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룰 브레이커 =========================
#93-1
며칠이 지났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죠?"
-저도 정부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미 확정이라고 하셨죠? 뭐,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겠네요?”
유재원은 전화기를 잡고 하소연 중이다. 연결된 상대는 당연히 ID 그룹의 이인자 최강욱이었다.
-그만큼 정부가 회장님을 중히 생각하고 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좋게 생각하시지요.
최강국이 유재원을 토닥이는 말처럼, 93 엑스포 기공식에 유재원은 참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21일 고졸 검정고시 준비를 위해서 참석이 어렵다고 하니 윗선은 순순히 이해했다. 그리고 기공식을 22일로 연기했다.
무려 대통령도 참석하는 행사였다. 심지어 엑스포 위원회의 자크 솔로랑 의장과 관계자들 같은 외국의 귀빈도 있다. 엑스포에 참가 신청을 한 대기업 회장도 참석할 예정이다. 어마어마한 인사들이 모이는 행사다.
이런 귀빈들이면 저마다의 스케줄이 촘촘히 짜여 있을 것이고, 몇 시간만 미뤄도 문제가 생길 텐데 무려 4일이나 늦춰버렸다.
심지어 노 대통령의 경우엔 20일쯤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회담이 잡혀 있다. 정상회담 전이 준비나 이후의 후속처리 일정도 무척이나 빡빡할 텐데, 너무도 간단히 기공식이 연기되었다.
자신의 옆자리에 유재원을 무조건 꽂아놓은 사진을 꼭 남기고 싶다는 노 대통령의 의지가 확실히 보이는 조치였다.
소위 말하는 유재원 뽕을 거하게 들이마신 상태인 거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유재원의 ID 그룹을 통해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세금을 받기도 했고, 유재원이 미국이나 세계에서 올린 쾌거를 보고 즐거워 한 국민은 수도 없이 많았다. 심지어 그것이 투표로 연결되어서 이번 기초의원을 뽑는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압승을 거뒀다.
“알겠습니다. 이건 무조건 오라는 거니까 어쩔 수 없죠. 참석할 수밖에.”
본인이 노 대통령으로 환생했고, 자신처럼 잘나가는 사람이 있었으면 당연히 옆에 끼고 돌아다녔을 거 같다.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유재원은 작은 한숨과 함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하긴 갑자기 거리를 벌리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차라리 얼른 미국으로 가는 게 훨씬 간편하고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기왕 만나게 된 거, 박 사장님 도와줄 부탁이나 해야겠다.”
세상만사 주고받기로 이뤄지는 것 아니겠는가.
유재원은 대통령과 22일 만나게 되면, 부산 그룹에 대한 부탁 몇 가지를 전해서 확답을 받을 작정이다. 이렇게 거마비라도 좀 챙겨야 계산이 맞는 것 같다.
-보스! 넥스트 Inc의 투자요청 취소 사유에 대한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거…, 정보팀의 보고가 워낙 생뚱맞아서 말씀드리는 게 좀 어렵군요.
이런 상황에서 유재원의 마음을 더욱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레밍턴의 보고가 올라왔다.
좀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상당히 빠른 보고였다. 대신 보고를 하기 전 레밍턴이 말하는 게 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생뚱맞은 이유라니
“뭔데요?”
-ID 인베스트먼트가 회장님의 회사라는 걸 모르는 상태에서 투자 신청서를 낸 거랍니다. 먼저 알았더라면 절대 신청하지 않았을 거라고 합니다.
응? 이게 무슨 소리인가?
투자 회사가 유재원 소유라서 문제가 될 건 뭐가 있단 말인가.
-스티브 사장이 표면적으로 밝힌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ID 그룹이 넥스트 Inc를 합병할 의도가 보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넥스트 Inc의 부진을 심화시킨 에그 PC의 제조사와 큰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이유를 들어보니 과연 레밍턴 사장의 말처럼 완전 생뚱맞았다.
합병이라니!
넥스트 Inc 같은 회사는 10개를 줘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개인용 워크스테이션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긴 했지만, 그 가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제품 생산 공장도 연간 100만 대를 생산할 수 있는 자동화 설비를 갖춘 규모였다.
스티브 잡스는 세트당 최소 6천 달러, 보통은 1만 달러나 하는 워크스테이션이 연간 100만 대씩 팔릴 거로 생각했다는 거다. 지금은 한 달에 몇천 대 겨우 팔리는 수준이니 이게 다 거대한 부실 덩어리다.
