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룰 브레이커 =========================
#90-2
샤프에서도 제작비용도 비용이지만, 단점도 엄청난 탓에 연구소에서만 굴려보는 중이었는데, ID 그룹에서 2세대 에그 PC 모니터용으로 테스트용 샘플을 요청하자 바로 보내주었다.
예전이면 한국 기업의 요청은 깔끔히 무시했을 텐데, 에그 PC의 범 세계적인 히트를 보고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TFT-LCD의 성능은 최악이었지만, 디자인적으론 최고였다.
일체형 PC에서 제일 큰 부피를 차지하던 게 모니터였는데, 쓸데 없이 낭비되는 공간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덕분에 에그 PC의 형태도 크게 달라졌다.
본체는 조그만 정육면체 형태였고, 뒤쪽에서 단단한 금속 받침대가 있어 LCD 모니터를 올린 형태다. 마치 ET가 연상되기도 하고, 귀여운 로봇이 연상되기도 했다. 게다가 케이스도 고급스러운 고강도 알루미늄이라서 로봇 같은 느낌이 강해졌다.
그렇다고 오리지널 에그 PC의 형태를 싹 지운 건 아니었다. 유려한 곡선에 폴리카보네이트로 톤을 넣어서 디자인적인 동일성은 분명히 보였다.
하여튼, 매우 슬림한 형태라서 탁자 위에 올려도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 않는 2세대 에그 PC였다. 부팅을 시작할 때부터 모니터에 잔상이 무척이나 심했다. 가정용으로 상용화를 하기엔 무리였지만, 사무실에서 업무용 문서를 보는 건 큰 문제가 없었다.
유재원은 부팅이 끝나자 컴퓨터를 조작해 미국 넥스트컴에 접속했다. 거기에서 다시 ID 인베스트먼트 사이트로 들어가 관리자 계정으로 다시 접속했다. 그러나 PC 통신 비슷했던 화면이 은행원들이 사용하는 화면과 비슷하게 바뀌었다.
ID 인베스트먼트의 방대한 장부가 실시간으로 열람할 수 있는 화면이다. 물론 수정은 할 수 없다. 해킹의 위험성 때문에 오직 열람만 가능하고, 그것도 제한적이었다. 열람하는 것도, 여러 가지 보안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계좌를 확인하려면 투자증서가 있어야 하는데요. 혹시 가지고 오셨나요?”
“음, 그래요? 그건 몰랐네. 일단 이것저것 다 챙겨 오긴 했는데, 투자증서를 챙겼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일단 찾아보죠.”
박상권 사장님은 서류 가방을 열어서 이것저것 풀어놓기 시작했다.
가방에서 나오는 서류는 여러 가지 등본이나 장부 복사본 같은 것이었는데, 사이에 ID 마크가 박힌 통장 같은 게 보였다. 유재원의 독수리 같은 눈빛으로 포착해 들어 보였다.
“이거예요!”
두꺼운 종이를 반으로 접어서 만들어진 투자 증서였다. 밖으로 보이는 것은 ID 인베스트먼트라는 간략한 로고였고, 접힌 걸 펼치면 이름이랑 도장, 투자자의 주민등록번호 등등이 적혀 있다.
여기에서 보는 건 투자자 개인 번호였다.
ID 인베스트먼트는 투자자의 중요한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서 이름과 계좌를 연동시켜놓지 않았다. 이름으로도 검색이 되면 손쉽게 돈의 주인을 가려낼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개인 정보가 털리면 금융 정보까지도 같이 위험해진다. 자금의 추적도 쉬워진다.
ID 인베스트먼트는 은행의 계좌 번호처럼 랜덤하게 부여한 투자자 개인 번호를 통해 개별 자금을 관리한다.
증서가 사라지면 자신의 돈을 찾을 수 없다. ID 인베스트먼트의 투자 상품을 구매하는 이들에게 몇 번이고 강조했다.
