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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215화 (215/1,007)

[215] 로열로드 (王道) =========================

유재원은 분명히 이번 사업은 선경이 낙점될 거라고 이용권 사장에게 말했었다.

그런데 준비 단계에서 워낙 성과가 좋으니 TG의 이용권 사장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생겼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ID 테크놀로지의 컨설팅을 통해 함께 만든 사업 계획서를 보면 1등은 누가 뭐라고 해도 TG였다. 단말기와 중계기 국산화는 물론 이동전화 서비스에 대한 비전들이 놀랍도록 구체적이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7월 말의 1차 심사에선 선경, 코오롱, 포스코와 함께 TG도 선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변은 없었고 최종에선 선경이 되었다.

-응? 벌써 떨어졌네?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추가! 아, 그리고 소주가 너무 써요! 신선한 거로 주세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이용권 사장의 주책이 가관이었다.

“사장님, 소주가 원래 써요.”

진짜 제대로 만든 증류식 소주라면 몰라도, 희석식으로 대충 만들어서 녹색 유리병에 담겨서 나오는 원래 맛이 없다. 그걸 감추려고 감미료를 왕창 넣어서 쓰고도 단 이상한 맛이 나는 것이다.

“아, 그러면 제가 소주 맛이 맛있어지게 해드릴까요?”

물론 유재원은 이용권의 술맛이 확 살아날 방법도 알고 있다.

-응? 뭐라고 했니?

“술맛 살아나게 해드린다고요.”

술이 좀 취한 이용권이지만, 주량이 높은 덕에 아직은 상식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 뭔가 있구나! 그렇지?

덕분에 유재원의 말이 귀에 확 들어왔다.

당연히 뭔가 있다.

전생에서도 선경이 제2 이동통신 사업자에 낙점되었지만, 그 사업권을 가지고 제대로 된 영업은 시작할 수 없었다. 바로 정치권의 극렬한 반발 때문이었다. 시민들 역시 매우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선경이 사업권을 낙찰받은 다음부터 아침저녁으로 3분짜리 광고를 열심히 틀어도, 국민의 시선이 달라지지 않았다. 선경 마크를 단 거대한 컨테이너선들이 힘차게 대양으로 나아가고, 희망으로 가득 찬 미래를 만들겠다는 식의 이미지 광고였지만 효과는 없었다.

국민은 그들이 정경유착으로 이동통신사업을 얻었다는 걸 다 알았고, 불신의 시선은 더욱 강해졌다.

시기도 좋지 않았다.

대선이 코 앞이었고, 여당의 후보는 노 대통령 계열이 아닌 굴러 들어온 돌 김영삼으로 유력했다. 선경과 노 대통령의 정경유착을 밀어붙이면 버티지 못한다. 실제로 과거에도 선경은 이러한 압력 때문에 제2 이동통신 사업권을 반납했다.

-정치권이 움직여 줄까?

한 번 쓴맛을 본 탓에 이용권 사장의 자신감이 많이 줄어든 모양이다. 유재원에겐 약한 소리를 하지 않던 양반이 오늘은 술이 좀 들어갔다고 끊이지 않는다.

“그럼 제가 전명헌 의원님께 잘 말씀을 드려볼게요.”

-헉! 진짜?

전생에 전명헌 의원은 의원 시절 좋은 기회가 좀 있었지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이럴 때 치고 나가서 인지도를 높여놓았다면 대선에서 좀 더 좋은 성격을 낼 수 있었을 텐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의원 시절엔 두각을 내지 못했다.

아무래도 대선으로 거쳐 가는 코스라고 딱히 뭔가 할 생각이 없으셨던 것 같고, 옆에서 조언을 해주는 분도 없었던 탓으로 보인다.

통일 국민당에 큰 그림을 그릴 사람이 없는 건 지금도 같다. 하지만 유재원이 있다. 다른 사람 말은 안 믿어도 유재원의 말이라면 찰떡처럼 받는 전명헌이었기에 적절한 조언을 드리면 바로 행동으로 이어질 것이다.

