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New Experience ==============================
홈, 스위트 홈.
영화나 소설에서 집에 대한 그리움과 따스함을 말할 때 시작하는 표현이었다. 유재원은 그걸 볼 때마다 무척이나 상투적이다 싶었다. 그런데 막상 샌프란시스코 집에 도착하니 그 말이 딱 떠오르는 게 아닌가.
살을 에는 차디찬 칼바람이 부는 한국과 달리, 샌프란시스코의 12월 날씨는 추워 봐야 영상 6, 7도에 지나지 않았다. 두툼한 스웨터 하나를 걸치면 다른 외투는 필요 없을 정도의 기온이라서 활동하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집은 떠날 때와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약간의 먼지가 내려앉아 있는 걸 빼면, 누구도 들어온 흔적이 없었다. 유재원이 있든 없든 매일 경비를 서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청소기를 돌려 먼지를 털어낸 유재원은 곧장 침대로 직행했다.
“다음 스케줄은 일단 자고 나서 생각하자.”
언제나 활력이 넘치는 유재원이었지만, 한 달이 넘는 선거 운동에 집중해야 했고, 막판엔 상당한 스트레스도 받으면서 쌓인 피로가 어마어마했다. 시골집에서 3일 자는 거로는 풀리지 않을 정도다.
침대로 몸을 던진 유재원은 곧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날.
“아, 살 것 같다.”
확실히 집에서 자는 건 느낌이 달랐다. 시골집이 최고였지만, 이곳 샌프란시스코 집도 그에 못지않았다.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한결 가벼운 몸으로 유재원은 침대를 벗어났다. 입맛도 되살아났는지 시장기도 확 돌았다. 아쉽게도 장기간 집을 비운 터라 냉장고에 남은 음식은 하나도 없어서 밖으로 나가 먹고 돌아왔다.
배를 채우고 돌아오면서 장도 봐서 냉장고를 채워 넣었다. 커다란 냉장고와 식량 창고를 한 방에 채운다고 바리바리 사 들고 왔다. 항상 자석처럼 따라다니는 그렉과 피셔가 도와준 덕에 여러 번 왕복할 필요는 없었다.
집에 음식이 넉넉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 유재원은 오랜만에 서재로 가서 컴퓨터를 켰다.
항상 최고의 부품으로 만든 자체 제작 컴퓨터였기에 부팅은 시원스레 진행되어서 몇 초 만에 로그인 화면이 나타났다.
이젠 익숙하다 못해서 살짝 지겹기도 한 안드로이드 1.0의 화면이었다.
“아, 이것도 업그레이드해야겠다.”
한국에서 있을 땐 만지는 컴퓨터마다 최신 버전을 받아서 모두 업그레이드해두었는데, 정작 본진 컴퓨터는 한 달이 넘게 방치되면서 업그레이드가 미뤄진 것이다.
안드로이드 2.0은 아직 베타 버전이긴 해도 1.0과의 기능 차이는 상당했기에 업그레이드하는 게 무조건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회사 업무를 시작하는 게 더 중요했기에, 일단 로그인을 하고 ID 톡과 넥스트컴에 접속했다.
띵띵띵!
로그인하자마자 알람이 연달아 터졌다.
선거 운동을 끝내고 시골집으로 돌아간 후 거의 5일 동안은 미접속 상태에 있다가 처음으로 접속한 터라, 회사의 온갖 보고 사항들이 쏟아지는 것이다.
다행히 대부분 알람은 프로젝트나 과제의 진행 상황을 보고하는 단순 메시지였다. 시간을 다투는 사건이나 결재 사안이었다면 최강욱이나 레밍턴이 직접 전화를 걸어서 유재원의 판단을 물었을 것이다.
유재원은 느긋한 표정으로 메일함에 쌓여 있는 보고서들을 펼쳐보았다.
메일 제목만 봐도 대충 ID 그룹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하고 숫자도 많았다.
-신 일본투자은행, 인수기업 정상화 상황 보고.
-넥스트컴캐스트, 디지털 방송 시스템용 셋톱박스 테스트 결과 보고.
-넥스트컴캐스트, 광케이블 구매협상 보고서.
-ID 테크놀로지, 클라우드 데이터센터를 위한 정전설비 시범 가동 보고서.
