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Command & Conquer =========================
“아쉽지만 그건 안 되겠네요.”
유재원은 단호히 거부했다.
-뭐? 왜? 혹시 내가 섭섭하게 한 거 있느냐?
전명헌 명예회장, 아니 이젠 의원님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잔뜩 베였다.
“아, 절대 없습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도대체 이유가 뭐냐?
“비선은 이쯤에 빠져줘야 뒷말이 안 나오는 법이에요.”
유재원은 통일 국민당에서 그 어떠한 직책도 받은 바가 없었다. 앞으로도 뭔가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자타공인 유재원은 완벽한 실세였다. 비선 실세가 나대면 어떤 문제가 일어나는지는 전생의 한 대통령이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유재원은 44명 국회의원을 거느린다고 뭔가 큰 이익이 될 게 없었다. 이미 유재원의 ID 그룹은 완벽하게 합법적인 영업 중이었다. 세금 감면이나 특혜 따위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전환사채 발행에 대한 규제 강화나 다양한 편법 상속을 방지하는 법률 정도만 만들어주면 바랄 게 없다.
거리를 두는 이유는 비단 이뿐만은 아니다.
가깝게 있다가 만에 하나 통일 국민당이 큰 삽질을 하게 되면 유재원까지 피해를 보게 될 가능성이 크다. 기업을 경영하는 데 있어 마이너스가 될 테니, 모두가 웃는 이 시점에서 떨어지는 게 좋다.
물론 진짜로 손을 놓겠다는 건 아니었다.
“혹시 대선 때문에 그러 시나요? 그때는 당연히 도와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총선도 도와드렸는데, 가장 큰 판인 대선을 두고 보는 건 말도 안 된다. 전명헌을 도와서 커다란 변수를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전명헌의 대통령 당선에 낙관하는 건 아니다.
이번 총선에서 나온 유권자들의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이번 총선에서도 여권 성향의 표가 야당보다는 많았다. 단지 선거구가 나뉜 탓에 과반 획득에만 실패했을 뿐이다. 이 지지율 그대로 가면 전명헌 회장은 전생처럼 3등 확정이다.
-그, 그래!? 고맙구나.
전명헌은 유재원이 대놓고 거절할 줄 몰라서 반응이 즉각적이지 못했다.
만나자고 했던 건 당연히 대선도 도와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덤으로 자신의 손자들과 인사도 시켜줄 생각이었던 탓이다.
손자, 손녀 중에 유재원과 또래는 없었지만, 몇 살 어린아이들은 많았다. 혹시나 손녀 중 하나와 눈이라도 맞으면 대박 아니겠는가. 그런데 재원이 이렇게 나오는 걸 보면 그 의도까지도 다 읽혔던 모양이다.
이후 유재원은 전명헌 명예회장과 약간의 잡담을 좀 더 나눈 후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곤 곧장 전화기의 코드를 다시 뽑아 놓았다. 전명헌 명예회장과 통화를 종료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전화가 와서 시끄럽게 울었던 탓이다.
이후 유재원은 딱 3일을 머물면서 짧은 휴식기를 보냈다.
친구들도 만나고, 유경이 아버지나 현미유 공장 아니 이젠 부산 양조 사장님과도 만나 안부도 전하고, 몇 가지 조언도 해드렸다. 김&정 법무법인에도 들려서 일본군 강제위안부 소송 준비 상황도 체크하고 격려도 해주었다.
마지막 날에는 부모님 그리고 친척들과 여주의 강희제에 다 모여서 축하 자리를 만들었다. 이번 총선의 통일 국민당의 선전도 선전이지만, 가족이었기에 유재원의 사업 번창과 명문대 합격이 훨씬 더 많이 이야기되는 자리였다.
그렇게 한국에서의 모든 일을 마친 유재원은 비밀리에 출국했다. 이제는 훨씬 더 큰 판에서 놀아 볼 시간이다.
“한국에서의 활약 잘 봤습니다. 대단하시던데요? 회장님이 선거에도 재능이 있는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덕분에 미국의 정치인들로부터 은근한 연락이 많이 오기도 했습니다.”
