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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149화 (149/1,007)

[149] 룰 브레이커 =========================

#88-2

유재원은 능력이라면 능력인 생체 시계의 정확도 향상은 기억의 궁전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기억의 궁전이 있기 전엔 보통사람 수준이었는데, 머릿속에 기억의 궁전을 만든 다음부터는 시간 감각이 제법 날카로워졌으니 말이다.

“들어오세요.”

유재원의 말에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전환국입니다!”

남자는 유재원을 향해 대뜸 90도 가까운 인사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ID 그룹의 마이크로소프트 인수를 통해 삶의 근본이 180도 달라진 사람이 바로 전환국이었다. 그의 전직은 바로 마이크로소프트 한국 지사장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전환국은 참으로 편하게 일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해외 판권을 관리하는 건 로열티 방식이었다. 국내의 PC 메이커에게 판권을 주고 디스크나 메뉴얼도 PC 메이커들이 알아서 만들어 배포하도록 했다.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로열티만 징수하는 형식으로 영업했다.

그런데 MS-DOS는 독점적 지위였으니, 영업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완제품 컴퓨터를 만들어 팔고 싶다면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로열티를 주고 라이센스를 사야 한다. 앉은 자리에서 손님이 오길 기다리는 것으로 끝이다.

한국의 컴퓨터 시장이 성장하는 만큼,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의 매출성장이 쑥쑥 이뤄졌다. 그런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의 좋은 시절은 ID 그룹의 인수와 함께 끝났다.

“반갑습니다. 유재원입니다.”

유재원도 여주까지 내려온 전환국에게 고개를 꾸뻑 숙이면서 인사했다. 어쩔 줄 모르는 전환국에게 자리도 내줬다.

그렇다고 자기 책상 자리를 내준 건 아니다. 전명헌 회장의 집무실처럼 낮은 탁자를 중심에 두고 마주 보는 2인용 소파 두 개가 있고, 2인용 소파 사이에 푹신한 1인용 소파도 놓였다. 마치 왕이 앉은 옥좌 앞으로 4개 자리가 있는 형태다.

유재원은 당연히 상석에 앉았고, 전환국은 왼쪽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 김대석이 원두커피를 내려왔다.

아직 밖은 쌀쌀한 탓에 차를 잠깐 마시면서 얼은 손을 풀었다. 물론 긴 잡담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유재원이었기에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 본론이 시작되었다.

“여기 최근 3년간의 결산 자료입니다.”

전환국이 여주를 찾아온 건 실사 작업 때문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인수는 일단 적대적 형태였다. 그렇기에 마이크로소프트가 가진 자산의 실체를 정확히 체크한 후에 값을 매긴 건 아니다. 그러니 인수 후에 장부상 자산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맞춰보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미국 본사는 레밍턴과 앨런 그리고 금융 전문가인 빈센트 그린힐과 분석팀이 달라붙어서 현미경 체크 중이었다.

한국은 당연히 유재원이 직접 체크할 작정으로 자료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쿵!

전환국이 회장실에 들어왔을 때, 들고 있던 보따리를 그대로 탁자 위로 올리자 묵직한 소리가 났다. 분홍색 보자기로 만든 보따리였다. 매듭을 풀어보니 A4용지로 만든 문서가 가득했다. 가장 아래에 쌓여 있는 건 빛이 좀 바랜 듯 누런색이었고, 그나마 제일 위에 있는 게 깨끗했다.

“응? 컴퓨터 파일은 없습니까?”

“아. 네. 죄송합니다. 2월 초에 본사에서 사무용 컴퓨터를 모두 교체하고, 하드디스크나 백업도 깨끗이 삭제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2월 초?

그러면 아마도 유재원이 게이츠 회장에게 형사 소송도 당할 수 있다고 엄포를 한 직후였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뜨끔해진 게이츠 회장이 혹시나 자신에게 불리한 자료가 있을지 모르는 컴퓨터의 자료를 죄다 파기하라는 명령을 내린 모양이다.

레밍턴 사장도 비슷한 보고를 해왔었다.

인계받은 자료를 보다 보면 빠진 부분이 좀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마치 정권교체가 된 다음 불쑥 찾아온 정권인수위원들에게 책잡히지 않으려는 전 정부 사람들이 민감한 자료를 열심히 폐기했던 것과 비슷한 행태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파기를 어떤 식으로 한 거예요? 설마 하드 디스크도 다 갈아버린 건 아니죠?”

