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237화 (237/1,007)

[237] New Experience =========================

사람에게는 누구나 커다란 기회가 최소 3번은 온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사람뿐만이 아니라 기업이나 조직에도 적용된다는 걸 유재원은 AMD를 보면서 깨달았다.

CPU 계에서 만년 이인자인 AMD도 절대 강자 인텔을 능가할 기회가 3번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AMD에서 출시한 제품의 코드명을 가지고 3번의 기회를 논한다면 첫 번째가 애슬론 시절이고 두 번째가 젠, 세 번째는 콜드퓨전 시절이 있다.

리사 슈는 그중에서도 두 번째 기회였던 젠(ZEN) 시리즈를 만들어낸 사람이었다.

특히 젠 시리즈가 1부터 6까지 나왔던 때는 AMD 역사를 보았을 때, 가장 전성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CPU 시장 점유율에서 인텔을 역전했고, 그걸 몇 년이나 유지했던 게 젠 시리즈가 쏟아져 나왔던 시절이다.

“리사 슈라니.”

더욱 놀라운 점은 CEO이면서 동시에 개발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리사 슈의 칭호는 사장님이 아니라 박사라고 불리는 게 당연했다. 그녀가 스스로 경영자 이전에 개발자라는 생각이 더 강했고, 실제 MIT의 전기공학 박사(PHD) 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흠, 그러면 나 때문에 이 사람 이력도 영향이 받을 수도 있다는 소리잖아.”

덕분에 유재원은 리사 슈에게 이메일을 보내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이메일의 내용은 그녀가 쓴 석사 논문에 대해 ID 그룹이 관심이 있고, 함께 후속 연구를 진행해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리사 슈가 관심을 보이면 비행기 표를 보내줘서 초청하거나, 유재원 본인이 직접 가서 스카우트할 마음도 있었다.

“애매해졌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인물의 이력에 개입하게 되면 나중에 후폭풍이 어떤 식으로 일어날지 쉽게 예상을 할 수가 없다. 만에 하나 ID 그룹에서 쌓은 경력을 바탕으로 인텔에 CEO가 된다면 AMD에는 최악의 결과가 나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인텔보다는 AMD에 호감이 있는 유재원이었기에 망설임이 더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전생에 주머니 가벼웠던 시절에 좋은 가성비로 제품을 내주었던 게 AMD였기 때문이다. 만약 AMD가 없었으면 고만고만한 성능의 CPU를 비싼 값을 주고 사서 써야 했을 텐데, 그나마 AMD의 선전 덕에 멀티 코어 제품을 저렴하게 샀다. 양자 컴퓨터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인텔의 양자 CPU와 경쟁을 할 수 있었던 게 AMD의 콜드퓨전 시리즈였다. 절대적 성능은 여전히 인텔에 뒤졌지만, 무척이나 저렴한 가격에 적당한 성능으로 많은 개발자의 주머니를 가볍게 해주었다.

“잠깐 생각해보자.”

잠깐 생각해보자던 고민은 순식간에 10분이 넘어갔다.

유재원의 머릿속에서 다양한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동시다발적으로 해보는 중이다. 양자 컴퓨터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정확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수십 년 쌓인 경험을 통해서 최고에서 최악의 결과까지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었고, 그것이 컨트롤이 가능한지 따져보는 것이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대충 30분쯤 지났을 때, 결과가 나왔다.

“가자!”

유재원이 도출한 결과는 간단했다.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을 담그지 않을 이유는 없다.

리사 슈가 자신의 제안에 응할지 말지는 미지수다. 응하면 좋은 것이고, 응하지 않는다더라도 논문 인용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주면 그만이다.

AMD는 별개의 사안으로 놓았다. 젠 시리즈가 나오는 건 지금으로부터 대략 24년이나 지난 후였다. 연구 개발에 대충 2, 3년이 걸린다고 치면 20년 후에나 후폭풍이 일어난다는 건데, 그때의 일을 지금 예견한다는 건 21세기 최고의 양자컴퓨터인 GS-X도 수행하기 불가능한 과제였다.

