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로열로드 (王道) =========================
스탠퍼드라고 해서 오리엔테이션이 뭔가 특별하진 않았다.
앞으로 함께 공부할 동기지만, 대부분 서로 처음 보는 사이인지라 어색하고 데면데면한 느낌이 가득했다. 특히나 사교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기에 분위기를 먼저 풀어주려고 나오는 사람도 없었다.
유재원이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실리콘밸리의 유명인사가 유재원이었고, 미국의 텔레비전에도 여러 번 오르면서 그 인지도는 상당히 올라간 상태였다. 더구나 전자기기나 컴퓨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에그 PC에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사용할 테니까.
물론 모두 다 그럴 거로 생각하는 건 위험하다. 엄청나게 괴짜라서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걸 태생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다. 그래서 PC도 자작으로 사용하고 리눅스를 설치한 사람도 찾아보면 있다.
여긴 그런 괴짜 너드(Nerd)들이 모이는 스탠퍼드 공대니 말이다.
강당에 모였던 전자공학과 신입생들의 숫자는 무려 500명이 넘었다. 스탠퍼드 대학교 공대의 입학 정원은 1,500명이었다. 그중에서 컴퓨터 공학이 600명, 전자공학이 500명이고 나머지 400명은 기계, 생명 등의 다른 공과 대학이 차지했다.
컴퓨터 공학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정원을 자랑하는 만큼, 오리엔테이션의 규모도 컸다. 일단 강당에 모여 환영사를 들었고, 일정에 관해 설명을 들었다. 그리곤 20명 단위의 작은 팀으로 나눠서 조교나 선배들의 인도로 캠퍼스 투어를 시작했다.
“엡실론 팀, 따라와라.”
유재원은 엡실론이라고 명명된 팀에 속했다.
“하나둘셋……. 스물! OK! 다 왔군. 여긴 너무 복잡하니까 일단 밖으로 나가자.”
유재원의 팀을 이끄는 조교는 다행히 박력과 자신감이 넘치는 선배였다. 운동이라도 했는지, 덩치도 미식축구 선수처럼 컸다.
너드가 죄다 사회성이 부족하고, 운동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괴짜 중에서도 밖에선 운동 잘하고, 사회성 좋은데 집에 들어오면 컴퓨터만 하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유재원의 팀을 이끄는 선배가 그런 축에 드는 모양이다.
“아우, 살 것 같다.”
밖으로 나오자 선배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아마 강당 안에 있을 땐 숨을 작게 쉬고 있었던 모양이다. 유재원 역시 숨을 크게 몰아쉬면서 신선한 공기를 폐 안에 가득 집어넣었다. 안에 다 모여 있을 땐 몰랐는데, 확실히 강당 밖으로 나오니 확실히 공기가 신선했다.
강당 공기가 탁했던 건 밀폐된 공간이라는 측면도 있겠지만, 95% 이상 남자라는 어마어마한 성비도 분명했을 것이다.
“이번에도 전자공학과의 저주가 이어졌구나.”
숨을 몰아쉰 선배는 병아리처럼 모여 있는 팀원을 둘러 보더니 탄식했다.
저주?
“어떻게 20명을 무작위로 뽑는 데 죄다 남자 일 수가 있지? 확률적으로 보면 1,048,576분의 1짜리 잭폿이 터진 거네. 오늘 집에 갈 때 로또나 하나 사야겠어.”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좀 달랐는데, 역시 재미있는 선배다.
“저기, 초면에 실례인데요. 계산이 틀렸습니다. 1,048,576분의 1이란 확률은 표본이 남녀가 동등한 비율로 고르게 섞여 있는 상황에서 확률이고 지금처럼 남자의 성비가 높았을 때는 확률이 훨씬 낮아집니다. 게다가 지금 우리 팀이 죄다 남자로 구성된 케이스와 로또 추첨은 독립 실행이라서 아무런 연관도 없습니다.”
유재원의 옆에 있던 녀석 하나가 손을 번쩍 들면서 말했다.
역시 여기는 괴짜들만 모이는 스탠퍼드다.
