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181화 (181/1,007)

[181] 열혈 추종자들(Esquires) =========================

워싱턴 DC의 상징을 꼽자면 첫 번째가 국회의사당이다.

미국 국회의사당은 워싱턴 DC의 내셔널 몰 동쪽 끝에 있는 캐피틀힐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지리상 컬럼비아 특별구의 중심에 있지는 않으나, 4개 지구를 가르는 원점이 된다. 공식적으로 의회의사당의 동서쪽 측면을 각각 '정면(front)'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동쪽 정면은 방문자와 고관들이 들어오도록 의도한 방향이다.

국회의사당의 동쪽 정면으로 가는 가장 큰길이 메릴랜드 애비뉴 노스이스트라는 거리인데, 여기에서 고풍스러운 붉은색 3층 건물이 헤리티지 재단의 워싱턴 DC 사무소였다. ‘고풍스러운’이라는 주관적 형용사가 붙은 까닭은 메릴랜드 애비뉴 거리의 건물 중에 붉은 벽돌로 쌓은 집이 참 많았던 탓이다.

다행히 한 번에 제대로 찾아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로비를 지키고 있던 경비에게 수행직원이 ID 그룹, 유재원이라고 말하니 어디론가 연락했다.

잠시 후, 유재원이 아는 사람이 나타났다.

샤일라 돌리, 에드윈 풀러 이사장의 비서였다.

“반가워요. 샤일라 씨. 저번에 보고 이번에 두 번째죠?”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환한 미소를 가진 금발의 미녀는 지금도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맨해튼에서 봤을 땐, 예쁘구나 하고 넘어갔었는데, 지금은 자꾸 보게 된다. 아무래도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몸에 남성호르몬이 가득 쌓이고 있는 모양이다.

“어서 오세요, 유재원 회장님. 기억해주셔서 기쁘네요. 이사장님은 1시간부터 회장님을 기다리고 계셨어요. 안내해드릴 테니 따라오세요.”

샤일라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유재원을 안내했다.

3층의 오른쪽 끝이 에드윈 풀러의 사무실이었다. 당연히 엘리베이터는 설치되지 않았기에 중앙 계단을 타고 끝까지 올라가야 했다.

“오, 우리의 자랑스러운 후원자님께서 오셨군.”

사무실에 들어서자 에드윈 풀러가 유재원을 정말 반갑게 맞이했다.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유재원을 향해 성큼 걸어와 포옹까지 해줬다.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지만, 미팅에 있어 나쁜 시그널은 아니었기에 유재원도 친근하게 안아 줬다. 에드윈 풀러는 덩치가 좀 있는 양반이었지만, 요즘 유재원도 많이 커서 이제는 주먹 하나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서 이상한 그림이 그려지진 않을 거다.

“SAT 만점이라고?”

이야기의 시작은 역시나 유재원의 대학 진학이었다.

설마 부모님이 에드윈 풀러에게 자랑이라도 했나 싶을 만큼, 그는 유재원의 근황에 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자네의 이력이면 스탠퍼드 대학교 합격은 떼놓은 당상이겠군.”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 복수지원으로 여러 곳에 원서를 넣으려고요.”

“호오, 신중하기까지. 덕분에 3월이 되면 재미있는 모습을 보겠군. 명문대들의 유재원 회장 쟁탈전 말이야.”

후원금 때문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호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드윈 풀러의 주도 덕에 이야기는 쉽게 풀려나갔다.

“ID 그룹의 확장도 무섭더군. 요즘은 일본에 상륙했다고?”

“네! 아시아에서 제일 발달한 경제 대국이 일본이잖아요. 그런데 작년부턴가 이상한 신호가 자꾸 감지돼서 자세히 살펴보니 속은 말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이때라고 바로 들어갔죠.”

“호오, 정확한 분석이야. 플라자 합의 후에 엔고의 수혜를 톡톡히 보았겠지만, 이젠 후폭풍이 일어날 때가 되었지.”

에드윈 풀러도 유재원의 말에 동의하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런데 러시아는 또 무슨 일인가? 거기 상황에 비하면 일본은 천국일 정도인데 말이야.”

ID 그룹의 러시아 진출 역시나 에드윈 풀러는 일본과 같은 금융 투자 정도로만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 투자는 아니고 스카우트예요.”

“스카우트?”

“러시아의 경제 상황은 말도 안 되게 어려워지고, 정치적으론 극심하게 혼란하죠. 이런 상황에서 제일 먼저 감축되는 게 연구 조직이잖아요.”

유재원의 설명에 에드윈 풀러는 살짝 놀란 듯 입을 벌렸다.

