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사막의 폭풍 ==============================
#78-1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
이름만 들어도 뭔가 압박적인 느낌이다. 실제로도 엄청난 조직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강입자 충돌기를 통해 물질의 최소 단위인 분자의 성질과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의 세계에 대해 연구하는 연구소다. 강입자 충돌기의 둘레가 27km이니 엄청난 규모임은 확실하다.
이렇게 큰 시설을 운용하는만큼 소속 연구원의 숫자도 엄청났다. 규모가 크고 사람 숫자가 많으면 자연스럽게 운영 비용도 올라간다. 나라 혼자서는 조달할 수 없는 규모인지라 유럽의 많은 나라가 연합으로 연구비를 대고 공동으로 연구해, 연구 결과를 공유하는 형식의 조직이 만들어졌다.
팀 버너스리는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 소속이지만, 연구원은 아니다. 정확한 직책은 컨설턴트로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가 최대한의 효율을 낼 수 있게 학자들이나 장비를 배치하는 일이나 연구 결과를 빠르게 주고받을 수 있는 정보 시스템이나 어마어마하게 누적된 데이터를 색인화하고 공유할 방법을 연구하는 직책이다.
당시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에서는 인사 재배치가 자주 일어났는데, 자리가 바뀌면서 기존에 수행했던 실험의 결과나 각종 문서가 유실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를 줄이기 위해 팀 버너스리는 프로포셜이라는 정보 정리 시스템까지 제안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지식을 축적한 팀 버너스리는 곧이어 무척이나 획기적인 발명품 하나를 만들어낸다. 처음엔 인터넷의 한 가지 종류였다가, 21세기에는 아예 인터넷과 같은 뜻이 되는 WWW의 발명이다.
WWW의 활성화를 위해 서버와 사용자의 컴퓨터를 연결하는 HTTP라는 프로토콜도 고안했고, 사이트의 이름을 쉽게 기억하고 갈 수 있는 URL이란 주소 방식도 만들었다.
영국 출신인 그는 이러한 공헌을 통해서 대영제국 훈장 2등급, 일명 기사 작위(KBE)를 받기까지 했고, 나중엔 튜링상까지 받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유재원은 팀 버너스리를 매우 잘 알고 있다. 생전에 만나봐야 할 네임드 순위 중에 상단에 있는 존재로서, 유재원에겐 존 카멕과 같은 리빙 레전드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팀 버너스리가 자신을 찾는다는 건 분명 평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아쉬운 건, 자신에게 직접 전화를 한 건 아니고, 미국 실리콘밸리 사무실로 연락했다는 점이다. 레밍턴이 확인해서 ID 톡으로 유재원에게 남겨진 메모를 전달해 줬다.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에서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한 거예요?”
-인터넷에 대해 문의와 협조를 요청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아!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 궁금증이랍니다.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닌 모양입니다.
레밍턴은 개인적인 사안이라고 하니 조금 시큰둥한 모습이다. 하지만 유재원에겐 더 좋았다. 애초에 WWW는 팀 버너스리의 개인적 연구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흠, 저는 그래도 인터넷이라고 해서 관심이 가네요. 팀 버너스리 씨에게 연락은 어떻게 하죠?”
-그쪽 전화번호를 받은 게 있습니다. 그런데 시차가 좀 있으니 지금 전화하면 애매할 거 같습니다. 이메일을 보내서 시간을 맞춰 본 후에 통화하는 게 좋지요.
“그렇군요. 그러면 아예 ID 톡으로 연결하면 더 좋을 거 같은데요? 거기도 인터넷은 될 거 아니에요?”
-아! 그게 훨씬 낫겠습니다. 그러면 이메일로 ID 톡을 전송한 다음, 가입 방법도 같이 알려주겠습니다.
“네, 그게 좋겠네요. 저는 잠잘 시간 빼고 언제든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해주세요.”
-예! 그런데 보스, 잠을 많이 자는 게 성장에 좋다는 거 알고 계시죠?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아지면 보스가 꿈꾸는 키는 못 찍습니다.
“예예~!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속으론 뜨끔한 유재원이었다.
요즘 처리해야 할 일이 하도 많아서, 밤늦게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경우가 많았던 탓이다. 작년에 키가 부쩍 컸는데, 잘 자고 잘 먹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을 거다. 요즘 키가 좀 컸다고 방심한 것 같다.
레밍턴과의 통신을 마친 유재원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IBM의 신형 메인프레임이 로데오 사무실로 먼저 올지, 아니면 팀 버너스리의 연락이 먼저 올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며칠 동안 유재원은 집 밖에 나가지도 않고, 열심히 프로그램 제작에 매진했고, 덕분에 PC 통신용 브라우저의 기본 형태를 완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구조는 간단했다.
상단에 몇 가지 기능 버튼이 있고, 바로 그 아래엔 드넓은 짙은 남색의 바탕화면이 있다. 다이얼 아이콘을 눌러 접속을 하면, 하얀색 글자들이 바탕화면에 나타나는 것이다. 현재 임시 운영 중인 케텔에 접속해보니 글자들이 제대로 떴고, 모든 기능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VT 모드의 접속도 문제없는 것이다.