딱 봐도 선배가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농담한 걸 모르나? 그걸 또 그대로 반박이 녀석도 보통은 아닌 게 확실하다.
“오호라! 역시 전자과라서 숫자 계산이 빠르구나. 나는 풋볼 특기생이라 이해해 달라고. 그러고 보니 내 소개도 안 했네. 카디널스에서 뛰는 조너선이라고 해. 빅게임 할 때 꼭 응원해달라고.”
스탠퍼드 카디널스는 대학 미식축구팀이었다. 대학리그에서 알아주는 명문 팀이었고, UC버클리와는 전통의 라이벌이다. UC버클리 미식축구팀과 붙는 걸 빅게임이라 칭하는데, 경기가 있을 때 수용 인원이 5만 명이나 되는 스탠퍼드 스타디움이 가득 찬다고 한다.
유재원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보통 특이한 게 아니다. 체육 특기로 들어온 사람들은 그나마 공부하기가 편한 인문대학을 가는 게 보통인데, 조너선이란 양반은 전자공학을 선택했다.
“우리 수학 잘하는 친구 이름은 뭐니?”
“어, 길버트 오웬이라고 합니다!”
길버트 오웬. 특이한 이름이라 쉽게 외울 수 있을 거 같다. 그런데 왜 본인의 이름을 말하면서 조너선 선배보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건지 모르겠다.
“OK! 길버트 오웬. 앞으로도 계산할 게 나오면 잘 부탁할게. 아, 이번에 아예 통성명하자. 오엔이 스타트를 했으니,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해볼까? 짧게 자기소개도 하면 좋고. 앞으로 같이 공부할 사이니까.”
시계 반대방향이면 유재원이 제일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자기소개를 하라니 적잖게 당황한 모양새였다. 미국 학교는 주입식 교육 대신 서로 토론도 많이 하고, 개방적이라고 하는데, 영 아닌 모양이다.
낯선 사람들끼리 모아 놓고 보니 한국의 상황이랑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래도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다 보니 자기 이름과 출신, 취미 정도를 짧게 소개해주긴 했다. 숫자가 20명이나 되니 30초씩 해도 10분이나 걸려서 유재원의 차례가 되었다.
모두의 시선이 유재원에게로 몰렸음에도 유재원은 당황하지 않았다. 조금 전 강당에 있을 땐 이보다 몇 배는 많은 시선을 받았었다. 그나마 다들 낯을 가리느라 몰려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16살 유재원입니다. 컴퓨터를 좋아하고요, 컴퓨터로 뭔가 만드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렇게 만든 걸 좀 팔아봤는데, 운이 좋게 많은 분이 좋아해 주셔서 ID라는 회사를 차릴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짧게 줄인다고 줄인 소개였지만 박수가 나왔다.
그냥 몇 번 짝짝거리고 마는 이례적인 박수가 아니라 진짜 신기해서 나오는 그런 박수였다. 다들 유재원을 의식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 역시 네가 소문의 ID 그룹 회장님이구나! 우리도 회장님이라고 해야 하니?”
조너선 역시 다 알고 있으면서도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고, 그냥 재원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 알겠다. 재원이.”
예전에 유재원은 본인의 미국식 이름으로 제이(J)를 밀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쓸데없는 일이었음을 자각했다. ID 그룹이 본궤도에 올라가니 알아서들 유재원의 이름을 정성껏 불렀다. 그러다 보니 제이라는 미국식 이름은 자연스럽게 용도가 사라져버렸다.
유재원의 소개가 끝나자 약간의 웅성거림이 생겼다. 역시나 다들 유재원의 정체를 짐작은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다른 신입생들 보다 서너 살은 어린 동양인이라 유독 튀어 보인다.
조금만 더 가만히 두면 소란스러워질 찰나, 역시나 조너선이 한 발 더 빨랐다.
“서로에 대해선 차근차근 알아가면 되겠지. 시간이 없으니 이동하자. 일단 식당 먼저 갈까?”
응?
잘못들은 건가?
“응? 왜? 밥 먹는 거 싫어?”
말을 마친 조너선이 다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겨우 11시 5분을 지나는 중이었다. 식당에 가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라 다들 황당해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찍 밥을 먹어요?”
