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왕좌의 게임 =========================
통일 국민당의 중앙 당사.
의원 총회 직후에도 의원들은 해산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작은 행사 하나가 더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명헌을 비롯한 50여 명의 의원은 총회가 열렸던 5층 회의실에 그대로 앉아서 대기 중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니 웅성거리는 소음이 날법했지만, 중앙에 자리한 전명헌의 강력한 존재감 때문에 사소한 잡담을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1층 로비는 몰려든 취재진으로 인해 도떼기시장처럼 시끄러웠는데, 5층은 그야말로 적막감 그 자체였다.
방음처리를 맡은 회사에 보너스를 줘도 아깝지 않을 수준이다. 덕분에 작은 쪽문이 열렸을 때 나는 경첩 소리에 의원들의 시선이 단박에 쏠리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전에 부산까지 함께 내려갔던 전명헌 의원의 수행비서였다.
그는 의원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전명헌 의원에게로 가서 조용히 말했다.
“후보님, 위원장 연락입니다. 서울에 들어왔다고 하니, 30분 내로 도착할 거라고 합니다.”
작은 소리로 전달했지만, 워낙 조용해서 뒷자리에 앉은 의원들도 집중했다면 정확히 들었을 정도였다.
역시나 유재원의 소식에 잔뜩 굳어 있던 전명헌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덕분에 조용하던 대강당에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전 의원.”
전명헌은 옆자리에 앉은 아들 전재준을 의원 자 붙여가면서 불렀다.
“예.”
전재준은 풀이 죽은 상태로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하루 전까지는 그야말로 제 세상이었다. 무소불위의 총재 전명헌에게 할 말 하는 사람으로서 통일 국민당의 가슴앓이를 하던 의원들의 희망이 되어 새로운 파벌로 급부상하던 중이었다.
그 숫자가 20명 이상이었기에, 국회 안에서도 목에 힘을 주고 다닐 수준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모든 게 박살이 나버렸다.
어제는 김우중의 대선 출마 특종이 터졌고, 조금 전에는 민정당에 꽂아둔 빨대가 김영삼 후보가 선거 공약으로 금융실명제를 꺼냈다는 소식을 전했다.
유재원은 무슨 신선이라도 되는가?
말도 안 되는 두 가지 가정이 모두 터질 수가 있냐는 말이다. 전재준의 그 작은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었기에 진심으로 승복하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전명헌의 부름에 대답하는 전재준의 말투는 툴툴거림이 가득했다.
“전 의원이 모실 위원장님이 오신다고 하잖습니까. 내려가서 영접하는 게 도리 아닐까요?”
이어진 전명헌의 말은 더 최악이었다.
선거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무려 40일이 넘는 기간 동안 유재원을 떠받드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금배지를 버렸으면 버렸지, 미래 그룹에서 왕자처럼 떠받들며 살았던 그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전재준은 금배지를 내놓겠다고 했지만, 전명헌에게는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그 금배지가 네 것이더냐? 착각하지 마라. 줄 사람이 없어서 네가 잠시 맡고 있을 뿐이야.’
오히려 냉혹한 현실이 그대로 담긴 비정한 대답만 돌아왔다. 울산에서 전재준이 왕자였다면, 황제는 당연히 전명헌이었다.
전명헌이라면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를 잡고 울산에 출마시키면 100% 당선이다. 텃밭이라는 게 이런 것이다.
“네.”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던 전재준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전명헌의 명령은 도저히 항거할 수 없기에 싫어도 해야 했다. 다만 표정관리는 엉망이라서 전재준의 얼굴엔 싫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잠깐. 저기 대기실에서 따로 이야기 좀 하자꾸나.”
그 모습을 냉정한 눈으로 보고 있던 전명헌은 걸음을 옮기던 전재준을 불렀다. 그 소리에 더더욱 화들짝 놀라는 전재준이었다. 따로 이야기하자는 의미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에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확 올라왔고, 주변을 둘러 보았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 누구도 전재준을 구해줄 사람이 없었다.
