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정보고속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 ==============================
#74-1
공항에서 서울 사무실로 가는 자동차 안.
“첫 장기 출장이었는데 어땠습니까?”
최강욱의 질문이다.
유재원이 국내의 일에 궁금했던 것처럼 최강욱도 미국의 사정에 대해 무척이나 궁금한 표정이었다. 대신 질문의 상대는 유재원이 아니라 김대석이었다. 최강욱은 비서실장이고, 김대석은 수행비서로 최강욱의 직속 부하였으니, 김대석이 잘했는지 궁금했을 거다.
“으, 영어를 한마디도 못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일주일 정도의 짧은 출장이었는데, 김대석은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최강욱이 쿡 찌르니 온갖 말이 쏟아져 나왔다. 반은 유재원의 칭찬과 경외였고, 남은 반은 본인의 능력에 대한 한탄이다.
특히 영어 실력이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0이었으니, 몸으로 수발을 드는 것 말고 도와줄 수 있었던 게 하나도 없었다고 푸념했다.
“역시. 내가 그럴 줄 알고, 미국 원어민이 1:1로 가르쳐 주는 영어 과외를 끊어 놨습니다. 이제부터 틈틈히 나랑 같이 배우러 다니는 겁니다.”
“과외요? 설마 선생님이 로버트 팀장님은 아닌거죠?”
경상도 사투리가 구수한 로버트 하일 법무팀장은 이미 ID 테크놀로지에서 유명 인사였다.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이니 당연했다. 그렇지만 이미 한국 사람처럼 느껴지는 로버트 하일에게 영어를 배운다는 건 뭔가 좀 그랬다.
“당연히 아니죠. 우리 같은 초보들도 잘 가르쳐서 말을 트게 한 유능한 분이십니다.”
두 비서가 각오를 다지는 동안, 유재원은 최강욱이 준 스크랩북을 보기 시작했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최강욱이 자세한 브리핑을 해주겠지만, 한국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려면 일주일 사이에 중요한 기사를 모아둔 스크랩북이 적당했다.
-ID 테크놀로지, 마이크로소프트와의 1심 승리!
-미 연방지방법원 피해보상액 2억 달러 판결. 역사상 최대 금액!
-국가 공인 천재, 소프트웨어 산업의 잠재력을 선보인다!
-자동차 수출 10년 치 이익이 소송 한 번으로 만들어진다!
가장 처음에 나타난 건 역시나 마이크로소프트 재판의 승리였다. 국내 신문사들이 받은 충격이 꽤 큰 모양이다. 기사마다 느낌표가 가득하다.
“역시 언론의 부풀리기는 전통이었네.”
그중에 눈에 들어온 건 자동차 수출 10년 치 이익이라는 대목이다.
미래 그룹의 전명헌 왕회장님이 이걸 봤다면 미래 자동차 무시하느냐며 펄쩍 뛰셨을 것 같다. 현재 외국에 차를 수출하는 자동차 회사는 미래 자동차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장 개척의 시기였다.
미래 자동차의 지명도를 높이기 위한 몸부림으로 엄청난 마케팅비용을 퍼붓는 중이다. 수출로 인한 수익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이렇게 수출로 벌어들이는 돈이 작으니 겨우 2억 달러 좀 번 것 가지고, 미래 자동차 10년 치 수출 금액이라는 문장이 튀어나올 수 있었다.
“나중에 만나면 위로 좀 해드려야겠네.”
미래 자동차가 꾸준히 해외 시장문을 두드린 덕에, 21세기에는 어마어마한 지각 변동이 일어나는 자동차 업계에서 최후의 승자로 살아남았다. 왕회장님 생전에는 볼 수 없는 일이었지만,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하여튼 중요한 건 ID 테크놀로지를 미래 자동차와 동급, 아니 그 이상으로 생각하는 게 현재 한국의 분위기라는 거다.
동시에 유재원 자신에 대한 주목도도 폭발했다.