미국 실리콘밸리 사무실에 복귀하니 레밍턴을 비롯한 임원들이 유재원을 환영해주었다. 역시 화제는 한국의 총선이었다.
미국인에겐 동방의 조그만 나라 총선 소식은 그냥 짧은 단신 혹은 대충 결과만 요약해서 보여주는 뉴스 한 꼭지에 지나지 않겠지만, 유재원이 직접 참가했다는 이유 하나로 ID 그룹 임원들에겐 남다른 이벤트였다.
“어휴, 무리에요. 너무 지쳐서 지금은 생각이 없네요.”
유재원은 두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거절하진 않았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지 알고 있는 판에, 그쪽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없더라도 접점 정도는 만들어 놔야 일하기가 좋다. 혹여 도와달라고 연락이 온다면 흔쾌히 나서 줄 용의도 충분하다.
ID 그룹의 주거래 시장은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재의 기업 현안은 케이블 TV 사업의 진출인데, 집집마다 케이블이 깔려야 하는 사업의 특성상 맨땅에 헤딩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작은 케이블 TV 회사를 인수해서 참여해야 하는데, 미국 정부가 딴죽을 걸면 한 발도 나아갈 수 없다.
“그러면 일단은 킵 해놓겠습니다.”
“네. 그래 주세요. 아! 클린턴 후보는 예외에요.”
유재원의 말에 레밍턴과 엘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유재원과 제일 오래 일한 사람들인 만큼, 이번엔 클린턴이로구나 하고 바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클린턴은 이미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중이었기에 의외의 선택은 아니었다.
현직 부시 대통령은 걸프 전쟁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경제 분야에서는 워낙 큰 삽질을 하고 있어서 정권 교체가 유력시되는 상황이다. 그러면 민주당인데, 민주당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드러내는 후보가 클린턴이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거대한 기업들을 비롯한 큰손들이 아직 관망 중이었으니, ID 그룹이 파고들 여지는 충분했다.
“엘런이 맡아서 잘 지원해주세요.”
유재원은 엘런을 콕 찍어 말했다.
정치인을 상대하는 데 있어, 레밍턴보단 엘런이 훨씬 더 자연스러웠던 탓이다.
“알겠습니다.”
엘런도 본인이 자신 있어 하는 임무를 맡게 되자 환한 미소를 띠었다.
민주당 후보 경선이 끝날 때까진 엘런에게 맡기고, 후보로 선정되면 유재원도 클린턴과 공식적인 미팅을 해보는 것으로 그날의 회의를 마쳤다. 그렇게 외적인 일은 일단 다 처리한 유재원은 본업으로 돌아왔다.
-보스의 집에 인텔에서 보낸 소포가 있습니다.
-ID 소프트의 카멕 사장도 보스에게 시제품 하나를 배송했다고도 했습니다.
택배 왔다고 하면, 마음이 급해지듯 유재원은 인텔과 ID 소프트웨어에서 뭔가를 보내왔다는 소리에 회사 일을 빠르게 끝내고 집으로 급하게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로비에 커다란 상자 두 개가 유재원을 반기고 있었다.
상자에는 커다란 로고가 그려져 있었기에 누가 보냈는지 바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인텔의 것이 카멕이 보낸 것보다 2배는 컸다.
ID 소프트웨어 마크가 찍힌 상자의 경우에는 ati라는 VGA 회사의 로고도 함께 찍혀 있었다. 도통 내용물이 뭔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뭘까?”
두 상자 안에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건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옷도 갈아입지 않은 상태로 바로 상자에 달려드는 유재원이다.
가장 궁금했던 ID 마크가 그려진 상자부터 개봉을 시작했다. 커터칼을 쓴다면 조심히 다루라는 표식이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박스 테이프를 잘랐다.
“오!”
상자를 개봉하자 작은 상자 2개가 완충재 속에 파묻혀 있었다. 마치 러시아의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상자 안에 또 상자가 나올지 걱정이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손과 가까운 상자를 열자 게임 패키지가 나왔다.
둠 2였다.