-ID 소프트웨어, 둠 2 출시 준비 완료.
-회장님! 놀라지 마세요! 모델1이 4대나 팔렸습니다!
몇 분 전에 라이트닝 볼트에서 날아온 제목 형식이 좀 색다르긴 해도, 이메일의 내용은 한결같았다.
모든 일이 척척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다.
천편일률적으로 다 괜찮다고 한다면 알아보기 귀찮아서, 혹은 잘못된 걸 숨긴다고 대충 잘 진행되고 있다고 보고하는 거라면 최악이겠지만, 그런 정신 나간 간부는 ID 그룹에 없었다. 조직이 방대해질수록 감사실이 미치지 못하는 곳도 생겨나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유재원의 방대한 기억력은 아직도 건재했다.
ID 테크놀로지가 인수한 조그만 신생 기업부터,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새롭게 생겨난 신 일본투자은행까지도 조직 구조는 유재원의 머릿속에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좀 오래된 거라면 잠깐 눈을 감고 기억의 궁전에 들어갔다 나와야 하지만, 말단 직원 이름까지도 다 기억하고 있으니, 허튼짓하면 바로 감지할 수 있다.
“흐흐, 내가 조직 하나는 잘 만들었어.”
자화자찬도 이어졌다.
구체적인 비전만 딱 제시해주면, ID 그룹 식구들은 본인들이 가진 최고의 역량을 동원해서 처리하고 있다는 걸 잠깐 쌓인 보고서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모델1이 4대나 팔렸다고?”
유재원의 호기심을 확 잡아끈 것은 당연하게도 라이트닝 볼트의 마이클 볼튼 사장이 보낸 이메일이었다.
모델1이란 유재원이 대학교에 타고 다니기 위해 의뢰한 첫 번째 전기 자전거였다. 유재원도 별다른 이름을 주지 않았고, 제작자인 마이클 볼튼 사장도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중에야 그걸 알아차렸는데, 작명 실력에 자신이 없던 볼튼 사장이 이름을 두고 얼마나 고심했는지 모른다. 결국, 단순하고 무난하고 개성도 없는 모델1이란 이름으로 명명했다.
속사정은 따로 있다.
스탠퍼드 대학교나 실리콘밸리에선 유재원이 잘 타고 다닌다고 해서, 유재원 자전거라는 별명이 진작 붙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식 상품명에 유재원이란 이름을 붙일 수는 없으니 결국 모델1이 된 것이다.
“10만 달러짜리 자전거를 사는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야?”
궁금증이 폭발한 유재원은 얼른 메일을 열었다.
유재원도 라이트닝 볼트의 기술이 전기 자동차와 연결이 되는 게 아니었다면, 그냥 모터 달린 자전거나 타고 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투자하면 나중에 강력한 기술이 되어 돌아올 거라는 기대에 돈을 넣었다.
“대박이네.”
메일을 열어보니 더욱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팔린 4대 중 2대는 무려 인터넷을 통해 팔렸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트닝 볼트의 마이클 볼튼 사장은 무척이나 성실한 양반이었다. 유재원은 그저 기술개발만 해도 좋다고 했지만, 그는 스스로 판로를 개척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자전거 판매소를 돌면서 모델1의 브로셔를 걸어 놓는 건 기본이고, 인터넷에다 판매용 사이트를 개설하기도 했단다.
인터넷 판매 사이트 주소도 메일 안에 들어 있었기에, 유재원은 바로 접속해보았다.
입이 떡 벌어졌다.
“세상에, 이걸 보고 10만 달러짜리 자전거를 지른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네.”
라이트닝볼트닷컴이라는 이름의 판매 사이트는 유재원이 상상했던 인터넷 쇼핑몰과는 100만 광년쯤은 뒤떨어진 모습이었다.
인터넷이 시작된 지 1년 조금 지났으니, 모든 기술과 디자인은 단순하고 기초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라이트닝볼트닷컴은 최소한 갖춰야 할 것도 갖추지 못했다.
쇼핑몰이라면 판매하는 물건의 모습을 디테일하게 보여주는 사진이라도 다수 수록하고 있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유재원의 눈앞에 열린 판매 사이트에는 사진 자체가 몇 개 없었다.
사진도 크기도 작았고, 디테일도 잘 드러나지 않았다.
