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열혈 추종자들(Esquires) =========================
#103
○ 열혈 추종자들(Esquires)
ID 하이테크 연구소 설립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물리적 위치로는 레드먼드 안드로이드 본부 근처로, ID 그룹 명의로 되어 있던 5층짜리 건물로 확정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건물의 이전 주인은 마이크로소프트였다.
완공한 지 5년도 안 된 신상 건물이라서 사용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다. 첨단기술 연구에 필요한 장비를 들여놓기 위한 공간도 충분했다. 모자라는 건 이곳에서 근무할 사람뿐이지만, 유재원의 의지가 충만했기에, 정상 가동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문제는 자금이네.”
유재원은 컴퓨터에 뜬 잔고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모니터에 나타난 숫자는 유재원의 발언과는 상반되게 상당한 액수를 자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ID 그룹의 현금 흐름은 무척이나 좋았기 때문이다.
안드로이드 1.0과 ID 오피스 판매 대금은 하루마다 정산되어 통장에 꽂히는 중이었고, ID 소프트웨어의 둠도 출시 당일처럼은 아니지만, 스테디셀러가 되어 꾸준한 판매량을 보여주었다. 이 밖에도 여러 수익사업을 통해서 꾸준한 수익이 나는 중이었다.
딱 하나 부진한 게 있다면 복사방지 시스템이었던 이지스 쉴드의 부진이다. 디스켓의 자기장 상태를 통째로 복사하는 기계가 나오면서 완전히 크랙된 거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 이미 깨진 것이나 다름이 없는 복사방지 시스템을 채용할 회사는 없었기에 이지스 쉴드의 매출은 급락한 상태였다.
이렇게 돈을 많이 벌고 있지만, 역시나 대량으로 빠져나가는 부분도 많았다.
일단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승계한 이들로 인해서 인건비 항목이 대폭 늘어났고, 글로벌 런칭과 함께 대규모 프로모션과 마케팅을 진행하면서 천만 달러 이상의 지출이 발생했다. 여기에 ID 하이테크나 러시아 헤드헌팅 팀 구성 등등으로 유재원이 여러 가지 일을 벌이면서 벌어들인 돈도 많이 쓰는 중이었다.
“많이 썼으니, 이제 또 많이 벌어야지.”
본인이 돈을 많이 썼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가벼워지는 ID 그룹의 계좌에 돈을 채워 넣을 일을 슬슬 시작했다.
그렇지만 객관적인 시선에서 ID 그룹의 재정 상태를 보면 매우 건전했다. 많이 쓰고 있지만, 벌기도 많이 버는 중이었다. 무디스와 같은 신용평가회사들이 매기는 등급에서 Aa3 등급 이상은 나올 것이다.
하여튼 이번 일 역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크기였기에, ID 인베스트먼트의 빈센트 부사장을 ID 톡으로 연결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본 닛케이 지수가 지금 몇엔이지요?”
-어제 종가 기준으로 25,114엔입니다.
이번에 유재원이 타겟으로 삼은 건 바로 일본이다.
일본의 80년대 버블은 그야말로 전설의 전설이었다.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4, 5천 포인트 수준의 닛케이 지수가 버블의 정점에 다다른 시기엔 39,000엔을 넘을 정도였다. 단지 닛케이 지수에만 거품이 낀 건 아니다.
닛케이 지수보다 더 심했던 건 부동산 가격의 상승이었다. 특히 도쿄의 땅값 폭등은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 도쿄의 땅값 상승이 한창일 때 이런 말이 나오기도 했다. 도쿄 땅을 다 팔면 미국을 사고도 남는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이제 다 옛말이 될 거다. 시장 선도적인 주식 시장은 하락 반전했고, 거품경제의 핵심인 도쿄의 땅값도 올해를 기점으로 폭락을 시작한다. 일명 잃어버린 10년이란 장기 불황의 시작이 올해였다.
그렇기에 지금이 닛케이 들어갈 타이밍도 딱 좋다.
-한달 전 21,000엔 대까지 떨어졌다가 반등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닛케이라니, 보스의 이번 상대는 일본이군요?
“네! 일본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하락 배팅입니다.”
나중에 경제학자나 역사학자들이 ID 인베스트먼트의 투자를 보면 비관론자들이 세운 투자회사라고 볼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닛케이에 대한 투자도 그렇고, 앞으로 있을 대규모의 투자 역시 하락에 배팅할 것이기 때문이다.
상관없다.
어디에 투자하던 돈만 잘 벌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닛케이 지수가 24,000엔 이상에서 풋 포지션을 대량 매수하세요. 특히 25,000엔을 넘을 땐 대량으로 매수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유재원은 빈센트 그린힐에게 닛케이 지수가 폭락할 거라는 여러 징조를 설명해주었다.
핵심은 부동산 가격 폭락이다.
기업이나 개인들은 보통 부동산을 담보로 잡고 대출을 받았다. 그런데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면서 담보를 팔아도 대출금을 갚기에 부족해지는 경우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대량의 부실로 인해 대출해준 은행이 버티지 못하고 도산했고, 이것이 연쇄 작용이 일어나면서 일본 전체의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국가 성장률이 마이너스가 되는 데 닛케이 지수가 용가리 통뼈도 아니고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하다.
폭락에 폭락을 거듭할 것이다.
주식으로는 이런 폭락 장에서 수익을 낼 수는 없지만, 하락했을 때 큰돈을 벌 수 있는 상품은 있다.