벌써 둠 2를 다 만들었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스테이지 1만 만들었다는 설명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소프트웨어가 담긴 미디어는 플로피디스크가 아니라 콤팩트디스크, 일명 CD였다. 얼마나 대단한 걸 만들었기에 벌써 CD롬을 사용하는 것인지 기대감이 한껏 차올랐다. 게다가 유재원이 CD롬이 없을 것 같았는지 외장형 CD롬도 하나 들어 있었다.
“설마 이건?”
혹시나 하는 마음에 ati 로고가 선명한 상자를 여는 유재원의 손길이 빨라졌다.
“와우!”
개봉을 마치자마자 유재원의 탄성이 터졌다. 팔뚝만 한 크기의 확장카드 하나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3D 가속 칩이 달린 VGA 카드였다.
글라이드 X2의 마크가 선명히 박혀 있는 칩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글라이드 X2에 포함된 3D 라이브러리를 하드웨어적으로 가속하기 위해 설계된 전용 칩이 드디어 완성된 모양이다.
여기에 일반 VGA 카드보다 2배는 더 많이 박혀 있는 메모리칩도 인상적이었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물건이라서 대중화는 좀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몇 년만 지나면 메모리 가격도 싸지고, 칩 생산 비용도 떨어질 테니 비싸다고 사장될 기술은 절대 아니다.
“이걸로 끝이네.”
밑에 더 깔린 건 없나 살펴봤지만, 더 담겨 있는 건 없었다.
상자에서 나온 물건을 책상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은 유재원은 하나 남은 인텔의 상자로 이동했다.
덩치도 훨씬 크고 묵직했다. 그걸 보고 딱 감이 오긴 했지만, 김칫국 마실 수도 있었기에 유재원은 별말 없이 해체부터 시작했다.
“역시!”
상자를 뜯자 나온 건 컴퓨터 본체였다.
예전에도 유재원에게 486을 보내줬던 때와 거의 흡사한 모양이다. 그때는 그렇게나 멋져 보였는데, 뉴 에그가 컴퓨터 시장을 호령하고 있는 지금 보니 너무도 투박한 모습이었다. 대신 빅타워 케이스라서 확장성 하나는 정말 끝내주게 좋을 것 같았다.
“어?”
본체를 꺼내서 비닐을 뜯던 유재원은 깜짝 놀랐다.
“펜티엄?!”
전원 버튼 근처에 펜티엄이라는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486 DX4 같은 게 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차세대 CPU로 개발한 펜티엄이 들어간 본체였다.
원래는 93년 3월에나 출시될 물건이었는데, 유재원에겐 1년이나 일찍 보내졌다. 아무래도 유재원의 개입으로 IT 기술 발달이 빨라지면서 펜티엄의 발매 일정도 빨라진 모양이다.
하긴 인텔을 두고 했던 말이, 연구실에서 한참 전에 완성된 CPU를 시장 상황을 봐가면서 느긋하게 풀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픽 인터페이스 기반의 운영체제가 대흥행 중이었고, 이에 맞춰 고화질, 고음질 게임도 쏟아지고 있다. 높은 처리 능력에 대한 수요가 높았는데, 이미 DX4 같은 모델로 사골까지 우려내고 있는 486으로는 한계였다.
무엇보다 ID 테크놀로지와 VGA 제조사들이 힘을 합쳐 만든 3D 가속 카드와 3D 라이브러리는 PC게임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신기술이라는 걸 IT 기업들은 모두 동의했다.
인텔의 대답은 펜티엄이다.
원래는 586이라고 명명되어야 할 제품이지만, 숫자만으로 이뤄진 상표명은 저작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미국 법원의 판단 때문에, 펜티엄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486보다 향상된 파이프라인 명령어 처리 방식에, 용량이 더욱 커진 L1 캐시가 적용되었고, 슈퍼스칼라 아키텍처를 사용해서 486에 비해 최소 2배는 빠른 차세대 CPU였다.
인텔은 펜티엄의 생산을 위해 라인을 변경하면서 486의 생산량을 줄인 상태였다. 그 빈자리를 염가의 호환 CPU 제조사가 차지하는 중이었는데, 몰려드는 주문에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당연히 설비 증설을 생각하는 회사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펜티엄을 출시하면, 인텔을 따라잡는데 더 큰 시행착오를 해야 할 것이다.
