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189화 (189/1,007)

[189] 열혈 추종자들(Esquires) =========================

비슷한 시각.

최현희 일성 회장은 본인만의 공간인 서재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혼자는 아니었다. 곧 스케줄 때문에 이동해야 해서 비서실장인 김혁수가 곁에서 대기 중이었다.

김혁수의 눈빛엔 걱정이 가득했다. 며칠 전 유재원을 만나고 나서부터 최현희가 이런 모습이 되었다. 하긴, 직접 만나본 유재원은 김혁수의 고정 관념을 바꿀 만큼 놀라운 모습이었다. 겉모습으로는 판단하면 큰코다칠 거라는 생각이 딱 들 정도로 존재감이 굉장했다.

그렇지만 개인의 능력이든 거느리고 있는 기업의 규모든 일성이 모든 면을 압도하고 있으니, 최현희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그가 모시는 최현희는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최현희의 모든 것을 존경하는 김혁수였기에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김 비서. MAD라고 아나?”

그때, 깊은 고민 중이었던 최현희가 말했다.

“MAD 말입니까? 미쳤다는 뜻 아닌가요? 아, 유재원 그 녀석이 미쳤다는 말씀이시죠? 맞습니다! 그 꼬마 녀석은 미친 게 확실합니다!”

한 번 물어보니 본심이 확 나오는 김혁수다. 하지만 최현희는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

“Mutually Assured Destruction, 그래서 MAD일세.”

“음, 상호 보장된 파괴라니요?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냉전 때, 존 폰 노이만이란 천재 수학자가 제안해 만들어진 용어지. 전투나 전쟁의 결과에 상관없이 양측 모두 파괴될 것이 확실한 전략이지.”

며칠 전 만난 유재원이 페어플레이를 하자면서 확실하게 언급한 전략이었다. 최현희가 반칙을 저지르면 자기도 하겠다. 그건 비단 사법부의 일성 장학생 만들기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사안에 대해 적용될 거라는 걸 최현희는 강하게 느꼈다.

어떻게 보면 ‘네가 반칙했어? 그럼 나도 할 거야!’ 같은 어린아이의 발상처럼 들리기도 했다. 한데, 돌아와 생각해보니 빈틈이 없는 전략이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미국과 소련은 그 냉혹한 냉전 시대에 핵전쟁의 발발 없이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일성이 할 수 있는 반칙적인 일은, ID 그룹이 못할 건 아니었다.

여기에서 최현희 회장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냉전의 끝은 소련의 붕괴다.

오늘 아침 기사를 보니 소련에서 러시아라고 이름이 바뀐 나라의 수도 모스크바에 유재원이 대규모 투자를 위해 입국했다는 소식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다. 소련이 아직 유지되고 있었다면 유재원이 그렇게 환대를 받으며 입국할 수 있었을까?

소련은 경제적, 정치적 모순으로 내부에서 붕괴했다. 그런데 일성 역시 마찬가지라는 거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속 문제도 그렇고, 여러 가지 논란거리는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려야 했다.

하나라도 삐끗하면 일성 그룹과 최현희 본인에게 큰 타격이다. 그렇기에 사법부와 정치권에 관리가 들어가는 것이다. 이 짓을 그만두면 일성은 소련처럼 서서히 망해갈 거다.

절대 그렇게 둘 수는 없다.

“방, 방법이 있습니까?”

“그래. 있지.”

답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효과적인 대응법을 찾았다.

부산 그룹의 일에서 실마리를 포착했다. 부산 그룹의 문제에 많은 재벌이 공감하며 힘을 보탰었다. 같은 사회적 위치였고, 같은 문제를 내포하는 운명 공동체였던 탓이다. 마찬가지로 최현희가 품고 있는 문제와 비슷한 상황의 기업가들은 참 많았다.

한국에서 사업을 크게 하려면 어김없이 맞닥뜨려야 할 문제가 다 비슷했기 때문이다. 즉, 일성과 함께할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거다.

MAD 전략도 미국과 소련이 대등할 때 적용되었던 것이지만, 상대의 숫자가 많아지면 무용지물이다. 마찬가지로 일성과 함께 수많은 기업이 함께한다면 ID 그룹도 버텨내지 못할 거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일성을 비롯한 한국의 재벌들이 미국이 될 것이고, ID 그룹이 소련의 처지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음 스케줄이 경제인연합 모임이지?”

