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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156화 (156/1,007)

[156] 룰 브레이커 =========================

#92-1

“흐흐.”

박상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낙동강의 작은 사고 하나로 자신이 회장 집무실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매일 밤 꿈을 꿀 정도로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허무한 신기루처럼 사라지곤 했다. 능력도 없으면서 그저 맏형이라고 그룹의 회장 자리를 승계하는 걸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낙동강 공단의 작은 계열사의 오염 물질 누출 사고가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불러일으켰다.

어마어마한 불매 운동, 정치권의 비토와 대통령의 경고가 더해지면서 그룹 역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위기감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바로 보여주는 것이 박상용 전 회장의 행보였다.

욕심만 가득하고 능력은 쥐뿔도 없는 회장이자 맏형인 박상용은 집안 식구나 전문가 집단의 조언을 듣는 위인이 아니었다. 그룹 경영과 인선은 오로지 자기 생각과 기준으로만 하는 독불장군이었다. 그런 박상용이 낙동강 페놀 사건이 터지자 그룹 임원들과의 긴급대책회의를 소집했고, 거기에서도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하자 가족회의까지 소집했다.

-소나기는 제가 다 맞을 테니, 형님은 날이 맑아지면 복귀하시지요.

박상오는 그 자리에서 형님인 박상용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소리를 해줬다.

박상용은 이번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도 싫었고, 그렇다고 손해를 보는 것도 싫어했다.

그걸 자신이 하겠다고 하니 형님이 냉큼 물었다.

사고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며 회장직을 내려놓는 것과 박상오의 3대 회장 취임이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만약 낙동강 사고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건 지분 양도 없는 승계라는 것일까.”

박상용이 무능력하지만, 아주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자기의 안위와 보신을 지키는 감각만큼은 박상오가 인정할 만큼 철두철미했다. 그룹에 닥친 위기가 보통의 수준이 아니라는 걸 알자마자 항상 경계만 하던 박상오에게 냉큼 자기 자리를 넘겨 줄 정도였다.

박상오의 회장 취임도 그룹 지배 지분의 이동 없이, 박상용이 내정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마치 월급쟁이 사장을 꽂는 형식이었다. 그나마 박상오는 로열패밀리였고, 약간의 지분을 가지고 있으니 월급쟁이 사장하곤 좀 달랐다.

“형님은 실수했습니다.”

어렵게 넘겨받은 자리였다.

위기를 넘긴 다음에 다시 원래대로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절대 그럴 마음이 없는 박상오였다. 재미있는 건 박상용도 동생인 박상오가 그렇게 할 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박상용이 취한 선택은 승계였다.

부산 양조의 주가가 폭락한 상황을 이용해 박상용은 제 아들에게 부산 그룹 지배 지분을 넘기는 작업을 준비 중이었다. 만에 하나 박상오가 막무가내로 버티더라도 차차기는 박상용의 아들이 넘겨받게 되는 것이다.

“그 건은 나중에 처리하면 되는 것이고.”

회장 자리에 앉은 박상오는 느긋했다.

당장은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에 대한 처리가 먼저다. 인터폰을 눌러서 비서실장을 호출했다. 엊그제 내린 조치에 대한 보고를 듣기 위해서였다.

“기름칠은 잘하고 왔나?”

비서실장이 들어오자마자 앉으라는 말도 없이 바로 질문을 했다. 이런 게 익숙한 듯 비서실장은 들고 온 서류철을 박상오에게 내밀었다.

“예, 회장님께서 짚어주신 사람들은 모두 전달했습니다. 한 번이라도 거절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겠지. 그놈들이 크게 한탕 먹는 때가 지금과 같은 상황이니까.”

부산 그룹에 닥친 위기에 대해 박상오가 들고 나온 해결책이란 매우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전방위적인 로비였다. 정치권부터 검찰, 심지어 환경처 사람들에게 막대한 돈 봉투를 살포하는 일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번 일만 잘 넘기면 더 큰 보답을 하겠다며 선처를 부탁하면서, 그들이 타고 온 자동차의 트렁크에 선물세트로 위장한 돈보따리를 넣어주는 것이다.