다음 날.

-전명헌, 선경 낙점은 정경유착의 전형적 비리!

-모두의 반대에도 선경이 낙점되었다는 건, 김영삼 총재의 동의도 있었을 것!

넥스트컴 뉴스페이지에 대문짝만하게 뜬 기사였다.

전명헌 의원님은 국회 정론관에 나오셔서 긴급 기자회견을 하는 쇼맨십을 보였다. 그러면서 선경과 노 대통령의 정경유착을 비난함과 동시에 민자당의 김영삼 총재까지도 걸고넘어졌다.

사실 김영삼 총재 역시 제2 이동통신 사업이란 뉴스와 함께 선경이 오르내리자 가장 열심히 반대한 사람 중 하나였다.

바로 지금의 상황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정치에 단수가 있다면 9단이 확실한 김영삼이다. 그가 노 대통령의 사돈 챙겨주기 때문에 본인의 대권가도에 큰 장애물이 생길 거라고 예상하는 건 매우 쉬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열심히 반대했지만 노 대통령의 고집을 이길 순 없었다.

-김영삼 총재, 선경의 제2 이동통신 사업 반대!

-노 대통령 만나 담판 짓겠다!

역시 김영삼은 배팅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보통이라면 대책을 세우겠다고 한두 걸음 늦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수렁에 빠지고 마는데, 김영삼은 달랐다.

전명헌이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했던 날. 바로 몇 시간 후에 본인도 기자회견을 하면서 선경에 강한 비난을 가했다. 심지어 한 발짝 더 나아가 노 대통령에게 면담을 신청하고 직접 담판을 짓겠다고 했다.

여당 총재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김영삼이 움직이니 당연히 민주당도 김대중이 직접 나섰다. 사실 김대중 총재도 기자회견을 준비했었는데, 그보다 몇 시간 먼저 전명헌 의원이 움직인 탓에 스포트라이트를 제일 늦게 받게 된 것이다. 순위가 늦은 만큼 가장 격렬하게 반응했다.

덕분에 노 대통령과 선경은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딱 5일이 지났다.

-선경, 제2 이동통신사업권 반납.

정치권이 민정당까지 다 들고 일어서니 노 대통령과 선경은 버틸 수 없었다. 딱 5일 만에 항복했다.

선경의 손승길 사장은 서울 을지로 선경그룹 본사에서 항복 기자회견을 했다.

-‘선경 이동통신은 정부의 합법적 절차와 공정한 평가과정을 거쳐 이동전화 사업자로 선정됐으니, 이와 관련한 사회적 물의가 빚어져 국민총화합에 이바지한다는 취지로 사업 추진을 포기하기로 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혀가 기네”

유재원은 모니터에 뜬 기사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백기 항복은 아니었다. 뒤이어 나오는 기사를 보면 사업자 재선정 때 다시 참여하겠다고 하는 손승길 사장의 확고한 의지가 있었다.

선경은 자신들의 실력으로 사업자를 낙점받았지만, 국민과 정치권이 오해하고 있으니, 다시 한 번 재선정 과정에 참여해서 정당성과 실력을 입증받겠다는 것이다.

“염치도 없네.”

손승길 사장은 월급 사장이다.

선경의 로열패밀리는 최 씨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기사에 실린 말은 손승길 사장의 생각이 아니라 현재 오너인 최일선의 의지라고 봐야 한다.

“역시 그 더러운 피가 어디 가겠어.”

덕분에 살짝 열이 오르는 유재원이다.

전생부터 이어지는 악연 중에는 일성이 최고였지만, 선경그룹 역시나 빠지지 않는다. IoT와 인공지능의 결합에서 통신의 중요성은 빠질 수 없고, 유재원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다. 갑질도 질리게 당했고, 빼앗긴 성과도 상당했다.

