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220화 (220/1,007)

[220] 왕좌의 게임 =========================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한국에서 가장 간단하게 성공을 증명하는 건 강남의 테헤란로에 번듯한 건물 하나를 가지는 일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TG는 확실히 성공을 증명했다. 건물 수준이 아니라 25층짜리 마천루 하나를 현찰 박치기로 매입하면서 본사 사옥으로 삼았으니 말이다.

이용권도 그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던 듯, 사옥의 이름을 TG 테헤란 타워라고 지었다. 그냥 TG 타워라고 해도 될 걸, 테헤란이라는 도로명을 넣은 것이다.

매물로 나온 테헤란로의 건물 중에 연식이 제일 짧은 걸 골랐고, 거기에 외부 인테리어를 하늘색 통유리로 다시 했다.

80년대 스타일의 빌딩이 즐비한 테헤란로 빌딩에서 TG 테헤란 타워는 마치 21세기에 있는 것처럼 세련된 모습으로 거듭났다.

“와! 사옥이 정말 멋지네요. 역시 디자인의 TG답습니다!”

하루를 쉬었던 유재원이 TG 테헤란 타워에 도착했을 때 감탄이 나오는 것도 과장이 절대 아니었다.

유재원의 칭찬에 마중 나왔던 이용권 사장의 얼굴에 흐뭇함이 더해졌다.

TG 테헤란 타워를 사들일 때나, 외부와 내부 공사를 새로 할 때 TG 안에서 말들이 좀 많았다. 사옥 이전과 리모델링을 추진하는 이용권 사장에게 가장 많이 떨어진 비판은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쓴다는 말이었다.

사실 디자인의 TG라는 말을 유지하기 위해 살짝 무리한 감도 없지 않았다. 외부의 하늘색 통유리는 심미적 요소 말고는 얻을 게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 비판이 쏙 들어갔다. TG 테헤란 타워가 들어서고 난 이후, 주변의 땅값 건물값이 슬금슬금 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울의 땅값, 임대료의 상승은 상수나 다름이 없지만, TG 테헤란 타워가 만들어진 후부터 주변부의 시세는 보통의 상승률보다 훨씬 더 가파르게 올랐다. 당연히 TG 테헤란 타워 자체의 평가가치도 TG가 사들였을 때보다 크게 올라서 시세 차익이 상당히 생겼을 정도다.

그제야 TG의 창업 동지들은 오래전 유재원이 말했던 돈이 열리는 나무가 무엇인지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디자인은 무슨. 다 네가 그려준 거로 먹고사는 건데.”

이용권 사장이 말은 이렇게 해도 얼굴은 싱글벙글한다.

그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결정했던 순간 중 가장 잘했던 것을 꼽자면 컴퓨터 경진대회에 후원하고, 유재원을 찾아서 덕진리까지 내려갔던 일을 일말의 고민 없이 선택했을 것이다. 유재원과 함께하고부터 TG의 체급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으니 당연했다.

“올라가자!”

로비에서 잠깐 멈췄던 둘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목적지는 TG 테헤란 타워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한 이용권의 사장실이었다.

“1,600억이요?”

욕이 터지 나오는 걸 겨우 참은 유재원은 간신히 숫자만 되물을 수 있었다.

사장실에 도착해서 푹신한 소파를 마주 보고 앉은 유재원과 이용권은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제대로 추출해 만든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 것이다.

TG가 제2 이동통신 사업권을 놓고 청와대와 모종의 협상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드디어 결론이 나왔다.

즉 제2 이동통신 사업자가 되려면 1,600억 원을 상납하라는 결론이 난 것이다. 그렇다고 현금을 사과 상자에 담아 가져다 달라는 건 아니었다. 이동통신 서비스를 하려면 전파를 써야 하는데, 그 권리는 정부로부터 사는 것이었다.

그러니 청와대는 기본적인 전파 사용료에 1,600억 원을 더 얹어서 내면 알아서 챙겨 가겠다는 것이다.

“원래 주파수 사용료는 얼마였지요?”

“가입자 숫자에 따라 사용료가 좀 달라지는데, 우리가 만든 사업계획서에 예측한 대로라면 연 80억 원 내외겠지.”

전파 사용권 계약은 보통 10년 단위이니, 전파 사용료만 800억 원이고 여기에 1,600억 원이 더해져서 2,400억 원을 준비해야 한다.

