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아메리칸 드림 =========================
#95-1
“POS라니. 이런 게 있었어?!”
유경 식품 사장 류준식의 감탄이 터졌다. 유재원의 프레젠테이션이 다 끝나기도 전이었다. 유경 치킨 프랜차이즈에 가맹해놓고도 값이 싸다고 시장 닭을 써서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자들을 골라낼 방법을 며칠이나 고심했는데, 유재원의 POS 시스템이란 걸 보고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그냥 유재원에게 일찍 문의했다면 쉽게 풀릴 문제였는데, 혼자서 해결해보겠다고 했다가 머리만 아팠다.
“핵심은 공유하는 데이터베이스에요.”
유경 식품의 경유 닭의 유통 경로에 대한 실시간 데이터가 데이터베이스로 입력되면 생닭의 재고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생닭이 유경 치킨으로 넘어가서 염지를 비롯한 각종 가공이 이뤄지는 상황도 기록하는 것이다.
유경 치킨이 다뤄야 할 데이터는 조금 많다. 염지된 닭은 물론 치킨 파우더나 양념 소스, 치킨 박스와 유산지, 쿠킹포일, 양배추 샐러드를 담는 투명 케이스 등등.
가맹점에서는 바코드만 잘 찍으면 된다. 재고가 들어왔을 때 찍어 두면 가맹점의 재고가 업데이트되고, 팔릴 때는 무슨 치킨이 팔렸는지만 찍으면 이에 연관된 재고들이 자동으로 소진된다.
이러한 데이터들은 한데 모여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된다. 그렇기에 각 업체는 각자가 원하는 화면을 보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면 된다.
각각의 사업자들에게 맞는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을 만들고, 데이터베이스를 구동하는 서버와 데이터 테이블을 세팅하는 게 이 시대 사람들에겐 낯선 일이다. IBM처럼 오래전부터 데이터베이스를 다루고 컨설팅을 한 기업이 아니면 완성하는 것이 불가능할 거다. 하지만 유재원에겐 아니었다.
“가맹점주들에게 POS 시스템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겠군. 구축하는 데 돈이 좀 나갈 거 아니겠어?”
“네, 그런데 가맹점 주인들에게도 POS 시스템은 필요해요.”
류준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시스템을 만드는 데 비용이 좀 들 거다. 하지만 체계적인 시스템을 도입하면 이점은 충분히 많이 있다.
“가맹점 주인들이 하루 마감할 때, 마감버튼 하나 누르면 그날 얼마나 팔렸는지, 수익은 얼마나 남았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잖아요. 게다가 재고 관리도 따로 할 필요가 없이 자동으로 되니 얼마나 좋아요.”
유재원의 말에 류준식이 동의했다.
그놈의 재고 관리는 집 앞에서 닭과 돼지를 키울 때부터 문제였다. 얼마만큼 키운 후 출하해야 사룟값과 노동 시간 대비 최대의 이익을 낼지 항상 고민이었다.
이번에는 생닭의 재고 문제와 유통이 류준식 사장의 골머리를 앓게 했다. 위탁생산 농가에서 닭을 받아오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어떤 땐 주문량이 더 많기도 했고, 어떨 땐 남아돌기도 했으니 적절한 재고를 만드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차라리 보관 기간이 긴 냉동 유통을 하는 게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그러면 치킨 맛이 떨어지니 문제다.
“좋다! 그러면 POS 시스템 구축에 대해 ID 테크놀로지에 정식으로 넣겠습니다.”
“네, 그럼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시스템 제원과 견적서를 보내 드릴게요.”
류준식은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서 첫 만남에 바로 수주가 이뤄졌다.
유재원이 유경 식품의 대주주이긴 해도, 류준식 사장은 쓸데없는 돈은 절대 쓰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만큼 POS 시스템에 대한 활용도는 확실히 뛰어나다는 증명이었다. 쾌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날.
-아, 이번엔 IT 솔루션인가요?
이찬수의 푸념이다.
갑작스럽게 날아온 유재원으로부터의 쪽지에는 POS 시스템과 IT 솔루션 사업에 대한 개요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완성이 얼마 남지 않은 ID 오피스 작업도 상당한 일이었는데, 여기에 일이 또 늘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소프트웨어 개발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분야였으니, 난감함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유재원이 지금 당장 이번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할만한 인재를 골라 보니, 역시나 이찬수뿐이었다.