“예, 회장님.”

김혁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최현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이 나왔으니 실행을 할 때다. 경제인연합회라면 딱 좋은 모임이었다.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국제공항에 도착한 유재원은 처음으로 레드카펫을 밟아 보았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 제일 나중에 내려달라고 부탁을 하기에 알겠다고 했다. 러시아에서 빠져나가는 사람은 많아도, 들어가는 사람은 얼마 없었기에 맨 마지막에 내려도 그렇게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비행기에서 좀 대기하다가 내리려고 움직이니 의장대가 나와 팡파르를 울리고 있었고, 사다리차부터 대기 중인 방탄 리무진까지 붉은색 카펫까지 깔렸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ID 그룹의 투자를 환영한다면서 러시아 정부가 준비한 행사였다. 미처 보고받지 못했던 일이라서 유재원도 조금 당황했다. 사다리차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미하일 팀장의 설명을 들어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외자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는 러시아 정부가 미하일과는 별도의 상의도 없이 그냥 준비했다는 것이다.

러시아라면 그럴 수 있다.

무엇보다 유재원의 ID 그룹도 러시아 정부가 살짝 오해할 만한 걸 하긴 했다. 러시아에서 인재들을 무한히 빨아들일 창구로 미하일이 이끄는 스카우트팀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대로 간판을 걸기엔 러시아 당국이나 국민에게 그다지 좋은 이미지로 인식되지 않을 것 같다는 의견이 올라왔다.

유재원도 동의하는 바였기에, 이름을 살짝 바꾸었다. ID 하이테크 모스크바 연구소라고 말이다. 당연히 진짜 연구과제를 맡기는 조직은 아니다. 단지 러시아 인력을 하이테크 연구소로 보내는 조직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러시아 당국에서는 ‘ID 하이테크 모스크바 연구소’라는 이름을 보고 자기들이 좋을 데로 해석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예정에도 없는 환영행사도 열어준 모양인데, 마음에 좀 켕기긴 했다.

환영한다고 나온 분들께 고맙다고 말하며 웃는 얼굴로 악수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그렇다고 예정했던 예산 이상으로 돈을 쓸 생각은 추호도 없는 단호한 유재원이다.

유재원의 러시아 일정은 무척이나 콤팩트했다.

러시아에서 오래 머물러봐야 위험에 노출될 확률만 높아지니 1박 2일의 일정으로 만들었다. 동선도 최대한 단순하게 짰다.

오늘은 모스크바에서 가장 번화한 아르바트 거리에 생긴 ID 하이테크 모스크바 연구소에 간판을 올리는 행사와 샤일로프 박사를 비롯한 6명의 인재 영입식, 그리고 환영 만찬을 하는 것이 전부다. 내일은 레닌그라드에 가서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에 장학금을 주는 행사가 끝이다. 푸틴과의 만남은 행사 전 대학 총장과의 면담 전후로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출국이다.

바로 미국으로 가서 산적한 일도 해결하고, 레밍턴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11월의 굵직한 스케줄을 모두 마무리한다.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미하일 이바노프입니다.”

러시아 정부가 준비한 의전을 모두 마치고서야 미하일 팀장과 마주 보게 된 유재원이다. 명함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는 살짝 주름이 더 늘어난 모습이다. 하긴, 케빈 존슨이 가지고 있던 파일은 몇 년 전의 것이었으니, 지난 세월만큼 현재의 모습도 바뀐 모양이다.

미하일은 자신감이 철철 넘쳤다.

ID 하이테크 스카우트 팀장이라는 직책과 넉넉한 보수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집에서는 존경받는 가장이 되었고, 사회적으로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경제 체제의 붕괴로 석유나 가스를 다루는 회사 말고는 딱히 먹고살 게 없는 러시아에서는 외국계 기업이 최고의 직장이었다.

“반가워요.”

유재원도 미하일을 비롯한 스카우트팀과 악수를 했다. 곧이어 준비된 자동차에 나눠 탔다. 미하일이 준비성 좋게도 리무진 딱 한 대만 준비한 게 아니라, 구식이긴 해도 벤츠 자동차도 몇 대 더 준비했기에 넉넉하게 나눠 탈 수 있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숙소로 잡은 호텔이었다.

