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아메리칸 드림 =========================
#95-2
“어서 와라.”
이용권이 제일 먼저 유재원을 반겼다.
“환대 고맙습니다, 사장님.”
몇 달 전만 해도 부사장이었던 이용권은 에그 PC의 대성공 덕에 사장으로 승진했다. 대신 이용태 회장은 명예 회장으로 은퇴했다.
아무래도 동업자가 6이나 되는 회사였으니 이용태 형제가 회장과 사장을 동시에 하는 건 무리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이용권이 회사의 경영권을 승계했기에 ID 그룹과 삼보 컴퓨터의 협력에 금이 가는 일은 없다.
이용권은 곧장 공장의 사무실로 유재원을 안내했다.
“우와!”
들어가자마자 유재원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상상 이상으로 잘 나왔네요!”
"그럼! 누구 디자인인데. 최종 시안 그대로 뽑아내느라고 죽는 줄 알았다."
삼보 컴퓨터 공장이니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책상 위에 있는 건 컴퓨터였다. 정확하게는 에그 PC의 다음 제품, 뉴 에그 리테일 버전이다.
에그 PC가 출시한 지 1년 반이 넘었다.
폴리카보네이트에 여러 색을 넣기도 하고, 스펙을 올리는 등의 개선은 있었지만, 판매량은 점차 내림세였다. 처음엔 혁신적인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웬만한 PC 제조사에서 일체형 제품을 출시했다.
완성도와 디자인은 에그 PC를 능가하는 모델은 없었지만, 같이 놓고 봐도 떨어지지 않을 만큼은 되었다.
슬슬 신제품이 나와야 할 타이밍이었다. 특히 대규모 투자를 완료한 삼보 컴퓨터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삼보컴퓨터를 위해 유재원은 뉴 에그를 디자인해주었다. 전에 박상권에게 투자 수익금을 보여줬을 때 사용했던 바로 그 컴퓨터였다.
그때와 지금이 다른 게 있다면, 모니터의 형식이었다.
유재원의 집무실에 있던 프로토타입 뉴 에그는 LCD 모니터를 달고 있었고, 지금 눈앞에 나타난 리테일 버전 뉴 에그는 CRT를 장착한 형태라는 점이다.
유재원은 리테일 버전에도 LCD를 달고 싶었다. 하지만 장점 보다는 단점이 너무도 많은 탓에, 결국 CRT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CRT 모니터 덕분에 유재원의 눈앞에 있는 모델은 프로토타입과 느낌이 많이 달랐다.
유재원의 사무실에 있는 프로토타입 뉴 에그는 얇은 모니터 덕에 ET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건 모니터도 크고, 본체도 좀 더 컸다. 그래도 뉴 에그의 콘셉트에 맞게 모니터와 본체는 확실히 분리되었다. 단단한 합금으로 모니터를 받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모니터의 각도나 방향을 조절할 수 있다.
또 다른 특이점이라면 알루미늄 케이스였다. 은색이지만 무광으로 코팅해서 고급스러운 느낌을 냈다. 대신 본체 한구석에 박힌 트라이젬 로고와 ID 로고는 광택을 내서 확실히 돋보이게 했다.
“켜 볼까요?”
“그럼! 얼마든지!”
유재원의 물음에 이용권이 자신감 넘치게 답했다. 살짝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유재원은 둥근 전원 버튼을 눌렀다.
바이오스 포스팅 화면이 잠깐 나오더니 곧 부팅 화면으로 넘어갔다.
안드로이드 로봇이 열심히 달리면서 로딩이라는 글자를 만들어내는 화면이었다. 안드로이드 알파에서 처음 선보인 화면인데, 알파의 인기 요소 중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컴퓨터를 다루는 데 어느 정도 실력이 있고, 좋은 시스템을 가진 사람들은 로딩 화면을 최대한 단축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로딩(Loading)의 L자가 나오기 전에, 심지어 안드로이드 로봇이 등장하기도 전에 바탕화면을 띄우는 사람도 있었다.
이번에 나온 로딩화면은 알파의 것과 조금 달랐다.
안드로이드 알파의 로봇은 깡통 로봇이었다면, 지금의 등장한 로봇은 매끈한 유선형에 밝은 아이보리 빛깔을 자랑했다.
안드로이드가 버전업을 할 때마다 로봇도 업그레이드 된다는 콘셉트였다. 나중에 인공지능이 도입되면 안드로이드 마스코트가 사람의 말도 알아 듣고, 대답도 하게 될 거다. 물론 지금은 그저 상상만 하는 먼 미래의 일이다.
하여튼, 부팅 중 나오는 안드로이드 로봇의 모습으로 버전을 쉽게 알아 볼 수 있다. 삼보 컴퓨터도 중요한 파트너였기에 안드로이드 1.0 프리뷰 버전이 당연히 제공되었으니 뉴 에그에 1.0 버전이 설치된 것도 당연했다.
