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Command & Conquer =========================
-저, 유재원이 보증합니다. 통일국민당에 투표하세요.
짙은 남색 색에 슬림핏 양복을 차려입고, 포마드를 바른 리젠트 헤어스타일의 유재원이 텔레비전 속에서 보증을 선다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으, 보증은 불알친구라도 안 서주는 건데.”
그걸 제일 앞에서 보고 있는 유재원이 또 툴툴거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전명헌 회장의 통일 국민당이 선전해야 유재원도 더욱 쉽게 한국을 주물럭거릴 수 있게 된 상황인지라 ‘보증’과 같은 단어도 서슴없이 사용하는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최종 편집본을 함께 보고 있던 감독이 유재원에게 되물었다.
영상의 정체는 바로 공식 선거운동 시작과 함께 텔레비전에 쉬지 않고 방영될 통일국민당 CF였다.
처음에 유재원은 단순히 CF에 출연해주겠다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전명헌 회장과의 미팅 이후 보다 적극적인 참여로 생각이 바뀌었다. 아예 본인이 CF를 직접 제작하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것이 90년대 초 한국의 영상제작 수준은 유재원의 성에 차지 않았다.
열심히 만들어놓고 봐도 구도, 색감, 소품의 질 등에서 촌티가 풀풀 났으니 말이다. 그래서 유재원은 미국에서 아예 광고를 찍었다. CF 광고 잘 찍기로 소문이 난 데이비드 핀처 감독과 할리우드의 기술을 동원했다.
에이리언 3의 후반 작업으로 좀 바쁜 사람이긴 했지만, 돈이면 안 될 게 없다. 보수도 두둑이 주고, 그의 차기작에 큰돈을 투자하겠다고 하니 기꺼이 나서 주었다.
광고의 내용은 간단했다.
유재원 본인의 이미지인 IT 천재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유재원이 지지하는 통일 국민당을 찍으면 첨단 기술로 만들어지는 유토피아인 테크노피아 시대가 열리는 것처럼 꾸몄다.
“아주 마음에 드네요.”
돈과 인력을 아낌없이 투입하니 때깔부터 다른 결과물이 나왔다. 14인치짜리 텔레비전으로도 확 다른 게 구분이 될 정도였다. 심지어 원본은 영화 필름으로 찍어서 나중에 리마스터링을 하면 FHD 화질로도 복구할 수 있다.
유일하게 걸리는 점이 있다면 보증이라는 단어였다. 하지만 통일 국민당의 공약이 허무한 거짓말로 끝나지 않게 집중적으로 관리하면 본인이 내뱉은 말을 지키는 것 아니겠는가.
CF의 완성도에 만족한 유재원은 약속한 보수를 지급하는 것은 물론이고 감독과 스태프에게도 추가적인 보너스를 돌렸다.
할리우드가 한국만큼은 아니어도, 노동 착취는 분명 존재하는 산업이었다. 덕분에 예상외의 수입을 거둔 스태프들은 유재원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싹트기 시작했다. 할리우드에 유재원에 대한 좋은 소문이 돌기 시작하는 계기였다.
마스터 테이프는 곧장 비행기를 타고 전명헌 명예회장에게 전달되었다.
-CF를 봤는데, 때깔부터 다르더구나. 이걸 틀기만 하면 다른 당 CF나 일반 상품 CF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거야.
전명헌 명예 회장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오죽하면 공식 선거 일정 시작이 며칠 남은 걸 한탄할 정도였다. 유재원이 만들어준 CF를 방영하려면 며칠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말이다.
-CF 만드는 데 적잖게 돈 좀 쓴 거 같은데, 얼마 들었느냐?
“에이, 돈 안 주셔도 돼요.”
유재원과 전명헌 사이는 이제 돈거래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며칠 전 전명헌 회장이 샌프란시스코 별장에 와서 선거 전략을 받아갔을 때도 유재원은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전명헌 회장 역시나 고맙다, 나중에 갚겠다는 정도만 말하고 떠났다. 이번에 할리우드 감독까지 동원해 찍은 CF 역시 유재원은 돈을 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 그런데 지금은 선거판이지 않으냐? 망할 놈들에게 털리지 않으려면 비용처리를 꼼꼼히 해야 한다더라.
말은 그렇다.
하지만 투명하고 깨끗한 선거는 2010년 뒤에나 이뤄진다. 이전까지는 탑차로 수백억의 현금다발을 실어 나르고, 무기명 채권이 가득 든 앨범을 상납하는 등의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났던 게 현실이었다.