여기에 HTML 태그가 적용된 문서를 열어 보면 획기적인 화면이 나타난다.
제목과 소제목이 글자 크기와 색으로 확실히 구분되었고, 사진도 글자와 함께 바로 모니터 위에 나타난다. 기본이 16컬러라서 그리 질 좋은 화질은 아니지만, 유재원처럼 고급형 VGA를 사용하면 24비트 컬러가 지원돼서 천연색으로 잘 나온다.
당연하게도 이번에 만든 브라우저는 안드로이드 알파 GUI모드 전용 프로그램이다. 덕분에 글라이드 X를 이용해서 화면의 스크롤도 매우 부드럽게 이어진다. 뚝뚝 끊어지듯 스크롤 되었던 모습은 이제 역사의 뒷길로 사라질 풍경이 될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배포를 해도 좋을 만큼 세련된 디자인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것 정도였고, 서버용 프로그램을 만드는 정도였다.
데이터를 주고받을 서버의 데이터베이스를 세팅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건 아니었지만, 게시물을 올릴 사람들이 HTML 태그를 쉽게 사용할 편집기를 만드는 건 또 별개의 일이었다. 일단 메모장에 일일이 손으로 써서 올리고, 이미지 파일도 따로 첨부하면 당장 사용할 수는 있는데, 그러면 번거로워서 누가 신기술을 쓰겠는가.
콘텐츠를 올릴 사람들이 쉽게 작업할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대중화의 큰 관건이라는 걸 잘 아는 유재원은 좋은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러던 차에, 드디어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먼저 결과가 나온 건 바로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의 팀 버너스리였다.
띵동!
저녁 10시쯤 팀 ID 톡의 알람이 떴다. 팀 버너스리로부터 연결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바로 수락을 누르자, 몇 초 후에 글자가 올라왔다.
-안녕하십니까?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 컨설던트 팀 버너스리입니다.
본인을 소개하는 말이 너무도 정형적이지만, 이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ID 테크놀로지 오너 유재원입니다.”
-예, 미스터 유에 대한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통신을 허락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연결된 팀 버너스리는 예의가 넘쳤다. 동시에 묘하게 유재원을 향해 저자세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를 대리해서 ID 테크놀로지와 컨택을 한 게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역시 IT 업계를 선도하는 회사답게 이런 메신저 서비스도 일찌감치 시작하고 계셨군요.
-정말 놀랍습니다. 세계 반대편에 있는데, 문자를 실시간으로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아! 문자뿐만이 아니라, 디지털 파일도 주고받을 수 있다지요?
“우와! 타자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시네요!”
팀 버너스리에 대한 감탄이 먼저 나오는 건 무지막지한 타이핑 속도였다. 장문이 툭툭 올라오는데, 오타도 하나도 없으면서 속도도 빨랐다.
-키보드 워리어 덕을 좀 봤습니다. 마지막 보스를 깨고 나니까 전보다 2배는 빨라졌더군요.
유재원의 첫 작품인 키보드 워리어가 언급되니 어깨가 으쓱해지는 유재원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교육성과 게임성을 동시에 잡은 게임을 또 만드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먼저 이메일로 말씀을 드렸지만, 제가 요즘 구상하고 있는 인터넷 서비스가 하나 있습니다.
모니터에 뜬 문장을 본 유재원은 손에 살짝 땀이 났다.
-World Wide Web, 줄여서 WWW라는 서비스입니다.
“www, 이름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설명 부탁합니다.”
-예, WWW는 CERN의 정보 시스템에서 착안한 아이디어입니다. CERN에는 몇 가지 인트라넷이 운영 중이었는데, 상위의 서버를 두고 이를 하나로 묶는 작업을 작년에 마쳤습니다. 그러자 네트워크의 효율이 몇 배로 상승했습니다. 이처럼 전 세계의 인트라넷을 데이터 전용선을 통해 하나로 묶는다면 그 효용은 상상하기 힘들 겁니다.
역시 인터넷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전혀 부족하지 않을 팀 버너스리였다.
인트라넷은 폐쇄적인 네트워크였다. 연구동, 혹은 대학교 전체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여 있는 수준이다. 보안을 위해서 외부와 연결하지 않는 게 좋은 조직도 있지만, 대다수의 연구소나 대학은 예산이나 기술의 한계 때문에 묶여 있는 것뿐이다.
스탠퍼드나 MIT처럼 돈과 기술이 넉넉한 학교들은 고속의 열린 네트워크를 구성해서 여러 가지 인터넷 서비스를 시행 중이었다.
“연결만 한다고 끝나는 건 아니겠죠?”
-예. 정확히 보셨습니다. 역시 정보고속도로 정책 제안자답군요. 인트라넷을 고속의 전용선으로 연결한다더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건 아니더군요. 그래서 쓸만한 서비스를 고안해봤습니다.
-하이퍼텍스트입니다.
보통의 문서는 선형적인 구조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으면서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흐름이 있다. 하이퍼텍스트는 링크라는 기능을 통해 문서와 문서를 연결해서 순간 이동된다. 여기에 멀티미디어가 추가되면 완벽해진다.