뿌리는 돈의 크기는 직급에 따라 달랐다.

기관장급이라면 사과 상자에 담아 트렁크에 넣어 드리고, 부장급이라면 선물세트다.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에게는 박카스 상자다.

“기자들은?”

“예, 마케팅 부서 직원들이 전담마크 중입니다. 전대 회장님이 사과도 확실히 했고, 오염 방지 대책도 마련했으니, 조만간 언론 마사지가 들어갈 겁니다.”

“좋아. 돈은 얼마든지 써도 좋으니까 한 달 이내에 부정적인 느낌을 깔끔하게 지워버리라고. 그나저나, 불매운동하는 놈들 돈줄이나 배후는 알아냈어?”

“아, 그것이 크라운 맥주의 소행이라는 소문은 있지만, 아직 포착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대답을 잘 해오던 비서실장이 말끝이 어지러워졌다.

불매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긴 한데, 박상오가 찾는 배후라는 건 아무리 봐도 없었다. 부산 양조나 부산 그룹이 운영하는 프렌차이즈 업체에 대한 불매운동은 소비자들의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재벌 가문 안에서 현실과는 크게 괴리된 채 살아온 박상오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전에 그렇게 말했다가 조인트를 까였다.

“뭐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포착하지 못했다는 소리에 박상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냅다 비서실장의 정강이를 찼다.

“큭!”

구두의 밑창은 딱딱하고 무거운 고무로 되어 있어서, 군화와 같았으니 고통이 상당했다.

“군기가 빠졌구만. 뭐, 아직도 못 찾았어?”

군대는 문턱도 가보지 않은 박상오의 군대 타령이 시작되었다. 하도 닦달하는 통에 마저 하려던 말도 콱 막히고 말았다.

넥스트컴에 부산그룹 불매운동 동아리라는 게 만들어졌고, 게시물들이 무섭게 올라오고 있다는 보고였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여러 개의 동아리가 만들어졌고, 부산 그룹이 생산하는 소비재라던가, 부산그룹이 운영하는 프렌차이즈가 리스트로 정리되어 올라왔다.

코카콜라, 버거킹 KFC, 네슬레 등등 부산 그룹이 외국에서 들여와 국내에 유통을 하던 물건들이 활발히 공유되는 중이었다.

“당장 나가서 찾아와!”

동아리 개설자를 알아보기 위해 노력 중이었는데, 그건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집무실에서 쫓겨났다.

“어휴, 저 멍청이. 그놈의 정만 아니면 잘라버리는데. 나 아니면 써 줄 사람도 없으니…….”

비서실장이 박상오와 함께 일한 지 거의 20년이 되었다. 웬만한 친구 사이라도 이보다 깊을 수는 없었다. 그런 가장 가까운 부하 직원의 정강이를 차면서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도 박상오밖에는 없을 거다.

어쨌든 수습 작업이 잘 되고 있다는 보고였으니 살짝 안도감이 드는 박상오였다. 그러자 슬슬 다른 생각도 들었다.

“그나저나, 조카 녀석에게 승계하는 걸 지켜봐야 하나?”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진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막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지분을 자신이 사고 싶었다. 수중에 돈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정치권과 사법계, 그리고 언론에 뿌려지는 돈도 회사 공급이 아니라, 박상오의 개인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이었다. 물론 그 뭉칫돈은 다 부산 그룹 계열사를 운영하면서 챙긴 비자금이었다.

그렇게 모은 돈이 제법 된다. 그걸 풀어서 지분을 산다면 한층 안정적인 경영권을 가질 수 있다.

“음, 무슨 방법이 있을 거 같은데?”

박상오의 잔머리가 비상하게 돌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각.

“사장님!”

