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정보고속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 ==============================
#73-2
빈말은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헤리티지 재단에 후원금을 크게 해봐야 몇십만 달러쯤 될까 싶다.
2010년쯤, 한해 기부금의 크기가 3천만 달러였다고 한다. 20년 전인 지금은 그보다 규모가 작을 테니, 1천만 달러를 겨우 넘길 거라고 예상한다.
이런 상황에서 ID 테크놀로지가 100만 달러쯤 헤리티지 재단에 기부한다면 유재원의 존재감이 확실히 각인될 거다.
물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미국 민주당 인사들이 유재원을 좋게 보지 않을 것 같다.
헤리티지가 공화당의 두뇌라면, 민주당의 두뇌는 브루킹스 연구소였으니 말이다. 당연히 두 싱크탱크는 의견의 차이도 상당했고, 학계에서도 늘 충돌한다. 그렇지만 다음 선거는 한참 멀었다. 민주당과의 커낵션은 그때 만들면 그만이다.
“자네도 보안에 대해 무척이나 신경을 쓰는 인물이니 잘 알겠지만, PC 운영체제는 컴퓨터 시스템 보안의 알파와 오메가일세.”
일단 동의한다.
그렇다고 MS-DOS에 무슨 보안 시스템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니 DOS 자체가 보안성은 하나도 없이 그냥 뻥 뚫린 운영체제다. 바이러스가 실행되면 응용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시스템 파일도 쉽게 망가뜨릴 수 있을 만큼, 기본적인 보호도 없다.
“그런데 중요한 PC 운영체제를 외국 기업에 장악당하는 걸 용납할 수 없는 관료들이 국방부나 정보부 같은 곳에 많이 포진해 있다네. 민족주의 아니라 안보와 직접 관련이 있기 때문일세. 음, 현재 부시 행정부의 성향을 보자면 ‘많이’라는 걸로 부족하군. 절대다수라고 해야겠지. 이뿐만이 아닐세. 최근 자네의 ID 테크놀로지는 PC 통신 서비스를 정식으로 시작하려고 하고 있다지?”
“예! 시큐리티 챌린지를 위해 한시적으로 운영했던 사설 BBS의 반응이 매우 좋아서요. 게다가 그걸 운영해보니, 온라인을 응용한 좋은 서비스가 많이 떠오르더라고요.”
“역시, ID 테크놀로지의 수완이 좋군. 그런데 통신망 역시 국가를 운영하는 데 중요한 기간산업일세. 보수적인 이들은 또 반대할 걸세.”
역시 예상했던 흐름이다.
“그런데 미국은 신자유주의의 나라 아니었어요? 이것저것 제약이 많네요.”
왠지 심통이 난 유재원이 툴툴거리면서 물었다.
“허허. 당연히 우리 미국은 기회의 땅일세. 자네가 성공한 만큼, 미국에 고용도 창출되고 부가적인 이익도 생기니 말일세. ID 오피스로 기업의 능률은 한층 높아졌고, AES-256 알고리즘으로 소련이나 중공과 같은 나라와의 첩보전에서도 한발 앞서 있게 되었지.”
냉전은 끝났다.
아? 아직 아닌가. 소련 붕괴는 1991년이니 1년쯤 남았다.
“이게 모두 자네의 공이니 덕분에 정부의 관계자들이 더욱 애가 단 것일세. 게다가 자네의 나이는 이제 겨우 14살 아닌가. 앞으로 얼마나 큰일을 할지는 기대가 참으로 크다네. 그런데 한국이란 나라가 자네를 잘 보호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또한 매우 크지.”
보호라는 단어는 함축적이었다.
물리적인 공격으로부터의 보호도 있고, 여러 영향력으로부터의 보호도 있다.
“실제 한국에 있던 자네에게 소련과 중공의 요원이 접근하려던 것을 차단한 것이 3번이나 되네. 그런데 그 3번의 시도 중에 한국의 안기부가 막아낸 건 단 한 건도 없지. 혹시 한국 정부에 연락받은 게 있었는가?”
진짜? 그런 일이 있었다고? 믿을 수 없다. 하지만 믿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안기부의 역량이 함량 미달인 것은 유재원 본인이 에드윈 풀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안기부가 국정원으로 바뀐 다음에도 그들의 실력은 여전했다.
“그래서 결론은요?”
“어험, 간단하네. 우리 미국이 자네를 직접 보호할 수 있게 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걸세. 국가 안보에 마지막 걸림돌도 사라지는 것이니 운영체제는 물론, 통신 분야 진출도 매끄럽게 진행될 걸세. 오직 실력 하나로 경쟁할 수 있겠지. 또한, 큰 사업을 하기 위해 대자본을 조달할 때도 훨씬 수월할 걸세. 당연히 소련과 중공 등으로부터 이전과 다른 수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야.”
역시 시민권을 따라는 이야기다.