유재원은 검색항목을 개인 계좌로 설정한 다음, 박상권 사장의 투자자 개인 번호 16자리 숫자를 넣었다.
기계식 키보드 위에서 유재원의 가는 손가락이 경쾌하게 움직였고, 마지막으로 엔터키를 딱 눌렀다.
곧 모래시계가 뜨더니 검색 중이라는 문구가 크게 떠올랐다. 박상권 사장님으로부터 꿀꺽하는 마른 침 넘기는 소리가 났다.
유재원이 석유로 대박을 낸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자신의 투자금에도 적용되었을지 확신이 없었다. 게다가 이제껏 얼마가 투자금으로 납부되었는지도 잘 몰랐다. ID 테크놀로지에서 배당금을 줄 때마다, 다 투자금으로 돌렸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까.
-48994350068KRW
하나의 숫자가 뚝 떠올랐다.
“음, 이게 무슨 숫자죠?”
한눈에 숫자가 잘 들어오지 않는 박상권 사장이었다. 아차 싶었던 유재원은 결괏값에 자릿수 구문을 넣는 옵션을 켰다.
-48,994,350,068 KRW
“4백8십9억9천만 원이라는 거네요. 사장님이 현재 투자한 금액을 한국 원화 기준으로 출력한 거예요.”
유재원은 화면에 다시 뜬 숫자를 덤덤하게 읽었다.
“뭐라고? 이게 내 돈이라고?”
순간 박상권 사장은 펄쩍 뛰었다. 엄청나게 놀라셨는지 순간 높임말도 사라졌다. 게다가 사장님은 아재 소리 들을 나이였지만, 몸 관리를 잘하셨던 모양인지 탄력이 넘쳤다.
"세상에!"
그러고도 모자라 에그 PC의 액정 모니터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손가락으로 숫자를 찍어 보면서 숫자를 직접 읽었다.
“일십백천만……. 억, 십억, 백억!”
진짜로 백억 단위의 숫자가 모니터에 떠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냐? 아니, 겁니까?”
박상권은 마치 유재원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숫자였던 탓이다.
“흐흐, 그러면 돈이 불어난 과정도 보여드릴게요.”
유재원은 다시 ID 인베스트먼트의 관리용 사이트를 조작했다. 엔터키를 누르자 새로운 화면에 떠올랐다.
“사장님이 ID 인베스트에 90년 초까지 투자하신 돈이 1억6천만 원 정도 되네요. 그리고 90년도 배당금 3억3천만 원은 올해 1월 초에 입금하셨고요.”
“그렇습니다!”
ID 테크놀로지는 매년 배당을 시행했다. 그렇지만 유재원이 투자금을 두 번으로 나눠서 말한 건 ID 인베스트먼트의 투자도 1기와 2기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1억6천만 원까지는 1기와 2기 공통으로 투입되었고, 나중에 추가된 3억3천만 원은 2기에만 투입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수의 구분은 바로 이라크-쿠웨이트 전쟁과 걸프 전쟁이었다.
1기는 ID 인베스트먼트가 걸프전쟁 이전, 이라크-쿠웨이트 전쟁 때 88배라는 경이적인 수익을 올렸을 때부터 투자된 자금이었다.
박상권 회장님의 돈 1억6천만 원이 88배라는 경이적인 수익률에 포함되었다. 그러니 곱하기 88로 해서 140억8천만 원이 되었다.
당연히 2기는 걸프전쟁 중 미국이 전략 비축유를 풀었을 때였다. ID 인베스트먼트는 하락에 배팅했었고, 전략 비축유 방출에 WTI 가격이 11달러가 폭락했을 때, 그만큼 이익을 얻었다. 그때의 수익률 레버리지는 3.4배.
140억8천만 원에 다시 추가된 3억3천만이 더해진 144억1천만 원은 다시 3.4배로 부풀려지면서 489억 원이라는 엄청난 돈이 만들어졌다.
“말도 안 돼.”
박상권 사장은 큰 충격을 받은 듯 딱 굳어버렸다.