“아, 그야 정시에 가면 밀리니까! 오늘 공대만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게 아니라고. 늦으면 국물도 없단다.”
유재원은 조너선도 한국 출신이 아닐까 순간 의심이 갔다. 국물도 없다니, 어쩜 그렇게 말하는 투가 한국식인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조너선은 금발에 하얀 피부를 가진 WASP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덕분에 낯설긴 해도 친근한 느낌도 좀 났다. 게다가 그렇게 혼잡하다면 먼저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일부는 아직도 당황했지만 조너선이 먼저 움직이니 유재원도 움직였고, 그러자 다들 따라나섰다.
이후의 오리엔테이션은 평범했다.
식당에서 밥을 든든히 먹고, 캠퍼스 투어를 시작했다. 강의실의 위치도를 확인했고, 수강신청을 하는 법과 스터디 그룹, 클럽 등등에 관해 설명도 들었고, 취향에 맞게 가입하는 것도 배웠다.
수강 신청의 경우엔 학교 전산화가 잘 되어 있어서 종이에 써서 제출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로 접속해서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대신 클럽이나 스터디그룹은 알아서 찾아가 가입 신청을 해야 했다.
클럽 활동까지는 생각이 없었던 유재원이었지만, 전자공학과의 실상을 확인한 다음이라 생각이 좀 바뀌고 있다. 방심하면 졸업할 때까지 여자친구 한 명 사귀지 못할 것 같았기에, 물 좋은 클럽에 대해 조너선에게 물어보면서 정보를 확인했다.
물론 학생이라는 본분도 잊지 않았다. 교수진에 대한 정보도 알차게 물어보았다. 유재원의 레벨에선 그 어떤 까다로운 교수님에게 걸리더라도 문제없이 헤쳐나갈 수 있지만, 중요한 건 탄력적인 출석이 가능하도록 타협을 하는 것이다.
10월부터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가장 커다란 선거를 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선엔 그다지 관여할 생각은 없었지만, 한국은 아니다.
전명헌이라는 강력한 동맹이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작정이다. 그러자면 학교 수업도 많이 빠질 수밖에 없는 데, 그러자면 교수와의 타협이 필요했다.
물론 유재원은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무작정 빼달라고 할 생각은 없다. 교수가 잡고 있는 중요한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것으로 거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고지식한 교수님이라면 그런 거래도 불가능하니 말이 잘 통하는 분을 찾는 게 중요했다.
아쉽게도 조너선이 모든 교수님의 성향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조너선이 비록 전자공학과이긴 해도, 본분은 체육특기생이라서 훈련과 경기에 나가는 일이 훨씬 많아서 교수진과의 교류는 부족한 편이었다.
그나마 수강신청을 완료해야 하는 기간까지는 시간이 넉넉히 남아 있었고, 교수님들과의 만남도 예정이 되어 있다. 게다가 스탠퍼드 대학교는 교수 숫자가 학생 숫자보다 더 많은 학교였다. 전자공학과 신입생 정원이 1,500명 정도인데, 전자공학과의 교수님들 숫자는 2천 명이 넘는다.
덕분에 1:1 면담도 쉽게 이뤄지고, 시간도 넉넉하게 주어지니 유재원이 본인의 실력을 보여주는 것이나, 설득하는 데 큰 장애는 없을 것이다.
유재원이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한 번 대학교에 다녀온 것뿐인데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ID 톡 친구 목록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길버트 오웬을 비롯해 오리엔테이션에서 같은 팀에 있던 동기들 대부분 유재원과 친구 추가가 되었다. 다만 먼저 말을 걸어온 친구는 길버트 한 명뿐이었다.
-오리엔테이션 때 걸로 나를 오해하지 말아줘!
ID 톡으로 연결된 길버트 오웬은 시작부터 오해를 말아 달라고 했다.
-사실 나는 유재원 너의 열성 팬이거든! 덕분에 살짝 흥분한 나머지 좀 튀어 보려고 조너선에게 과하게 반응했을 뿐이거든.
믿음이 가지 않는 말이었다.