유재원은 일단 전명헌 명예회장이 비용처리를 제대로 하겠다고 하시니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래요? 음 1억 약간 넘었어요.”
약간 수준은 아니다. 거의 2억 가까운 돈을 썼는데, 다 말하면 놀라실까 봐 적당히 줄여서 말했다.
-뭐라고? 1분짜리 광고가 1억이 넘어?
역시나 전명헌 회장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할리우드 감독에 스태프를 그대로 빌려다 만든 거라서요.”
그렇다고 설명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유재원은 아니었다. 때깔부터 다른 고급스러운 소품도 직접 제작했고, 컴퓨터 그래픽도 잔뜩 들어갔으니 단가가 상승했다.
-알겠다. 이건 내가 잘 처리하마. 다음부터는 미리 물어보고 만들 거라.
전명헌 회장이 구두쇠는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쓸 수 있는 선거 자금의 상한선이 있었기에 하는 소리였다. 물론 선거판에 뛰어든 정치인 중에 그 선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명헌 회장도 CF 제작비로 2,500만 원 수준으로 신고하고 나머지는 장부에 기재하지 않고 처리할 게 분명했다.
시간은 총알처럼 흘렀다.
전명헌 회장이 그렇게나 기다렸던 공식 선거 일정이 바로 내일로 다가왔다.
통일 국민당은 한 달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 위세는 엄청났다. 전명헌 명예 회장의 공식 창당 선언과 함께 창당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동시에 발기인과 당원들도 모집했는데, 이미 사전에 많은 이야기가 있던 모양인지, 발기인 모집도 순식간에 끝났고 당원들이 모집되는 속도도 어마어마했다.
당원이 하루에 100만 명씩 늘어났다.
비유가 아니라 통일 국민당의 당원 명부에 등록되는 이름들이 매일 엄청난 숫자였다. 알고 봤더니 미래 그룹의 임직원은 물론 협력사들 그리고 이들의 가족들까지 총동원해서 만들어냈던 숫자였다.
당연히 허수였고, 중복된 이름도 엄청나게 많았다. 하지만 100만 명이라는 숫자가 발휘하는 존재감이 있었고, 미래 그룹의 영향을 받는 공중파와 신문사들은 이를 대서특필하면서 기정사실처럼 보도했다.
유재원의 제안을 모두 다 수용되었다.
계파의 충돌로 인해서 공천에서 탈락한 이들을 다 통일 국민당이 긁어모았다. 여당, 야당 가리지 않았으니 이념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잡탕이었다. 하지만 통일 국민당이 제창한 창당 이념을 보면 이해가 된다.
경제!
보수든 진보든 경제를 부흥하는 게 우선이라는 것이다. 경제 다음은 통일이다. 노 대통령의 북방 정책으로 시작된 화해무드는 당장에라도 북한과 통일이 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기에 모든 정당이 통일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통일 역시 보수와 진보 역시 이견은 없었으니, 여당 출신이든 야당 출신이든 통일 국민당의 이름으로 하나로 묶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 통일 국민당에서 제일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자랑하는 건 전명헌 명예회장이었다.
미래 그룹이라는 한국 최고의 재벌 출신이지만, 당직은 하나도 맡지 않았다. 그저 전국구 후보 5번을 맡아서 인재 영입을 돕는 중이셨다.
대중들에겐 그야말로 신선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존의 정당 대표들은 보통 텃밭이라 불리는 안전하게 지지율이 나오는 지역에 출마한다거나, 전국구로 옮기더라도 1번을 받는 게 기본이었다.
현재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는 비례 대표를 뽑는 별도의 투표용지에 따로 뽑는 건 아니고, 지역구 의원들이 받는 표의 숫자만큼 전국구 의석도 가져가는 것이라서, 득표수 예측이 힘들다. 즉, 뒷순위에 가면 당락을 가늠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심지어 통일 국민당은 이제 막 조직을 갖춘 신생 정당이다. 전국구 선출 제도는 군소 정당에 매우 불리한 제도였다. 무소속 후보를 찍을 경우 따로 정당 투표를 하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국에 후보자를 내지 못하면 전국구 의원의 표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서 유권자들의 선택권이 박탈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러한 구조로 보았을 때, 전명헌 명예 회장이 받은 전국구 5번이라면 지역구에서 최소 15명 이상의 당선자를 배출해야 얻을 수 있는 순번이었다.