무엇보다 유재원의 본격적인 개입으로 전 세계의 역사가 미지의 영역으로 급속도로 바뀌고 있는 지금, 20년 후에 리사 슈가 AMD의 두 번째 구원자로 등극하기 전에 무슨 일이 생길 가능성이 훨씬 크다.

심지어 이전보다 잘 나갈 가능성도 충분하다.

전생에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윈·텔 동맹의 한 축은 이미 소멸했고, 넥스트컴캐스트의 대규모 데이터센터에는 AMD의 CPU가 채용되었다. 그러니 기업용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최적화도 AMD를 기준으로 이뤄질 가능성도 커졌다.

“만에 하나 잘못되면 내가 사면 되는 거고.”

마스터플랜에는 당연히 반도체 분야의 진출도 있다. 그러니 예상과 달리 AMD의 상태가 나빠진다면 인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긍정적인 답변이 오면 좋겠는데.”

정중하게 리사 슈를 초대하는 이메일을 쓴 유재원은 희망을 담아 전송버튼을 눌렀다.

실리콘밸리는 좁은 동네였다.

불과 며칠 사이에 ID 그룹이 반도체 분야에 진출한다는 이야기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LCD 공장을 짓겠다고 한 건 정식으로 발표한 사안이지만, 반도체 기술 개발과 설계는 공식적으로 발표되진 않았음에도 소문이 참 빨랐다.

ID 그룹이 반도체 전문가를 스카우트한다는 소식이 실리콘밸리를 강타했고, 덕분에 기대감을 품은 이들이 많아졌다.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최근에, 가장 확실하게 성공한 기업은 ID 그룹이다. 한때 금방 꺼질 거품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 ID 그룹이 반도체 분야에 뛰어들었다는 건, 최소 그룹 내부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ID 그룹의 자본력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니 대대적인 투자가 있을 것이고, 이를 통해 한몫 잡아 보고 싶은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인텔과 AMD도 이례적인 반응을 보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둘의 반응은 미묘하게 달랐다.

인텔은 CPU계의 터줏대감으로서 새로운 도전자는 얼마든지 환영한다는 태도였다. 그렇지만 반도체 설계와 제조라는 건 만만히 볼 산업이 아니니 굳건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것이라면서 조언을 주는 척했다. 승승장구하던 ID 그룹이 이번에 실패라는 값진 교훈을 얻을 거라는 식이었다.

어찌 되었든, ID 그룹이 자사의 반도체 기술을 능가하진 못할 거라는 자신감은 확실했다.

반면 AMD는 진심으로 경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만 해도 ID 그룹은 AMD의 초고성능 CPU를 한 번에 1만2천 개나 사서 대단위 데이터센터를 만들었다. 그걸 보고 AMD는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펜티엄급 컴퓨터의 보급이 빠르게 이뤄지고, 인터넷도 그만큼 보급이 되면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할 서버 컴퓨터의 수요도 그만큼 많아질 거라는 분석이다. 여기에서 인터넷의 창시자이고 동시에 가장 빠르게 인터넷 기술을 선도하고 있는 ID 그룹이 데이터센터로 AMD 시스템을 채용했다.

그렇기에 앞으로 수많은 기업이 ID 그룹의 사례를 보고 AMD를 선택할 거라는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ID 그룹이 자체 개발로 돌아서면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불안감은 단순한 우려뿐만은 아니었다.

주식 시장에서 ID 그룹의 데이터센터에 AMD 제품이 채용됐다는 소식 이후 줄곧 상승했던 AMD의 주가가 하락 반전해버린 것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AMD의 경영진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ID 그룹 비서실에 열심히 전화를 넣어서 유재원과의 미팅을 성사시킨 것이었다.

“아, 전화로도 충분한데, 미안하게 직접 찾아오셨네요?”

유재원이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는 건, 날짜 때문이었다.