거기서 짐을 푼 뒤 간단히 점심을 먹고, 곧장 하이테크 모스크바 연구소 현판식으로 가는 것이 첫 일정이었다.

호텔에 도착해서 체크인하고 짐을 푸는 것도 다 수행원들이 해줘서 유재원은 딱히 할 일도 없었다.

“다행히 감지되는 도청 장치는 없습니다.”

꼼꼼한 레밍턴은 출발 전에 도청기 탐지기를 챙겨서 경호원에게 들려준 모양이다. 경호원은 레밍턴에게 훈련을 받은 대로 스위트룸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탐지한 후에 보고했다. 탐지기가 포착하지 못한 정밀한 도청기가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탐지기의 작동 방식이 전파를 탐지하는 거라서 현재의 기술로는 포착하지 못하는 도청기는 없을 거다.

짐을 푼 다음, 차를 마시며 장시간 비행의 피로를 푼 유재원은 곧 현판식 행사를 위해서 이동했다.

“괜찮으십니까?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미리 독일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은 줄곧 쉬고 있었고, 베를린에서 모스크바까지는 3시간 미만의 비행이지만, 유재원은 서울에서 독일까지 13시간을 비행해야 했다. 비행기를 갈아탈 때 좀 쉬긴 했지만, 침대에서 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유재원은 현재 엄청난 강행군을 수행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젊어서 그런가 팔팔합니다. 게다가 비행기에서 푹 자기도 했고요.”

실제 유재원은 전혀 피곤한 기색이 아니었다.

다크서클도 없었고, 눈이 충혈되지도 않았다. 졸린 기색도 없었으니 임원들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티타임을 마친 유재원의 일행은 곧 행사가 있는 아르바트 거리로 이동했다.

하이테크 모스크바 연구소는 아르바트 거리의 하얀색 대리석으로 지어진 3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사용한다. 러시아는 아직 시장경제체제로 본격적으로 전환한 것은 아니라서 구매를 하진 못하고, 장기 임대를 했다.

러시아 사람들에겐 부담인 가격일 텐데, 달러로 계산하니 무척이나 저렴한 가격이라서 2010년까지 20년 장기 계약을 했고, 임대료도 다 계산했다.

그렇게 임대를 마치고 내부 공사도 새로 했다. 나중에 러시아의 경제 상황이 나아지면 1층은 ID 플래그쉽 스토어로 사용하고, 지금은 2층과 3층을 스카우트팀이 사용하기로 했다.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낫네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도착해서 실제로 보니 사진으로만 보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깔끔했다. 규모도 제법 컸다. 유재원은 결재할 때 봤던 예산과 작은 크기의 첨부 이미지만 보았을 때, 서울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편의점 크기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직접 보니 덕진국민학교 건물처럼 컸다. 층이 높은 건 아닌데, 가로로 길어서 1층에 커다란 마트 하나가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다.

건물은 언제나 작아서 문제지, 커서 문제가 되는 건 드물다. 임원들이 보기에 드넓은 1층을 어떻게 가득 채우나 싶지만, 앞으로 ID 그룹이 만들어낼 혁신적인 제품은 수도 없이 많았다. 21세기만 되면 여기엔 ID의 마크를 단 신제품으로 가득할 것이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미하일이 작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크게 웃어 보였다.

이번 행사를 준비하면서 얼마나 노심초사를 했는지 모른다. 보통 행사도 아니고 유재원 회장이 직접 참여하고, 러시아 방송국에서도 취재를 나올 예정이라서 일반적인 행사보다 몇 배는 많은 예산을 썼다.

많은 돈을 쓴 만큼 망하면, 본인의 책임이었는데, 유재원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왔기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곧이어 개업식 행사를 시작했다.

일단 ID 하이테크 모스크바 연구소라고 명명된 건물의 입구에는 화려한 러시아식 치장과 함께, 하얀색 천으로 가려진 간판도 있었고, 커팅식을 할 리본도 러시아 국기 색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경제적 혼란 중인 러시아에서 이렇게 커다랗게 오픈 행사를 하는 경우는 무척이나 드문 경우였기에, 취재진은 물론이고 근처에 사는 시민들도 구경하러 많이 나오셨다.