“반면 우리 ID 그룹에 제일 부족한 게 전문 연구 인력이고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러시아의 두뇌들을 데려오려고 스카우트 중이에요.”

“괜찮겠나?”

단순한 물음이다.

대신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지분은 아마 그들을 믿어도 되냐는 물음일 것이다. 헤리티지 재단의 성향은 무척이나 보수적이었다. 미국 보수당이 상정한 최대의 적은 소련이었고, 소련이 붕괴하고 남은 러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련 사람이나 러시아 사람이나 같이 믿을 수 없다는 거다. 이를 바로 보여주는 것이 주러시아 대사관에서 쏟아져 나오는 도청기들이다. 하나만 나오는 게 아니라 이제까지 수십 개가 적발되었다. 심지어 한창 모스크바에 한창 새롭게 짓고 있는 미국 대사관 공사장에서도 발견될 정도였으니 넌더리가 날 정도였다.

“그건 모르겠어요.”

유재원도 러시아 사람들을 두둔하지 않았다.

전생의 경험까지 포함해서 러시아 사람들과 일해 본 적은 없었기에 솔직하게 말하는 유재원이다. 마스터플랜을 세울 때도 이렇게 하면 좋겠다 싶었고, 뛰어난 연구를 했던 사람들이나 북한에 협력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열심히 외웠을 뿐이다.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실행하고 있으니, 현실에서는 무슨 변수가 생겨날지는 유재원도 짐작할 수 없다.

“그래서 이사장님의 도움이 좀 필요해요.”

“응? 내 도움이라? 무얼 부탁할지 감이 잡히긴 하군. 그렇지만 일단 들어보고 이야기하지.”

“네. 최근에 러시아 연방 원자력센터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와 접촉했고 이직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어요.”

“응?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

역시 명성 높은 싱크탱크의 이사장이라 사하로프 박사의 이름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안드레 샤일로프라는 사람 아닌가? 내가 알기에 러시아의 원자력센터 소장은 샤일로프일세. 이번만큼은 자네 발음이 부정확한 것 같군.”

안드레 샤일로프?

발음으로 지적받아 보기는 처음인 유재원이다. 그렇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기억의 저장소에 기록된 러시아 사람들의 이름은 키릴 문자와 한글로 병기된 상태였던 탓이다. 당연히 키릴 문자를 읽을 수는 없었던 유재원은 한글로 써진 이름을 읽은 것이었다. 한글로 써진 이름은 실제 발음과는 제법 큰 차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미하일은 어째서 사하로프라고 말했을 때 아무 말 없었던 걸까? 하여튼, 그건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지칭하는 사람이 러시아 연방 원자력센터 소장이라는 건 확실했다.

앞으로 조심하면 그만이다.

“네! 제가 이번에 ID 하이테크라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어요. 거기에 샤일로프 박사를 모시고 싶거든요. 그런데 미국으로 모셔오기에 절차가 조금 까다롭더라고요. 특히 비자 발급이 문제에요.”

유재원의 미국 비자 발급은 무난했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는 여행자 비자를 받았었고, 지금은 O1A라는 비자로 클래스가 달라졌다. O1 비자는 특기자 비자라고 하는데, 최소 3년의 체류 기간을 준다. 체류 기간이 다 지난 다음에도 1년씩 지속으로 연장할 수 있다. 이익활동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O1 비자 중에 A가 붙어 있다는 건 과학, 예술, 사업 분야에 국내외적으로 뛰어난 것을 인정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데, 유재원은 과학과 사업에서 인증을 받았다.

샤일로프 박사도 O1 비자가 나오면 좋을 텐데, 적성국 출신이라는 게 발목을 잡았다. 혹시 미국에 들어와서 스파이 활동을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큰 모양인지, 비자를 신청한 지 시간이 꽤 됐는데도 아직 승인이 없었다.

“흠, 그렇군.”

유재원은 살짝 목이 탔지만, 에드윈 풀러는 뭔가 생각하는 모양인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에 유재원은 추가적인 설명을 이어나갔다.

“러시아의 우수한 연구 인력을 데려오는 건 저에게도 좋은 일이지만, 미국에도 분명 긍정적인 일일 겁니다. 두뇌의 유출은 그 나라의 연구 능력을 상실하게 하잖아요. 미국이 자체적으로 연구와 발전을 통해 기술력을 키워 경쟁국과의 격차를 크게 키우는 것도 좋지만, 경쟁 상대의 개발 능력을 떨어뜨리는 것도 효과적입니다.”