다른 개발자들은 커다란 프로젝트를 이끌고 갈 만큼 능력이나 경력이 부족했다. 물론 이찬수도 그다지 많은 경험을 가진 건 아니지만, ID 테크놀로지의 평균 연령을 따져 봤을 때 비교적 연장자에 속했다.
“이 팀장님이 이번 프로젝트를 전담하라는 건 아니에요. 데이터베이스 설계나 클라이언트 프로그램 개발은 내가 할 거니까요.”
유재원은 이번 프로젝트의 데이터베이스와 관리용 프로그램은 ID 데이터베이스로 만들 작정이다.
유경 식품의 직원 숫자는 100명 조금 넘는 규모였다. 유경 치킨의 가맹점 숫자도 30개 정도였고, 가맹 본부의 직원들도 20명이다.
IBM의 DB2나 오라클 데이터베이스 같은 거대하고 비싼 제품을 쓸 이유는 하나도 없다. ID 데이터베이스는 관계형 DB로서 SQL 문법도 잘 준수하고 있었다. 나중에 규모가 커지더라도 만들어진 데이터베이스 파일을 확장하거나 이전하기도 쉬웠다.
“이 팀장은 추가로 직원을 채용해서 컨설팅 부서를 조직하고 하드웨어 개발만 하면 되는 거죠.”
하드웨어 개발이라고 하니 뭔가 거창한데, POS에는 새로운 컴퓨터 시스템을 쓰는 건 아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전문적인 시스템이 나올 테지만, 유재원이 생각하는 건 저렴한 보급형 컴퓨터에 바코드 리더기를 달아놓은 정도였다.
컴퓨터도 엄청난 신형이 아니라, 이제 학교에서도 퇴출당하고 있는 XT 컴퓨터를 쓸 거다. XT 컴퓨터에서 20메가짜리 하드디스크와 바코드 리더기, ISDN 모뎀만 달아 놓으면 가맹점에서 사용할 POS 기기로 충분하다. 모니터도 녹색으로만 나오는 구형이라도 괜찮다. 글자만 읽으면 충분하니 말이다.
유경 식품, 유경 치킨의 생산 공장의 경우에도 가맹점에 들어갈 시스템과 비슷했다. 창고에 들어갈 때나, 화물차에 출고할 때 바코드를 찍으면 된다. 공장에 들어가니 습기나 먼지 등으로부터 잘 보호될 수 있게, 케이스는 좋은 걸 써야 할 거다.
비싼 시스템은 데이터가 취합되고 관리될 서버용 컴퓨터 하나뿐이다. 24시간 꺼지지 않고 계속 운영이 되어야 하니 신뢰성이 확인된 워크스테이션 정도면 충분하다.
바코드 리더기 자체에 통신 기능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아직 IT 기술이 그 정도로 올라가진 않았다.
“알겠습니다.”
유재원의 설명에 이찬수는 자신의 지인 목록을 빠르게 훑었다.
학교 선후배들이나 아래아 한글을 같이 만들었던 동아리 후배들이 목록에 올랐다. 다들 컴퓨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고, 능력도 있었다.
서울대라는 이름값이 있으니 대기업에서도 모셔갈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찬수가 불러도 올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게다가 유재원의 존재감도 영특한 천재라서 호기심이 동하는 정도였지, 사람들을 끌어들일 만큼 매력적인 수준은 아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그랬다.
지금은 다르다. ID 그룹의 이름값은 유재원 이상이었다. ID 인베스트먼트로 엄청난 대박을 터트렸음은 물론이고, 실리콘밸리의 맹주였던 마이크로소프트까지 인수해버렸다.
호기심이 좀 있던 수준에서 선망하는 기업으로 급상승했다. 구인 공고를 낸다면 지원자들이 쏟아져 들어 올 거다.
“뭐지?”
유재원은 5월 23일 신문을 뒤적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 신문 1면에 나와야 할 기사가 며칠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개각이다.
총리가 사퇴하고 장관 여럿의 얼굴이 바뀌는 큰 폭의 개각이었다. 원인은 시국의 불안이다. 91년 4월과 5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전국 대학을 중심으로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노 대통령은 강경 진압으로 대응했다. 그러다가 4월 27일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경찰의 사복 체포조 5명에게 쇠파이프와 구둣발로 집중 구타를 당해 죽는 일이 벌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노태우 정권에 대한 감정이 부글부글 끓고 있던 상태에서 이 사건은 기폭제 역할을 했다.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고, 급기야 살인 정권을 규탄하는 분신도 이어졌다. 스스로 몸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분신 정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4월이나 5월에 시위가 좀 있다는 뉴스를 보긴 했지만, 대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수준은 아니었다.