두 번째 이유도 말도 안 된다.
ID 그룹은 공장이 없다. 그나마 패키지를 만드는 조직이 있긴 한데, 종이상자를 만들고 매뉴얼을 제본하는 정도지, 쇳덩이를 다루는 공장은 하나도 없다. 에그 PC는 삼보에서 알아서 다 진행하는 거다.
가격 경쟁력이 부족해서 본인의 제품이 안 팔린 걸 가지고, 유재원 탓을 하는 것이다.
-제 탐정 경력에 비춰 보자면, 스티브 잡스의 본심은 아마도 보스에 대한 자격지심일 거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레밍턴의 설명이 바로 이해가 되는 유재원이다.
현재 유재원의 포지션은 스티브 잡스가 화려하게 부활한 전성기 시절 못지않았다. 아니, 그보다 더 빛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려 마이크로소프트를 집어삼켰으니 말이다. 스티브 잡스의 입장에서 회사가 어려워진 이유를 찾는 중에 가장 쉽게 보이는 게 에그 PC였을 거다.
그러다 투자를 받기 위해 ID 인베스트먼트의 문을 두드렸고, 거기에서 또 유재원의 이름이 나오니 깜짝 놀랐던 모양이다.
뭐야?
그러면 스티브 잡스는 ID 인베스트먼트의 문을 두드렸을 때만 해도 이걸 자신이 세운 회사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스티브 잡스라면 그럴 수 있죠.”
세상 돌아가는 것에 둔감하고, 자기가 관심이 있는 분야만 열심히 파는 사람이었으니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하긴, 스티브 잡스 같은 인재를 길 가다 돌멩이 하나 줍는 것처럼 쉽게 얻는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투자 의향은 계속 유지하겠습니다. 그리고 미팅 약속은 아직도 유효하니까 주선해 보세요.”
-그런데 보스가 직접 챙길 만큼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모르겠습니다. 애플사의 혁신은 리사에서 쫄딱 망한 거 아닙니까?
레밍턴의 지적은 타당했다. 그리고 레밍턴이 말한 리사는 애플이 몇 년 전에 내놓았던 초고가 PC였다 넥스트 Inc에서 나오는 워크스테이션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역시나 쫄딱 망했던 프로젝트였다.
“앞으로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잖아요. 이미 한 번 정상에 올랐던 사람이니 다시 오르는 것도 쉬울 수 있습니다.
-흠, 알겠습니다.
스티브 잡스에게는 아직도 여력이 있어서 튕길 수 있겠지만, 넥스트 Inc의 상황이 180도 반전해서 살아날 가망성은 지극히 드물다.
세련된 디자인에 더욱 강력한 성능을 탑재한 에그 PC의 후속기가 양산을 준비 중이었으니, 넥스트 Inc의 부실화는 한층 가속화될 거라고 본다. 그러면 스티브 잡스도 생각을 바꿔 먹을 수 있으니, 그때 접점을 만들면 된다.
다만 유재원은 넥스트 Inc에 딱히 위해를 가한 것도 없는데, 악감정을 가진 스티브 잡스 때문에 좀 억울한 느낌이었다.
회사가 커 나는 중에 의도치 않게 만들어진 부작용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게 편할 것 같다.
4월 22일.
93 대전 엑스포를 위한 기공식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유재원은 역시나 노 대통령의 오른편에서 삽질했다. 군대에서 뭔가 의미 없는 작업을 했을 때 삽질을 한다고 하는데, 이번에 했던 삽질은 진짜 삽으로 흙을 퍼 올리는 진짜 삽질이다. 손잡이와 자루에 오색의 촌스러운 리본이 달린 삽으로 귀빈들 앞에 놓인 모래를 떠서 앞으로 뿌리는 일이다.
21세기라면 버튼 하나 꾹 누르면 미리 매설한 화약이 터지면서 발파 작업이 이뤄진다거나, 폭죽이 터지는 등등. 행사를 화려하게 꾸밀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냥 삽질 좀 하는 것에서 끝이었다.
대신 기공식에 참석한 이들은 한국에서 손에 꼽을 만큼 쟁쟁한 분들이 다 모였다.