그렇게 빼앗긴 능력은 선경의 무능력한 재벌 3세의 능력을 포장하는 데 사용했다. 게다가 뺏어 갔으면 관리라도 잘했어야지, 포장지로 한 번 쓰고는 용도가 폐기되었다.

“두고 보자고!”

두고 보자는 사람은 무섭지 않다. 보통은 약한 자들이 앙심을 품고 물러나면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재원이라면 다르다. 벼르고 벼른 칼을 품고 있었기에, 긴장해야 할 것이다.

따르릉!

공교롭게도 딱 맞춰서 전화벨이 울렸다. 한국 전용 전화기에서 울리는 것이었으니, 전화기 너머로 누가 있는지 대충 그려진다.

-재원이, 너 진짜 대박이다!

역시나 전화를 건 사람은 TG의 이용권이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신선한 소주를 달라고 징징거렸던 이용권은 완전히 살아났다. 목소리만 들어도 힘이 펄펄 넘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동통신 사업은 TG가 전력을 다해 준비한 차세대 먹거리였다. ID 테크놀로지의 컨설팅도 매우 정확했다. 심지어 회사의 규모도 경쟁자인 코오롱이나 포철보다 더 커졌다. 몇 년 전엔 그저 용산에 공장 하나를 가진 중소기업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컴퓨터 단일 품목 하나로 금성 전자에 비견될 수준이다.

올해 판매 예상치만 해도 200만 대가 넘는다. 이를 통해 TG가 올릴 예상 수익만 1조 원이 훌쩍 넘을 거라고 예상한다. 이 정도 규모면 금성 전자는 넘어서고도 남는다. 게다가 컴퓨터 분야는 매년 20% 이상의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는 분야였기에 몇 년만 더 지나면 일성 전자도 능가할 거라는 전망이다.

선경만 없었으면 TG가 선정될 거라는 건 업계에 파다했던 이야기였다. 그런데 정치권의 맹공에 선경이 물러났으니 제2 이동통신사업권은 이제 TG로 넘어올 거로 생각하는 것이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응? 그게 무슨 소리니?

“손 사장의 발표가 무조건 항복 선언이 아니거든요. 행간을 읽으셔야죠.”

선경의 항복에는 꼼수가 있다.

‘재선정’이라는 단어다. 선경이 사업권을 반납했으면, 당연히 사람들은 2순위에 있던 사업자가 물려받을 거로 생각한다. 이용권 사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재선정이라는 단어가 무슨 소용인가.

선경의 말은 이번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은 완전히 파투를 내고, 다시 선정작업을 하자는 이야기였다.

-뭐라고?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

물론 무리수라는 걸 다 안다.

실제로 제2 이동통신 사업자 재선정 사업 같은 건 없었다. 단지 쉽게 물러서지 않겠다는 포부도 보여주면서, 다른 길을 모색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다른 길이란 바로 한국이동통신의 인수다.

이번이 제2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이다. 그러니 이미 이동통신사업을 하는 곳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것이 바로 한국 이동통신이다. 국영 기업이었고 한국통신의 자회사였다. 유재원이 사용하던 카폰도 바로 한국 이동통신의 서비스였다.

“민영화라는 게 있거든요.”

90년. 아니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민영화는 긍정적인 단어였다.

공무원들은 믿을 수 없고, 방만 경영으로 비효율의 극치를 달린다는 게 현재 정치권과 대중의 인식이었다. 그러니 말 많고 탈 많은 공기업을 민영화해서 효율을 극대화하자는 이야기에 힘이 실렸고, 이를 통해 선경은 그렇게나 원하던 이동통신 사업에 진출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건 한국 이동통신의 민영화는 차기 대통령인 김영삼 때의 일이었다는 점이다. 지금은 이렇게나 반대를 하는 사람이, 선경이 한국 이동통신의 인수를 승인했다는 건 이미 모종의 합의가 다 이뤄졌다는 이야기였다.