“넥스트컴에도 없네?”
유재원은 컴퓨터 앞으로 가서 ‘분신’이라는 키워드로 기사를 검색했다.
결과는 ‘없음’이다. 넥스트컴에서 4월 신문을 다 뒤져 봐도 분신했다는 기사는 없었다. 혹시나 검열을 당해서 온라인으로는 기사가 못 올라올 수도 있었으니, 종이 신문을 다 뒤져 봤다.
수행비서인 김대석이 스크랩하고 남은 건 한데 묶어 놓아 보관 중이었기에, 아주 편하게 이전 신문들을 뒤적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분신에 대한 기사는 없었다. 시국이 안정적이었으니 총리 사퇴 이야기도 없었고, 그러니 개각도 없는 것이다.
원인은 쉽게 파악되었다.
전생의 흐름과 다른 이변을 일으킨 존재는 유재원 혼자뿐이었으니, 자신 때문일 거다.
유재원의 성실한 세금 납부 덕에 곳간이 넉넉해진 노 대통령은 선심성 예산을 아낌없이 뿌렸다. 대학생들이야 노 대통령을 까기에 바쁘지만, 지방에선 칭송이 자자했다. 확실한 증거는 1차 지방선거에서 어마어마한 압승이다.
먹을 게 많으니 정치력에 흔들리지도 않았고, 시위가 있어도 예전과 같은 강경 진압은 없었다. 그러니 강경대 사망 사건도 없었고, 이로 인한 분신 정국도 일어나지 않았다.
넥스트컴에 뉴스 게시판에서 대학생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니 예전과 다른 기사들이 잔뜩 올라왔다.
ID 그룹 유재원, V6 김철수를 잇는 제3의 대박을 위해 불타오르고 있다는 기사가 대부분이다. 90년 입시에서 거의 모든 대학의 컴퓨터 공학학과가 경쟁률 1등을 달리는 기염을 토했으니 결코 과장은 아니었다.
이과 커트라인에서도 부동의 1위였던 의대를 컴퓨터 공학이 앞지르는 이변이 일어날 정도였다.
일단 사람들이 죽어 나가지 않으니 다행이다. 특히나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따위의 저열한 칼럼이 튀어나와 눈 버리는 일이 없어서 좋았다.
“그나저나 양반들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닌데?”
한편으로 걱정도 들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뜨거운 국민이었다. 87년 대선에서 살짝 꺾이긴 했지만, 완전히 낙담한 건 아니었다. 게다가 이러한 열망을 이용하는 조직이나 정치인들도 있었다. 터질 게 제때 터지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후유증이 올 수도 있다.
반대로 유재원이 우려했던 것처럼 노태우 정권의 위세가 더욱 기세등등해져서 한국의 보수화가 더욱 강해질 수도 있고, 브레이크 없이 달리다가 큰 사고를 칠 것만 같았다.
“뭐, 당장 고민한 일도 아니지. 어쨌든 사람 살리는 거로 됐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공이지만 뿌듯한 유재원이다.
곧이어 회장실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회장님, 다음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수행비서 김대석이 스케줄을 가지고 왔다.
유재원도 이미 인지하고 있어서 준비를 끝낸 상태였기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1시간쯤 자동차를 타고 이동한 곳은 경기도 판교였다.
신도시로 지정된 이후, 여기저기 아파트가 무섭게 자라나고 있는 이곳에 삼보 컴퓨터의 생산 공장이 들어섰다.
돈이 열리는 나무를 많이 잡으라는 유재원의 조언에 따라 삼보 컴퓨터는 열심히 부동산을 모았다. 그중에 추가 생산 공장이 필요해지면서 판교에 거대한 컴퓨터 조립 공장을 만들었다.
자리도 좋았다.
판교 인터체인지 부근으로, 나중에 수많은 IT 기업들이 입주할 자리였으니, 그냥 가지고만 있어도 땅값이 폭등할 땅이었다.
유재원의 그랜저 리무진이 삼보 컴퓨터 제2 공장에 들어서자 낯익은 사람들이 보였다. 이용권을 비롯한 삼보의 임직원들이 늘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자동차가 정차할 자리에 레드카펫까지 깔아 놨다.
삼보컴퓨터가 유재원을 대하는 태도가 딱 보이는 대목이었다.
자동차가 멈추자 정장을 입고 대기 중이던 삼보의 직원이 문을 열어줬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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