덕진 현미유 공장 사장실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웬 젊은 여자가 박상권 사장을 향해 들소처럼 돌진했다.

“미스 김? 일단 진정해!”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여러 가지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박상권이 김 양의 돌진에도 별다른 놀람 없이 침착하게 대응했다.

미스 김이라는 여자는 현미유 공장 경리부장으로, 회사의 창업 때부터 박상권 사장을 도운 직원이었다.

함께 일한 지 10년은 넘었으니, 남매처럼 친해져서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사이였다. 그래도 미스 김이나 박상권이나 각자가 가진 선은 절대 넘지 않았다. 미스 김에게 박상권은 좋은 사장님이었고, 박상권에게는 회사 안 살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안 주인과도 같았다.

“사장님! 무슨 사고 친 거예요?”

“사고라니?”

“회사 통장에 440억 원이나 들어왔는데, 이게 사고가 아니란 말이에요? 설마 담보 대출 알아보신다더니 진짜로 대출받으신 거예요? 요즘 이자가 얼마나 비싼데! 내가 더 좋은 거 알아보겠다고 했잖아요!”

미스 김의 목소리가 진짜 박상권의 안주인이 된 것처럼 높아진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출근할 때마다 우체국에 들러 회사 당좌계좌의 변동 사항을 체크 하는 게 경리 부장의 일이었다. 온라인으로 확인할 수 있으면 앉은 자리에서 편하게 보는데, 아직 그런 서비스를 시행하는 은행은 없었다.

오늘도 그렇게 업무를 시작하는데, ATM에서 통장 정리를 받아 보니 상상도 못 해본 금액이 찍혀 있는 것이었다.

440억9천4백만 원.

덕진 공단에서 제일 큰 공장인 박상권의 현미유 공장에서 경리팀장을 하면서 제법 큰 돈을 많이 만져 봤던 미스 김이었지만, 오늘 본 액수는 처음이었다.

놀라기도 했고,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낙동강 페놀 사건 이후, 박상권 사장에게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큰돈이 필요하다면서 회사 전체를 담보로 잡았을 때, 받을 수 있는 최대 대출금을 알아보라는 지시까지 받았다.

10년이 넘게 다녔던 회사의 큰 위기였다.

“후후, 그거 작은 투자금 하나를 정산받은 돈이야.”

“예? 정산금이라니요?”

“유재원 회장, ID 그룹말이야. 입금자 이름을 보라고.”

유재원과 ID 그룹.

미스 김은 두 단어만으로 단박에 이해했다.

박상권 사장이 유재원을 가지고 얼마나 자랑을 하고 다녔는지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다. 떡잎을 알아보고 투자를 해서 대박이 났다는 건 이미 유명한 이야기였다. 다만 대박의 규모는 그저 말로만 대단하다는 정도였는데, 오늘 처음으로 숫자가 확인된 거다. 440억 원이라는 건 처음이었다.

“원래는 489억쯤 되었지.”

“네에? 489억이요?”

유재원은 박상권에 대한 호의로 투자 수익 전액을 바로 입금해주려고 했다. 박상권의 투자 계좌를 시가로 본인이 매입하는 방식이었다. 상상 이상의 투자 수익에 깜짝 놀랐던 박상권이었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나중에 보면 특혜 시비에 걸릴만한 요건이 가득했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유재원이 정권과 친해서 문제는 없지만, 차기 정권에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정권에 밉보여 회사 여럿 날아가는 걸 자주 봤던 박상권은 이번 건도 정식으로 처리해주길 부탁했다.

덕분에 위약금도 물었고, 수익금에 대한 수수료도 물었다. 다 빼보니 49억 원 정도 해서, 440억이 된 거다.

“아니! 왜 먼저 나서서 주겠다는 돈 보다 적게 받으시는 거예요? 왜요?”

440억에 놀랐던 미스 김은 이제 거꾸로, 먼저 나서서 돈을 덜 받고 오냐고 따지듯 되물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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