오리엔테이션 때 봤던 길버트 오웬도 다른 동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직 주근깨가 남은 얼굴에 커다란 안경, 체크무늬 셔츠와 펑퍼짐한 베이지 면바지. 여기에 화룡점정인 백팩까지 완벽하다!
비록 패션 감각은 꽝이지만 길버트 오웬에게 호감이 가는 유재원이었다. 딱 봐도 앞뒤 재는 것 없는 호의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머지 사람들에게서는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아무래도 다들 나이가 어려서 이것이 얼마나 좋은 인연인지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거나, 너무도 소심해서 먼저 선뜻 말을 걸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어쩌면 ID 톡을 쓰는 게 어려울 수도 있다.
어쨌든 유재원도 딱히 아쉬울 건 없었기에 먼저 말을 걸진 않았다.
같이 다닐 친구 하나가 생겼다는 것 다음의 일이라면 지도 교수님도 정해졌다는 것이다.
전자공학과, 그중에서도 반도체 소재에 탁월한 업적을 쌓고 있는 츄쳉 장 교수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중국계 미국인인데, 양자홀효과와 위상절연체 이론 및 실험연구로 매년 노벨상에 노미네이트 되는 저명한 학자였다.
젊기도 하고, 아시아에 대한 공감대도 있어서 유재원의 지도 교수로 선정된 모양이다. 한 번 찾아가서 인사를 하고 10분 정도 짧게 면담을 하고 왔는데, 역시 말이 잘 통하는 분이었다.
유재원이 바라는 특별 과제 수행으로 출석에 약간의 양해를 받는 건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슈쳉 장 교수의 과목 하나만 얻은 것이라서, 나머지 교수님들과는 면담을 좀 더 해봐야 한다.
다른 변화는 한국에서 날아온 것이다.
바로 최강욱 비서실장의 미국행이었다. 레밍턴이 출산휴가를 보내는 동안 최강욱 비서실장이 ID 테크놀로지의 사장 대리를 맡기로 했다.
레밍턴 다음으로 유재원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실력도 출중해서 ID 테크놀로지의 사장 대리 임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했다. 오히려 이제껏 한국 지사만 맡았던 것은 소 잡는 칼로 닭을 잡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유일한 문제는 언어였다. 하지만 영어 공부를 몇 년 전 시작했고, 꾸준히 했던 결과 많이 나아졌다. 발음은 여전히 문제였지만, 미국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것에 큰 불편함이 없었다. 오히려 전문적인 단어를 훨씬 많이 알고 있어서 미국의 보통 사람들보다 수준이 더 높은 문장을 구사할 수 있었다.
최강욱의 임시 미국행으로 공백이 된 한국 지사장에는 황재홍이 임명되었다.
덕진리에 선산을 사러 왔다가 유재원에게 스카우트되었던 황재홍은 그동안 ID 인베스트먼트의 한국 지사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ID 그룹의 한국 사업체 총괄을 맡게 된 것이다.
전생과는 180도 달라진 황재홍은 이제 어엿한 기업인의 풍모를 풍겼다. 능력과 신용도 확실히 검증을 받았다. 그러니 승진할 때가 되어 승진한 것이고, 최강욱이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그 자리는 여전할 것이다.
최강욱 입장에서는 ID 테크놀로지 사장은 임시였고, 한국 지사장은 잃은 것이라서 권한 하나를 빼앗겼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최강욱은 오히려 그것을 더 반가워했다. 일거리가 넘쳐 나는 ID 그룹이었기에 그게 아니더라도 할 일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만큼 어깨가 가벼워진 것이었기에, 본인의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되어 좋아했다.
미국으로 온 최강욱에게 당장 떨어진 일은 크게 두 개였다. 하나는 컴캐스트 인수였고, 다른 하나는 둠 2 발매 준비다.
컴캐스트는 유재원의 적극적인 매입 의사 표명 뒤에 급물살을 타는 중이었다. 조만간 언론에 공식적으로 인수를 발표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다.
그와 비슷하게 ID 소프트웨어의 둠 2 제작 역시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본격적인 개발은 작년 겨울부터이었으니 상당히 빠른 속도라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2D보다는 3D 모델링이 작업 효율이 높아서 예정보다 2개월 정도 더 빨라졌다.
