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룰 브레이커 =========================
#90-1
“사장님!”
밖으로 나가 보니, 현미유 공장 사장님이 사무실 밖에 서 계셨다. 사장님의 자가용인 낡은 벤츠 자동차 말고는 운전기사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직접 운전해서 오신 모양이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갑작스럽게 약속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박상권 사장은 밖으로 나온 유재원을 보자 깍듯한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유재원이 두 팔을 저으며 마다했다.
“회장님이라니요, 게다가 무슨 높임말이에요? 예전처럼 편하게 말씀하세요.”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이제 마이크로소프트까지 합병해서 고용한 종업원만 수천 명이신데요. 부담 갖지 마십시오.”
박상권이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놀리는 투도 아니었고,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이라서 유재원은 어떻게 받아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지금도 버릇없다거나 싹수없다는 말이 PC 통신 안에서 돌고 있는데, 박상권의 일까지 알려진다면 더 커질 것 같다.
“그렇게 따지면 사장님은 우리 ID 그룹의 몇 안 되는 주주님이시잖아요. 어떻게 부담을 안 가져요?”
“하하. ID 그룹에 투자하기로 한 건 제 생에 몇 안 되는 자랑스러운 일이었지요.”
“하여튼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기쁘네요. 제가 먼저 찾아봐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그러니 예전처럼 대해주세요. 안 그러시면 제가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하하, 그러면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하면서도 끝까지 말을 높이는 박상권이었다. 호칭과 높임말 문제는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유재원은 일단 박상권을 본인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사무실에 와서도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누가 상석에 앉느니 하는 것이었다. 박상권도 고집이 있었지만, 유재원도 나름 한 고집하는 사람인지라 결국, 나란히 마주 보고 앉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페놀 뉴스 보셨습니까?”
자리가 정리되었을 때, 박상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순간 유재원은 조금은 뜬금없다는 걸 느꼈다. 현미유 공장 사장님이라면 유재원의 근황이 궁금해서 찾아오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지고 온 용무가 갑자기 페놀 사건이라니. 앞으로의 전개가 도통 짐작이 되지 않는 유재원이다.
“물론이죠. 사건이 터진 다음부터 계속 페놀 뉴스가 끊이지 않았잖아요. 설마 사장님이 그 사건에 연루되셨어요?”
그나마 짐작을 해볼 수 있는 건, 박상권이 페놀 사건과 연루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겸연쩍은 얼굴로 유재원을 어렵게 방문한 이유가 설명된다. 하지만 박상권 사장님은 낙동강 쪽에 연고가 없다.
여기 여주와 낙동강의 거리는 수백 km 나 되는데, 곡물만 다루는 박상권 사장이 이런 식으로 사업체를 운영할 일이 없다.
박상권과 본인이 수경이 아버지께 투자한 유경 식품의 경우엔 경기도와 서울을 중심으로 사업이 진행 중이었다. 최근 근황을 알아보면 유경 치킨의 가맹점이 30개가 넘었고, 생닭이나 닭의 부산물을 공급하는 거래처도 부쩍 늘었다고 했다.
하루에 출하되는 생닭이 5천 마리를 넘었다고 하니 엄청나게 가파른 성장 속도였다. 이대로라면 91년이 막바지에 이르면 하루에 1, 2만 마리까지 팔아치울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유경 식품도 경상도 쪽으론 아직 진출 전이었다.
“음, 크게 보자면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겠지요.”
“네에?!”
아니라는 답변을 기다리던 유재원은 박상권 사장님이 바로 수긍을 해버리자 깜짝 놀랐다.
“하하, 놀라시긴. 그렇게 걱정할 건 없습니다. 크게 보면 그렇다는 거니까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아니라 집안 식구들이 연루됐다는 것이지요.”
집안 식구?
페놀은 부산 전자가 저지른 사건이었다.
부산 전자는 부산 그룹의 자회사였고 부산 그룹의 오너 집안은 박 씨였다. 최근 사고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회장의 이름이 박상용이었다. 유재원의 앞에 앉아 있는 박상권 사장과 무려 두 글자가 같다.
게다가 박상권 사장님을 가까이서 찬찬히 살펴보니 사퇴 기자회견장에 나왔던 박상용과 뭔가 좀 닮은 구석이 있다.
그렇다는 건 설마!
“그래요, 내 부친이 부산그룹 박병철 회장입니다.”
유재원의 입이 떡 벌어졌다.
박병철이라면 부산그룹의 2대 회장이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사망한 지 10년도 더 지났기 때문이다. 박병철이 사망한 다음 부산그룹의 3대 회장으로 장남인 박상용이 올랐고, 페놀 사건으로 인해 회장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부산그룹도 나름 재벌이었다. 한국 재계 순위 10위권 안에 드는 기업인지라, 기억의 궁전에 저장해 놓은 정보가 좀 있다. 하지만 90년대 초까지의 분량은 지극히 미미했다. 부산 그룹이 두각을 나타내는 건 2000년대 초반부터였던 탓이다.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박병철 회장의 아들이라면 다들 쟁쟁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박상용은 회장이었고, 다른 아들들이나 딸은 부산그룹 계열사에서 한 자리씩 했다. 그런데 왜 박상권 사장님은 여주라는 조그만 도시에서 현미유 공장만 하고 있었을까.
“음,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나는 서자 출신입니다.”
서자?
“에, 그러니까 박상용 회장이나 다른 자식들과는 어머니가 다르다는 거죠?”