날강도도 이런 날강도가 없다.

전파는 공공재였고, 국가가 국민으로부터 위임을 받은 권리로 공정하게 분배를 해야 한다. 그러니 전파 사용료로 받은 돈도 국민을 위해서 써야 하는데, 저기 청와대에 계신 분은 기존 전파 사용료의 2배나 되는 돈을 자기 주머니로 넣겠다고 대놓고 설치는 것이다.

“결정은 하셨어요?”

유재원은 이용권에게 먼저 의견을 물었다. 이것도 의례적인 질문이었다. 이용권의 얼굴을 보아하니 이미 결론을 내린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해야지. 구더기가 무섭다고 장 못 담그는 건 아니잖아.”

역시 이용권은 거침이 없었다.

통상의 전파 사용료보다 훨씬 큰 1,600억 원이 덤으로 붙어 있는 일이지만 뚫고 나가겠다는 것이다. 몇 년 전이라면 입이 떡 벌어져서 엄두도 내지 못할 금액이지만, 이제 그 정도의 돈은 현금으로 바로 준비할 수 있을 만큼 TG의 체급이 달라졌다.

“네, 정답입니다.”

유재원도 완전히 동의했다.

2,400억 원으로 황금 주파수인 800MHz 대역을 계속 점유할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큰 이점이 있다. 회절성이 좋은 800MHz 대역은 산악 지형이 많은 한국에서 강력한 장점이다. 이동전화라면 사용자가 어디에 있든 뻥뻥 터져줘야 하는 게 최우선이다. 경쟁 통신사는 먹통인데 TG의 것이 잘만 터지면 이보다 더 좋은 마케팅 요소가 없다.

“그래,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보자. TG 모바일 말이야.”

TG 모바일은 이름 그대로 TG의 자회사로서 이동통신사업을 전담할 법인이다.

2,400억 원의 전파 사용료는 기지국 설치나 단말기 수급, 전국 대리점 모집과 AS센터 운영 등등. 이동통신 사업 전체 규모로 보았을 때 큰 비중은 아니었다.

그만큼 이동통신 사업은 초기 투자비가 대규모로 필요한 사업으로, 한국 어디서나 통화가 뻥뻥 터지도록 기지국을 설치하는 데 소요되는 자본의 크기는 조 단위를 훌쩍 넘어간다. 물론 대도시 권역에서 먼저 상용화를 하고, 수익을 차곡차곡 모은 후 기지국을 늘려가면서 통화 범위를 점차 늘려가는 방식을 쓰면 그나마 투입될 자본의 크기를 줄일 수 있긴 한데, 그래도 초기에 투자 자본의 크기는 TG에도 제법 부담이 된다.

“투자 비율은 어떻게 할까?”

그렇기에 이용권이 생각한 건 동업이었다. 바로 유재원과의 동업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다름이 없는 이동통신사업이었고, 그 지분을 아무나와 나눌 수 없다는 건 이용권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유재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TG에게는 더욱 특별해서, 세계 최대의 PC 메이커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유재원의 디자인 덕이었다. 디자인 말고도 다른 분야에서의 유재원이 선보인 특별함에 대해 말하는 건 이제 입이 아플 지경이다.

그렇기에 이용권은 유재원과 단순한 친분 사이를 넘어서고 싶었다. 지금은 언제든 틀어질 수 있고, 그러면 TG의 위상이 추락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매일 고심했던 이용권이 도출한 건 TG 모바일에 유재원의 지분 참여였다. 지분을 나누면서 자본도 조달하고, ID 그룹과 더욱 가깝게 묶일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유재원도 나쁠 건 없었다.

“뭐, 저야 나눠 주신대로 받는 거죠.”

말은 그렇게 해도 살짝 기대감을 보이는 유재원이다.

지분이 공짜는 아니지만, 조만간 한국 최대의 이동통신 회사가 될 TG 모바일의 지분은 몇 년만 지나면 그 평가 가치가 쑥쑥 올라갈 테니 말이다.

더욱이 유재원의 마스터플랜에서 이동통신은 꽤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다만 핵심은 모바일 기기와 모바일 기기 안에서 돌아가는 여러 가지 앱에 있는 것이었고, 통신 서비스는 살짝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을 생각은 없다.

