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2 New Experience =========================================================================
○ New Experience
노 대통령과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몇 마디 더 나눈 것 같았는데 다들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워낙 충격적인 전화였던 탓이다. 그나마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유재원이다.
‘이 양반이 무슨 바람이 나서 전화를 직접 한 거지?’
의문은 초원 복국집 사건이 노 대통령이 직접 전화까지 할 사안이냐는 것이다.
전화는 그다지 좋은 통신수단은 되지 못한다. 녹취를 따기도 쉽고 도청이나 감청도 쉽게 가능하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은 그 위험을 감수하면서 직접 전화를 했다.
유재원은 잠깐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곧 답을 찾았다.
똥줄이 탔던 건 전명헌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노 대통령도 전명헌의 지지율이 급상승할 때마다 무척이나 다급해졌을 거다.
그가 속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김영삼이 정권을 인수해야 자신의 노후보장이 이뤄질 거로 생각하고 있었을 터인데, 뜬금없이 전명헌이 급부상하니 퇴임 후의 그림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을 거로 추측할 수 있다.
그렇게 다들 머릿속이 복잡할 때, 갑자기 사무실 문밖이 소란스러웠다. 그러다가 문이 벌컥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전재준이었다.
“이 자식아!”
그와 함께 꾹꾹 누르고 있었던 전명헌의 분노도 폭발했다.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테이블 위에 있던 물컵을 잡아서 냅다 전재준에게 던져버렸다. 그나마 다행히 물컵은 전재준을 살짝 빗겨 날아가며 와장창 터졌다. 대신 안에 담겨 있던 냉수는 그대로 전재준에게 쏟아졌다.
전명헌의 화는 그것으로도 풀리지 않는지, 책상 위에 있던 수첩이나 유인물 급기야 전화기까지 내던졌다.
“꼴도 보기 싫다! 당장 꺼져!”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물벼락과 함께 전명헌의 분노가 쏟아지니 전재준은 말할 틈도 없이 쫓겨났다. 황당함과 섭섭함이 가득한 얼굴을 보면 전명헌이 왜 분노를 토해내는지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전명헌은 이미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알고 있었다.
초원 복국집 종업원이 양심선언을 하겠다고 한 것도 유재원의 보고를 통해 들었고, 전재준이 본인의 공명심 때문에 차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서울로 와버렸다는 것도 인지한 상태였다. 물론 전재준이 백강호를 돕기 위해 부산으로 차를 돌렸다더라도 청와대가 대놓고 움직였으니 실패할 가능성은 무척이나 크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전화 한 통에 눈이 돌아간 전명헌에겐 전재준의 트롤 짓으로 모든 게 어긋나버렸다는 생각이 콱 박혔다.
“헉, 헉, 미안하다. 못난 할애비에 못난 저 녀석까지……. 네가 고생이 많구나.”
전재준을 쫓아낸 이후에도 한참을 쏟아낸 전명헌은 그제야 이성이 돌아왔는지 뒤늦은 사과를 했다.
“헉, 헉. 이제 방법은 없는 것이냐?”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플랜 B가 있습니다.”
말이 플랜 B였지, 사실상 유재원에겐 원래의 계획이었다.
전명헌과 이렇게 가까워지고, 전명헌의 지지율이 폭등할 거라는 건 전생에 못했던 일이어서 마스터플랜에는 없는 일이었지만, 상식적으로 따졌을 때 그나마 달성할 수 있는 목표는 플랜 B였다.
플랜 B라고 거창하게 지칭하는데, 그다지 대단한 건 아니었다.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 둘 중 하나의 지지 선언을 해서 그를 대통령에 올려놓고 권력 일부를 나눠 갖는다는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21세기 선거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일이었지만, 92년 지금에는 무척이나 낯선 일일 거다. 그러니 전명헌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후보님, 선거판에 뛰어들 때의 초심이 무엇이었습니까?”
초심?
유재원의 말에 잊고 있던 각오가 하나 떠오르는 전재준이다.
한국 최대의 재벌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겠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전명헌의 전성기 시절 한국은 금권보다 정치권력의 힘이 훨씬 강했고, 재벌들은 그저 정치권력의 저금통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국민투표로 뽑힌 노 대통령도 다르지 않았다.
참다 참다 폭발한 전명헌은 그깟 정치 본인이 하면 더 잘할 수 있다며 뛰어들었다. 여기에 유재원이 가세하자 놀랄만한 성과가 쏟아졌다. 솔직한 심정으로 대선에서 지지율이 30%에 육박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지지율이 높게 나오니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조금만 더 올라가면 1등인데, 비관적 전망도 함께 나온 탓에 화려한 갈지자 행보까지 펼쳤다.
“저놈들에게 주먹 감자 한 방 먹여주고 싶다.”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 전명헌은 초심을 찾는 데 성공했다.