예상했던 그대로다. 다만 예상보다 2, 3년은 일찍 내려온 제의였다. 마스터플랜이 원래보다 일찍 발동된 탓에, 미국의 움직임도 빨라진 것이다.
"흐음."
미국 시민권은 유재원에게 있으면 좋고, 없어도 나쁘지 않은 것이다.
신체 건강한 한국 남자라면 피할 수 없는 병역을 건너뛸 수 있다는 건 좋지만, 나중에 미국 세제가 바뀌면서 세금 부담이 왕창 늘어나게 된다.
대신 미국의 국가 기간산업에 진출할 수 있게 되니, 그만큼 회사의 활동 영역도 늘어나면서 그 영향력도 한층 강대해질 수 있다.
무엇보다 미국 시민권을 한 번 딴다고, 계속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 전략적 판단으로 보유하고 있던 시민권은 언제든 버릴 수도 있다.
미국 시민권을 버린다는 건, 보통 사람은 쉽게 선택할 수 없지만, 사고가 유연한 유재원에겐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권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유재원이 회귀 직후 만들었던 첫 번째 문서에서 천명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중에 치국에 해당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저는 미국에 아는 사람들이라곤 제 회사 동료들뿐인데요? 부모님이나 친구들은 모두 한국에 살고 있어요. 게다가 한국에서 제 위치가 어떤지 아시죠? 정부와 국민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거든요.”
일단 한 번 튕겨보는 유재원이다.
“물론, 잘 알고 있네. 그런데 우리 미국의 기대도 한국 이상이라 자부함세. 결정적으로 ID 테크놀로지의 사업장 크기도 미국과 한국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이지 않나?”
유재원에 대해 제법 자세히 조사한 모양이다.
정답이다. 한국에서 ID 테크놀로지의 사업 규모는 10억 원 정도를 겨우 넘기는 수준이다. 미국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배상금이 입금된다면 천억 원 단위를 쉽게 넘어갈 거다.
“그렇긴 해요. 제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미국 국적이 있으면 훨씬 좋죠.”
“잘 선택했네.”
“그런데 지금 당장은 무리에요.”
“음? 어째서 말인가?”
“일단 부모님과 상의를 해봐야죠. 제가 미성년자인 거 잊으셨어요?”
“아참. 그렇군, 자네가 워낙 어른스러워서 그런지 대화를 하고 있노라면 나이를 잊어버리게 되는군. 부모님도 걱정하지 말게. 자네뿐만이 아니라 부모님의 시민권도 바로 나올 수 있게 힘을 써줄 테니.”
“네. 그건 고맙네요. 그런데 그 정도로는 제 성에 차지 않아요. 음, 제가 알기에 미국에는 명예 시민권이라는 것도 있다면서요?”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도 미국 시민이 될 방법이 있다. 그게 바로 미국 명예시민이다.
전생에 마스터플랜을 설계할 때 찾아낸 것인데, 일반 시민권 이상의 특권을 부여하면서도 본래의 국적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허허, 물론 있지. 하지만 그건 정말 특별한 사람에게만 부여하는 것일세. 처칠과 같은 동맹국 수상에게나 주는 것일세.”
에드윈 풀러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맞다. 명예시민은 특별했다.
미국 대통령이 선정하고,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40년까지 명예시민 자격은 총 8명이 부여받았고, 생전에 시민이 된 이들은 윈스턴 처칠과 라울 발렌베리 단 2명뿐이었다. 이후 수상자들은 모두 사후 수상했다.
“일단 노력해보려고요. 대학진학 전까지 안 되면……, 그때 보통 시민권을 신청하죠.”
생전에 명예시민을 받기 위해선 윈스턴 처칠에 비견될 공훈을 세워야 한다.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하지만 유재원에겐 다 방법이 있었다. 자신에게 명예뿐만이 아니라 실리도 듬뿍 안겨줄 굵직한 이벤트 몇 가지를 계획하고 있는데, 이게 성공한다면 병역에 대한 면제는 물론이고, 명예시민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흠, 그건 무리라고 생각되네만, 자네의 뜻은 확실히 알아들었네. 그래도 긍정적이라 다행이야. 그런데 대학 하니까 궁금증이 또 생기는군. 어디로 진학할 예정인가? 아! 그전에 한국식 정규 교육 과정을 그대로 밟은 건가?”
오우.
이번에도 제법 날카로운 물음이다. 이건 자신의 부모님도 물어보지 않으셨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유재원의 상념을 잡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이기도 했다.
이제 곧 국민학교 졸업이다.
졸업식은 2월이고, 3월에는 중학교 입학이다.
“글쎄요….”