경쟁 상대의 능력을 갖춰오는 건, 대단히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상대에겐 마이너스였고, 반대로 자신에겐 플러스가 되니 차이가 배로 벌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렇게 유출된 고급 인력이 중국이나 북한으로 간다고 상상해 보세요. 만약 고급 인력 중에 핵물리학자들이라도 있으면 그 후폭풍은 심각할 거예요.”

“전적으로 동의하네.”

유재원의 설명에 이번엔 더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에드윈 풀러였다.

중국과 북한은 헤리티지 재단의 주요한 연구 과제 중 하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재원이 틀린 소리를 한 것도 아니었다.

주요 이슈로 떠오르진 않았지만, 재단 안에서는 러시아의 붕괴와 중국의 부상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서서히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그렇게 보고만 있다가 중국이 크게 성장하고 나서야 허둥지둥 대응했는데, 이번엔 유재원의 개입으로 인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알겠네. 내가 얼마나 큰 힘이 될지 모르겠지만, 한 번 힘을 써보지.”

고심이 조금 길어졌던 에드윈 풀러에게서 드디어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나왔다.

“고맙습니다. 이사장님 말 한마디면 든든하죠.”

“하하, 자네의 기대가 크니 이거 좀 부담스러워지는군. 앞으로도 조언이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오게나.”

응?

그런데 이렇게 끝인가?

유재원은 순간 당황했다. 부탁을 들어주는 것과 함께 에드윈 풀러 역시나 자신에게 뭔가를 요구할 줄 알았다. 그런데 에드윈 풀러는 별다른 요구가 없이 부탁을 수락했다.

“자, 점심시간인데, 내가 일전에 말했던 레스토랑으로 이동하지. 끝내주게 맛있는 스테이크를 소개해주겠네.”

그가 요구할 것도 열심히 예상했는데, 이렇게 대화가 끝나버리니 오히려 유재원이 조금 섭섭한 느낌이었다. 법무팀장인 앨런을 이 자리에 대동한 것도 에드윈 풀러 이사장이 요구한 것에 대해 불법적인 건 없는지 따져보기 위해서였는데, 이러면 바쁜 사람 괜히 데려온 것이나 다름이 없다.

에드윈 풀러가 이럴 사람인가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도 러시아의 일은 현재 진행형이니 앞으로 무슨 말이 더 나올지는 두고 봐야 하는 것이었다.

10월의 마지막 날.

“흐음? 뭐지?”

일성 그룹 비서실장 이혁수는 전화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중이었다. 와야 할 전화가 아직도 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기다리는 건 온겨레 신문의 영업부장 전화였다. 신문사를 운영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수익원은 광고였고, 그 광고를 따내기 위해 신문사들은 매일 발행되는 부수를 높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찍어내는 부수가 커지는 만큼 광고의 단가도 상승하기에, 최근에는 정기구독자에게 자전거를 나눠주는 행사를 벌이는 곳도 있었다. 제법 부담이 되는 사은품이긴 해도, 그만큼 광고 단가도 올라가니 신문사에는 분명 남는 장사였다.

그렇기에 신문사가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광고의 유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성 그룹이 온겨레 신문과 계열사 잡지에 광고를 줄이면, 영업부장부터 똥줄이 타기 시작해서 바로 연락이 온다.

그때 가려운 곳을 말하면 십중팔구는 부드럽게 해결되었다. 나머지 극소수의 상황도 며칠이 지나면 대충 견적이 나왔다.

“이상하네. 그 아귀 같은 놈들의 배가 불렀나?”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단번에 온겨레 신문, 그리고 온겨레에서 발행하는 잡지들에 대해 광고를 전면적으로 중단한 건 아니었다. 단지 비중을 평소의 60%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이렇게만 해도 전례를 보면 바로 다음 날 영업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번엔 아니었다.

호시탐탐 기회만 보다가 작은 실수나 책 잡힐 게 있으면 기가 막히게 나타나 돈을 뜯어가던 놈들이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반응이 없다는 건 너무도 수상스러운 일이었다.

“아예, 다 빼 봐?”

울컥 화가 치밀은 이혁수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친애하는 회장님께서 그룹 핵심임원들의 구조조정을 설계 중인데, 최측근이랄 수 있는 자신이 이런 사소한 일로 심기를 끼쳐드릴 수는 없는 법이다.

“휴, 일단 무슨 일인지부터 알아보자.”

결국, 이혁수가 먼저 전화기를 들었다. 그렇다고 온겨레 신문사 데스크에 곧장 전화를 거는 건 아니었다. 일성 그룹이 자랑하는 정보팀의 팀장에게로 직접 전화를 거는 전화였다. 누가 더 회장님께 잘 보일지 경쟁하는 사이인지라 무척이나 껄끄러운 관계였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먼저 전화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회장님! 좋은 소식입니다.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샤일로프 박사의 비자가 곧 나올 것 같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미하일 스카우트팀의 기분 좋은 연락이었다.