“예, 바로 그겁니다. 그리고 그건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 목푭니다.”
1등은 되지 못하지만, 양 김 중 누구 하나를 1등으로 만들어주는 건 쉬운 전명헌이었다. 더욱이 양 김 모두 군부 정권에 쌓인 게 무척이나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면 누구를 선택해야 하느냐? 김대중이겠지?”
전명헌은 심적으로 김영삼이었다. 경제와 통일에서는 파격적인 공약을 내던 통일 국민당이지만, 정치적 노선은 상당히 보수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김영삼은 노 대통령과 같은 편이니 선택할 수 있는 건 김대중뿐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둘 중 누가 후보님이 가진 표를 높이 사주는가, 약속을 잘 지킬 것인가가 중요한 거죠. 선거는 9일 남았으니 그동안 몸값을 최대로 올리는 게 관건입니다.”
유재원의 답은 간단했고, 이해하기도 쉬웠다.
“그러면 내가 좀 아파서 병원 신세를 지어야겠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던 전명헌이 갑자기 병원 타령이었다.
“구급차 좀 불러다오.”
“구급차요?”
“흐흐, 뜬금없이 단일화를 한다고 나서면 유권자들이 얼마나 허탈하겠느냐? 자연스럽게 단일화를 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전명헌의 말에 유재원은 탄성을 냈다.
확실히 나이에서 오는 연륜은 무시할 수 없었다. 정치 공학적으로 따지기만 했던 유재원은 지지자들의 감정을 챙기는 게 살짝 부족했다.
“그렇게 우러러볼 것 없다. 오늘 워낙 다채로운 일이 있던 탓에 좀 힘이 부쳐 영양 주사나 맞을까 했는데, 그게 그렇게 이어지더구나.”
유재원은 전명헌을 다시 보았다.
얼굴에 가득한 주름과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검버섯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워낙 열정이 넘쳐서 나이는 보이지도 않았는데, 지금 보니 여느 할아버지들과 다르지 않았다.
다음 날.
-속보! 전명헌 후보, 유세 돌연 취소!
-전명헌 후보, 건강에 적신호!
-이산병원 응급실에서 전명헌 후보 목격담!
-통일 국민당, 단순 피로감일 뿐. 위급 상황 아니야.
아침 일찍 쏟아지는 조간신문에 어제 있었던 굵직한 일들이 커다란 제목의 기사로 실렸다. 다른 기사들도 많았을 테지만, 이날 만큼은 모조리 전명헌의 병원행 기사가 모든 신문의 1면을 차지했다.
지지율이 30%가 넘는 후보가 건강을 이유로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실려 갔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일부 국민은 전명헌이 나이가 많으니 그럴 수도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동시에 엄한 불똥이 김대중 후보에게도 튀었다. 전명헌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나이가 있으니 건강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는 시선이 강해진 것이다. 덕분에 김대중 후보는 팔자에도 없는 건강 진단서를 받아서 공개하는 해프닝도 일어났다.
당연한 일이지만, 김영삼과 김대중 후보도 유세를 중단하고 전명헌이 입원한 이산병원을 찾아와 문병했다.
앙숙인 둘이 한날한시에 찾아온 건 아니었다.
서울에서 유세 중이었던 김대중 후보가 제일 먼저 찾았고, 다음이 김영삼 후보였다. 김영삼 후보는 부산에서 유세 중이었다가 상경을 해야 했기에 소식을 들은 다음 날에야 찾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문병하러 온 두 후보와 전명헌은 독대를 나눴다.
독대의 자리에서 전명헌은 건강상의 이유로 대선의 완주가 어렵게 됐다는 말과 함께, 적절한 대가를 약속한다면 지지 선언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을 전했다. 물론 세부적인 사항은 유재원과 논의하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병문안을 가장한 독대 이후 선거판도가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잠시 찬밥 신세가 되었던 유재원의 사무실로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뭔가 냄새를 맡은 기자들 그리고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유재원 곁을 맴돌기 시작했다.
대선 D-4일.
유재원은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며 복잡한 인문학적 방정식을 푸는 중이었다.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적막한 이곳은 서울 용산구 한남동 유엔빌리지에 마련된 ID 그룹 소유의 안가였다.
전명헌이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간 이후로 시장통같이 변한 통일 국민당 사무실은 이제 제 기능을 상실했다. 게다가 청와대의 움직임도 노골적이어서 아무리 대비해봐야 도청의 위험성이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들어왔고, 전명헌 후보나 선거대책본부 등과는 인터넷과 특수한 전화로만 소통하는 중이었다.
현재 유재원의 머릿속에 있는 문제는 김영삼과 김대중 누구를 선택하는 게 더 나을까 하는 문제였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점심때가 다 되는 지금까지도 고민 중이었다. 시간은 헛되지 않았기에 지금은 그 답을 거의 다 내놓았다.