노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와 같은 정치계의 거물이나 미래의 전병헌 회장, 일성의 최현희 회장을 시작으로 엑스포에 특별관을 만들겠다고 신청한 재벌들도 다수였다. 대전 지역 정치인들도 가득했다.
이런 자리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역시 노 대통령이다.
나라의 권력을 한주먹이 쥐고 있는 사람이니 경호부터 대우까지 확실히 다른 VIP들과 한 차원 높았다.
노 대통령 다음은 당연히 유재원이었다.
이번에 초청된 사람 중에 노 대통령의 동선과 싱크로율이 가장 높았던 사람이 바로 유재원이었다. 심지어 유재원이 시험 때문에 참석을 못 할 것 같다고 하니 기공식 날짜를 22일로 연기해버렸으니,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은 18일엔 비가 왔고, 오늘 22일은 쨍하게 맑은 날씨였다. 이걸 보고선 참석자들이 유재원에게 하늘이 돕는 사람이라고 칭찬하기에 바빴다는 것이다. 신기한 건 이런 소리가 아첨이라는 걸 알면서도 듣고 있으면 기분은 좋았다는 거다.
하여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어째서 성격이 이상하게 변하는지 잘 알 수 있는 사례로 오늘을 딱 꼽으면 될 것 같다.
기공식 행사는 탈 없이 끝났다.
기자단과 카메라를 앞에 두고 삽질 한 번씩 거하게 한 다음, 노 대통령과 엑스포 위원회 자크 솔로랑 의장의 기념사도 들으면서 열심히 박수를 치니 끝났다.
따듯한 봄날의 부드러운 햇살, 여기에 봄바람까지 솔솔 불어오니 잠이 쏟아지려 해서 꾹 참아야 했던 게 제일 힘든 일이었다.
이렇게 행사는 무사히 끝났지만, 그렇다고 해산은 아니다. 식후 행사로 대전의 호텔에서 노 대통령을 비롯한 VIP들이 다 함께 점심을 먹는 일이 남았다.
식후 행사를 위해 대전 시내로 가는 길.
유재원은 대통령의 방탄 리무진에 같이 함께 탄 유일한 손님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특혜였지만, 이걸 가지고 뭐라고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행사가 끝난 다음에 혼자 있을 때 구시렁거리겠지만, 다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다들 표정 관리를 했다.
“유 회장, 시험은 잘 보았는가?”
노 대통령이 호의 가득한 얼굴로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러다가 정들겠다 싶은 유재원은 얼른 대답했다.
“네, 덕분에 시험공부에 차질이 없어서 잘 보고 나왔습니다. 집에서 채점을 해보니 틀린 게 없더라고요.”
틀린 게 없다?
“그러면 만점이란 말이지? 전국 수석은 유 회장이 맡아 놓았구먼.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노 대통령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유재원의 고졸 검정고시 때문에 기공식을 억지로 뒤로 미룬 건 당연히 노 대통령의 결정이었다. 이렇게 했는데, 만약 유재원이 불합격이라도 되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그런데 전과목 만점이라면 전국 수석으로 통과하는 것이니, 충분히 인정을 받을 만한 일이었다.
대통령이라면 이런 사소한 일은 따지지 않고 행동해도 될 법도 한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정치인의 최정점에 있는 대통령은 모든 행동과 결정이 정치적이었다.
잘못된 결정을 반복하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청와대 안에서는 법으로 보장된 권리가 있으니 힘으로 밀고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청와대 밖, 여의도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삼당 합당을 통해 흡수한 김영삼 세력이 민주자유당 당 안에서 무섭게 세를 불리고 있었다. 같은 당이긴 해도 권력 투쟁은 현재 진행형이었기에, 작은 오점만으로 정치력에 타격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이번에도 노 대통령의 선택은 옳았다.
“사업하는 데 있어 큰 문제는 없고?”
이어진 노 대통령의 물음은 마치 올해에도 세금을 많이 낼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는 것처럼 들리는 유재원이다.
“아, 좀 있어요. 회사가 커지다 보니 고려해야 할 문제가 너무도 많아요.”
덕분에 보통은 문제없습니다 하고 대답할 것을, 대놓고 몇 가지 애로사항이 있다고 대놓고 말하는 유재원이다.
“역시 그렇지? 조직이 크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나오기 마련일세. 그런데 그 문제라는 게 뭔가?”
말만 하면 뭐든 해결해 줄 것 같은 얼굴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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