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열혈 추종자들(Esquires) =========================
처음 시작은 일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성의 별명은 ‘관리’였다.
관리의 일성은 인재들을 떡잎부터 알아보고 관리를 시작한다. 서울대 법대의 최상위권엔 일성 장학재단에서 커다란 장학금을 턱턱 내준다. 그때부터 사법고시에 통과할 이들을 밀착해서 관리했고, 일성에 우호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사법부 내에 일성 장학금을 받은 사람을 뽑아 줄을 세워 보면 지금도 수백 명은 나올 것이다. 이처럼 일성에 편향적인 이들은 당연히 일성에 우호적이었고, 그것이 수사나 판결에도 영향을 미쳤다.
부산그룹이 청와대를 찾기보다는 일성 그룹을 찾은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재원의 ID 그룹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다. 법과 원칙, 그리고 본인의 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리고도 불이익은 전혀 받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원래대로라면 매장당해서 개털이나 만나고 다녀야 할 김창완과 정병우가 떵떵거리면서 법원과 검찰을 제집처럼 돌아다니면서 후배들을 다독거리고, 선배들까지 챙겼다. 만날 때마다 술값이며 후배들 용돈으로 수백만 원씩 깨지는데도 일주일에 2, 3번은 했다.
검찰과 법원에선 제법 상당한 동요가 있다는 풍문이다.
김창완과 정병우처럼 한 번 크게 질러놓고 나오면, ID 그룹의 후원을 확실히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일성의 편을 들어주기 위해선 법전을 깡그리 무시하고, 온갖 억지와 비상식을 동원해야 하는데, ID 그룹 편에 서기 위해선 법과 원칙에 따라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초임 검사나 초임 판사 중에 처음부터 재벌에 기생해 큰 몫 잡아보겠다고 고시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음, 우리 사이에 할 말이 좀 있지 않은가? 허심탄회한 대화를 위해 이 친구들은 내보내는 게 어떻겠나?”
역시 마음이 급한 최현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
“회장님! 여긴 ID 그룹 사무실입니다.”
최현희의 말은 사전 약속이 없었는지 김혁수가 기겁해서 만류했다.
아니, 그런데 저 아저씨 웃기는 아저씨다.
여기가 ID 그룹 사무실이면? 홀로 남겨진 최현희에게 유재원이 무슨 못할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건가? 아니면 일성 그룹의 회장님이 따로 남겨 놓은 이들에게 해코지라도 심심치 않게 해서 도둑이 제 발 저린 건가.
“아, 됐어. 자네는 나가 봐.”
“좋아요. 최 비서실장님도 잠깐 비켜주세요.”
최현희와 유재원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그러자 최강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일어섰고, 김혁수는 좀 더 뭉그적거리다가 일어나 경호원과 함께 회의실 밖으로 나섰다.
분위기가 정리되는 동안 둘 사이에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최현희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부탁이 하나 있네.”
“뭔가요? 어렵지만 않으면 좋겠네요.”
부탁?
“당연히 자네가 들어줄 수 있는 걸세. 어렵게 만들어진 자리이니 정직하게 말해주었으면 좋겠어.”
솔직도 아니고 정직이라?
그러고 보니 최현희 회장이 했던 말 중에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고 했던 게 떠오른다. 최근에 했다는 건 아니고, 전생에 어떤 기념행사에서 그렇게 발언했었는데,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런데 지금 보니 대충 어떤 느낌으로 말한 건지 알 것 같다.
정직한 사람처럼 다루기 편한 사람은 없다. 진짜 정직한 사람이 있다면 모든 걸 사실 그대로 이야기할 테니, 상대는 약간의 노력만으로 큰 이익을 거둘 수 있다. 노력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높인 것이고, 야료라고 하면 딱 맞다.
“아, 그럼요. 저도 궁금했어요. 뭐가 궁금하셔서 여기까지 어려운 걸음을 하신 거예요?”
유재원의 물음에 최현희는 약간의 이채를 띄었다.
사실 신기하기도 했다. 청와대, 혹은 일성의 경쟁 기업에 있는 높은 양반들 몇몇을 제외하면 한국 사람들 대부분은 최현희를 무척이나 어려워했다. 그런데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유재원이 너무도 편하게 본인과 말을 나누는 모습은 참 기이한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원래 유재원이라는 녀석은 상식을 초월한 녀석이니 그러려니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보통의 아이였으면 수학이나 영어니 하는 낯선 과목을 붙들고 있거나, 놀기 좋아하는 녀석들이라면 친구들과 놀기 바쁜 나이였다.