“애초에 선택은 정해진 거였지.”
유재원의 선택은 김영삼이었다.
전명헌의 지지 선언의 대가로 내놓은 걸 보면 김대중 후보의 제안이 훨씬 컸다. 단순히 차기 내각에서 몇 자리 정도 내주는 것이 아니라, 민주당과 통일 국민당의 공동 정부를 꾸리는 수준이었다.
반면 김영삼 후보 측은 장관직 몇 자리를 비롯한 대통령이 가진 인사권 일부를 내주는 수준이었다. 두 후보 사이의 지지율 차이가 제법 크니, 김대중은 다급했고 김영삼은 느긋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지날 때마다 김영삼 측도 조바심이 커지면서 대가가 점점 올라가긴 했다. 결국, 전명헌의 총리 지명까지 나왔다. 그렇지만 두 후보의 제안을 놓고 비교해보면 김영삼 측이 훨씬 모자라는 건 사실이다.
“때로는 조금 모자라게 먹는 게 정답일 때도 있는 거지.”
유재원의 선택은 김영삼이다.
객관적으로 따진다면 14대 대통령직을 가장 잘 수행할 사람은 김영삼보다 나은 인물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군대에는 하나회는 물론 일심회 같은 사조직이 버젓이 살아 있었고, 안기부와 경찰은 군사 정권이 임명한 사람들이 아직도 가득했다.
이럴 때 불도저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하나회를 쓸어버릴 사람, 조선총독부 건물을 순식간에 폭파해버리는 깡다구가 있는 사람은 김영삼이었다.
“문제는 지역감정의 고착화겠지만, 해법이 없는 건 아니지.”
김영삼의 원죄는 삼당 합당이었다.
이를 통해 뭉친 부·울·경의 강력한 결집력은 한국의 민주화 수준을 떨어뜨리는데 강력한 능력을 발휘한다.
복잡한 문제인 만큼 유재원의 해결책은 조금 과격했다.
군부 독재의 완벽한 청산이다. 원래 김영삼도 군부에 당한 게 많았기에 청산 작업은 철저했다. 임기 중반에 군부 출신 두 대통령을 잡아다 재판에 세웠고, 사형 판결까지 받아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임기 말에 사면을 결정했고, 그걸 후임자에 떠넘겨버리는 패착을 저지르고 말았다. 덕분에 살아남은 두 군부 출신 대통령은 수구의 아이콘이 되어서 두고두고 발목을 잡았다.
유재원은 여기를 파고들었다.
사면 따윈 없이 바로 사형을 집행하도록 약속을 받아 놓을 거다. 약속만 받고 손을 터는 게 아니라 약속이 지켜지도록 끊임없이 압력을 행사할 작정이다.
김영삼이 유재원 본인이나 ID 그룹에 대해 호감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이를 갈고 있다는 건 익히 인지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IMF가 터지면 버틸 수도 없을 거다. 그렇게 김영삼이 직접 군부 출신 대통령을 사이좋게 하늘로 보내버리면 삼당 합당의 구심점도 붕괴할 것이고 지역주의도 박살이 날 것이다. 반면 전명헌과 통일 국민당은 대선 이후에도 건재할 것이고, 보수 세력의 강력한 대안으로 성장한다는 로드맵을 만들었다.
안타까운 건 김대중 후보다. 지금 기대가 무척이나 큰 거 같은데, 그만큼 실망도 클 것이다. 게다가 유재원은 김대중 후보를 위해 딱히 다른 대안을 만들어두지도 않았다. 알아서 잘하는 양반이기도 했고, 어지간한 변수만 없다면 차차기는 확정이기 때문이다.
“어휴, 진짜 진이 다 빠지네.”
컴퓨터에 생각을 정리한 유재원은 가까운 소파에 풀썩 누웠다.
이마를 만져보니 열이 후끈 느껴진다. 수학 7대 난제를 풀었을 때도 이렇게 머릴 써보진 않았다. 역시 답이 딱 떨어져 나오지 않는 인문학적 난제는 유재원 자신에겐 무리라는 걸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이딴 선거는 다신 안 한다.”
14대 대선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사건인도 모르고 겁도 없이 달려든 것에 대한 뼈저린 반성도 잊지 않았다.
다음 날.
-요 며칠간 당원 동지 여러분, 지지자분들 그리고 국민께 심려를 끼쳐드린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텔레비전에 전명헌 후보가 국회 정론관에서 중대 발표문을 읽는 중이었다.
전명헌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듯, 공중파는 물론이고 온갖 매스컴에서 촬영을 나와서 시장통을 방불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언론사에다 전명헌 후보의 발표문의 요지에 대해서 사전에 공지했던 탓이다. 엠바고를 걸어 놓긴 했는데, 지켜질 거라는 기대도 안 했고 실제로 지켜지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단일화는 누구에게 할 것인가는 직접 와서 들으라고 했다.