“이거 마이클 사장님이 직접 찍은 거 같은데?”
사진사에게 의뢰했으면 그나마 좀 좋게 찍어줬을 텐데, 서툴게 찍은 티가 너무도 역력했다. 대신 모델1의 스펙은 자세히 적어놓긴 했다. 다만 너무도 자세히 적어놓은 바람에 전문가가 아니면 원하는 정보를 찾기도 힘들 지경이다.
가장 중요한 결제도 선결제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10만 달러를 라이트닝볼트닷컴 계좌에 송금하면 배송을 시작한다는 이야기다. 유재원이 봤을 때, 이걸 보고 구매한 사람의 심리가 너무도 궁금해졌다.
“산업스파이인가?”
오죽하면 기술을 빼가려고 모델1을 샀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전기 자전거를 만드는 데 들어간 기술은 그다지 특별한 건 없었다. 핵심 기술이라고 해 봐야 탄소 섬유, 리튬 배터리, 모터가 전부였다.
하여튼 인터넷은 생각보다 더 빨리 발전하고 있고, 사람들도 빠르게 적응 중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증거였다.
“그럼, 오늘 일정은 데이터센터부터 시작해볼까.”
원래 유재원은 학교에 먼저 들려 교수님께 복귀한다고 인사를 드리러 갈 참이었다.
선거 운동을 한다고 한 달이 넘게 학교에 나가지 않았으니, 교수님을 뵙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학교에서 할 일도 몇 가지 있었다. 하지만 마이클 볼튼 사장의 이메일에 고무된 유재원은 생각을 바꿨다.
클라우드 컴퓨터 기술로 완성된 데이터센터는 ID 그룹의 새로운 심장이었다. 얼른 달려가서 그 심장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살펴보고 싶었다.
유재원은 곧장 본인의 스케줄 보드를 열고 수정에 들어갔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가보고 싶다.
그도 그럴 것이 데이터센터는 샌프란시스코 남쪽에 코요테라는 작은 도시에 있다. 차로 30분이면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이다. 하지만 지금 곧장 가는 건 아니고, 거기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배려해서 오후 첫 스케줄로 잡았다.
한국과 비교해서 수평적인 조직 문화가 있는 미국이라도 유재원이 갑자기 방문하면 적색경보를 일으킬 일이니 조금 참기로 했다.
“회장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서늘한 겨울임에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30대 초반의 남자가 유재원을 맞이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웰스파고의 커다란 전산망을 관리하다가 ID 그룹에 스카우트 되어 클라우드 데이터센터를 맡게 된 조셉 윌슨이다.
조셉의 얼굴에는 다급히 티가 역력했다. 뜬금없는 타이밍에 유재원은 물론이고, 그룹 고위직들이 우르르 찾아 왔으니 절로 긴장될 수밖에 없을 거다.
1만2천 대나 되는 PC를 하나로 묶어서 클라우드 컴퓨터를 세팅하는 일도 낯설었고, 그걸 한데 모아 강력한 컴퓨팅 파워를 끌어내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컴퓨터와 컴퓨터를 잇는 네트워크 스위치는 시스코에서 만들었고, 그곳에서 파견된 엔지니어들은 아직도 열심히 작업 중이었다.
당연히 데이터센터 안은 정리도 안 된 상태였는데, 회장인 유재원이 온다고 하니 난리가 난 거다.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셨죠? 그냥 좀 어떻게 준비되고 있나 궁금해서 찾아와 봤어요. 가동 준비가 미비하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안내해주세요.”
그 점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유재원은 땀을 흘리는 조셉 센터장을 잘 다독였다. 덕분에 적잖게 안심이 된 조셉은 유재원과 그 수행원을 이끌고 센터로 향했다.
“일단 센터 통제실로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좀 멉니다.”
“괜찮아요. 얼른 가봐요.”
조셉 센터장은 빈말이 아니었다.
입구에서 통제실까지 거의 7분을 걸어야 할 만큼 멀었다. 그냥 걷기만 한 게 아니라 3단계나 되는 보안 절차를 통과해야 했다.