“본받을 만한 전략이네.”
21세기 들어 커다란 삽질을 많이 하는 인텔이긴 했지만, 2010년까지는 눈부신 발전을 보여주는 회사였다.
본체를 다 꺼내 보니 이번에도 작은 편지가 있었다.
-인텔의 새로운 비밀병기 펜티엄입니다. 유재원 회장님께만 일주일 일찍 보여드리는 것이니 소중히 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엔지니어가 대기 중이니 사용 중 문제가 발생하면 언제든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ID 테크놀로지와의 소중한 파트너쉽이 영원히 이어지길 기원합니다.
-인텔 CEO. 앤디 그로브.
만년필을 이용해 자필로 적은 고급스러운 편지였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펜티엄에는 중대한 결함이 2개나 있다.
어떻게 전원을 넣어보지도 않고 단정하느냐 하겠지만, 이건 워낙 큰일이라서 세계사 떠들썩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FDIV 버그인데, 수학과 교수가 소수 발견 프로그램을 돌리다가 발견했다. 어떤 특정한 수의 나눗셈 연산을 수행할 때, 잘못된 결과가 나오는 버그였다. 랜덤한 두 수를 무작위로 나눗셈 연산을 하는 작업을 수행하다 보면, 90억 회 중 1번꼴로 발견되는 희귀한 경우였다.
일반인이 만나 보기는 엄청나게 희박한 버그였지만, 학술용이나 특수목적 전문 연산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에겐 제법 위험한 일이었다. 이런 사람들에겐 수백, 수천억에 달하는 연산은 심심치 않게 활용했으니 말이다.
다른 하나는 그 이름도 찬란한 멜트다운 버그였다.
이건 버그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취약점이라고 해야 한다. FDIV처럼 논리회로 자체에 오류가 있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멜트다운은 이번에 도입된 파이프라인 명령어 처리에서 의도치 않게 발생한 문제인데,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취약점을 2017년도 말에서야 찾았다. 그 이야긴 펜티엄에서부터 시작된 버그는 후속작 모델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25년 가까이 보안 위협을 내재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핵심은 펜티엄 CPU부터 인텔이 도입한 파이프라인의 부실한 보안 때문이다.
동시에 여러 가지 명령어를 수행할 수 있는 파이프라인 구조를 통해 CPU의 처리 능력을 크게 향상했는데, 그만큼 보안 위협도 커졌다.
운영체제를 만들다 보면 사용자의 암호와 같은 중요한 데이터는 아무나 접근할 수 없도록 제안을 둔다. 데이터에 접속하려면 사용자가 맞는지 확인을 해야 하고, 맞는다면 데이터를 보내고 아니면 파기해야 한다.
인텔의 파이프라인 구조는 이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데이터를 접근할 권한이 없다면 바로 파기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다. 중간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만약 해커가 알고 싶어하는 암호 A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해커는 일단 A의 암호를 읽어오라고 한다. 물론 권한이 없으니 실행해보면 A란 암호는 전달되지 않고 파기된다. 그런데 파기 되기 전에 암호 A에 임의의 숫자 B를 더해서 메모리에 저장하라는 명령을 넣으면 그 데이터가 메모리에 저장되는 것이다.
해커는 메모리에 저장된 데이터를 가져와서 B를 빼는 것으로 간단히 A의 암호를 손에 넣을 수 있다. A를 그대로 메모리에 복사하라고 하는 게 더 간단한데, 그렇게 하면 보안 회로에 걸려서 작동이 멈춰진다.
하여튼, 멜트다운 버그의 핵심은 CPU가 일을 다 하고 보여주지만 않는 것이니, CPU가 작동한 흔적을 찾아서 암호를 알아내자는 것이다.
“일단 버그는 그대로 있는지 볼까?”
유재원은 바로 인텔의 펜티엄 컴퓨터를 가지고 컴퓨터를 조립했다. 집에는 굴러다니는 모니터와 키보드 등의 여유 부품이 많이 있었기에, 간단히 컴퓨터 한 세트를 완성할 수 있었다.
운영체제는 안드로이드 1.0 무광고 버전이 설치된 상태였지만, 유재원은 일부러 엔터프라이즈 버전을 다시 설치했다.