현미유 공장을 운영하고, 현미유 공장에서 나온 부산물로 사료를 만들어 파는 사업으로 매년 5억이 조금 넘는 돈을 벌었던 박상권이었다.
ID 테크놀로지의 배당금도 제법 큰 돈이긴 해도, 생활은 넉넉했기에 재투자를 했던 것뿐이다. 그렇게 몇 년 동안 맡겨 놓은 돈이 순식간에 300배가 불어났다. 현미유 공장을 평생 운영해도 다 벌 수 없는 막대한 액수였다.
순간 무서워지기도 했고, 허탈해지기도 한 박상권이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나서, 부산그룹 박 씨 집안과의 인연은 뚝 끊겼다. 그나마 아버지가 식구들 몰래 물려주신 돈과 주식이 좀 있어서 이를 통해 현미유 공장을 세웠다.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80년대 들어 식용유 소비도 늘어나고, 사료 수요도 늘어나서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했다.
그런데 유재원이라는 천재 녀석이 불쑥 나타났고, 호기심에 투자했는데 평생을 일궈온 것보다 더 큰 대박이 터졌다.
“이 정도면 사장님께 보탬은 되겠죠?”
“응? 당연하죠! 보탬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차고 넘칠 만큼 충분합니다!”
박상권 사장님의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기쁨과 자신감이 넘쳤다. 처음 사무실에 들어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와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떤 계획을 세우셨길래 갑자기 큰돈이 필요하게 된 거예요?”
“내가 노리는 건 부산 양조입니다.”
부산 양조.
부산 양조는 진천양조와 대한민국 주류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회사였다. 진천양조의 대표 상품은 크라운 맥주였고 부산 양조는 OB맥주였다.
OB맥주는 상당한 격차로 1등을 유지하던 중이었는데,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이 터진 것이다. OB맥주에 대한 불매 운동이 시작되면서 점유율이 급락 중이었다. 지금 당장은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나중에 페놀 사건이 좀 누그러진다더라도 원래의 점유율을 회복할 거라고 장담은 할 수 없다.
OB맥주의 경쟁자인 크라운 맥주의 경영진이 생각이 있다면 이 사건을 그냥 두고 보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상권 사장을 솔깃하게 만드는 소문이 들려왔다. 바로 부산 그룹 회장의 사퇴였다.
권력에는 공백이 없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그룹은 회장이 물러났으니, 다음 회장을 선출해야 한다.
박상권 사장님이 알아본 바로는 오너 일가에서 내정한 차기 회장은 공식적으론 차남, 실질적으로는 박상권 사장의 다음 동생인 3남이 승계하기로 했단다.
또한, 지금 가장 큰 문제가 되는 부산 양조도 혁신의 대상으로 발표해서 전문경영인을 선임하고, 박상용 회장이 가진 지분도 주식시장에 매도하기로 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겁니다. 나도 그 집안 핏줄이지만, 돈에 대한 집요함이란 상상을 초월하거든요. 가뜩이나 부산 양조의 이미지와 주가가 급속히 추락하는 중인데, 오너 보유 지분을 시장에 풀면 과연 누가 그걸 사겠습니까.”
박상권 사장의 물음이 아니었다면 유재원은 자기 손을 번쩍 들었을 거다.
부산 양조는 페놀 사건에도 망하지 않았고, 한국의 맥주 시장을 완벽히 장악한다. 술장사는 훌륭한 캐시카우였으니 두고두고 유용하게 쓸 수 있다.
그렇지만 미래 지식이 없는 현재의 주식투자자에게 부산 양조를 권한다면 뭘 모르는 사람으로 손가락질만 받을 거다.
하여튼, 박상권 사장님의 물음에 답을 하자면 지금 부산 양조 주식을 사겠다고 할 사람들은 딱 한 부류뿐이다.
“아, 오너 일가 말고는 없겠네요.”