제일 먼저 출입증을 체크했다. 유재원과 수행원들은 건물 앞 초소에서 발행받은 임시 출입증으로 통과를 받았다. 다음으로 금속 탐지기가 있다. 데이터센터에 들어올 때 무단으로 자료를 유출한다거나, 컴퓨터 바이러스를 입력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저장 매체 반입 불가다. 마지막으로 지문 인식 장치를 넘어야 데이터센터 전체를 관리하는 통제실에 들어올 수 있었다.
각각의 보안 단계에 따라 보안 요원이 배치되어 있는데, 데이터센터 소속이 아닌 ID 그룹이 직접 고용한 사람들이었기에 데이터센터 소장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다.
그렇게 여러 단계를 넘어들어온 통제실은 단출했다.
컴퓨터 몇 대와 모니터 몇 대가 전부였다.
21세기라면 벽 한쪽을 대형 스크린을 걸어놓고 서버의 상태나 인터넷 연결 상태를 통제소에서 한눈에 볼 수 있게 했을 터인데, 지금은 기술이 부족해서 이게 최선이었다.
“아직 설비 설치가 끝나지 않아서 이렇습니다.”
게다가 조셉 센터장의 말처럼 설비가 다 설치된 것도 아니었다. CCTV나 여러 가지 관리용 도구가 설치되면 지금보다는 알차게 보일 것이다.
유재원은 상관없었다.
통제실 앞쪽 전면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1만2천 대의 클라우드 서버의 모습만으로 이미 압도적 위용이 뿜어졌기 때문이다.
AMD사의 K5 PR66이라는 펜티엄급 CPU에 메모리는 4메가, 하드디스크는 560메가가 채용된 PC가 1만2천 대였다.
랙마운트 케이스에 담아 10단을 쌓았고, 그렇게 10개씩 묶인 랙마운트 타워가 1,200개다. 가로로 30개를 놓았고, 그런 줄이 40개나 있다. 축구장 넓이의 공간에 촘촘히 세워진 타워들은 녹색의 불빛을 불규칙적으로 깜박였다.
마치 컴퓨터의 숲이 생생히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컴퓨터 부품과 네트워크 장비, 정전대비용 전력공급장치, 조립을 위한 인건비는 물론이고 이 거대한 데이터센터 건물을 짓는 것까지 총 600억 원 정도 들어간 사업이었다. 컴퓨터값만 생각하고 있다가 점점 불어나는 사업비용에 잠깐 고민도 했었던 유재원이지만, 이 장관을 보니 들인 돈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성능 테스트는 해봤나요?”
클라우드 서버들의 위용을 유재원과 나란히 서서 뿌듯하게 지켜보던 센터장의 얼굴에 그늘이 떴다.
“아, 그것이…….”
테스트는 매일 하는 중이다.
하지만 유재원에게 아직 정식 보고를 하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설계했던 성능에 아직 한참 모자란 탓이다.
펜티엄급 PC를 1만2천 대나 연결했으면, 적어도 슈퍼컴퓨터 TOP10 안에는 드는 성능은 나와줘야 했다. 하지만 지금도 TOP10은커녕 TOP50에도 들지 못했다. 개별 컴퓨터의 성능은 펜티엄급으로 잘 나오는데, 전체를 하나로 합쳐 놓고 연산을 시키면 여기저기서 병목현상이 발생해 설계했던 성능이 나오지 않는다.
“하드웨어적인 이슈도 있고, 소프트웨어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뭐지?
개그 치는 건가? 센터장의 대답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느낌이다.
농구팀 감독이셨던가? 작전 타임에 우리가 안 되는 게 있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공격과 수비란다. 즉 총체적난국이라는 소리다. 컴퓨터 역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문제라면 모든 게 문제라는 소리다.
데이터센터를 만들기 위해 들인 시간과 돈이 얼마던가. 덕분에 날카로운 가시가 돋친 말이 막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유재원은 참았다.
클라우드 서버라는 개념은 나온 지 좀 되긴 했다고 해도 이만큼 대규모로 만드는 건 유재원이 처음이었다. 처음이라는 건 늘 시행착오가 있기 마련이니 지금은 감수해야 할 문제였다.
“에휴, 한 번 직접 봅시다.”
더욱이 유재원은 답답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전생에 인공지능을 바닥부터 다룬 사람이었고, 인공지능의 하드웨어를 구성하는 지식도 충분했다.
오너가 살펴본다는 데, 막을 이유도 권한도 없었기에 조셉 센터장은 곧장 메인콘솔 자리로 유재원을 안내했다.