그렇게 지내는 게 평범한 나이인데, 상대는 순식간에 PC의 운영체제와 사무용 프로그램 시장을 장악했고, 마이크로소프트까지 인수해버린 존재였다.
상식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유재원이었다.
“우리 일성이 자네의 회사나 자네에게 피해를 준 게 있나?”
그렇기에 최현희는 더욱 궁금했다.
어째서 유재원과 같은 머리 좋은 녀석이 본인이나 일성을 적대시하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알아보니, 이번 부산그룹의 일 전에는 자네와 일성 사이에 뭔가 충돌이 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네만.”
오죽하면 김혁수는 물론 정보팀까지 다 조사해서 본인이 몰랐던 충돌이 있었는지 찾아봤다. 하지만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가 옛날의 기억 하나를 겨우 끄집어낼 수 있었다. 예전 88년도 말이었나?
바로, 수출기업인의 밤이었다. 그때, 최현희는 부친의 죽음으로 일성 그룹 회장을 승계했다. 승계작업은 거의 마무리 된 상태였는데, 의사의 예측보다 더 빨리 돌아가셔서 완벽하게 끝내진 못했다.
특히 상속 문제는 아직도 진행형이었다.
부친이 가지고 있던 차명 재산은 상당히 방대했는데, 그걸 본인의 명의로 바꾸면서도 부담이 되는 상속세는 피하려고 갖은 노력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재원에게 대통령이 말을 붙였다.
유재원은 천연덕스럽게 돈도 많이 벌고 세금도 잘 내겠다고 하면서 대통령에게 웃음을 주었다. 당시엔 아이의 천진함으로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애초에 그때부터 자신에게 물을 먹였다는 확신이 드는 최현희였다.
그래서 더욱 의문이다.
타자 연습기를 미국으로 수출에서 첫 성공을 거두었던 때의 유재원은 별 볼 일 없는 집안의 아이였다. 유재원 일가의 친인척까지 모두 확장해 봐도 일성 그룹과는 조금의 연결 고리도 없었다.
설마 좌파적 사상을 가진 부모에게 배운 반기업 정서일까 싶어서 유재원의 부모까지 정보팀을 통해 알아봤는데 아니었다. 유재원의 부모는 최종학력 국민학교라는 평범한 시골의 사람들로 기업과 정부에 친화적인 성향이었다. 오히려 대학물 어설프게 먹은 대학생들이 반기업 정서가 팽배했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이렇게 해서 좁혀진 결론은 딱 하나. 유재원에게 답이 있다는 것이다. 그 답을 들어보기 위해서 1억짜리 자리를 만든 것이다.
최현희는 유재원에게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가 나올지 너무나 궁금한 표정이다.
유재원도 시간을 끌지 않았다.
“흐음, 유감이네요.”
유감이다.
그것이 유재원의 답이었다. 그런데 최현희 회장의 성에 차진 않았는지 화가 잔뜩 일어난 모습이었다. 그러나 유재원은 진심이었다.
감정이 있다.
그것도 최현희 회장을 비롯한 일성의 일가가 어떠한 용서를 구해도 절대 풀어지지 않을 복수심이 있다. 물론 복수의 대상은 일성뿐만이 아니었지만, 일성의 지분은 제일 컸다. 유재원이 이룩한 모든 성과를 빼앗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 지위와 인격까지 죽였다. 숨만 붙어 있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무엇보다 유재원의 전생에 이룬 성과란 돈으로도 따질 수 없었다. 가치가 주관적이라는 게 아니라, 너무도 높아서 계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재원이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은 바로 ‘기계심리해석모듈’이라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이었다.
21세기는 인공지능의 시대였다.
다양한 인공지능이 출시되어 성능을 대결했고, 날로 고도화되는 인공지능의 구조는 나중에 가서는 사람이 해석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른바 기술의 특이점에 이른 것이다.
인간은 수십 년 고민해야 할 복잡한 문제에 대해 고도로 발전한 인공지능은 답을 금방 내놓았다. 당연하게도 최고 수준의 인공지능 전문가가 집단으로 모여도 어째서 이러한 답이 도출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재원은 발상의 전환을 해봤다.
