표시되죠. 오프라인 상태의 친구와는 실시간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대신 단문의 쪽지를 보내, 나중에 접속한 친구가 확인할 수 있죠. 온라인 상태의 친구와는 바로 접속해서 실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유재원은 바로 온라인 상태인 레밍턴에 커서를 놓고 엔터키를 눌렀다. 유재원은 단축키로 단번에 이동했지만, 초보자는 마우스를 이용하는 게 더 쉬울 거다.
“레밍턴 부사장님, 오늘 제 발표 어땠나요?”
채팅으로 입력하면서 직접 읽기도 하는 유재원이다.
-레밍턴: 나쁘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레밍턴의 답이 화면 위에 나타났다.
채팅은 미국에서도 익숙한 문화였기에 콘퍼런스장에 모인 사람들은 바로 ID 톡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에? 나쁘진 않았다? 겨우 그거에요?”
-레밍턴: 에그 PC를 발표할 때는 좋았는데, 다음으로 넘어가니 저 같은 비전문가가 이해할 수 없는 외계어가 마구 나오더라고요. 그 어려운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사장님이나, 바로 이해하는 여기 청중들이 괴물처럼 보였습니다! 대신 저 같은 일반인을 위해 좀 쉽게 말해주셨으면 더욱 좋은 점수가 나왔을 겁니다.
괴물이라는 소리에 우하는 소리가 났다. 바보라는 소리도 났다. 여기 있는 컴퓨터 괴짜들이나 해커에게는 이렇게 쉬운 코드도 이해하지 못하는 레밍턴이 이해되지 않는 거다.
그때,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메시지 박스가 나타났다. 존이라는 아이디가 대화방 참가를 요청했다는 메시지였다. YES 버튼을 누르자 참가자 목록에 존이 새롭게 나타났다.
-존: 존입니다! 갑자기 끼어들어서 죄송한데, 에그 PC를 구매하려면 어디로 가야 한다는 거죠?
ID 소프트웨어 존 카멕의 뜬금포였다.
그렇지만 유재원과 레밍턴, 존의 대화는 잘 짜인 각본이었다.
레밍턴에겐 연구 좀 해보라며 방금 완성한 AES-256 소스코드를 보내주었고, 존에겐 그림 파일로 된 에그 PC의 브로셔를 보내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ID톡은 ID테크놀로지의 BBS와 컴퓨서브, 각 대학의 FTP 사이트에 오늘 밤 자정부터 개시될 예정입니다. 인터넷이 연결된 PC라면 286에서도 실행 가능합니다. 회원 가입도 무료, 사용도 무료입니다.”
지금은 89년도다.
어마어마하게 이른 시점에 ID 톡이 공개되었다. 이제 메신저 시장도 ID 테크놀로지의 앞마당이다.
========== 작품 후기 ==========
새해 첫 연참이네요!
다음 편으로 가기 전에 추천 한 방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