기존의 정치 상식으로는 사지로 걸어 들어간 것이나 다름이 없다. 대신 매우 파격적인 것이라서 신문과 방송에도 끊이지 않고 언급되었고, 유권자들에게도 통일 국민당의 신선함을 강력히 어필했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외부인이 보았을 때의 이야기였고, 전명헌 명예회장에게 국회의원 자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전명헌 회장이 노리는 건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을 거느리는 건 재벌 때도 가능했다. 명절 때, 선거철이 임박했을 때, 전명헌 명예회장의 집, 혹은 안가를 찾았던 의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진심으로 국회의원 배지는 없어도 상관없다.
여기에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유재원의 분석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유재원은 지역구 24석, 전국구 6석의 의석을 가져올 거라고 프레젠테이션했다. 디스켓으로 담아준 문서에는 훨씬 더 상세한 자료가 담겨 있었다. 기억의 궁전에 있는 뉴스라이브러리에서 찾은 전생의 통일 국민당 득표수 데이터를 ±5% 정도의 오차를 두고 옮겨온 것이다.
예측 데이터를 보면 6번에 가도 무방한데, 당 중진들의 한목소리에 5번을 선택한 것이다. 전명헌을 당선시키기 위해서는 통일 국민당 출마 의원들을 찍어야 하니, 이를 지렛대 삼는 선거 운동을 진행하기 위해서다.
중량감 있는 연예인들에 출마하는 것도 순조로웠다.
미래 그룹은 광고나 협찬 등으로 연예인과 긴밀한 관계였기에 정치에 관심이 있는 이들을 추려낸 것도 수월했다.
이를 통해 최영한, 김부자, 석주일과 같이 인지도 높은 연예인의 영입에 성공해서 지역구 의원 후보에 등록되었다.
다만 너무 급하게 만들어진 탓에 통일 국민당은 전국에 후보를 내는 건 실패했지만, 서울, 충청, 경상, 강원 지역을 중심으로 100명 정도 되는 후보를 냈고, 전국구는 총 25명의 후보 명단을 완성했다.
그래도 후보들 개별 공약도 완성되었고, 당 차원의 공약집 깔끔하게 나와서 배포 중이었다. 공약집을 보니 유재원 본인이 했던 것들을 140% 수준으로 수용했다.
단적으로 유재원은 중학교까지 무상급식을 말했는데, 공약집에는 고등학교까지로 확대되어 있었다. 그냥 혹시나 해서 말해 봤던 반값 아파트 역시 담겨 있었다. 어떻게 반값 아파트를 실현하려나 봤더니, 정부 차원에서 강력한 세금 정책을 동원해 아파트에 낀 프리미엄을 제거하고, 아파트를 지을 때 들어가는 원가까지 공개하겠다고 되어 있었다.
전국 건설사들이 죄다 들고 일어날 이야기고, 서울에서 사는 사람들 특히 강남에 사는 이들은 당장 통일 국민당 당사에 찾아가 난장을 만들 만큼 급진적이었다.
서울 강남은 버리고 지방을 꽉 잡아버리겠다는 의지가 철철 넘치는 공약집이었다.
“잘 돼야 할 텐데.”
전화나 텔레비전, 인터넷 등으로 시시각각 들려오는 한국 소식에 귀를 기울이던 유재원에게 간절한 마음이 생겼다.
전생엔 존재감 하나 없던 통일 국민당이 이렇게까지 직접 엮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통일 국민당을 통해 한국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할수록 마스터플랜으로 만든 것보다 훨씬 직접적이고도 부드러운 방식이었다. 그러니 통일 국민당의 성공에 유재원은 크게 배팅하는 것이다.
다음 날.
공식 선거 운동이 시작되었다.
유동 인구가 많은 목 좋은 자리는 선거 유세단이 점령했고, 확성기 소리가 시끄러웠다. 다들 자신들을 찍어 달라고 여당부터 야당까지 큰 목소리로 열변을 토했다.
후보자들은 각자 도깨비 방망이 하나쯤은 가진 것 같았다. 본인을 찍기만 하면 집 앞에 도로가 생기고, 낡은 건물을 재건축하고, 하천이 정비되는 일이 뚝딱 일어날 것처럼 말했다. 낯이 좀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런 도깨비 방망이 휘두르는 식의 호들갑에서 제일 목소리도 크고 엄청난 공약을 남발하는 정당은 통일 국민당이었다.
경제와 통일.
두 가지 화두로 길거리의 유권자들을 사로잡았다.
계산기를 두드려 정책 예산과 국가 예산을 비교하면 공약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할 걸 바로 알 수 있지만, 그걸 제대로 분석하는 평론가나 기사들은 없었다.