“와, 색감 좋네요.”
그렇게 로딩 중이라는 단어가 모두 만들어지자, 곧 바탕화면이 나타났다.
파란 초원에 뭉게구름이 잔잔히 떠 있는 파란 하늘이 유재원을 반겼다. 샌프란시스코 근처의 광활한 포도 농장을 찍은 사진이다. 안드로이드 1.0 기본 바탕화면을 위해 유재원이 직접 사진작가를 고용해서 찍은 후에 디지털로 보정했다.
VGA용은 물론 이제 막 하나둘 나오고 있는 SVGA 해상도도 준비했고, 심지어 아직 표준화도 이뤄지지 않은 풀HD 화면용 배경화면까지 만들었다.
준비된 뉴 에그는 최상위 모델인지 SVGA를 통해 24비트 컬러를 지원했다. CRT 모니터라서 쨍한 느낌은 없지만, 디테일은 확실히 살아 있다.
“당연하지! ATI의 최신 SVGA 모델에 비디오 전용 램도 4메가나 넣었단다.”
무슨 메모리든 많으면 좋다.
비디오 메모리가 넉넉하면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색상과 해상도도 높아지고, 프레임 버퍼로 삼아서 한층 부드러운 화면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 말이다.
바탕화면의 아이콘들, 시작 버튼과 리본 인터페이스 등등. 안드로이드 1.0 프리뷰 버전은 알파와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시작 버튼을 눌러 보았을 때 나오는 패널이라던가 파일 관리자의 형태는 디테일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흡사했다.
대신 알파와 달리 몰라보게 화려해졌다.
알파는 아이콘의 크기도 작았고, 사용된 색상의 숫자도 16색뿐이었다. 안드로이드 1.0에서는 기본 16비트 컬러였고, 저사양 컴퓨터를 위해 256색 모드를 지원하는 형태였다.
특히 눈에 확 들어오는 건 반투명 기술이다.
파일관리자를 띄웠을 때 경로를 표시하는 리본이나, 복사 삭제 이동과 같이 파일을 관리하는 아이콘이 들어 있는 리본이 반투명하게 되어 바탕화면이나 먼저 실행되었던 창이 반투명하게 비치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보기에 좋은 눈요기 기능인데, 이것이 활성화되려면 비디오카드도 좋은 모델을 써야 하고 CPU도 486 이상은 되어야 한다.
실리콘밸리 팀 소속 개발진 중에는 예쁘기만 하지, 실질적으로는 컴퓨터 운영에 도움이 하나도 되지 않는 이 기능을 왜 만드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유재원은 그들의 질문에 답이 있다고 말했다.
예쁘니까!
투명, 반투명 인터페이스는 이제껏 나왔던 그래픽 인터페이스가 보여주지 못했던 비주얼이다. 글로벌 마케팅팀에게 주면 잠재 유저들을 끌어들일 기가 막힌 선전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차기 버전에는 반투명을 이용한 실질적인 기능도 넣을 거다. 이를테면 알트 키와 탭 키를 동시에 눌렀을 때 띄워 놓은 프로그램들 사이를 쉽게 전환할 수 있는 익스포제 기능이 반투명 효과와 결합하면 훨씬 보기가 좋아진다.
이렇게 안드로이드 알파의 인터페이스를 계승했지만, 바뀐 것도 많았다.
그중에 가장 큰 것은 다중작업이다. 도스 기반의 알파에서는 한 번에 하나의 프로그램만 실행할 수 있었다. 다중 작업은 아주 드물게 이뤄졌다.
ID 오피스의 경우 여러 개의 문서를 띄워 놓고 번갈아 이동한다든가, ID 오피스로 문서를 작성하면서 디스켓을 포맷하는 정도의 수준이다.
커널이 유닉스 기반으로 완전히 바뀐 안드로이드 1.0에서는 컴퓨터의 성능이 지원되는 만큼 다중작업을 쉽게 할 수 있다.
미디 음악이나 WAVE 파일을 재생하면서 문서를 작성하는 건 기본! 최적화가 잘 된 게임이라면 다른 음악을 들으면서 게임도 즐길 수 있다. 심지어 디스크 정리 같은 리소스를 많이 먹는 프로그램을 돌리면서 게임이나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전제는 컴퓨터 성능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관건은 CPU와 램의 용량! 486 DX-33에 4메가 램이라면 서너 가지 작업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한다.
지금 유재원이 만지고 있는 뉴 에그는 메모리 용량이 8메가에 달하고, CPU는 486 DX2-66에 최신의 비디오카드. 고음질 사운드 처리를 위한 전용 DSP 칩까지 내장된 컴퓨터라서 매끄러운 동작을 보여주었다.
“이거 써보니 진짜 대박 나겠더라.”