빠른 루트를 탄다면 바로 검정고시를 봐서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따는 것이다. 그리고 이걸 가지고 미국의 고등학교로 진학한 후에, 월반을 거듭해서 미국 명문대를 골라가는 루트가 있다. 여길 타면 빠르면 15살, 늦어도 16살에는 대학생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빠른 루트를 타면 주변인과의 나이 차는 계속 유지된다는 것이다. 지금도 사회에 활동하는 분들과의 나이 차이가 심해서 여러 헤프닝이 일어나는데, 그게 계속 유지되면 곤란해지는 건 유재원 본인뿐이다.
반면 정석 루트를 타면 중, 고등학교 정규 과정을 거치는 6년을 학교생활에 낭비하는 것이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배워야 할 것들은 전생에 다 머릿속에 넣고 왔으니, 친구들과 어울리며 친분을 다지는 게 최대의 소득이다. 대신 낭비되는 시간이 너무도 크다.
그렇기에 유재원이 생각하고 있는 루트는 중학교는 정상적으로 다닌 후, 고1 진학 시기에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 통과해서, 미국 대학으로 입학하는 것이다. 이러면 17, 18살쯤에 대학생이 되니 보통의 신입생들과 큰 시차가 생기지 않고, 겉모습도 성숙해질 테니 지금처럼 확 구분되지 않을 거다.
유재원의 생각을 들은 에드윈 풀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미국의 영재 교육 시스템은 무척이나 체계적으로 만들어졌네. 물론 자네는 완성된 상태이니 그 시스템대로 따를 필요는 없지. 대신 대학은 다를 거네. 명문 대학의 저명한 교수들과 함께 연구할 수 있으니 말이야. 그들에게 부족한 건 자금이고, 자네에게 부족한 건 연구·개발이지 않겠나? 서로서로 도와줄 수 있을 것일세.”
유재원을 향한 노골적인 인재욕심이 훤히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알겠습니다. 오늘 조언 고맙습니다. 커피도 맛있게 잘 마셨어요. 상담료 겸 기부금은 마이크로소프트의 배상금이 들어오는 대로 입금할게요. 우리가 워낙 크게 이겼으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허허, 그걸 원하고 만든 자리는 아니지만,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기대하고 있겠네.”
유재원의 말에 에드윈 풀러도 반색했다.
처음 이곳으로 올라왔던 것처럼 유재원과 일행은 환대를 받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무슨 선택을 하시던, 우리는 보스와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원하는 대로 움직이세요.”
플래그쉽 스토어로 돌아온 길, 레밍턴이 멍하니 있던 유재원에게 자신의 각오를 내비쳤다.
“아, 그거 때문에 멍하니 있던 건 아니었어요. 걱정마세요.”
상념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유재원은 두 손을 흔들며 말했다.
진심이다. 이미 전생에 마스터플랜을 세운 다음 회귀까지 한 마당인데 국적 하나 가지고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잠깐 멍하니 있었던 것은 명예시민을 가장 싸게 따낼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카테고리는 크게 3개였다.
치명적인 첩보, 첨단 기술, 놀라운 신약.
마스터 플랜에서는 세 가지 보따리를 다 풀어서 미국의 영웅이 되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미국은 이미 자신을 얻고 싶어서 애가 타고 있는 상태다. 즉, 원래 계획에 따라 보따리를 3개나 풀 이유가 없는 것이다.
셋 중 하나만 풀어도 될 것 같은데, 뭐가 좋을지 짧게 고민을 해봤던 것뿐이다.
1월 4일.
원래 계획은 어제 3일 쇼핑과 레저를 즐긴 후, 저녁에 출국이었는데 헤리티지 재단 이사장과 만나는 일정 때문에 하루 늦춰졌다.
성공만을 위해 정신없이 달리는 건 유재원의 취향이 아니었다. 어렵게 얻은 이번 생에는 할 것 다 하고, 누릴 거 다 누리겠다는 게 유재원의 기본 마음가짐이었다. 그래서 약간의 위약금을 물고 항공권을 하루 늦춘 다음에 뉴욕 관광을 제대로 했다.
황소 동상 앞에서 사진도 찍고, 미슐랭 가이드에 나오는 레스토랑에 가서 밥도 먹었다. 야경이 시작될 즈음엔 세계무역센터 옥상에 올라가서 뉴욕 전체를 보며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지금은 뉴욕에 자신의 건물은, 아니 건물도 아니고 입대한 가게가 딱 하나 있지만, 언젠간 세계 경제의 중심인 뉴욕을 다 잡아먹어 버리겠다는 각오였다.
그렇게 하루를 편히 보낸 유재원은 4일 아침 출국했고, 반나절을 날아 한국에 도착했다. 공항에 나와 있던 건 부모님 대신 최강욱 비서실장이었다.
유재원이 없는 사이에 여러 가지 사업들이 진척되었고, 그에 대한 보고를 위해서 잠깐 서울 사무소를 거친 후 내려가기로 했다.
유재원은 자동차 안에서 살짝 듣기만 했는데, 자신이 없는 사이 상당히 굵직한 일이 상당했다. 케텔 인수 건은 굵직한 축에도 못 들어갈 정도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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