잠시 후.
둘이 들어갔던 작은 대기실에서 ‘악’하는 비명이 터졌다.
유재원의 소식 이후 도란도란 이야기하던 의원들이 깜짝 놀라 말이 멈췄을 만큼 큰 소리였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전재준이 먼저 나왔다. 그리곤 도망치듯 강당을 벗어났다.
“어휴.”
그 모습을 또 한심하다는 듯 보는 전명헌이었다.
전재준을 볼 때마다 화가 확 올랐는데, 오늘따라 유독 심했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자기 자식이 맞나 싶을 때가 있을 만큼 판이한 성격 때문이다.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것 같아서 참았지만, 마음이 너무도 옹졸했다.
막내라고 오냐오냐해가면서 키운 탓이라는 후회가 진하게 올라왔다.
사람을 볼 때, 겉이 아니라 속을 봐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해도, 단 한 번도 그러지 못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앙심을 품으면 어떻게 든 해코지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소인배적인 성격이었다.
그 두 가지 단점을 해결만 하면 미래 그룹의 주력 계열사 하나 정도는 바로 물려줄 수도 있지만 지금 봐서는 도저히 가망이 없어 보였다.
덕분에 유재원에게 전재준을 붙여 주는 게 미안할 지경이다.
그렇지 않아도 힘들 유재원에게 괜한 짐 덩이를 부쳐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비 된 자로서 재원이 옆에서 하나라도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에 전재준의 정강이를 차면서까지 내려보내게 된 것이다.
유재원의 그랜저 리무진이 여의도에 거의 가까워질 때. 따르릉 하는 벨 소리가 났다. 카폰으로 전화가 온 것이다.
카폰은 옆자리에 앉은 김대석이 받았다. 카폰 전화번호가 알음알음 퍼져 나간 것인지 귀찮은 전화가 많아지면서 전화 연결 방법도 달라진 것이다.
몇 마디 짧게 통화를 하더니 유재원에게 수화기를 넘겼다.
“최강욱 비서실장입니다.”
최강욱?
미국에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네, 저예요. 무슨 일인가요?
-회장님, 앞으로도 정치를 계속하실 겁니까?
역시 함께 일한 지 좀 오래되었다고, 최강욱은 유재원을 닮아갔다. 단도직입적으로 직구가 딱 들어왔다.
유재원의 공식 일정은 ID 톡을 통해 주요 임원들에게 바로 보고되는데, 통일 국민당이라고 적힌 걸 보고 바로 전화를 건 모양이다.
“최 실장님도 제가 정치하는 게 싫어요?”
-제가 어떻게 호불호를 말하겠습니까. 다만 회장님의 의중을 정확히 알아야 제대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여쭙는 것입니다.
역시 최강욱이다.
결정 전이었다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해줬겠지만, 이미 확정된 만큼 유재원을 지원할 생각부터 먼저 했다.
“당연히 정치를 계속할 마음은 추호도 없어요. 다만 이번 기회를 잘 살리면 나중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거예요. 이를테면 고소득 단기 아르바이트 같은 개념이죠.”
지금 통일 국민당은 50석 이상을 가진 원내 제3당으로 국회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중이었다.
양강 구도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가 하는 박쥐라고 손가락질하지만, 통일 국민당 덕에 저번 정기 국회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민생법안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균형추로 쓰기에 딱 좋은 포지션인데, 전생에서는 14대 대선이 끝나자마자 풍비박산으로 당이 깨지면서 소멸했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전명헌이 대통령이 되면 대박이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통일 국민당만큼은 지킬 생각으로 움직였다.
이런 내용은 아무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최강욱은 유재원에게 아무나가 아니었기에 허심탄회하게 설명해줬다.
-그런 거라면 다른 사람을 대신시켜도 될 것 같은데요.