“음. 그렇습니다. 그나마 아버지가 돌아가기 전에 호적에 넣어주신 덕에 박 씨 성을 제대로 쓰게 됐지만, 아무래도 본처 자식들이랑은 대우가 많이 차이가 났지요. 하여튼, 나이로만 따지면 박상용 전 회장 다음이 바로 저입니다. 물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도 못했고, 동생들로부터 형 대우를 받은 적도 없지요.”
세상에.
재벌, 출생의 비밀!
유재원은 자신과 가까운 자리에 21세기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드라마의 핵심 소재를 안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제는 유재원도 한국 최고의 재벌들과 어울리는 수준에 이르렀으니, 급 차이는 없다고 해도 출생의 비밀이 있다는 건 참 흥미로운 일이었다. 물론 여러 가지로 괴로운 일을 많이 당했을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할 소리는 아니었다.
하여튼, 박상권 사장님의 이야기 덕분에, 사장님이 어째서 자신을 찾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번 기회에 원래 자리를 찾고 싶으신 거예요?”
장남이 회장 자리에서 내려왔으니, 당연히 차남이 회장을 승계하는 게 맞다.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이라고 하는 걸 보니 욕심은 있으신 것 같다. 다만 여러 현실적인 제약으로 지금은 접고 계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금의 대화, 어디서 많이 보고 들었던 기시감이 들었다. 바로 드라마였다.
드라마는 전생에 유재원의 몇 안 되는 취미 생활이었다.
회귀를 장시간 준비하긴 했는데, 하루 종일 공부와 훈련만 할 수는 없었다.
달아오른 머리를 식히기 위한 적당한 취미로 드라마를 보았다.
정신을 차리고서 죽기 직전까지, 처음부터 마지막 편까지 정주행을 했던 드라마만 100편은 가뿐하게 넘을 거다. 서당개 생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드라마 전문가가 다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21세기 드라마의 가장 큰 트렌드는 재벌이다. 서민들에게 극한의 포커스를 맞춘 일부 드라마를 빼고 재벌이나 부자들이 등장하지 않는 드라마는 없었다. 거기에서 보면 출생의 비밀도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이가 그룹도 물려받는 것으로 끝이 난다.
박상권 사장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박상권 사장님이 부산그룹 회장님이 되면?’
유재원에겐 좋은 일이었다.
한국이란 나라를 개혁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재벌이었다. 유재원이 ID 그룹을 지금보다 크게 일군다고 해도 한국 재벌들이 똘똘 뭉치면 부담이 크다. 그래서 지금 미래 그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 중이긴 한데, 이것으로도 부족했다.
여기에 부산 그룹이 추가되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박상권 사장님의 인격이란 유재원이 알고 있는 부산 그룹 오너 일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역배당 배팅을 좋아하는 게 가장 큰 단점이지만, 덕분에 유재원은 박상권 사장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ID 그룹을 훨씬 빨리 일굴 수 있었다.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미래 전자처럼 해드릴까요?”
“설마, 며칠 전 미래 전자에게 해줬던 것처럼 대대적인 투자와 함께 전면에 나서겠다는 건 아니겠지요?”
“당연히 그거죠.”
유재원은 박상권 사장님을 위해서 뭐든 해줄 수 있었다.
부산 양조 인수도 마찬가지다.
당장은 부산 양조 하나겠지만, 이를 통해 부산그룹에 정식으로 한 발 걸치는 발판이었다. 박상권 사장님이라면 유재원의 지원과 본인의 역량을 통해 부산그룹 전체를 장악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건 너무 큽니다. 게다가 세계적 기업을 이끄는 회장님께 큰 누를 끼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다른 계획이 있으신 거예요?”
“음, 이런 말 하기 좀 민망한데, 내가 ID 인베스트먼트에 투자했던 돈을 지금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걸 좀 이용해 볼까 합니다.”
물론 당연히 된다.
심지어 일반 투자자들도 마찬가지다. 중도에 해지할 수 없다고 공지는 했는데, 그걸 진짜 금지하면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 위약금을 물면 누구나 해지할 수 있다. 심지어 투자한 기간에 발생한 수익금도 챙겨갈 수 있다.
더욱이 박상권은 일반 투자자보다 등급이 높았다. 훨씬 자유롭게 투자금을 넣을 수 있고 찾을 수 있다.
“당연히 됩니다! 그런데 투자하신 돈이 얼마가 되었는지는 아세요? 일단 확인하시고 찾으셔야죠.”
“음? 그게 얼마나 된다고…….”
“한 번 보세요.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하시고요.”
유재원은 탁자에 세팅된 에그 PC의 전원을 켰다.
전에 전환국 지사장이 찾아왔을 땐 없었는데, 소프트웨어를 다루는 기업이다 보니 컴퓨터를 켜놓고 회의를 할 일이 많아서 탁자에도 한 대 놓았다.
에그 PC는 형태가 기존의 제품과는 약간 달랐다.
과장해서 말하면 덩치가 반의반 쪽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탁자에 놓인 건 2세대 에그 PC인데, LCD 모니터를 채용했기 때문이다. 일본 샤프에서 시범적으로 만든 12인치 TFT-LCD인데 무려 16비트 컬러가 지원된다.
기술이 완성된 초기라 그런지 단점도 무시무시했다.
잔상도 심하고 반응 속도도 한숨이 나올 정도다. 결정적으로 시야각도 좁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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