인공지능에 표준의 인간 지능을 가진 캐릭터를 입력하고, 이 가상의 캐릭터에게 문제 해결 방법을 설명하도록 했다.
말은 쉬워도 구현하는 건 무척이나 어려웠다. 오죽하면 기계심리라는 말도 안 되는 단어가 다 동원되겠는가.
그렇지만 유재원은 뚝심 있게 밀고 나갔고, 드디어 결실을 보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인공지능들은 문제 해결에 대해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설명을 하나둘 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덤으로 인공지능의 연산속도도 최적화가 되면서 훨씬 더 빨라졌다.
물론, 인공지능의 설명 역시나 해당 문제와 관련된 고도의 지식을 갖춘 사람들 정도가 되어야 이해할 수 있었을 만큼, 수준이 높았다.
그렇지만 인공지능이 도대체 무슨 판단으로 이런 결과를 도출했는지 몰랐을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고도의 인공지능과 함께 인류가 이룩한 지식의 경계 역시 확장되기 시작했다.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기적을 일으킨 기계심리해석모듈의 가치는 얼마일까?
당연히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금액일 거다. 그런데 당시 일성을 비롯한 재벌들의 제시는 0원이었다.
돈으로 따질 수 없다는 게 0원이라는 말은 아니지 않겠나. 그런데 그 당시의 논리는 유재원의 회사에 연구개발비를 이미 지급했으니 그냥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때 유재원이 받았던
과제는 인공지능의 처리 능력 향상이었다. 기계심리해석모듈은 유재원이 따로 연구하던 것이었는데, 이들은 기계심리해석모듈까지 내놓으라고 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요구라서 단호히 거절했는데, 돌아온 건 대기업의 최첨단 기술을 빼돌린 산업스파이 취급이었다.
언론이 먼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정부가 뒤를 따랐다. 심지어 고소까지 당해서 검찰청을 몇 번 드나드니 유재원은 순식간에 한국의 미래 먹거리인 인공지능 기술을 빼돌린 죽을 놈이 되어서 국민의 공분을 샀다.
이런 일을 주도한 게 바로 눈앞에 있는 최현희의 손자, 그리고 같이 어울리던 재벌 3세들이다. 나중에 곱씹어 보니 이들이 자신에게 했던 건 그저 선대로부터 배웠던 짓이었다. 그러니 나락으로 떨어진 후에 바로 죽어서 회귀가 일어난 상태였다면, 당장 최현희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자식 교육 똑바로 하라고 다그쳤을 거다.
하지만 유재원은 그러지 않았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다. 그 일이 있었던 후에도 10년이 넘는 시간을 버티며 다음 생을 위해 실패를 곱씹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최현희와 마주했음에도 현재 유재원의 감정은 매우 잔잔했다.
“유감이다? 그러니까 감정이 있다는 말이군. 그게 대답 전부인가?”
오히려 최현희 쪽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눈가가 실룩거리는 걸 보니, 너무도 단순한 대답에 화가 좀 치밀은 모양이다. 하긴 전생이라는 수십 년의 세월을 유감이라는 단어 하나로 압축한 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면 최현희의 눈높이에 맞춘 대답이 필요한데, 이는 고민할 문제가 아니었다. 일성이라는 기업에 대해 누구보다 열심히 대비했던 유재원이었다. 자판기처럼 버튼만 누르면 디스꺼리가 툭툭 나온다.
오히려 최현희가 걱정이다.
얼굴 앞에서 대놓고 일성과 본인을 비난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을 양반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본인이 원하니 어쩔 수 없다.
“흠흠. 그러면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뭐, 이런 자리에서 인생의 색다른 경험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 작품 후기 ==========
추춴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주인공의 비밀이 하나 밝혀졌습니다.
전생에 열심히 만들었던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바로 기계심리해석 모듈~!
MIT에서 기계심리학을 전공했다고 주장하는 분이 트위치TV에 딱 한 분 계시긴 하지요. 알만한 분은 아실듯. 그렇지만 현실에는 백날 찾아봐도 없을 겁니다.
대신 인공지능이 고도로 발달해 기술의 특이점이 온 세계를 상상해 보니 기계심리학 같은 학문이 나올 거 같다는 느낌도 들어서 적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