그렇다고 완성도가 떨어진 건 아니다. ID 소프트웨어의 인력은 울펜슈타인을 냈던 때보다 10배 정도 커졌고, 투입되는 예산은 거의 100배가 늘었다. 예산과 장비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이끌어주는 리더가 있으니, 결과도 좋았다.
덕분에 허름한 차고에서 시작했던 ID 소프트웨어는 댈러스에서 제일 좋은 빌딩을 통째로 샀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부동산은 돈이 열리는 나무가 확실했기에, 돈이 넘쳐나서 어쩔 줄 모르는 존 카멕에게 건물을 사라고 권유했다.
다만 유재원은 주택을 말했던 것인데, 스케일이 훨씬 큰 존 카멕은 빌딩을 사버렸을 뿐이다.
하여튼, 둠 2의 제작은 너무도 순조로웠다. 조만간 발매해야 하는데 일렉트로닉아츠부터 액티비전까지 둠 2를 유통하겠다고 달려드는 유통사가 너무도 많았다.
아무리 보수적인 성격의 유통사라도 프리뷰 버전을 해보고 나면 180도 달라진다. 보고 다들 성공을 확신했기에 호가가 계속 오르고 있다.
문제는 유통 방식이다.
유재원이 플레이했던 알파테스트 버전의 경우 스테이지가 딱 하나 들어있었음에도 용량이 120메가가 넘었다. 곧 완성될 최종 버전의 경우 스테이지가 6개나 있다. 단순 계산이라면 720메가라는 엄청난 용량이 된다.
다행히 공유하는 텍스처와 사운드가 많아서 실제로는 그 정도 되는 건 아니다. 어제 보고받기로는 360메가 정도 된다고 했다. 여기에 이미지, 동영상 압축 코덱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용량을 줄이자 50메가로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디스켓으로 유통하기엔 너무도 버거운 용량이었다. 3.5인치 디스켓으로 34장이나 되니 디스켓값만 30달러가 훌쩍 넘는다.
역시 답은 CD를 사용하는 것이다.
CD 한 장에 650메가나 되는 용량을 자랑하니 압축하지 않은 상태 그대로 담아낼 수 있다. 문제는 CD롬의 보급률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점이다. 펜티엄급 이상의 모델에서만 기본 장착이었다. 486의 경우 사용자가 CD롬을 일부러 옵션으로 넣지 않으면 채택되지 않았다.
그만큼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탓이다.
덕분에 둠 2는 2가지 버전의 발매로 모이는 중이다.
모든 리소스가 다 들어간 CD롬 버전과 인트로 동영상과 고음질 배경음악 등을 모조리 빼고 게임 그 자체만 넣은 3.5인치 디스켓 14장으로 줄인 디스켓 버전의 발매다. 디스켓 판은 완전 립버전이나 다름이 없지만, 디스켓으로는 방법이 없다.
“최 비서님이 잘 해주시겠지.”
컴캐스트 인수나 둠 2의 발매나 유재원이 큰 틀에서 결정은 했으니, 최강욱은 실무만 담당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제2 이동통신은 선경 낙점이고.”
한국발 속보 두 번째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제2 이동통신 사업자 발표였다.
역시나, 달라진 건 없었다. 정치권과 경제계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엄청나게 컸지만, 노 대통령은 뚝심 있는 사람이었다.
기어코 사돈 기업 선경에 제2 이동통신을 낙점했다.
덕분에 어제저녁 즈음 TG의 이용권 사장으로부터 하소연이 담긴 전화도 왔었다.
-크, 재원아! 소주 맛이 쓰다!
술을 잔뜩 마셨는지, 국제 전화로 연결된 수화기 너머로 혀 꼬부라지는 소리가 다 났다.
탈락에 대한 실의가 무척이나 큰 모양이었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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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 오웬을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ㅋ
있다면 인정!!
기억이 안 나시더라도 괜찮아요~! 스치듯 지나갔던 엑스트라였으니 말입니다. 물론, 이제는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