AMD의 사장 제리 샌더스와의 미팅 날이 크리스마스이브였다. 크리스마스 당일 만큼은 아니어도, 이브 역시나 뜻깊은 날이었다. 미국에선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보내는 게 당연시되는 명절이기도 했다.

미팅날짜를 정할 때 ID 그룹은 아무 날이나 상관이 없다고 했고, AMD 측에선 최대한 빨리 만나보고 싶다는 뜻이 합쳐지면서 12월 24일로 정해졌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AMD의 임직원들과 고객의 미래 때문에 걱정이 돼서 회장님의 크리스마스를 방해하게 되었습니다.”

제리 샌더스는 보기에 점잖은 신사였다.

머리카락이 완전히 하얀 백발이었고, 턱수염까지 하얀색이었다. 검은색 정장도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렇지만 보기와 달리 재리 샌더스는 터프가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으로 무척이나 공격적이었다.

여기서 공격적이라는 건 주먹이 잘 나가는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공격적인 브랜드 포지셔닝과 마케팅을 선호한다는 뜻이었다.

일등 기업인 인텔에 모든 면에서 뒤처지는 AMD가 그래도 2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제리 샌더스 사장의 천부적인 감각 덕이었다.

AMD가 본래의 작동속도 대신 퍼포먼스레이트(PR)수치를 본격적으로 쓰게 된 것도 제리 샌더스의 전략이었고, 공격적인 가격 정책을 취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유재원이 1만2천 개나 주문했던 K5 PR66이라는 모델도 실제 작동속도는 50MHz였다. 이걸 가지고 AMD는 자사의 알고리즘은 인텔과 달라서 실제 성능은 인텔 펜티엄 66MHz 모델과 비슷하니 PR66이란 등급으로 붙였다고 선전했다.

물론 이 말은 진실이기도 했고, 거짓말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상황에서 인텔의 66MHz짜리 모델과 같은 성능이 나오는 게 아니라 벤치마크 프로그램처럼 특별한 애플리케이션에서 나오는 성능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비자들은 인텔보다 훨씬 가격이 싸니 AMD를 선택했다.

심지어 유재원이 AMD의 CPU로 데이터센터를 차린 것을 가지고 기업용 마케팅 포인트로 삼기도 했다. 그러니 ID 그룹의 반도체 분야 진출 소식을 대하는 태도도 완전히 달랐다.

덕분이 AMD의 사장이 크리스마스이브를 포기하고 유재원을 만나러 온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오해였군요!”

제리 샌더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유재원은 그가 상상하고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말이 잘 통하는 존재였다. 겉으론 청년이지만 그 속엔 60살이 넘은 인격이 자리했고, AMD에도 호의적이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유재원이 생각하는 반도체 비즈니스는 AMD가 우려했던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AMD의 제리 샌더스나 인텔은 ID 그룹이 자체적으로 CPU를 생산해 리테일 시장에 진출할 것으로 오해했다. 하지만 유재원이 하려는 비즈니스는 기술의 판매였다.

유재원이 만들 구리 배선 공정은 모든 반도체에 적용될 기술이다. 반면 ID 그룹은 번거롭고 돈도 많이 들고, 환경 오염까지 심한 반도체 공장을 운영할 생각은 없다. 그러니 남는 건 기술을 파는 것이었다.

반면 모바일 기기용 저전력 CPU는 인텔이나 AMD도 아직 만들지 않은 제품이라서, 설계만 직접 하고 실제 제품은 TSMC나 UMC 같은 OEM 업체에 생산을 의뢰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이렇게 만들어진 제품은 ID 그룹이 전량 소비할 예정이었다. 다만 저전력 제품을 원하는 기업이 있다면 구매 수량에 따라 팔 수도 있다. 하지만 소매점 시장에 낱개로 파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구리 배선 공정이라니.”

제리 샌더스도 AMD의 사장으로서 유재원이 말하는 기술의 가치를 단번에 이해했다.

“설마, 포뮬러를 완성하셨습니까?”