반가운 안드로이드 바탕화면이 유재원을 반겼다.
이렇게 규모가 큰 시스템은 유닉스가 설치되는 게 보통이지만, PC 운영체제를 만드는 ID 그룹이니 자사의 운영체제를 사용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일반형 안드로이드 1.0을 그대로 적용한 것은 아니고, 네트워크 기능을 강화한 특별 버전이었다.
“연결 상태는 좋네요.”
1만2천 대의 컴퓨터는 통제실의 메인프레임과 네트워크로 잘 연결되어 있다.
이걸 한눈에 보여주는 게 바둑판으로 보이는 상태 창인데, 정상을 상징하는 녹색 불이 1만2천 개나 찍혀 있었다. 그 많은 점을 한 화면에 표시할 수도 없어서 끝까지 내리는 데 한참을 스크롤 해야 할 정도다.
화면에서 보는 건 참 간단한데, 하드웨어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은 어려운 작업이다. 랜카드와 네트워크 허브를 일일이 연결하고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정하는 작업은 시스코의 전문가들도 학을 떼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이번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시스코의 네트워크 기술력은 한 차원 더 높아질 것도 자명하다.
시스코의 대주주인 ID 그룹에게도 좋고 시스코에도 좋은 일인지라, 파견 나온 엔지니어들은 최선을 다한 결과가 지금 유재원이 보는 상태 창이었다.
유재원은 곧장 벤치마크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다양한 분산처리 예제를 실행해서 결과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내부에서 평가용으로 만든 것이라서 화려한 그래픽도 없고, 단순한 콘솔화면에 글자와 숫자만 나오는 프로그램이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문제가 바로 보였다.
렌더링과 같이 분산처리가 쉬운 건 슈퍼컴퓨터 이상의 속도였는데, 소수 찾기와 같이 계산 결과를 참조해서 새로운 연산을 해야 하는 과제의 경우 속도가 너무 떨어졌다. 수치만 보면 2년 전에 나온 크레이 슈퍼컴퓨터가 훨씬 빠른 수준이다.
원인을 파악하기도 쉬웠다.
실행하는 것도 느렸고, 결과가 나오는 것도 느렸다. 컴퓨터들 사이의 네트워크 연결 상태는 좋았지만, 서로 데이터를 주고받는 속도가 느린 탓에 전반적인 속도 저하가 일어났다.
비단 네트워크 속도 하나만 문제는 아니다.
아무리 펜티엄급 최신의 CPU라지만 그래도 느렸고, 메모리 전송 속도도 느렸다. 랜 카드의 속도도 느리고, 하드디스크를 읽고 쓰는 속도도 느렸다.
하여튼, 컴퓨터를 구성하는 모든 부품이 다 느렸으니, 1만2천 대를 묶은 클라우드 컴퓨터라도 속도가 느린 건 당연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종합해보면 훨씬 간단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근본 원인은 거북이처럼 느린 반도체지.”
컴퓨터 부품의 최소 단위는 역시 반도체다. 반도체의 작동속도가 느리니 모든 게 다 느린 것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반도체의 작동속도를 높인다면 단박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소리였다.
그것으로 유재원의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
스탠퍼드 대학교였다. 본래 스케줄이었던 ID 테크놀로지의 방문은 또 뒤로 미뤄놓고 곧장 대학교로 가서 지도 교수님을 찾아가 다짜고짜 물었다.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혹시 반도체 퍼포먼스 향상을 위해 진행하는 연구가 있다면 리스트 좀 주실래요?”
교수님은 너무도 오랜만에 유재원을 보는 거라 안부부터 물으려 했는데, 갑자기 훅 들어왔다. 그래도 당황하진 않았다. 스탠퍼드에서 교수 일을 하면서 하나 꽂히면 주변은 안 보이는 사람이나 학생들은 수도 없이 봤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기의 천재가 완전 생뚱맞은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 꽂혀서 거의 두 달이나 학교를 찾지 않은 것에 비하면, 이번엔 너무도 바람직한 관심이었다.
“호오, 다행히 이번엔 반도체에 꽂혔구나.”
츄쳉 교수는 유재원이 또 변덕을 부릴까 봐 곧장 컴퓨터를 켜고 학교 인트라넷에서 검색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