예전의 2000년대 초반 한국의 모바일 생태계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클릭 한 번 잘못했다고 데이터 사용료가 몇만 원씩 나왔던 기형적 상황을 생각하면 이가 절로 갈린다. 통신사들은 이동이 자유롭다는 모바일의 핵심 이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가두리양식장처럼 자신들의 서비스 영역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하고, 돈을 뽑아내기에만 바빴다.

이러한 상황이 재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TG 모바일에 어느 정도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게 좋았다.

“당연히 51:49지. 네가 51이라도 나는 찬성이다!”

큰일 날 소리를 거침없이 하는 이용권이다.

“에이, 저는 49로 만족합니다.”

유재원이 TG 모바일 지분 51%를 가져간다면 나중에 ID 그룹이 다 해먹는다는 말이 분명 나올 것이다. 손가락질당하는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지만, 이것저것 다 하느라 신경이 분산돼서 마스터플랜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건 지양해야 할 일이었다.

“문제는 자본금이죠.”

돈은 많을수록 좋지만, 자본금이라면 상황에 따라 다르다.

1백만 원을 자본금으로 설정한 회사가 수백억 대의 사업을 할 수도 있고, 심지어 자본금 1원짜리 유령 회사가 수천억 원대 사업하는 회사를 소유할 수도 있다.

물론 유재원과 이용권은 TG 모바일을 한국 제1의 이동통신 회사로 키우겠다는 확고한 비전이 있었기에, 비정상적인 액수의 자본금을 설정할 마음은 없다. 그러니 대도시권에서 이동통신 서비스를 시작할 인프라를 만들 수준으로 자본금을 준비하는 게 정답이었다.

“전파 사용료가 확 올라갔으니, 6천억 원 정도로 할까요?”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던 이용권보다 그냥 머릿속으로 암산했던 유재원이 한 발 더 빨랐다.

전파 사용료로 2,400억을 내고, 나머지 3,600억 원으로 기지국일 비롯한 이동통신 서비스 인프라 설치 비용으로 내면 적당할 것 같다. TG가 3,100억을 출자하는 것이고, 유재원은 2,900억 원을 내면 된다.

“근데, 이동통신 규격은 뭐로 하실 거예요?”

이동통신 규격은 유럽식과 미국식으로 나뉜다. 당연히 미국이라면 고개가 돌아가는 한국은 미국식으로 크게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미국식도 TDMA와 CDMA로 기술이 갈리고 있어서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였다.

“그걸 우리가 정할 수 있니? 체신부가 하라는 것으로 해야지.”

아, 깜빡했다.

한국은 아직도 정부가 먼저라는 사실을 말이다. 정부가 결정하면 기업은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이동통신 규격을 설정하는 것도 사업자가 정하는 게 아니라, 정부에서 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CDMA를 강력히 주장하세요.”

“알겠다. 꼭 그렇게 하마.”

이용권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유재원의 말이라면 이제 밭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사람이 이용권이기 때문이다.

“CDMA는 현존 무선 통신 기술 중에 제일 발전한 거예요. 보안성도 좋고, 사용자가 대폭 늘어나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죠.”

그런데도 유재원은 기술적 특성에 대한 설명을 친절히 곁들였다. 다만 모든 이유에 대해 말하진 않았다.

CDMA를 추천한 건 익숙하기 때문이다. 퀄컴의 갑질에 당해본 경험이 있어 꺼려지긴 했지만, CDMA를 시작으로 여러 가지 모바일 기기를 사용했던 유재원에게는 이보다 익숙한 기술은 없었다. 게다가 퀄컴은 예전부터 유재원이 투자해놓은 기업이라서 과거처럼 갑질에 시달릴 일도 원천적으로 사라졌다.

나중에 미래전자가 반도체 기술에 노하우도 쌓이고 파운더리 사업까지 시작하면 여기를 통해 자체적인 AP도 만들 작정이니 퀄컴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이다.

이후 유재원은 TG 모바일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를 했다. 가장 중요한 TG 모바일의 출범 시점도 대략 정했다.

“적어도 한 달 안에 시작하는 거예요.”

“너무 빠른 거 아니니?”

“전혀요. 그때가 최적이죠.”

유재원이 말하는 그때라면 대선 운동이 한창일 시점이다.