이용권이 오른손 엄지를 척 들어 보이면서 안드로이드 1.0을 치켜세웠다.
“심지어 음질까지 더 좋아진 거 같다니까!”
이번엔 왼손 엄지다.
옆에서 이런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김대석은 삼보의 새 사장님이 영업 잘하시는구나 배워놔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감정이 듬뿍 실렸다.
“와, 사장님 귀 밝으시네요. 멀티미디어 지원에 제가 공을 좀 들였죠. 원음 그대로 출력하기 위해서 오디오 엔진과 믹서를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그건 김대석의 오해였다.
평소 하이파이 음악 감상이 취미였던 이용권의 귀는 음향 전문가처럼 훈련되었고, 덕분에 유재원이 공들인 오디오 성능 향상을 직접 체감할 수 있었다.
전생에 회귀를 준비하면서 여러 악기를 체계적으로 배웠던 유재원이다. 배우면서 많은 음악을 듣기도 했으니, 자연스럽게 음악을 즐기게 되었다.
이런 유재원에게 IBM 호환 PC의 허접스러운 미디어 기능은 한숨이 절로 나올 수준이었다. 애초에 사무용으로 설계된 컴퓨터라서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모두 음악 감상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
그래서 유재원이 나섰다. 안드로이드 1.0의 사운드를 비롯한 멀티미디어 기능은 유재원이 직접 설계했고, 코딩까지 완료했다.
결과물은 하이파이에 익숙했던 이용권이 엄지 손을 두 번이나 치켜세울 만큼 대단했다. 물론 멀티미디어가 강화되었다지만, 하드웨어가 뒤를 단단히 받쳐줘야 한다. 설계도 엉망이고 노이즈도 제대로 잡지 않은 사운드카드와 저렴한 스피커의 조합이라면 큰 향상을 느껴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대박 확신은 못 해요. 문제는 응용 프로그램이니까요.”
“그건 그렇지.”
프리뷰 버전을 받은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열심히 준비 중이지만, 과연 정식 발매 후에 혼란이 없을 거라고 낙관하진 않는다.
“그나저나 출시일은 확정됐니?”
“네!”
“가을쯤이라고 했지?”
“아, 그건 한 달 전 사정이고, 지금은 달라졌어요. 8월 15일이 유력합니다.”
개발은 매우 순조로웠다.
몇 가지 난관이 나오더라도 유재원이 손을 거들면 거짓말처럼 풀렸다. 덕분에 최신의 프리뷰 버전을 보면 버전 0.9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완성도가 무척이나 높았다. 오죽하면 유출된 프리뷰 버전을 알파 대신 사용하는 사람도 소수 있을 정도였다.
“8월 15일? 그러면 이제 두 달도 안 남았네?”
안드로이드 알파와 ID 오피스를 발표한 지 딱 2주년이 되는 날을 디데이로 잡았다.
사상 최대의 오프닝 쇼를 준비 중이다. 안드로이드 1.0의 발표 소식이 텔레비전은 물론 라디오나 신문 등등 모든 미디어를 통해 널리 알릴 수 있게 준비했고, 오프라인 행사도 성대하게 준비 중이다.
“나도 초청해 줄 거니?”
“당연하죠. 8월 15일 날에 이 녀석 위로 안드로이드 1.0이 돌아가는 모습이 전 세계 텔레비전으로 방송될 건데, 삼보컴퓨터 사장님이 당연히 옆에 계셔야죠.”
유재원은 탁자에 놓인 뉴 에그를 보면서 말했다.
오늘 유재원이 직접 삼보의 판교 공장까지 온 건 첫 번째로 완성된 뉴 에그를 인수하기 위함이다. 안드로이드 1.0을 올린 다음 8월 15일까지 온갖 테스트를 다 할 거다.
전생에 마이크로소프트 게이츠 회장이 차세대 윈도우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블루 스크린이 뜨면서 대망신을 당한 게 비디오로 생생히 남아 있었다. IT의 흑역사를 꼽을 때마다 무조건 탑3 안에 드는 사건이었다.
8월 15일, 그런 식의 대망신을 당할 수는 없으니 철저한 테스트를 위해서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물론 그때 게이츠 회장이 발표했던 차세대 윈도우는 불안정한 도스 기반에 올린 형태였고, 안드로이드 1.0은 안정성이 생명인 유닉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오작동이 일어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전 재산을 걸 수 있는 유재원이다. 그렇지만 교장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이 자만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끝날 때까지 자만도 방심도 하지 않을 거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무한 감사합니다~!!!
드디어 시작이네요. 올림픽 말입니다.
우리나라 순위와 금은동 갯수 맞추기 이벤트에 많은 분이 응모해주셨는데, 당첨자가 꼭 나오길 기원합니다~! 기왕이면 순위도 높고, 많은 분이 당첨됬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