한시름 놓았던 제리 샌더스는 바로 관심을 보였다. 당연히 유재원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알아도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기 때문이다.

리사 슈가 유재원의 제안에 반응을 보였다면 여기서 긍정적인 답변도 가능했을 텐데,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메일은 아직도 ‘읽지 않음’ 상태였고, MIT의 연구실에 전화를 걸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연구팀 전체가 일찌감치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난 것 같았다.

개인적인 연락처라도 알아보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미래엔 엄청난 거물이지만, 지금은 그저 박사 학위를 받은 많고 많은 연구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최소한 빌 클린턴의 대통령 취임식 전에 응답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직 발상만 했어요.”

덕분에 유재원의 대답도 시원찮았고, 잔뜩 기대했던 제리 샌더스 사장의 표정도 급격히 안정되었다.

“아, 그래도 대단한 아이디어입니다.”

그래도 립서비스는 잃지 않았다.

이제 겨우 시작하는 단계라지만 ID 그룹의 자본력은 AMD를 훌쩍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무엇보다 유재원이라는 불가사의한 존재를 단순 상식으로 평가하다가 큰코다친 사람이 수두룩했다.

제리 샌더스는 PC 운영체제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에 도달했다고 자만했다가 순식간에 사라진 게이츠와 스티븐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둘 다 다시 한 번 재기하기 위해 새로운 아이템을 만지작거린다는 소문이 들려오긴 했다. 그런데 그게 1년 전 소식이고 지금까지 갱신된 게 없으니 사실상 끝났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기술을 구현하실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감이 좋은 유재원은 제리 샌더스가 자신을 떠보기 위해 질문을 했다는 걸 딱 알아차렸다.

“흐흐, 그건 나중에요. 기술이 완성되면 대대적으로 광고할 거니 그때 확인하세요. 많이 기다리게 하지도 않을 거고요. 흠, 적어도 내년 여름쯤 이려나요?”

제리 샌더스의 표정이 미묘했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떠오른 ‘불신’을 숨기기 위해 억지로 표정관리를 하다 보니 생긴 불협화음이었다.

유재원이 대단한 존재라는 건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것은 소프트웨어 분야 한정이었다. 컴퓨터 하드웨어의 기본인 반도체는 완벽히 다른 분야였다.

그런데 내년 여름이라니. 길어야 7개월이다. 반도체 개발 단계에서 7개월은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었다. 그 사이 획기적인 제조 공법을 만드는 건 말도 안 된다. 만약 제리 샌더스 앞에 있는 사람이 유재원이 아니었다면 누굴 보고 사기를 치려느냐면서 면박이나 주고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무슨 걱정이신지 다 보입니다. 때가 되면 확실히 쇼케이스를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게다가 제리 사장님에게 지금 입장료를 달라는 것도 아니잖아요.”

포장기술에 있어 가장 앞선 존재가 유재원이다.

존재감이 하나 없었던 ID 오피스도 시큐리티 챌린지라는 세계적 이벤트를 급조해서 단숨에 시장을 휘어잡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진짜 포장기술도 ID 그룹이 남달랐다.

포스겐 소동으로 한차례 시달렸던 ID 그룹과 TG는 환경 보호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패키지를 만들 때도 친환경을 위해 비닐 사용은 최대한 줄였고, 재생되는 골판지를 썼다.

그런 골판지를 접어서 충격 완화를 넘어서 고급스러움을 전해주는 패키지를 완성한 지 오래였다. 당장 최근에 출시된 쉘 북의 패키지는 하나의 예술 작품과도 같았다.

모두 21세기 중반에 나왔던 IT기기 패키지를 오마주한 것인데, 완성도가 높음 만큼 패키지를 만든다고 낭비되는 돈도 당연히 컸다. 하지만 유재원은 밀고 나갔다.