이러한 야합 때문에 꼬인 건 한국의 이동통신 시장이었다.

멀쩡한 한국 이동통신을 선경에 넘겨줘 버렸기에, 공기업인 한국통신이 다시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한다고 KTF를 따로 출범시켜야 했다.

여기에 또 신세기통신이라는 것도 있다. 코오롱과 포철이 이동통신 사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자 억지로 만들어준 것이 신세기 통신이었다. 포철이 1대 주주, 코오롱이 2대 주주로 이뤄진 합작회사였는데, 동상이몽이었으니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결국엔 선경 이동통신에 합병당해서 없어지고 말았다. 당연히 선경과 신세기통신의 합병도 논란의 대상이었다. 합병하더라도 50% 미만의 점유율을 유지한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승인을 받았는데, 이후에도 선경은 꾸준히 50% 이상의 점유율을 유지했다.

“그러니 이제부터가 중요해요.”

-그래! 말만 하거라!

전명헌 의원보다 더 유재원을 믿는 사람이 바로 이용권이다.

ID 그룹과 합작을 하고 나서 TG는 급이 달라졌다. 예전엔 몇억 단위의 조그만 신규 사업에도 손이 벌벌 떨렸다면, 지금은 수천억짜리 이동통신사업에 당당히 참여할 수 있을 정도다. 본사도 여의도의 조그만 빌딩에서 강남의 마천루로 옮겼고, 컴퓨터 제조 공장도 경기도에 크게 지어 올렸다.

몇 년 전에 TG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인텔도 이제는 최신 제품을 제일 먼저 공급해주고 있다. 유재원의 말이라면 뭐든 할 수 있다.

“일단 TG 모바일의 인지도부터 올리는 게 급선무에요.”

-음 그건 하고 있다만.

TG의 광고도 요즘 텔레비전과 신문에 많이 실리는 중이다. 씀씀이가 달라진 이용권도 조금은 아깝게 느껴질 만큼 많이 뿌려졌다.

“에이, 그 정도로는 부족해요. TG가 요즘 세계에서 잘 나가잖아요.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얼마나 잘 팔리고 있어요. 게다가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도 신제품을 낼 때마다 수상했고요. 이러한 TG의 선전을 집중해서 보여주는 특집 프로그램이면 충분할 거예요.”

TG의 선전은 21세기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큰 반응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92년은 외국 기사를 얻는 건 신문의 국제면이나 텔레비전 뉴스에서 한두 꼭지에 불과했다. 그것도 기자나 신문사의 입맛에 맞게 걸러진 것이라서 정확하지도 않고, 신선하지도 않았다.

-알겠다. 그런데 이게 전부냐?

해외 로케 특집 프로그램이 작은 건 아니었지만, 뭔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이용권이었다.

“네, TG가 할 일은 그 정도가 좋아요.”

당연히 이게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TG가 해야 할 일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선경 그리고 노 대통령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할 분은 따로 있다.

“주제는 뭐로 잡을까? 확 꽂혀야 하는데 말이야.”

통화를 마친 유재원은 잠깐 고민이 이어졌다. 다행히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곧이어 유재원은 ID 워드프로세서를 실행하고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제목은 ‘성공의 기억’이었다.

며칠 후.

이젠 제법 정치인 같은 느낌이 나는 전명헌이 커다란 식당에서 기자들과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60석이 넘는 커다란 설렁탕 집이었는데 정치인은 전명헌과 보좌관들 몇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모두 기자들이다. 당연히 의도가 있어 불러 모은 것이다.

물론 명분은 밥이나 함께 먹자는 것이었지만, 이번 선경 사태에 관한 전명헌 의원의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거라고 보좌관들이 밑밥을 다 깔아 놓았다. 당연히 기자들의 밥값은 모두 전명헌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라 부담도 없거니와, 말만 하면 뉴스거리가 쏟아지는 화제의 인물이기에 식당 안에 빈자리가 없었다.