2월 말, 안드로이드 1.0의 두 번째 패치와 함께 발매된 엔터프라이즈 버전은 일반 버전보다 훨씬 강화된 기능이 탑재되었다. 고성능 컴퓨터 지원은 물론 멀티태스킹도 기본이라서 멜트다운 버그를 시연해 보기에 딱 좋은 운영체제였다.
CD롬으로 설치하니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그럼 한 번 해보자.”
손을 주물러 긴장을 푼 유재원은 안드로이드 버전 터보 C를 실행해서 신들린 듯한 코딩을 시작했다.
한 시간 후.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한 모니터 안을 보며 유재원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기억력은 건재하군.”
멜트다운 버그의 시연용 코드는 아예 머릿속에 암기해놨다.
윈도우용은 물론 리눅스용까지도 완벽히 외웠고, 기억의 궁전을 통해 리눅스용을 현실로 꺼내왔다. 본인이 만든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는 전생의 리눅스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기에, 소스코드를 크게 수정할 필요는 없었다.
디버깅을 생략한 유재원은 곧장 컴파일을 시작했다.
“오, 빠르네!”
펜티엄 컴퓨터라 그런지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486이었다면 드륵드륵 소리를 내며 하드디스크를 열심히 읽으며, CPU 사용률도 치솟아 다른 작업을 못 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인터넷이나 문서 편집 정도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컴파일 속도는 486보다 더 빨랐다.
이러니 인텔이 파이프라인 설계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을 거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자 OK라는 메시지가 나왔다.
코드가 아무런 에러나 경고 없이 깔끔하게 컴파일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유재원은 기다려 볼 것도 없이 컴파일이 끝난 파일을 실행했다.
그러자 안드로이드 바탕화면에 하얀색 작은 박스가 떠올랐다. 최대한 간소하게 만들었기에 어떠한 그래픽 인터페이스도 없었고, 심지어 텍스트 메시지도 나오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유재원은 넥스트컴 접속기를 실행했다. 이내 익숙한 로그인 화면이 나타났다. 유재원은 아이디를 넣고, 암호도 입력했다.
암호를 입력하자 하얀색 작은 박스에 변화가 생겼다. 넥스트컴 접속기에는 그저 ‘*’ 표시로 나타났던 암호가 먼저 실행되었던 하얀 박스 안에는 고스란히 노출된 것이다.
멜트다운 버그가 이번에도 펜티엄 CPU 안에 있다는 뜻이었다.
“역시 그대로 있네.”
유재원의 감상은 짧았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이 문제는 전생에서도 큰 난리였다. 그렇기에 마스터플랜을 설계할 때도 무척이나 중요하게 다뤄진 요소이기도 했다.
그때 내려진 결론은 ‘본인이 만들 운영체제로 보완한다’였다. 인텔에 미리 제보해줄 생각은 없다. 현재 ID 그룹과 인텔의 관계는 지금처럼 신제품이 나왔을 때 주고받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니 해커들이 유용하지 못하게 패치로 막아 놓고, 결정적인 순간 비장의 무기로 활용하자는 것이 유재원의 설계였다.
FDIV 버그 역시 마찬가지다.
애초에 FDIV 버그는 펜티엄으로 학술 연구를 하던 교수가 잡았고 발표했다. 그때까지 놔두더라도 큰 문제가 생길 버그는 아니었으니, 기다리면 그만이다.
“그럼 이거나 돌려보자.”
팬티엄 샘플을 통해 마스터플랜에 변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유재원은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존 카멕이 보내준 CD와 3D 가속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곧장 연장을 들고 와서 펜티엄 컴퓨터의 본체를 열고 3D 가속카드를 설치한 유재원은 설정을 시작했다. 안드로이드가 사용자 친화적 운영체제이긴 했지만, 하드웨어는 아직도 예전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어서 불편한 작업 몇 가지를 해야 했다.
다행히 하드웨어끼리 충돌은 없어서 곧 안드로이드가 가속카드를 인식했다. 글라이드 X2를 설치하고, 곧이어 존 카멕이 넣어준 CD를 설치했다.
“무슨 용량이 100메가가 넘네.”