선물투자가 대표적이었다.
유재원이 작년 석유 선물의 하락에 배팅해서 88배라는 전설적인 이익을 거두지 않았던가. 닛케이 지수 역시 지수 선물상품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 게다가 일본은 OECD 가입국으로 투자시장이 개방된 상태였기에 대량의 투자금이 진입하기에도 좋았고, 빠져나오기도 간편한 나라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투자하시겠습니까?
빈센트 그린힐은 유재원의 결정을 수용했다. 어떻게 보면 생각 없이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작년 석유 선물 때 확인했던 유재원의 빛나는 투자 감각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기도 했지만, 일본 건에 대해서는 빈센트 그린힐이 나름대로 조사한 것도 있었다.
ID 인베스트먼트의 부사장으로서 자체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금액이 무려 1천만 달러였다. 그것도 분기별 1천만 달러이니, 연간 4천만 달러나 되는 큰돈이었다.
물론 투자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 투자하던 유재원은 이유를 따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미국의 주식시장과 석유 선물은 물론 영국이나 일본의 사정까지도 스스로 공부하는 중이었다.
일본의 분석은 유재원의 판단과 매우 흡사했다. 정점을 찍은 일본 부동산 시장의 붕괴가 시장의 침체를 가속할 거라는 것이다.
“이번엔 30억 달러를 움직여 보죠. 내년 여름까지 하락 포지션을 유지해보겠습니다.”
-헉! 엄청난 액수로군요. 잘 알겠습니다.
유재원이 석유 선물시장에 처음 투자했던 금액은 1억 달러였다. 그것도 엄청나게 큰돈이었는데, 이젠 30배가 커진 목돈이 움직인다. 그렇지만 일본의 증권거래소 규모는 월스트리트에 이은 세계 2위 규모였기에 30억 달러 정도는 가뿐하게 소화할 수 있다.
“그러면 ID 인베스트먼트 금고에 남은 돈은 얼마나 되나요?”
-18억5천5백만 달러 정도가 남을 겁니다.
역시 요즘 돈을 좀 많이 썼다. 20억 달러는 넘을 줄 알았는데, 1억5천만 달러가 더 나갔던 모양이다. 그래도 18억5천만 달러라는 현금 잔고는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 이 돈을 그냥 은행에 넣고만 있으면 은행만 좋은 것이지, 정상적인 기업이라면 은행 이자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노리고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하는 게 옳다.
“일본은 그렇게 하고요. 요즘 할리우드는 어때요?”
-할리우드 말씀이십니까? 설마 영화에도 투자하시려고요?
“네!”
영화도 좋은 투자처였다.
고위험 고수익이라는 투자의 본질을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상품이기도 했다. 투자한 영화가 쪽박이라면 본전도 못 건지는 것이고, 심지어 투자자금 전부를 날릴 수도 있다. 반대로 대박이 난다면 투자했던 금액의 몇 배에 달하는 이익을 거들 수도 있는 시장이다.
더욱이 할리우드 투자에는 금전적인 이득뿐만이 아니라 무형의 이익도 있었다. 바로 영화를 이용한 이미지 마케팅이었다.
영화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첨단의 제품을 사용할 때, ID 그룹의 제품을 넣으면 그것 자체로 확실한 광고가 된다. 또한, 유재원의 출신인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은근슬쩍 좋게 만들면 미국 사회에서 활동하기가 더욱 편해진다.
또한, 영화 산업은 IT의 기술발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CG와 같은 비주얼적인 요소에 큰 도움이 된다.
다만 너무도 뜬금없이 할리우드를 언급해서 빈센트 그린힐이 오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조금 있다. 혹시 혈기왕성한 유재원이 할리우드의 스타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거 아닌가 하는 그런 오해 말이다.
당연히 사심은 없다. 돈도 벌고, 좋은 이미지 쌓는 일이니 투자를 하려는 것뿐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할리우드 배급사들과 접촉해서 투자할 수 있는 영화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빈센트 그린힐의 답변도 무난했다.
“네, 그럼 진행되는 데로 알려주세요.”
유재원은 이렇게 신규 투자를 확정했다.
1991년 9월은 유재원에게 있어 별다른 사건이나 사고 없이 지나간 달로 기억되었다.
1991년 10월은 첫날부터 징조가 좋았다.
-회장님! 좋은 소식입니다!
ID 하이테크 연구소, 스카우트팀장으로 임명된 미하일 이바노프의 연락이었다. 팀장으로 임명된 이유는 셋 중에 영어를 제일 잘한다는 것이 큭 작용했다.
미하일 이바노프의 연락은 전처럼 전화로 온 게 아니었다. ID 그룹의 기본적인 통신 수단인 ID 톡으로 연결된 것이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 ID 하이테크 출장소를 크게 열었고, 거기에 최신의 컴퓨터와 고속 데이터 통신망까지 깔아 놓았다. 덕분이 최신의 인터넷 기술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어졌다.
돈이 많이 들지도 않았다.
러시아의 부동산 시세는 처참한 상태였기에, 미국의 1/10 가격으로 훨씬 화려한 사무실을 꾸밀 수 있었다. 대신 최신 PC와 같은 값비싼 물품은 러시아에서 구할 수 없었기에, 유럽의 지점에서 러시아로 배송을 해줘야 했다.
이렇게 비싸게 들여 만들었던 스카우트 팀은 이제껏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마수걸이를 끝낸 모양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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