“대리인을 내세우는 것도 생각해봤는데, 아니더라고요.”
대리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아닌 일이 있다.
이번 건은 빠르고 정확한 대응이 관건인 판이라서 대리로 지시하는 것보다는 본인이 직접 처리하고, 결과를 받아드는 게 유재원의 성미에 맞았다. 만에 하나 대리로 움직였다가 실패라도 하면 그 후회가 상당히 길어질 테니까. 게다가 유재원은 자신의 명성에 오점이 생긴다고 마음에 묻어두는 성격도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회장님을 지원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네. 무리하진 마시고요.”
통화는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는 어느덧 통일 국민당 여의도 중앙당에 도착했다.
유재원의 자동차인 그랜저 리무진은 하나의 아이콘이었다. 그랜저 리무진 V 3.0 AMG라는 정식 명칭보다 유재원 자동차라고 하면 사람들이 바로 알아볼 정도였다. 그러니 자동차만 보고 주인공이 도착했다는 걸 인지한 취재진이 바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주변이 정리될 때까지 대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대석의 말과 함께 유재원의 자동차 앞뒤로 붙어 있던 경호원들이 차에서 내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머리처럼 자동차에 찰싹 달라붙어 플래시를 남발하던 기자들을 밀어내고 유재원이 입장할 자리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소란이 컸다.
개의 새끼를 찾는 건 기본이고, 온갖 욕이 쏟아졌다. 현장에서 놀던 기자들의 입담은 굉장한 것으로 유재원이 들어본 적이 없던 것들이 쏟아졌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현장 정리는 빠르게 이뤄졌다.
온몸이 근육으로 된 커다란 덩치를 가진 외국인 경호원들의 힘도 상당했고, 외국인 자체의 위압감도 있어서 정신을 차린 뒤에는 쉬이 달려들지 못했다.
그렇게 입구가 다 정리되고 나서 유재원이 차에서 내려섰다.
수많은 플래시가 터지면서 통일 국민당 로비가 대낮보다 더 밝아졌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당당한 걸음걸이까지 더해지니 주인공이 등장한 것과 같은 아우라가 아낌없이 뿜어졌다. 오죽하면 로비 안쪽에서 심통 가득한 표정으로 유재원을 기다리고 있던 전재준마저도 잠깐 넋을 놓고 지켜볼 정도였다.
아버지에게 조인트를 까여 욱신거리는 정강이 때문에 곧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잠깐이나마 유재원이 부러워질 정도였다.
-어떻게 비상대책위원장을 수락하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통일 국민당 편에 대놓고서는 것인데, ID 그룹의 경영에 부담되진 않으십니까?
-혁신적인 선거 전략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만 해주시죠!
유재원이 계단을 오를 때마다 아우성치는 기자들 사이로 제법 괜찮은 질문들이 들려왔다. 덕분에 유재원은 로비로 가는 마지막 계단에서 잠시 멈췄다.
약속된 움직임은 아니었기에, 김대식이 당황했다.
통일 국민당에서의 일정은 바로 5층으로 올라가서 원내대표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의원님들과 상견례도 하고,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후부터 유재원이 전권을 가지고 통일 국민당의 대선을 진두지휘할 수 있다.
기자회견 같은 건 예정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냥 지나치면 되는 것인데, 유재원이 걸음을 멈춘 것이다.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선거에서의 주인공은 바로 투표권을 가진 국민 여러분입니다. 저는 제가 반했던 전명헌 후보님의 매력과 후보님이 품고 계신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 비전을 국민 여러분께 확실히 알려드릴 역할만 할 것입니다. 또한, 선거가 끝나면 결과가 어떻든 저는 미국의 본업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기자들 사이에 오 하는 탄성이 나왔다.
후보들이 난립하고, 저마다 목소리를 크게 내면서 정쟁과 흑색선전으로 치닫고 있던 선거의 의의를 다시 한 번 상기 시켜주는 깔끔한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명헌 후보를 포장하는 것도 귀에 쏙쏙 박혔다.