오늘로써 전명헌의 14대 선거 운동은 끝나는 것이기에 최대한 화려한 자리를 만들어주려는 유재원의 생각이었고, 덕분에 정론관 안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혼잡했다.
전명헌 후보는 담담히 선거 운동에 대한 소회를 말했고, 건강 상태에 대해서도 숨기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지병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노환 때문이니 숨길 것도 없었다.
-단지 국가 원수의 건강은 국가 안보와도 직결되기에 선거를 계속하는 게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도 부담될 겁니다. 그렇기에 본인 그리고 통일 국민당의 정치 성향과 비전에 대해 제일 큰 공감을 해준 민정당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며 그만 물러서고자 합니다.
김영삼이란 이름이 나오는 순간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보수적인 성향의 매스컴은 환호성을 터트렸고, 민주당 성향의 사람들은 으악 하는 비명을 터트렸다.
통일 국민당 지지자들 역시나 비슷한 반응이었다.
전명헌을 지지하는 사람이 대다수이긴 했지만, 실망감을 넘어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동시에 유재원을 욕하는 사람들도 수도 없이 많았다. 단적으로 민주당 사람들과 그 지지자에겐 유재원은 김대중의 대통령 길을 막은 철천지원수로 등극했다.
중도에 서지 않고 딱 떨어지는 결정을 선택할 때부터 충분히 예견한 반응이었다.
엄청난 혼란 속에서 시간은 무심히 흘렀고, 18일이 되면서 역사적인 14대 대통령 선거를 위한 투표가 전국에서 시작되었다.
결과는 싱거웠다.
김영삼 후보는 48%, 김대중 후보는 36%, 전명헌을 그대로 찍은 무효표 12%. 나머지는 4%를 군소 후보들이 차지했다.
압도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지율이었기에 개표를 시작한 지 3, 4시간 만에 당선 확실해졌다. 그때 즈음하여 동교동 자택에서 나온 김영삼은 측근과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서 활짝 웃었다.
문민정부의 태동이다.
다음 날.
유재원은 조용히 김포국제공항에 나타났다.
통일 국민당의 선거는 5일 전에 끝났고, 개표 결과를 본다고 끝까지 밤을 지새우지도 않았다. 서울에서 덕진리로 내려와 부모님이 해주시는 밥 먹고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안부 인사도 하면서 출국 준비를 마쳤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는 정치 성향에 따라 투표 전날까지 유재원을 가지고 지지고 볶았지만, 집까지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없었기에 편안한 시간이었다.
“이제 가면 언제 올 거냐?
조용히 왔지만, 배웅이 없는 건 아니었다.
모자와 목도리로 꽁꽁 싸맨 전명헌이 출국장까지 동행해주었다. 유재원과는 달리 개표 결과를 본다고 밤을 새운 통에 피곤이 가득한 얼굴이지만, 유재원을 챙기는 데 있어 소홀함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만약 유재원을 무시하고 멋대로 나댔다가, 2등이나 3등으로 낙선했다면 후폭풍은 본인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통일 국민당은 물론 그가 목숨처럼 지키는 미래 그룹까지도 영향이 미쳤을 거란 생각이 이어졌다.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는 유재원이었으니, 전명헌이 유재원을 바라보는 눈빛은 친손자를 보는 것보다 따스했다.
“글쎄요. 밀린 일이 많아서 대전 엑스포 개막 직전에나 가능할 거 같네요.”
93년도부터는 할 일이 많은 유재원은 3달이나 진행되는 엑스포 기간에 계속 한국에 있을 순 없고, 개막 당일부터 3일 정도만 있을 예정이었다.
“그래. 그럼 그 때보자꾸나.”
“예, 전화는 종종 할게요. 아예 인터넷을 배워두시면 전자메일이나 채팅으로 훨씬 편하게 접속할 수도 있고요.”
“알겠다. 노력해보마.”
노력해보겠다고 하시지만, 기대는 하지 않는 유재원이다.
“그럼 가볼게요. 건강 조심하세요. 총리님”
“흐흐, 아직 국회 인준도 안 받았는데 무슨 총리냐. 그리고 앞으로 재원이 너는 내 직위에 상관없이 무조건 할아버지라 불러라.”
전명헌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선거에서 전재준에겐 학을 떼긴 했지만, 전명헌은 막판 조금 삽질한 것 빼고는 유재원의 지시를 잘 따른 최고의 플레이어다. 전명헌과의 작별 인사를 마친 유재원은 몸을 돌려 출국장으로 나아갔다.
역사적 사건 하나를 잘 마무리했다는 생각에 그 발걸음은 너무도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