그야말로 좋은 그림이 딱 만들어졌다. 딱 하나 마이너스 요소가 있다면 11월의 모스크바 날씨였다. 영하 -3도에 바람도 간간이 불어서 체감온도가 더욱 떨어졌다.

야외 행사를 치르기엔 좋은 환경은 아닌지라, 개업행사는 간결히 진행되었다. 행사장까지 찾아온 러시아 인사들은 연단에 올라서 몇 마디라도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유재원과 모스크바 시장 정도로 한정하고 시간도 3분 이내로 짧게 끝냈다.

곧이어 간판을 가리고 있던 막을 걷어내는 행사를 다 함께 진행했고, 리본 커팅식도 하면서 개업 행사가 마무리되었다.

곧이어 빵과 초콜릿, 사탕이 든 종이상자를 개업행사를 구경하던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한국에선 개업식을 하면 떡을 돌리는 문화가 있다. 러시아에도 그런 문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국식과 최대한 비슷하게 준비하라고 유재원이 지시한 것이다.

우와아!

반응은 엄청났다. 가뜩이나 모스크바에서도 빵을 구하는 게 점점 힘들어지던 상황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았으니 다들 좋아했다. 게다가 빵도 그냥 차와 곁들이는 디저트용이 아니라 식사용으로 쓰는 커다란 식빵이라서 실용적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열성적인 반응을 보일 줄 알고, 수량도 넉넉하게 준비했다. 혼란한 틈을 타서 얌체처럼 2개를 받아가는 사람이 있어도, 개업식 구경을 나온 사람 중에 빈손으로 돌아간 이는 없었다.

덕분에 러시아 뉴스에서도 ID 그룹과 유재원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보도되었다. 시큐리티 챌린지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인수로 유재원의 인지도가 러시아에도 조금은 있긴 했는데, 이번 행사 보도로 몇 배는 더 큰 인지도 상승이다. 마케팅으로 큰돈 들여 쌓은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효율이었다.

개업식 행사가 끝난 후, 유재원은 건물 3층에 올랐다.

3층에서 비공개 행사의 준비가 모두 끝난 상태였다. 바로 샤일로프 박사를 비롯한 6명의 영입 환영식이었다.

러시아의 두뇌를 빼가는 것이라서 공개적으로 하진 못한다. 그렇다고 완전히 비밀도 아니어서 러시아 당국이나 러시아 학계에는 이미 ID 그룹의 공격적인 인재 영입에 대한 이야기가 다 도는 중이다.

아니꼽게 보는 사람도 없는 건 아니다. 그리고 미국에 넘어가서 근무해야 한다는 걸 부담스럽게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일부는 영어를 쓰는 것에 문제가 되진 않았지만, 대부분 언어는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또한, 얼마 전까지 극렬히 대립했던 나라에 가서 사는 것도 어렵게 생각했다.

다행이라면 유재원이 찍은 필수 영입 인사 셋은 모두 영입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샤일로프 박사, 블라디미르 벡셀레드, 유진 카스퍼스키 이렇게 셋이었고, 여기에 추가로 물리학자 둘과 로켓 전문가 하나가 더 포함되었다. 또한, 미국행을 어렵게 생각하는 이들은 미국보다 더 나쁜 여건인 북한행은 더더욱 선택하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러시아의 상황이 더욱 나빠지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북한은 아니다. 북한은 러시아에서도 미국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취약한 나라라는 인식이 있었다. 미국행이 보장되는 ID 하이테크를 선택할 것이다.

물론 장담은 금물이다.

금전적 혹은 근무 여건이나, 지적 호기심보다 ‘이념’을 더욱 우선하여 생각하는 학자들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같은 사상을 공유하는 공산권 국가 북한을 위해 돈과 명예를 포기할 사람도 분명 있을 거다.

거기까진 유재원도 컨트롤할 수 없다.

대신 유재원은 미국의 CIA 같은 정보부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작정이었다. 영화에서는 CIA가 삽질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부서로 그려지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CIA의 수준은 상당이 높다. 국가 간의 첨예한 첩보전에서 거둔 성과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참고로 한국의 정보부는 처음부터 고려하지도 않았다. 대외 부서보다 국내 부서에 집중해서 성장한 한국의 국가안전기획부는 철저한 내수용 조직이라서 국제 첩보전에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회장님, 샤일로프 박사 일행이 도착했습니다.”