ID 오피스로 대통령상을 받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수준이라고 한다. 만약 오늘 입국이 매스컴에 알려졌다면 취재진이 구름처럼 몰려왔을 거라고 최강욱은 장담했다. 어제 그랬단다. 그런데 헤리티지 재단 이사장과의 미팅으로 하루 연기된 것으로 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 말고 다른 건 없나 찾아보는 유재원이다. 다행히 다른 기사도 좀 있다.
-정치권, 5공 청산 종결 움직임.
-평민당, 민정과 대연정 모색
-노 대통령, 북방정책 가동. 대공산권 실질 교역 박차
일단 보이는 건 3개였다.
작년 12월 3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회에 나와서 사전에 정해진 질문에 정해진 답변만 하고 쏙 내뺀 게 5공 청문회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문어처럼 쑥 내뺐다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별명이 문어 대가리로 굳어진 결정적 계기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성의나 반성 없는 태도에 열불이 터진 한 국회의원이 자기의 명패를 시원스레 내던진 모습이 그대로 텔레비전을 타서 잠깐 화제가 되기도 했다.
평민당의 대연정 모색도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였다. 이런 움직임이 나중엔 3당 합당으로 이어져서 한국 정치사에 두고두고 영향력을 행사하니 말이다. 유재원은 이런 흐름에 제동을 걸 생각은 없다.
국가의 정치의식 수준은 위로부터 변하는 게 아니라, 밑에서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피가 흐르게 될 때, 최소한으로 막고, 피 흘린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본인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유재원이다.
마지막으로 노 대통령의 북방 정책도 중요한 일이었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도 중요한 시장이었고, 그곳으로의 진출이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말이다. 이를 계기로 중국과 수교도 하게 되고, 거리적 이점으로 가장 먼저 진출해서 중국이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할 때,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물론 나중에 G2까지 올라온 중국이 절제하지 않는 패권주의를 선보이기 때문에 골치가 아플 테지만, 대한민국의 선진국 진입에 큰 견인차가 되는 건 사실이다.
스크랩을 다 보는 동안 자동차는 드디어 서울 사무실에 도착했다.
“ID 인베스트먼트의 투자은행 승인이 떨어졌습니다. 이제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마음대로 투자하시면 됩니다.”
사무실에서 브리핑을 시작한 최강욱이 좋은 소식부터 알려줬다.
한국에는 골드만삭스 같은 투자회사라는 개념이 없었다. 기껏해야 증권 중개도 하고, 스스로 증권에 투자하는 증권회사 정도였다. 이런 수준으로는 유재원의 성에 차지 않는다. 골드만삭스처럼 증권은 기본이고 각종 선물과 같은 금융 상품, 심지어 현물과 부동산 등에도 마음껏 투자할 수 있는 카테고리가 필요했다.
최강욱을 통해 사업계획서를 만들었고, 이걸로 정부에 승인을 요청한 게 작년 4월쯤이었는데, 이제야 결론이 나온 모양이다.
“금융위원장이 금산분리 원칙 위배라고 반대가 컸는데, 대통령께서 큰 힘을 써서 승인된 겁니다. 최대한 이른 시간에 청와대에 방문하라는 청와대의 요청도 있습니다. ID 인베스트먼트의 투자 계획을 사장님의 입으로 듣고 싶다는 겁니다.”
역시 노 대통령도 유재원의 커다란 후원자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유재원은 노 대통령에겐 10원 하나 직접 줄 생각은 없다. 차라리 차기 대통령이 될 김영삼 총재에게 투자하는 게 훨씬 수지타산이 좋다. 그래도 청와대에서 생색을 낸다면 웃는 얼굴도 다 받아 줄 용의는 있다.
참고로 유재원은 투자은행 허가가 나지 않는다면, 그냥 증권회사와 벤처투자회사 등으로 ID 인베스트먼트를 분리할 생각이었다. 이것도 안 되면 그냥 미국에서 투자은행으로 설립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런데 금산분리 쪽으로 어떻게 완화가 된 거예요?”