“그래요. 오른쪽 주머니에 있는 걸 왼쪽으로 옮기면서 깨끗한 척을 하는 겁니다. 어쩌면 주가가 폭락한 이 시점을 이용해서 3대 세습을 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오~!
유재원은 거기까지 생각해보진 못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분석이다.
주가가 폭락한 지금, 재벌 3세에게 주식을 싸게 넘기면 상속세 폭탄을 피하면서 재산을 옮길 수 있다.
“나는 이 틈을 노려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식 매입 자금을 마련하려고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는 중이고요. 현미유 공장도 담보를 잡아 대출도 신청했고, 유경 식품 주식도 ID 인베스트먼트에 처분할까 생각하기도 했죠. 또, 모아놓은 재산도 처분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회장님께 투자한 자금이…….”
박상권 사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500억!
현금으로만 500억에 조금 모자라는 금액이었으니, 상상도 못 하셨을 거다.
그렇지만 이번 대박의 수혜는 박상권 사장님 혼자서 입진 않았다. 교장 선생님의 투자금도 박상권 사장과 비슷한 수준으로 불어났다. 교장 선생님을 따라 지분투자를 했던 덕진 국민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도 100억이 넘는 부자가 되었다.
“이 돈이라면 거래소에서 부산 양조 주식은 씨를 말리고도 남겠습니다.”
다시 한 번 에그 PC에 뜬 잔고를 확인한 박상권 사장은 몇 번이고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유재원은 문뜩 궁금증이 생겼다.
“그런데 꼭 부산 양조를 노리시는 이유라도 있어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 부산 그룹 지분 자체를 보시는 건 어때요?”
“그 큰 기업을 안정적으로 경영할 자신도 없습니다. 다만 부산 양조는 원래 내가 받기로 했던 기업이라서 욕심을 좀 내보는 것뿐입니다."
원래 받기로 했던 기업?
"부친이 유언을 통해 약속했던 것이었죠. 심지어 부친께서는 임종 직전 나를 포함한 자식들을 모두 모아놓은 자리에서 다들 약속을 하도록 했고, 그들도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친이 돌아가시니 그들은 180도 달라지더군요. 이제야 빈틈이 좀 보이니 한번 제 자리 찾는 걸 시도해볼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상권 사장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유재원은 부산 양조의 사장이 된 박상권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제법 잘 어울리는 그림이 나왔다.
‘음, 부산 양조라. 아! 보니 치킨엔 맥주잖아.’
지금 유경 치킨을 위시한 치킨 프렌차이즈는 치킨과 맥주를 함께 팔진 않고 있다. 심지어 콜라와 같은 탄산도 기본으로 주지 않는다. 그나마 양배추에 케첩과 마요네즈를 올린 샐러드를 제공하는 유경 치킨이 제일 앞서 있다.
그렇지만 치킨과 가장 궁합이 좋은 건 목 넘김이 시원한 맥주였다.
수경이네가 치킨과 생닭을 박상권 사장님이 맥주와 곡물을 가지고 있으면 시너지 효과가 엄청날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맥주 제조에는 대량의 곡물이 필요하고, 곡물은 양계용 사료나 식용유를 만들 때도 쓰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 밀어드릴게요.”
박상권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사양하셨지만, 유재원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박상권 사장님이 부산 그룹의 오너가 된다면 유재원에게 무조건 이익이다.
덤도 있다.
잘하면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 재벌 집안의 진흙탕 싸움은 어떤 식인지 이번에 구경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 출금 작업을 시작할게요. 그런데 중간에 해지하면 위약금이 생겨요. 위약금은 투자금액에 비례하는데, 원금이 크니 적잖은 금액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 계좌를 시가에 매입하는 거로 해서 출금 작업을 할게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주주님이신데 해드려야죠! 그럼 시작할게요!”
행동력 최고, 박력도 넘치는 유재원의 기세에 박상권 사장님은 그대로 휩쓸렸다.
유재원의 참전 선언으로, 낙동강 페놀 오염 사고의 여파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급격히 흐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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