그러니 TG 모바일의 출범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할 수도 있고, 어쩌면 괜한 정치적 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제2 이동통신 사업은 노 대통령의 숙원(?) 사업이었기에 그가 힘이 남아 있을 때 해치우는 게 뒤탈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현재 대선이 돌아가는 형세는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전명헌이 거의 균형을 이루는 삼각 체제였다. 지지율을 보자면 현재 제일 높은 김영삼과 제일 낮은 전명헌의 지지도 차이는 10%도 나지 않았고, 김대중과 전명헌의 차이는 겨우 4.4%에 불과했다.

반면 대선까지는 1달 이상이 남아 있으니, 중간에 큰 사건이라도 터지면 지지율이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음 정권을 누가 잡을지도 모르는 판국이니 차라리 노 대통령이 청와대에 있는 동안 제2 이동통신 사업을 확정 짓는 게 최고의 방법이었다.

며칠 후.

-체신부, 제2 이동통신사업자로 TG 유력!

선경의 사업권 반납으로 정처 없이 표류 중이었던 제2 이동통신 사업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역시 돈이 움직이니 모든 게 매끄럽다. 체신부도 발을 맞춰 제2 이동통신 사업자는 재선정이 아닌 선경에 밀렸던 2순위자 중에 뽑겠다는 발표와 함께, TG가 유력하다는 소식이 빠르게 돌았다.

이동통신 사업에 강력한 의지를 표명 중이었던 포항제철이나 코오롱은 극렬히 반발했다. 선경은 제외한 상태에서 새로 경합을 해야지, 기존의 평가를 그대로 사용하는 건 안 된다고 말이다.

-TG, 전파 사용료로 2,400억 배팅!

목소리를 높이던 포철과 코오롱은 2,400억 원을 낸다는 소식에 입이 꾹 닫혔다. 한국에선 제법 큰 기업이긴 해도, 전파 사용료로만 2,400억 원을 만들기엔 기업의 역량이 모자랐던 탓이다.

-TG 모바일에 ID 그룹 출자 결정!

후속 보도도 이어졌다.

정부의 허가가 떨어지는 즉시 자본금이 8천억 원에 이르는 초거대 통신기업인 TG 모바일이 출범할 것이고, 1994년 전반기에 2G 이동통신 상용화를 목표로 사업을 진행할 것이라는 발표였다.

주식 시장에 TG란 이름의 광풍이 돌기 시작했다.

기사가 나기 전부터 TG 모바일의 모기업인 TG의 주가가 상승 중이었는데, 기사가 나오자마자 상한가에 올라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상한가 매수 주문이 쌓이고 쌓여서 평소 거래량의 몇십 배에 이르렀다.

이동통신 관련 기기나 사업을 하는 기업들의 주가도 덩달아 뛰었다. 나중에는 통신이라는 단어만 있어도 이유 없이 주가가 오르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야말로 묻지마 투자의 전형적인 행태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정치권은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진 않았다.

야당, 특히 민주당에서 TG를 선정한 건 특혜라면서 어떻게 결론을 내렸는지, 의사 결정 단계를 검증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TG가 전파 사용료로 낼 2,400억 원은 국민의 것이니 국민에게 돌려줄 방법을 제시하라고 정부를 압박했다.

물론 노 대통령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정부 여당은 노 대통령을 위해 침묵했고, 통일 국민당은 민주당과 보조를 맞추려다가 ID 그룹이 TG 모바일에 출자한다는 소리에 급히 후퇴했다. 강경한 논조로 TG의 의혹을 비판하던 대변인 성명이 불과 몇십 분 만에 철회되는 촌극까지 있었다.

걸린 이권이 워낙 크기 때문에 평소였다면 며칠은 크게 시끄러워질 일이었지만, 다이내믹 코리아에서는 불과 하루 정도의 소재밖에 되지 못했다.

-김영삼, 김대중, 전명헌 공명선거 합의!

현재는 대선 정국이었다.

TG 모바일의 출범보다는 누가 차기 대권을 거머쥐는가에 모두의 시선이 쏠린 상태다. 여기에서 유력한 3대 후보들은 합동으로 모여 이번 대선은 깨끗한 선거, 공정한 선거를 하기로 합의했다.

합의를 주도했던 건 놀랍게도 전명헌 의원이었다. 양 김은 그다지 반응은 없었는데, 전명헌 의원이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였다. 합의하지 않으면 부정선거를 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말이다.