유재원의 위명이야 두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다. 그런 유재원 본인이 직접 반했다고 하니 전명헌이 다시 보일 정도였다.
덕분에 사람들에게 치이며 장시간 뻗대기로 스트레스를 잔뜩 받았던 취재진도 만족할만한 사진과 취재 수첩을 품고 데스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 전 의원님, 안녕하세요.”
취재진을 넘어 겨우 통일국민당 로비로 들어선 유재원 앞에 전재준이 딱 나타났다. 눈이 마주치자 인사부터 먼저 하는 유재원이었다.
“어? 그래. 오랜만이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던 전재준이라도 인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저 기다리셨던 거예요?”
유재원도 알면서 되물었다.
감이 좋은 유재원이다. 지금 전재준이 내뿜는 아우라는 총선 때와는 확연히 다름을 확실히 느껴졌다. 총선 때에도 그다지 호감은 아니었으니, 지금은 약간의 적대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도와주러 온 사람에게 적대감이라니.
상식적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지만, 유재원은 다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전재준의 헛발질은 역사적으로도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이다.
16대 대선 하루 전에 지지철회는 너무도 유명했고, 이번 14대 대선에서도 큰 삽질을 한다. 바로 초원 복국집 사건이다.
초원 복국집 사건의 본질은 민관군 불법 선거 개입이었다. 여기에 지역감정까지 부추기는 최악의 모의였고, 실제로 실행되기까지 했다.
이걸 터트린 장본인이 바로 여기 계신 전재준이다. 문제는 정보를 습득한 방법이었다. 불법 선거의 꼬투리를 잡는 건 좋았는데, 방법이 도청이었다는 게 원인이었다. 불법 선거 개입 이슈가 야당의 불법 도청으로 순식간에 뒤집혔고, 부산도 뒤집혔다.
이후 한국의 선거 구도는 지역감정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판이 되었고, 21세기 초중반이 온 후에야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 가자.”
전재준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까딱이고선 앞장섰다.
총선을 치를 때 몇 번 와봤던 건물이라서 구조는 훤히 알고 있다. 게다가 유재원도 어디 가서 꿀릴 사람이 아니었다. 먼저 인사도 해줬는데, 끝까지 퉁명스럽다면 같이 대응해주면 그만이다.
강당에서의 분위기는 좋았다.
유재원이 입장했을 때, 다들 일어나서 박수로 맞이해주는 것을 시작으로 원내대표가 임명장을 주는 것도 매끄럽게 이어졌다.
전명헌 후보가 맨 앞줄 중앙에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어서 그랬던 것인지, 일부 취재진이 영상 카메라까지 들고 취재 중이어서 그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확실히 전재준이 보여준 냉랭함과는 다른 훈훈한 풍경이었다.
임명장을 받는 것으로 전권을 손에 쥔 유재원은 거칠 게 없어졌다.
인사말, 공치사, 구호 외치기 등등의 잡다한 행사가 끝나고 다시 유재원 차례가 되었을 때, 세대를 초월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었다.
단상에 올라간 유재원은 연단에 셸 북을 펼쳐 놓고 천장에 매달린 프로젝터와 연결했다. 프로젝터는 무척이나 비싼 물건인지라 한국에선 쉽게 볼 수 없는 물품이지만, 대단한 물주를 두고 있는 통일 국민당은 문제가 아니다.
프로젝터 중에서도 화질과 밝기, 해상도가 매우 뛰어는 삼관 프로젝터가 설치된 덕에 노트북에 띄워진 ID 프레젠스테이션 화면이 선명하게 띄워졌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저는 이번 선거운동에 컴퓨터 분석 기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생각입니다. 이른바 컴퓨터 분석 선거운동이죠.”
컴퓨터 분석이라니 옛날 기억하나가 떠오른다.