“벌써요?”

에드윈 풀런을 만나고 온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는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 대사관의 콧대는 하늘보다 높았다. 미하일이나 ID 그룹 법무팀에서 비자 발급에 대해 문의를 하면 어찌나 까칠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에드윈 풀러에게 부탁을 한 지 며칠 지나니 긍정적인 소식으로 바뀌었다.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기엔 에드윈 풀러의 위상이나 유재원 본인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진 않기로 했다.

참고로, 유재원은 미하일에게 샤일로프 박사를 사하로프라고 자신이 말했을 때, 어째서 정정해주지 않았느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미하일은 무척이나 당황했는데, 윗사람의 실수를 대놓고 지적하는 건 러시아에선 쉽게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고 했다. 사회주의 특유의 강력한 권위주의로 인해서 그런 인식이 생긴 모양이다.

러시아 사람의 단점이라고 볼 수도 있고, 무리한 지시도 곧장 따른다는 건 때론 장점도 될 수 있었기에, 유재원은 크게 괘념치는 않았다.

하여튼, 드디어 주 러시아 미국 대사관이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에, 유재원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요. 그러면 모스크바에서 영입 환영행사를 최대한 빨리 잡아 보세요. 제 스케줄과 잘 맞춰서요.”

-예? 진짜로 모스크바에 오신단 말씀이십니까?

이번에도 미하일이 유재원의 말에 깜짝 놀랐다.

아마도 유재원이 인재를 영입활동에 가속화를 위해서 러시아에 직접 갈 거라고 했을 때, 그냥 해보는 말인 줄 알았나 보다.

“그럼요. 저는 빈말 하지 않습니다.”

-아, 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면 11월 중으로 잡아 보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좋네요.”

유재원의 스케줄은 그야말로 여유로움 그 자체였다.

요즘엔 딱히 특별한 행사도 없었고, 인터뷰 요청도 뜸한 상태였다. 사업적인 일이나, 투자 관련해서는 아직도 연락이 많이 오긴 하는데, 그룹의 조직이 탄탄해지면서 유재원까지 올라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덕분에 유재원은 여러 가지 만들어 보고 싶었던 프로그램을 열심히 만들 수 있었다.

최근에 작업하고 있던 프로그램은 ID 톡과 연동되는 간단한 게임들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보석들을 섞어놓고 가로, 세로로 3개씩 맞추면 사라지는 퍼즐 게임과 소나기처럼 총알이 떨어지는 걸 요리조리 피하는 게임 등등.

한 판 즐기는 데 몇 분 걸리지 않는 캐주얼 게임인데,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에 기본 탑재시킬 예정이다.

ID 톡 사용자들을 위한 기능으로는 사용자 전체, 혹은 등록된 친구들 사이에 점수를 경쟁하는 식으로, 한때 한국에서 많이 유행했던 SNS 게임의 시스템을 넣었다.

그때, 한국 게임 개발사들은 한 판 즐기기 위해서 보석이니 별이니 하는 것을 소비하도록 설계했었다. 하루에 기본으로 다섯 개 정도를 주고, 이게 소진되면 이를 충전할 유료 아이템을 팔았다.

유재원은 거기까지 갈 생각은 없고, ID 톡의 대중화를 위해서 연동만 시켜줄 거다. 나중에 인터넷이 대중화되면 친구와 직접 게임에서 만나서 대결하던, 협동 미션을 함께 할 수도 있겠지만, 연결 속도도 느리고 응답 속도도 느린 지금은 점수 정도만 합산하는 게 최선이다.

하여튼, 유재원은 레밍턴에게 연락해서 러시아 방문을 위한 준비를 해달라고 했다. 레밍턴은 붉은 군대의 나라에 유재원이 직접 간다는 소리에 깜짝 놀랐지만, 유재원의 생각이 워낙 확고했기에 더는 만류하진 못했다.

대신 과하다는 말이 나올 만큼 경호팀을 꾸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

유재원은 오랜만에 실리콘밸리로 출근했다.

올드 팔로 알토에 집을 산 다음, 그곳에 전용 사무실을 꾸려놓고 프로그래밍을 하던 유재원은 앨런이 회사에 일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움직인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넥스트컴의 사장인 헨리 사무엘이 미팅도 요청했기에, 오랜만에 집을 벗어났다.