예전이라면 전명헌 의원의 말은 가볍게 무시하고 지나쳤을 텐데, 이젠 지지율이 20% 후반까지 나오는 상황인지라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결국, 셋이서 함께 모여 합의안을 도출해냈다.

언론에 나온 합의문은 참 좋았다.

선거법도 철저히 지키고, 안기부를 포함한 공권력도 중립을 지키자고 합의를 했으니 말이다.

“어떠냐? 이 정도면 나도 이제 정치인 티가 나지 않느냐?”

나름 한 건 했다고 어깨를 으쓱이는 전명헌이었다.

“네, 대단하세요!”

전명헌의 말을 받은 건 당연히 유재원이었다.

지금 둘은 지금 부산에 가는 자동차의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는 상황으로, 운전은 전명헌을 평생 모셨던 믿을 만한 수행비서가 전담하는 중이다. 덕분에 마음 놓고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지켜질 거라고 정말 믿으시는 건 아니죠?”

유재원은 설마 하며 물었다.

공명선거 합의를 했다고 안심하는 건 아니다. 저런 합의 수십 개를 모아 봤자 저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럼! 내가 정치인들에게 시달린 지 수십 년이다. 그 치들이 어제 했던 말 180도 뒤집는 건 수도 없이 봤다. 두 사람 다 합의를 해놓고 지키지 않을 테지. 나부터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데 말이다. 하지만 말이다, 정치하다 보니 과거에 생각 없이 했던 발언이 제 발목을 잡는 걸 여러 번 볼 수 있더구나. 만에 하나 이번 대선에서 뭔가 일이 난다면 오늘의 합의가 단단히 발목을 잡아줄 거다.”

역시 연륜이란 무시할 수 없다.

왕회장 전명헌의 정치력이 이렇게나 좋았었나 되돌아보게 될 정도였다. 덕분에 어째서 과거에는 그렇게도 헛발질을 했는지 참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나저나 이 시점에 부산행이라니, 자세히 설명해 보거라.”

유재원의 잡생각은 이어진 전명헌 의원의 질문에 희미해졌다.

오늘 전명헌의 부산행은 유재원의 권유로 이뤄진 행사였다. 정식으로 뭔가 커다란 이벤트가 준비된 건 아니었다. 그저 전명헌 의원이 손수 통일 국민당의 부산지역 조직을 방문해서 선거 준비 상황을 점검하고 지역 당직자들과 간담회도 하는 소소한 스케줄이 예정되었다.

의견을 말한 사람이 유재원이 아니었다면 전명헌은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을 그런 소소한 일정이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큰 변수가 발생할 지역은 바로 부산이 될 거예요. 이유요? 감이죠!”

감이라고 하니 더 질문하기가 모호해지는 전명헌이었다.

어느덧 자동차는 부산에 입성했고, 통일 국민당 부산지구당이 있는 남구까지 들어섰다.

“그나저나 배고프지 않으세요?”

“아, 슬슬 출출하던 참이다. 그러면 간단히 먹기 좋은 저기가 어떠냐?”

저녁을 먹기엔 애매한 시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산지구당 당직자들과의 만남은 오후 늦게 시작되어 저녁도 함께 먹는 식으로 짜여 있었기에, 서울에서는 아침 느지막하게 출발했다. 덕분에 점심은 휴게소에서 간단히 먹었다. 유재원은 가뜩이나 입맛이 없어서 점심도 그다지 많이 먹진 않았다.

재미있는 건 전명헌 의원이 가리킨 음식점이다.

유경치킨!

덕진리 그리고 여주 시에서 시작한 치킨프렌차이즈는 어느새 퍼지고 퍼지면서 부산에까지 내려와 있다.

프라이드, 양념, 간장이라는 3가지의 조화로운 메뉴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입맛을 단번에 사로잡았고, 함께 곁들일 수 있는 부산 양조의 생맥주는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했다. 덕분에 불과 몇 년 만에 전국구 프렌차이즈 업체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치킨 좋죠! 근데 지금 먹기엔 좀 느끼한 것 같아요. 차라리 저긴 어때요?”

전명헌은 피식 웃고는 유재원이 가리킨 새 음식점에 눈을 돌렸다. 거기엔 초원 복국집이란 간판이 선명했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어제 공지해드린 대로, 이번 주 연재는 이번 편까지네요.

불타는 금요일, 즐거운 주말 되시고 월요일에 다시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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