286 컴퓨터를 가지고 부모님께 88올림픽 메달 숫자를 예측해서 바닥을 치던 본인의 신용도를 대폭 상승시켰던 일이다. 그때는 컴퓨터라는 게 도깨비방망이처럼 여겨질 때라서 유효한 방법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컴퓨터가 좋은 도구임은 틀림없지만. 사람이 까무러칠 만큼 놀라운 일을 뚝딱 해내진 못한다는 걸 이제 다 알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유재원이 말한 컴퓨터 분석은 88년도와는 달리 대단히 현실적이었다. 바로 21세기의 선거운동 기법을 컴퓨터 분석이라고 포장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유권자들을 나이, 직업, 지역으로 분류하고 그에 맞춰 입체적인 선거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도시와 농촌이 바라는 공약이 다르고, 지역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안도 다르다. 세대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안 역시 천차만별이다.
이러한 현실의 데이터를 최대한 취합해, 유권자 밀착형 선거운동을 펼치겠다는 이야기다.
“여기 보시면 앞으로 만들 조직도가 있습니다.”
유재원이 차트를 넘기자 상세한 조직도가 떴다.
뜬구름 잡는 게 아니라, 진짜로 제대로 준비한 티가 딱 났다. 부산행을 마치고 통일 국민당으로부터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열심히 만들었던 것이 바로 지금 발표되는 프레젠테이션이었다. 화면에 띄워진 조직은 두 가지였다.
중앙선거대책위원회와 중앙선거대책본부다.
전자는 수평적 조직으로 다양한 계층이나 직업군을 아우르는 조직이다.
그렇기에 조직도를 보면 무슨 무슨 위원회라고 되어 있는 식이다. 노동 위원회, 노인 위원회, 농민 위원회 대학생 위원회 등등 그 숫자만 해도 30여 개를 넘는다.
반면 중앙선거대책본부는 수직적 구조를 가진 조직이다.
중앙, 도 단위, 직할시 단위, 도시 단위로 점차 내려가는 구조로 유재원이 결정한 일을 곧장 수행하는 조직이다.
통일 국민당 소속 국회의원들과 당직자, 당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기에 직위의 이름도 본부장, 실장, 단장, 부단장 하는 식으로 만들어진다.
오오!
약간의 긴장감을 품으며 유재원의 프레젠테이션을 보고 있던 의원들 사이에 감탄이 나오기 시작했다.
봐도 큼직한 타이틀이 걸린 자리가 수십 개다.
자리란 무엇인가.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선거 후 제 몫을 돌려받기가 수월하다. 이에 대한 전제는 당연히 선거에서 승리이겠지만, 현 통일 국민당 의원들과 당직자들은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조직도를 보시면 알겠지만, 숫자가 무척이나 많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소수죠. 그래서 겸직은 기본이고 세 탕을 뛰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대신 열성적으로 활동한 만큼 우리의 지지율은 폭등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힘이 좀 들면 어떤가.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서 이리저리 선을 대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였으니, 훨씬 나았다.
“중요한 건 팀워크입니다. 개인플레이는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팀워크가 제대로 발휘만 하면 민정당이든 민주당이든 무서울 게 없습니다. 그러니 맡은 바 직책에 전력을 다 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사조직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을 최대한 부드럽게 전하는 유재원이었다. 그렇지만 삐딱하게 앉아 있던 전재준만큼은 똑바로 눈을 마주 보았다. 마치 너 말이야 너 하는 것처럼.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하루 종일 하나의 이슈로 쭉 이어졌던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게다가 결과도 괜찮은 거 같아서 더욱 좋습니다. 이제 북미회담만 잘 되면 한반도에 새로운 전기가 시작할 거 같긴 한데...
합의문 만들어놓고 안 지켜진 경우도 많았으니, 방심하지 않고 잘 지켜봐야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시고, 다음 주에 봐요~~!!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