다만 투자은행 허가에 관해서는 유재원에게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일성이나 미래, 금성 같은 재벌회사들도 얼마든지 투자회사를 설립한 다음, 국민의 돈을 모아서 자기들 배 불리는 데 사용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커다란 경제적 위기가 닥쳤을 때, 후폭풍이 전생과 차원이 다를 수 있다.
“아, 금산분리정책이 완화된 건 아닙니다. 투자은행 요건이 무척이나 까다로워졌습니다.”
최강욱의 설명을 들으니, 금산분리정책이 깨진 건 아니었다.
투자은행 설립 요건이 엄청나게 까다로웠다.
자본금이 10조 이상인 기업집단은 설립이 안 된다. 또한, 기업서열 100위 안에 든 기업 집단의 경우 계열사 사이에 새로운 순환출자가 발생할 경우 금융당국에 무조건 신고해야 하고, 규모도 한정적으로 규정했다. 또한, 투자은행이 자사 기업에 대출이나 투자를 할 경우 경우에도 공시를 꼭 하도록 했다.
“모두 일리 있는 조치네요.”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유재원은 한편으로 일성 그룹의 최현희 회장이 자신을 향해 무척이나 이를 갈고 있겠구나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재원이 투자은행을 만든다고 난리를 친 덕에 생겨난 정책은 하나같이 일성 그룹을 저격하는 것이었다.
순환출자 고리를 통해 5%의 깨알 같은 수준의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게 일성 그룹이었다. 새로운 자회사가 만들어진다거나, 기존 자회사의 경영 상태, 혹은 지분의 변동으로 인해 순환출자에 약점이 생길 경우 깨지지 않도록 보완을 해야 하는데 이제부터는 무척이나 깐깐해진 탓이다.
‘생각해보니 후폭풍 수준이 보통은 아니네?’
잘못하면 최현희 회장의 그룹 경영에 막대한 차질이 생길 수 있는 정책이었다. 게다가 국내 재벌 중에 순환출자를 통해 그룹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회사는 많았다. 일본에서 건너온 로토 그룹은 일성보다 몇 배는 더 복잡한 상태다.
한편으로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에 혀를 내두르는 유재원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금융법 개정안은 별 무리 없이 12월 임시 국회를 통과한 것이다.
21세기 같으면 매스컴에서 기업들 다 망한다고 선동했을 것이고, 부화뇌동하는 국회의원들도 상당했을 텐데, 지금은 그저 최강욱 비서실장에게 지나가는 듯 보고받는 게 전부였다.
“기업들 반발은 없었어요?”
“반발이요? 처음엔 좀 있는 듯싶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투자은행을 키워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의욕이 대단합니다. 특히 사장님이 마이크로소프트와의 분쟁에서 승리한 다음부터는 다들 바람이 단단히 들었죠.”
최강욱의 답변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는 권력이 청와대에 있다는 게 확실히 실감 났다.
재계 순위 10위 이상 기업들에는 손해가 될 법이 바로 통과되는 것도 그렇고, 정치권에서도 별다른 분란이 없는 것도 그렇고, 아직 기업들의 힘이 유재원이 살던 21세 수준의 끗발에는 미치지 않는 것이다.
“그렇군요. 그럼 앞으로의 제 일정은 뭐죠?”
유재원의 물음에 최강욱이 기다렸다는 듯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하하. 많습니다. 여기서 별 표가 된 건 확정이 된 거라 무조건 참석하셔야 하고, 동그라미가 된 건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만, 아직 확정은 안 된 겁니다. 최우선으로 고려해주십시오. 특별한 마크가 없는 항목도 제법 중요한데, 중량감이 조금 부족한 건입니다.”
별표?
무려 4개나 있다.
청와대 오찬 참석, 오명 엑스포조직위원장 면담, 전명헌 미래 그룹 회장과의 미팅. 그리고 일성 그룹 회장과 미팅.
응?
일성?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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