이런저런 상념을 하는데, 드디어 주인공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존경을 받고, 나이도 가장 많은 샤일로프 박사를 선두로 벡셀레드 박사를 비롯한 학자들이 나타났다. 맨 뒤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유진 카스퍼스키도 있었다. 죄다 이공계들이긴 해도 핵이나 기초 물리학 전공인데, 유진 카스퍼스키만 컴퓨터공학도였던 탓이다. 나이 차이도 상당해서 할아버지와 손자뻘로 보인다.

샤일로프 박사의 경우엔 하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렀고, 머리카락도 장발에 백발이었다. 얼굴에도 주름이 가득했다. 지금은 무척 낡은 검은색 코트를 걸쳤는데, 붉은색 외투만 걸치면 세계의 어린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산타클로스가 될 것 같았다.

미하일이 의전에 따라 연장자인 샤일로프 박사부터 먼저 입장해 정해진 자리에 섰고 다른 이들도 뒤를 따랐다.

“안녕하세요! 유재원입니다.”

유재원도 그들 앞으로 가서 먼저 인사했다. 이들 중에 영어 능력자는 없어서 그냥 한국식으로 허릴 꾸뻑 숙이는 인사였다. 그러자 샤일로프 박사와 다른 이들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런데 분위기는 유재원이 생각했던 것처럼 화기애애하진 않았다.

아무래도 자유로운 미국과는 180도 다른 세상이라서 무척이나 경직된 상태였다. 동시에 샤일로프 박사를 비롯한 인사들이 유재원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아직 의문이 가득했던 탓이다.

미하일은 곧 다음 식순으로 넘어가려는데, 그보다 먼저 샤일로프 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러시아어라서 유재원은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어, 그러니까…….”

뭔가 좋은 말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미하일은 통역을 주저했다.

“무슨 말을 해도 저는 괜찮으니, 그대로 전해주세요.”

유재원의 재촉에 미하일은 통역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샤일로프 박사는 고용 계약에 사인을 하기 전에 약속해주신 것들을 지키겠다는 확답을 듣고 싶답니다.”

이해했다.

유재원은 샤일로프 박사를 비롯한 연구원들에게 몇 가지 사항을 약속했다. 그걸 단지 문서가 아니라 유재원의 입을 통해 확인받고 싶으신 모양이다. 소련에선 법적 요건을 확실하게 갖춘 계약서도 쉽게 무시되는 일도 많았으니, 불안하신 것 같다.

“그럼요. 얼마든지 말해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물론 앞으로 ID 하이테크에 고용될 연구원들 모두에게 단기에 성과를 내라고 닦달하지 않을 겁니다. 시간과 예산,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지원할 겁니다. 또한, 전에 약속했던 장비도 모두 발주했고. 크레이 3 슈퍼컴퓨터는 이미 설치가 끝났습니다.”

"오오! 슈퍼 컴퓨터!"

미하일을 통해 유재원의 대답을 듣자 반응이 즉각적이었다. 살짝 차가웠던 기색이 순식간에 반전된 것이다.

연구원을 제일 괴롭히는 것이 시간과 예산, 그리고 결과에 대한 닦달이었다. 유재원이 장담하는 것들은 연구원들이 그렇게도 바라던 이상향이나 마찬가지였다. 고용 계약서 상에도 들어 있는 문구였는데, 유재원한테서 직접 들으니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특히 슈퍼컴퓨터라는 말에 샤일로프 박사 같은 핵물리학자들은 물론 유진 카스퍼스키까지도 눈이 반짝였다.

한편으로, 샤일로프 박사를 비롯한 이들이 순진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유재원이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증거가 남는 계약서보다 사람의 말을 믿나 의문이다. 하긴, 여긴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서울은 아니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유재원의 확답으로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영입 행사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보도용 혹은 그룹 역사관에 들어갈 사진과 영상도 많이 만들었다.

이제 유재원에게 남은 러시아 일정은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의 장학기금 전달, 그리고 푸틴과의 만남이었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참 아쉽게도 연참으로 올리기엔 분량이 약간 모자라네요.

암튼, 물귀신 작전을 시작하는 최 회장님입니다.

과연 다 같이 살수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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