전명헌 명예회장은 본인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 압도적 자금력을 아끼지 않고 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자금력이 집중된 곳은 언론이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하룻밤에 수천만 원짜리 술판이 벌어졌으니 전명헌 회장의 약점을 후벼 파는 기사들이 신문지상이나 텔레비전에 오르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온겨레 신문과 같이 편집권이 기자들에게 보장되는 일부 신문사만이 전명헌 회장의 금권 선거에 대한 비판 기사가 몇 개 실릴 정도다.
오히려 다른 정당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자신들도 통일 국민당처럼 크게 질러야 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TV 광고였다.
-저, 유재원이 보증합니다. 통일국민당에 투표하세요.
프로그래밍과 회의 같은 유재원의 ID 그룹에서의 일상을 할리우드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테크노피아의 모습과 잘 버무려 보여준 뒤, 유재원이 나와서 한마디 하는 내용이다. 마치 유재원이 컴퓨터를 가지고 미래의 테크노피아를 만드는 것처럼 보였고, 그런 유재원이 통일 국민당을 지지하는 단순한 CF였다.
할리우드의 영상미가 빠지면 너무도 밍밍할 내용인데 반응이 엄청나게 뜨거웠다.
광고사들의 자체 조사로 가장 눈에 들어오고, 가장 호감인 정당 광고를 추렸을 때 유재원의 광고로 압도적인 쏠림 현상이 나왔다.
다른 정당도 유명 연예인을 쓰고 최대한 신선한 감각을 동원했지만, 할리우드의 기술력과 영상미를 따라오긴 무리였다.
텔레비전에 띄웠을 때 때깔부터 완전히 달랐으니 몰입감과 호감도에서 극심한 차이가 발생했다.
-재원 군, 실망일세.
오죽하면 노 대통령으로부터 연락이 왔을 정도다.
통일 국민당을 유재원이 돕고 있다는 건 이미 정치권에 파다하게 퍼진 이야기였다. 전명헌 명예회장과 가까운 사이기도 했고, 1월에 유난히 연락이 잦았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전명헌도 외부인과 만나는 자리에서 유재원의 이름을 많이 팔았다.
다만 기존 정치인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물음표였다.
유재원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치에서도 과연 힘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가능하다!’
그 답이 텔레비전을 타고 나온 통일 국민당 광고를 통해 입증되었다.
지지율이나 바닥 민심에 민감한 정치인들은 여론의 향배가 확 달라지고 있다는 걸 곧장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이 아우성을 치니 결국, 대통령까지 움직이게 되었다.
“헤헤, 전명헌 명예회장과 제가 보통 사이는 아니잖아요. 도와달라고 하셔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래, 이해한다.
다행히 노 대통령은 하도 성화여서 전화 한 통 한 것이지, 유재원에게 감 놔라 배 놔라 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내년에 퇴임하면 끝이었으니 말이다.
-대신 이번에도 빚 하나 진 거다.
대신 이번에도 빚 타령이다.
“그럼요! 저 미워하지 마시라고 잘 말씀 좀 해주세요.”
무슨 대단한 걸 요구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유재원도 노 대통령의 성향을 잘 파악했기에 맞장구를 쳤다.
이후 간단한 근황 이야기도 좀 하다가, 서로의 건투를 빌어주고 통화를 마쳤다. 기분 좋은 통화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노 대통령이 퇴임할 때까지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유재원에겐 확실한 이익이었다.
전화를 마친 유재원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회장님, 여론 조사 결과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얼른 보내주세요.”
대통령의 전화를 받기 전부터 최강욱 비서실장과의 1:1 채팅이 한창 이뤄지고 있었다. 최강욱 비서실장이 두 개의 파일을 전송했다. 하나는 용량이 12kb밖에 되지 않는 ID 워드프로세서 파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려 360kb나 되는 ID 스프레드시트 파일이었다.
유재원이 한참 전에 의뢰했던 여론 조사 보고서였다.
여론 조사 기관에 의뢰해서 뽑은 데이터는 아니었다.
최강욱을 책임자로 해서 200명 규모의 임시 여론조사 조직을 자체적으로 만들었고, 이를 통해 수집된 데이터를 직접 정리한 것이다.
한국에 여론조사 기관이 없어서 이렇게 임시 조직을 꾸린 건 아니다. 한국 갤럽이라는 여론조사 회사가 있긴 했다. 문제는 지금이 한국 갤럽의 최대 성수기였다는 것이다. 선거철이라고 공중파 방송국은 물론,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서로 의뢰를 주고 있어서, 유재원이 원하는 데이터를 받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값비싼 요금은 두말할 것도 없다.