“물론입니다! 하드 디스크가 얼만데 그걸 다 부수겠습니까. 이제는 다 회장님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해서 창고에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전환국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드디스크 안의 금속판이 박살 난 것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복구할 수 있다. 포맷만 하고 말았다면 프로그램 하나 실행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복구된다.

전환국은 유재원이 물어보는 사안에 대해 열심히 대답했다. 불안한 상태인지라 고용과 직위의 승계를 받고 싶다는 것을 온몸으로 어필했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어느 것 하난 확답을 주진 않았다.

마이크로소프트와 ID 그룹의 조직 크기만 보면, 마이크로소프트 쪽이 압도적인 크기이다. 미국 본사만 수천 명이었고, 전 세계에 직접, 간접적으로 고용된 사람들도 상당한 숫자였다. 핵심 인력에 대해선 당연히 직위까지도 승계되겠지만, ID 그룹에 이미 존재해서 겹치는 조직들은 정리의 대상이었다.

아직 비정규직이란 말이 없는 한국에선 해고하는 것이 좀 까다로운 일이지만 미국은 아니다. 노동 유연성이 상당히 넓게 보장된 나라였기에, 회사의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대량 해고도 가능하다.

전전긍긍한 모습으로 유재원이 물어보는 말에 열심히 대답해 주었던 전환국과 미팅은 30분 정도였다. 그는 유재원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유재원은 다음 스케줄이 있었기에 그만 일어서게 되었다.

-ID 그룹의 광폭 행보 시작!

-유재원 회장, 미래 전자 반도체 사업부에 2천억 원 투자!

저녁때 나오는 석간신문의 1면은 오늘도 ID 그룹의 이야기였다. 마이크로소프트를 인수했다는 소식이 터졌을 때도, 며칠간 유재원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았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인수 건과 비교하면 규모는 작아도, 국내의 일이었기에 파급력은 훨씬 컸다. 미래 전자 반도체 사업부에 2천억 원이란 거금을 투자한다는 소식이 오후부터 매스컴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석간신문의 기사 마감 시간은 아침 10시나 11시였으니, 이미 해당 보도자료는 아침부터 언론사에 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가장 빠르고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건 주식 시장이었다. 아침에 미래 그룹에서 보도자료를 돌렸을 때, 이미 찌라시로 알음알음 다 퍼졌던 모양인지, 미래 전자 주식은 아침 10시쯤 상한가를 치더니 내려올 줄은 몰랐다.

매수 잔량이 수백만 주가 쌓일 만큼, 무지막지한 매수 세력이 달라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재원이 손을 댄 것마다 실패한 게 없을 만큼, 국내에는 살아 있는 성공의 신화였다. 그렇지만 유재원과 함께 성공의 열차에 타고 싶어도 탈 방법은 많지 않았다.

ID 그룹은 무차입경영 선언을 한 것도 아닌데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주식 시장에 상장된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ID 그룹의 협력 업체라고 알려진 회사에 간접 투자하는 게 다였다. 패키지 제작에서 원본용 공 디스켓과 데이터를 복사하는 일을 대행하는 SKC라던가 패키지 상자와 메뉴얼용 고급 종이를 공급하는 전주제지의 주식을 사는 정도였다.

그나마 최근에 직접 투자할 수 있는 구멍 하나가 생겼으니 ID 인베스트먼트의 투자상품이었다. 하지만 목표 금액이 순식간에 차버리면서 계좌가 며칠 만에 닫혀버렸다. 투자의 행운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1만 명도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유재원이 미래 전자 반도체 사업부에 직접 투자를 한다는 소문이 딱 떴다!

미래 전자 역시 비상장 상태였지만, 다른 점이 있다.

미래 전자는 미래 건설과 미래 중공업 등의 미래 그룹 계열사가 출자해 만들어진 회사였다. 즉, 미래 건설 등이 미래 전자의 주식을 보유한 상태이니 미래 전자 주식을 보유한 회사를 사면 된다.

덕분에 3월 15일의 한국 주식 시장은 미래 그룹의 날이었다. 미래 그룹 산하의 모든 계열사가 폭등했다. 육중한 자본금을 자랑하는 미래 건설이 상한가를 찍는 기염을 토할 정도였다. 심지어 미래 그룹과는 아무런 상관없지만, 미래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유로 주가가 오르는 회사도 있을 정도였다.