-WWW는 기본적으로 하이퍼텍스트 기반으로 연결된 문서의 집합체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연구소, 대학, 혹은 기업, 심지어 개인들이 저마다 보여주고 싶은 정보를 하이퍼텍스트로 올리면 세계 어디서든 같은 화면을 볼 수 있죠. 그러기 위해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표시 언어가 있어야 하고, 이런 언어로 작성된 문서를 게재하는 서버와 단말기 사용자가 읽을 수 있는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놀라운 아이디어네요!”
유재원은 감탄했다.
팀 버너스리의 설명을 조금 듣는 것만으로 그의 연구의 성과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긴, 원래 역사에서도 WWW의 개념이 발표된 건 90년 가을 즈음이었다. 그러니 이전부터 개념 정리는 다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이었어요!”
-역시 미스터 유와 말이 잘 통할 줄 알았습니다.
“최근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서 만든 게 있는 데, 보여드릴까요?”
-예? 그런 걸 벌써 만드셨습니까?
유재원은 가타부타 설명 없이 곧바로 최근 완성했던 차세대 PC 통신용 브라우저 프로그램을 보내줬다. 기본 설정은 구식 모뎀, 혹은 ISDN 모뎀으로 접속하게 되어있지만, 아이피 주소를 넣어서 접속하는 것도 가능하다.
ID 톡의 파일 전송 기능을 통해 곧장 팀 버너스리에게 전송을 시작했다. 물리적으로 덕진리에서 스위스 제네바에 데이터를 보내는 것이니 속도가 좀 느릴 줄 알았는데 초당 2, 3KB로 제법 빨랐다. 전송완료까지 3분 정도 걸릴 것 같다.
“실리콘밸리 ID 테크놀로지 사무실 IP주소 아시죠? 그걸 넣어 보면 기본 화면을 볼 수 있어요.”
아직 IBM 메인프레임 도착 전이라서 실리콘밸리 사무실의 서버를 테스트용으로 세팅해봤는데, 덕분에 팀 버너스리에게 바로 기술 데모를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예, 뭔지 모르겠지만, 다운로드가 끝나면 실행해보겠습니다.
“아참! 이거는 안드로이드 알파 전용 프로그램이에요.”
엔터키를 눌러 문자를 전송한 후에 아차 싶은 유재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대화를 위해 사용하는 프로그램은 ID 톡이었고, 이것 역시 안드로이드 알파 전용이었기 때문이다.
-다행이군요. 리부팅할 필요 없으니 말입니다.
곧 전송이 완료되었다.
-오, 전송이 끝났군요. 한 번 실행해보겠습니다.
팀 버너스리가 압축을 해제하고 프로그램을 실행해 보느라 ID 톡이 침묵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1분이 지났고, 3분, 5분이 지났다. 무슨 일인지 침묵 상태가 계속되었다. 혹시 에러가 난 건 아닐까 싶어서 실리콘밸리의 서버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자 브라우저 테스트용 포트에 접속한 사람이 한 명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10분이 지났고, 15분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기해서 채팅 중이었던 걸 잊고 계속 둘러보고 있구나 싶었다. 하지만 페이지가 딸랑 2개밖에 없고, 게다가 한글이었다.
영국 사람인 팀 버너스리가 계속 볼만한 게 아닌데, 이렇게나 오래 있을 수 있나 싶었다. 그래도 끈기를 가지고 기다려 보는 유재원이다.
-음, 미안합니다! 너무 놀라고 신기해서 ID 톡 중인 걸 깜빡 잊었습니다.
대기 시간이 막 20분을 넘기기 직전에 겨우 답장이 왔다.
IT 분야에 있어 유재원의 인내심은 상당히 넉넉했기에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실수였다.
“어땠나요?”
감상을 물어보는 유재원은 살짝 긴장했다. WWW는 물론이고 HTML의 창시자인 팀 버너스리였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완벽하네요! 제가 생각했던 바로 그겁니다!
다행히 좋은 말이 돌아왔기에 유재원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미스터 유에게 드리려고 했던 제안이 WWW와 하이퍼텍스트용 언어의 공동 개발이었거든요.
팀 버너스리의 말에서 난감함이 절실히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팀 버너스리가 ID 테크놀로지를 선택한 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원래 WWW의 개발은 애플사에서 쫓겨난 스티브 잡스가 만든 넥스트 시스템의 컴퓨터를 기반으로 시작했었다.
넥스트 스테이션이라는 PC 크기의 소형 워크스테이션이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에 보급된 상태였고 팀 버너스리도 그걸 사용 중에 있었다.
넥스트 스테이션의 운영체제는 넥스트스텝이란 이름의 유닉스 계열이었고, 최신의 객체지향적 프로그래밍 환경으로 만들어졌다. GUI 인터페이스를 동봉하고 있었기에 WWW의 개발에도 최적이라고 생각한 팀 버너스리였다.
그러다 개발 환경이 180도 달라졌으니 IBM호환 PC에 안드로이드 알파가 탑재된 컴퓨터를 보고 나서였다.
에그 PC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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