디스켓 10장, 혹은 그 이상의 용량을 자랑하는 게임이 슬슬 나오긴 했지만, 100메가는 예상 밖이었다. 아무래도 텍스처 같은 고용량 리소스를 별도의 압축 없이 그냥 그대로 담은 모양이다.
CD라서 그런지 귀찮은 디스켓 교환도 없었고, 마음 졸이는 디스크 에러도 없이 설치도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럼, 실행해 볼까!”
실행파일의 이름은 단순하기 그지없는 둠 2였다.
“우와!”
둠 2를 실행한 후, 유재원의 입에서 감탄이 나오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옥문을 열어 악마로 뒤덮인 화성에서 겨우 살아남은 둠가이가 지구로 귀환했는데, 이미 지구도 악마에 점령된 상태였다. 지구 정화를 위해 다시 한 번 둠가이가 활약하는 것이 둠 2의 줄거리였다.
3D 가속카드를 완벽히 활용하는 둠 2의 비주얼은 이제까지의 게임과 완전히 달랐다. 모든 것이 폴리곤으로 이뤄진 완벽한 3D 게임이었다. 입체적인 음향 효과가 더해지면서 몰입감은 이전의 어설픈 3D 게임과는 완전히 달랐다.
21세기 게임에 익숙했던 유재원도 이제야 게임 다운 게임을 해본다는 느낌이었다. 알파 버전이지만 완성도가 너무도 좋았다. 결국, 잠깐 맛만 본다는 것이 스테이지 마지막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특히 보스 전이 압권이었다. 보통 첫판이면 보스는 약하게 만드는 게 기본인데, 아무래도 스테이지 하나만 있는 알파 버전이다 보니 강하게 설정해놓은 모양이다. 10번이 넘는 재도전을 하고서야 보스를 잡을 수 있었다.
중간에 유재원을 찾는 전화가 몇 번 오긴 했지만, 보스전에 집중하느라 뒤로 미뤘을 만큼 집중했다.
그렇게 어렵게 첫판 보스를 잡자 게임오버라는 화면이 나타났다. 곧이어 짤막한 문구도 하나가 떴다.
-thx J
존 카멕이 요즘 유행하는 짧은 약어로 고맙다고 남긴 글이었다.
고맙긴. 오히려 유재원이 이 시대에 이런 게임을 만들어준 존 카멕이 더 고마웠다. 유재원은 존에게 지금 느낀 감상을 이야기해주고 싶어서 곧장 ID 톡을 실행했다.
존 카멕의 접속을 확인했고, 곧장 채팅창을 열었다.
“방금 둠 2 플레이했습니다! 완성도가 끝내주더군요!”
잔뜩 상기된 그 느낌을 문장에 그대로 담아 날렸다. 그런데 존 카멕의 반응은 유재원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보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응? 그게 무슨 말이죠?”
-안드로이드 엔터프라이즈 말입니다. 리처드라는 사람이 넥스트컴에 사용기를 올렸는데, 그게 문제입니다. 컴퓨터 커뮤니티가 그거 때문에 난리입니다.
이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유재원은 곧장 넥스트컴 접속기를 띄웠고, 컴퓨터 운영체제 포럼으로 접속했다. 문제의 사용기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BEST TOP10 게시판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용자를 바보로 취급하는 안드로이드 엔터프라이즈를 결사반대한다.
결사반대라니. 제목이 너무도 자극적이다.
그런데 리처드라는 이름이 뭔가 낯이 익다. 순간 유재원의 눈이 번쩍 뜨였다.
리처드 스톨먼!
ID 오피스 시큐리티 챌린지에서 1등 공헌상을 차지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자유소프트웨어 재단의 이사로 GNU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추종자가 상당히 많았고, 그만큼 신망도 있는 사람이었다.
유재원도 높게 평가하는 존재였는데, 그가 대놓고 안드로이드 엔터프라이즈를 디스했다. 이건 절대 쉽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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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과 같은 200회 축하 리플 감사합니다.
독자 님이 주신 성권을 마음에 담아서 완결까지 우직하게 나아가겠습니다~!
즐거운 주말, 건강하게 잘 보내시고 다음 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