역시나 기자들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딱 잘라 말해서 테이프나 팔던 회사가 염치도 없이 이동통신 시장을 먹어 보려다가 이 탈이 난 것이지요.”

선경에 대해 대놓고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통령의 사위 기업이었기에, 그 위세는 대단했기 때문이다. 87혁명을 통해 이제는 대통령에 대해 대놓고 비판을 해도 남산에서 출동한 안기부가 잡아가진 않는다. 그래도 대통령의 위세는 대단했기에 뒤에선 씹어도 앞에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왜 이런 무리수를 두었느냐? 바로 이런 식으로 해서 성공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지. 선경의 시작은 적산으로 받은 섬유 공장이라는 건 여기 있는 기자님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요.”

전명헌 의원의 말에 기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섬유 공장이나 하던 선경이 대기업이 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석유공사의 인수 때문이고. 다들 젊어 보여서 그때를 기억하는 양반이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구먼. 그때 선경이 석유공사를 인수할 때도 말이 참 많았다오. 생각해 보시오. 그때 선경 그룹 매출액은 겨우 3천억 조금 넘는 회사였고, 석유공사는 1조 원이 넘는 회사였단 말이오. 새우가 고래를 먹은 거지.”

젊다고 해준 건 기자들 기분 좋아지라고 하는 립서비스였다.

기자들 상당수는 그때의 기억이 생생히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덕분에 전명헌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선경은 정경유착으로 대박을 맛보았으니 이번에도 잘 될 줄 알고 같은 방식을 했던 거지.”

기자들은 전명헌 의원의 명쾌한 분석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이렇게나 직설적으로 선경을 공격하는 전명헌 의원의 과감성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전명헌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같은 경우가 단지 선경뿐이겠소? 반칙으로 이득을 본 이는 또 반칙을 저지르고, 탈세로 이득을 본 자는 또 탈세하려고 궁리를 하지요. 그거 이걸 보고 본인은 성공의 기억이라고 이름을 지어 보았지요.”

성공의 기억!

“그렇다면 성공의 기억이 나쁘기만 할까? 아니요! 이런 말을 하면 본인의 자랑 같지만, 미래 그룹을 보시오. 맨주먹으로 시작해 그 거대한 기업을 일구었소. 남들이 다들 무모하다는 중공업! 자동차! 조선업! 모두 다 성공의 기억을 공유하며 일궈낼 수 있었던 것이오. 지금이라고 다를까? 최근의 예로는 ID 그룹이 있소. 매우 바람직한 예지. 혁신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니까.”

전명헌의 식견이 기자들도 인정할 만큼 날카로웠기에 다들 받아 적기 바빴다.

말을 너무 많이 해 목이 탄 전명헌은 냉수 한 모금을 마신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재심사? 그리고 거기에 또 본인들이 참가하겠다? 허, 참! 이런 몰염치가 나올 수 있던 건 바로 그 잘못된 성공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지요. 만에 하나 이러한 수작이 또 성공했다고 생각해 보시오. 더 큰 대박을 노린다고 또 얼마나 극성이겠습니까.”

전명헌의 물음에 기자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혹시나 반응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바람잡이로 몇 명 꽂아두긴 했지만, 괜한 짓을 했다고 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올바른 성공의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 그것이 바로 선진국 아니겠소? 이런 일을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않은 사람, 이 전명헌밖에 할 수 없을 겁니다!”

마지막에 확실히 깔때기를 들이대는 전명헌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명헌의 말은 그날로 특종이 되어 모든 텔레비전 뉴스와 신문을 장식했다. 플랜 B를 준비 중이었던 선경의 오너 일가는 물론 노 대통령까지 소태를 씹은 얼굴이 되었음은 당연했다.

마지막으로 대권 경제 체제에서도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지지도 조사에서 김영삼과 김대중 양강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전명헌이란 이름이 무섭게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나중에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는지, 대책없이 막 지르고 있는 전명헌 의원님이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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