회사에 도착하고 보니 앨런이 낯선 사람 둘을 데려왔다.

“회장님을 모실 드라이버들입니다.”

뉴욕 출장 때 말했던 전용기사 고용작업이 드디어 마무리된 모양이다.

이력서를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무사고 운전 경력 10년은 기본으로 넘었고, 병원 진단서와 정신감정 증서도 첨부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미국 특수부대 출신 경력까지 있었으니, 무척이나 화려한 이력서였다.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지만, 남이 운전하는 자동차를 믿고 타려면 이만큼 꼼꼼하게 점검을 하는 것이 정론이다.

특히 유재원의 ID 그룹은 조직의 핵심 역량이 모두 유재원 본인으로부터 비롯되는 회사였다. 유재원이 사라지면 오늘의 영광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는 걸 레밍턴이나 앨런 등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전용 기사를 뽑는 일은, 무척이나 꼼꼼하게 검증했다. 두 사람 모두 본인의 개인정보 제공에 동의했고, 여기에 레밍턴의 정보팀이 총가동되었고, 앨런의 촘촘한 검증도 이어졌다.

경력, 병력도 꼼꼼하게 살폈지만, 가장 중요하게 본 건 역시나 운전 실력이었다. 유재원 앞으로 주어진 롤스로이스부터 법인 차량으로 등록된 벤츠나 레밍턴이 소유한 머슬카까지 다 몰아보는 시험을 거쳤다.

“회장님,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켄 피셔입니다.”

“그렉 와일러입니다.”

켄 피셔, 그렉 와일러.

레밍턴과 앨런의 시험을 통과한 두 사람이 유재원에게 자기소개했다.

둘 다 덩치가 산만했다. 레밍턴도 좀 커다란 덩치인데, 그보다 더 크다고 느껴질 정도다. 겉모습만 보면 드라이버가 아니라 경호원을 뽑은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곰처럼 큰 사람들이 누구에게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식으로 꾸뻑 인사까지 했다.

“반갑습니다. 유재원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유재원도 자기를 소개하며 악수를 청했다. 미국인은 머릴 숙이며 인사했고, 유재원은 악수했으니 마치 인사 문화가 서로 바뀐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주5일근무제에, 2교대 근무를 하기로 했다. 특히 운전기사는 근무 시간이 탄력적일 수밖에 없는데, 정규 근무시간 너머로 일을 할 경우 특별 수당을 확실히 챙겨주기로 했다. 목숨을 맡길 사람들이었으니, 수당을 넉넉하게 챙겨주는 것에 대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근무 시작은 오늘부터 하기로 했고, 그렉 와일러보다 두 살 많은 켄 피셔부터 먼저 운전대를 잡기로 했다.

운전사들과 상견례를 마친 유재원은 곧장 다음 일정을 시작했다. 넥스트컴의 사장 헨리 사무엘의 미팅 요청이다.

예전에 사용하던 사무실로 가서 헨리 사무엘을 호출했다. 넥스트컴의 사무실도 바로 근처였기에 호출한 지 3분 만에 헨리 사무엘이 유재원 앞에 나타났다.

“요즘 무슨 일 있어요?”

유재원은 인사말보다 무슨 일 있었느냐는 말이 먼저 나왔다.

헨리 사무엘의 차림이 너무도 후줄근했던 탓이다. 명색이 넥스트컴의 사장으로서 50명이나 되는 직원을 거느린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헨리는 땀이 잔뜩 밴 청바지, 하얀색 라운드 티에 체크 셔츠를 겹쳐 입은 모습이었다. 영락없는 일에 찌든 IT 개발자의 모습이었다. 몇 주 전 임원 회의를 할 때만 해도 말끔한 정장 차림의 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정작 헨리 사무엘은 유재원의 유려와 달리 한껏 들던 상태였다.

“사장님, 드디어 고속 데이터 모뎀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케이블 TV 시장에 진출할 수 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에 들어가는 걸 좋아하는 유재원이지만, 이건 나가도 너무 나갔다. 적어도 앞뒤 설명이 맞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전 정보라도 좀 들었다면 그나마 때려 맞추기라도 할 텐데 헨리 사무엘은 보고서를 잘 올리지도 않았다.

뭔가 통신용 기기를 개발한다고만 들었지, 그게 고속 데이터 모뎀이라는 건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 아는 것이었다.

“흥분을 좀 가라앉히시고 여기 앉아서 차근차근 설명 좀 해주세요.”

“아, 네네. 알겠습니다.”

헨리 사무엘은 유재원과 나란히 보고 앉아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유재원의 입은 떡 벌어졌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기술이 헨리 사무엘의 입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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