없으면 만든다는 정신으로 유재원은 본인의 분신이나 다름이 없는 최강욱을 통해 임시 여론조사 조직을 만들었다.
전화기만 200개를 놓은 건 아니다. 386 컴퓨터도 개인당 한 대씩 지급했고, 여론 조사용 프로그램도 간단히 만들었다.
컴퓨터 화면에 여론조사용 질문이 표시되면, 아르바이트생은 그걸 읽고 대답하는 응답자의 답변을 컴퓨터에 입력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자동으로 집계되어 ID 스프레드시트 파일로 완성된다.
그렇게 200개의 파일을 다시 하나의 파일로 통합한 후에 통계용 함수로 데이터를 정리하면 생생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딩동!
경쾌한 알람과 함께 전송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유재원은 곧바로 IDW 파일을 열어서 내용을 확인했다. 다른 정당의 데이터는 볼 것도 없었고, 바로 통일 국민당 항목으로 이동했다.
유재원이 미리 지시했던 형식으로 가공된 정보가 주르륵 나왔다.
지역별, 나이별, 직업별 통일 민주당에 대한 지지도였고, 상대 후보와 비교해서 당선 확률을 추산해 보는 형식이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전체 18석으로 지역구 14석에 전국구는 4석이었으니 말이다.
1월 샌프란시스코에 전명헌 회장이 왔을 때 대놓고 면박을 당했던 국민당 이건형은 최대 10명 안팎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던가.
벌써 18석이면 상당한 선전이었다. 다만 전명헌 명예회장 코앞에서 딱 끊어지는 불상사가 터졌다는 게 옥에 티다.
최강욱이 보내준 여론조사 데이터는 유재원의 재가를 받는 즉시 통일 국민당 선대대책본부에도 전해질 예정인데, 전명헌 명예회장이 이걸 확인하면 불호령이 터질 게 분명하니 말이다.
“더 좋을 수도 있지.”
국회의원보다 더 높은 자리를 바라보고 있는 전명헌 명예회장이지만, 그렇다고 손만 더 뻗으면 딸 수 있는 과실을 놓치는 건 그의 성정 상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선거 운동 초반이다.
전생보다 더 적극적으로 움직인다면, 결과도 훨씬 더 좋게 나올 게 분명했다.
“앞으로 3일에 한 번씩 조사해서 보고해주세요. 선거 7일 전부터는 하루마다 해주시고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직접 만든 조직이라서 운영하는 건 유재원의 마음이었다.
만에 하나 전명헌 회장이나 다른 후보들이 큰 실수를 한다더라도, 여론 조사를 통해 유권자의 변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실시간으로 대응하면 그 피해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주의해야 할 건 유재원의 여론조사는 전화면접 기반이라는 점이다.
전화번호를 아무리 무작위로 뽑아도 전체를 대표하는 여론 데이터를 찾기는 어려운 법이니 무조건 신뢰하는 건 금물이다.
-보고 사안이 하나 더 있습니다.
유재원은 이쯤 해서 통신을 마치려는데, 최강욱 비서실장의 말이 이어졌다.
-김창완 님에 대한 사안입니다.
김창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유재원은 곧바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다가 제 손으로 책상을 탁 쳤다.
“이런, 바보같이! 외삼촌 이름이잖아!”
항상 외삼촌이라고만 불러서 이름이 곧장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행동거지가 가볍고 귀도 얇은 탓에 늘 유재원의 어머니에게 한 소리 듣고 다니는 불쌍한 외삼촌이다. 저번 달에도 상의도 없이 ID 인베스트먼트의 투자 상품을 해지해서 어머니는 물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 크게 혼이 났다고 했다.
“제 외삼촌이 또 무슨 사고를 쳤나요?”
-그건 아닙니다. 감사팀에서 김창완 님의 ID 인베스트먼트 투자상품 해지에 관련해 이상한 정황을 포착했다는 보고입니다.
이상한 정황이라니.
뭐지? 해지 사건은 외삼촌의 팔랑귀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무슨 일인데요?”
ID 톡 채팅창에 집중하고 있던 유재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 작품 후기 ==========
인터넷이 고장나서 스마트폰으로 올립니다. 문단마다 띄어쓰기가 안되서 빡빡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 테더링을 시도했는데 이상한 오류로 연결도 안 되고요. 인터넷이 없으니 정말 심심하네요.
주말 잘 보내시고 다음 주에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