한국 투자시장의 특징이 쏠림현상이다.

주식뿐만이 아니라 부동산, 귀금속 등등. 뭔가 잘 나가는 호재가 하나 있다고 하면 다 거기로 몰리는 것이다. 이번엔 증권이었고, 미래 그룹이었다. 그런데 쏠림의 현상이 보통 심한 게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미래 전자 투자 건은 그냥 때 되면 찾아오는 작은 호재가 아니었다.

2천억 원이라는 거금이 투자되는 것이었고, 투자자는 유재원이었다. 미국의 투자은행이 미래 전자에 투자했다고 하는 것보다, 유재원의 투자 소식이 한국 사람들을 훨씬 강하게 자극했다.

거기에 기름을 부으는 게 투자 조인식이었다.

유재원의 취향이라면 미래 전자에 최강욱이나 법무팀장인 로버트를 보내서 법률적인 효력이 있는 투자 계약서를 받고, 바로 송금을 해주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깔끔하게 끝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전명헌 회장님의 스타일은 달랐다.

서울 그랜드 하얏트 호텔 만찬장에서 국내외의 귀빈들과 매스컴의 취재진을 모아놓고 투자 방안이 담긴 계약서에 사인하는 화려한 행사를 준비하셨다.

“어서 오너라.”

정장을 입은 전명헌 회장이 유재원을 반겼다. 행사장 무대에 나란히 들어가는 것으로 조인식이 시작된다.

유재원이 2천억 원, 전명헌 회장이 1천억 원, 총 3천억 원의 자금으로 미래 전자의 반도체 생산량을 현행의 3배로 끌어올리고, 최신의 메모리 반도체 기술을 연구해서 용량과 속도를 키우기로 발표하는 게 오늘 행사의 핵심 내용이다.

그렇다고 투자의 내용을 다 밝히는 건 아니다.

이번 투자를 통해 유재원은 미래 그룹 지분 9%와 미래 전자 지분 31%를 받는다. 대신 미래 그룹 지분을 매도할 경우 오직 전명헌 회장 본인과 아들들에게만 팔 수 있다는 조항도 들어가 있다. 미래 전자의 경우엔 거래소에 팔아도 상관없다.

“그나저나 도시바에선 사람이 왔나요?”

도시바.

빈센트 그린힐에게 ID 그룹이 확보해야 할 기술이라며 준 목록 중에 낸드 플래시 메모리가 있다.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가 지워지지 않는 메모리칩을 제조하는 기술인데, 원천 기술이 도시바에 있었다.

유재원은 전명헌 회장과 함께 미래 전자가 이번에 증설할 메모리 생산설비 중 한 라인을 낸드 플래시 메모리용으로 설정하도록 권했다. 낸드 플래시 메모리 기술 이전에 대해 상의하고 싶으니 초청하고 싶다는 내용도 도시바에 보내달라고 했다.

“그럼, 당연히 왔단다. 너랑 내가 초청한 건데 아무리 도시바라도 무시할 수 있겠느냐?”

역시 어마어마한 규모의 투자이니 콧대 높은 도시바라도 솔깃했을 거다.

이처럼 ID 그룹의 미래 전자 투자 조인식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도 가득한 완벽한 축제로 세팅이 끝났다.

“가자!

무대로 올라서는 전명헌 회장은 최소 3일은 한국의 매스컴을 미래와 ID가 꽉 잡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안타깝게도, 전명헌 회장의 확신은 실패하고 말았다. 15일 9시 뉴스의 첫 꼭지화면은 주인공이 따로 있었다.

-부산 전자, 낙동강에 페놀 누출 사고!

-배관 손상으로 페놀 원액 30톤, 낙동강 수원지로 유입!

-배관 손상 모른 체 염소 투입! 송수관 속에서 악취가 극심한 클로로 페놀로 합성!

-바람의 영향으로 대구 시내로 흘러가, 시민들 긴급 대피!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환경 문제는 심심치 않게 터졌던 사고였다. 그런 사고 중에 낙동강 페놀 누출 사고는 한국 최대의 공해사건이었다.

국민이 받은 충격은 너무도 컸다. 유재원의 미래 전자 투자 소식은 뒷전으로 밀려날 만큼 컸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낙동강 페놀 유출 뉴스를 직접 보신 분 있으실지?

유느님 데뷔할 때 했던 꽁트가 이 사건을 소재로 썼는데 말이죠~.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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