때때로 비합리적인 결정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품격 친환경 패키지는 소비자들에게 ID 마크가 찍힌 제품은 확실히 다르다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이는 선망의 대상이 되어서 커다란 수요로 돌아왔다. 이뿐만이 아니라 패키지는 모두 한국 여주시의 공장에서 만드는 데, 매달 수십만 개 단위로 찍어내야 할 정도로 바쁜 공장이 되었다.

고용 인원도 어느덧 2천 명을 넘을 정도라서 지역 발전에 큰 보탬을 하는 중이었다. 잘라진 종이 패키지를 조립하는 건 자동화 작업이 쉽지 않아서 인력으로 감당할 수 밖에 없었던 탓이다.

덕분에 덕진리나 여주에서는 패키지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쉽게 볼 수 있었고, 덕분에 유재원의 인기도 무척이나 높았다.

하여튼, 포장에 대해 특별한 사상을 가진 유재원이었다. 게다가 본인이 선보일 기술에 대한 가치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앞으로 열 쇼케이스도 성대하게 준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AMD의 제리 샌더스가 다녀간 다음부터 유재원은 한가해졌다.

실리콘밸리를 살짝 흔들었던 ID 그룹의 신규 사업 이야기도 크리스마스와 새해 시즌이 되면서 뒷전으로 밀렸다.

뉴스가 원래 이렇다. 직접 이슈를 다루는 당사자들이 아니면 한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신 실무진은 연말이었지만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ID 그룹은 거대한 덩치와 달리 민첩했다.

유재원이 LCD와 반도체를 언급한 직후, 실무진은 즉각 움직였다.

한국 지사의 황재홍이 대전으로 내려가서 공장을 올릴 공단 자리를 물색했고, 실리콘밸리에서는 반도체 전문가를 대놓고 모집하지 않았던가. 연구실로 삼을 건물까지 다 준비가 끝났다. 심지어 TSMC나 UMC에 주문 생산에 대한 견적까지 받는 중이었다.

반면 유재원이 한가해진 건 모든 준비는 착착 이뤄지는 중인데 정작 발을 맞출 사람이 무응답이었던 탓이다.

“그나저나 리사 슈, 이 양반은 메일도 읽었으면서 왜 이리 응답이 없는 거지. 진짜 내년까지 무소식이려나?”

유재원이 아는 리사 슈의 성격은 호탕함 그 자체였다.

제리 샌더스도 그렇고 AMD의 역대 사장이나 CEO는 다 호탕한 성격이 필수였던 건 아닐까 싶을 만큼 시원시원했다. 덕분에 슈 박사님을 넘어 장군님이란 칭호도 붙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왜 이리 소극적인지 모르겠다.

유재원은 한 번 더 메일을 보내놓고 신경을 뚝 끊었다. 그저 지금은 소박하기 그지없는 크리스마스 연휴를 즐기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크리스마스는 물론이고 죽 이어진 주말까지 게임만 하겠다는 집돌이다운 계획이었다.

그렇기에 게임의 선택이 중요한데, 유재원에겐 이미 답이 있었다.

바로 둠 2였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게 출시된 둠 2는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무척이나 폭력적인 내용이라 주의하라고 경고 문구를 달아놓았지만, 아이들이나 성인 모두 열심히 즐겼다.

유재원도 나오자마자 그날로 끝판을 깼고, 어제부터는 멀티플레이를 시작했다.

멀티플레이 전용 지도도 여러 개 있었고, 방장이 원하는 대로 규칙도 설정할 수 있다. 여기에 유재원의 조언으로 전적에 따라 등급이 정해지고, 등급에 맞게 매칭이 되는 현대적 매칭 시스템까지 넣어서 두고두고 플레이를 즐길 수 있다.

문제는 하드웨어의 성능과 네트워크 환경에 따라 쾌적함에서 큰 차이가 난다. 이것은 게임 외적인 불공정함이었다.

당연히 더는 올라갈 수 없는 스펙을 갖춘 PC에 최신 ADSL이 깔린 유재원에겐 더 없이 유리했다. 게다가 둠 2와 같은 FPS에 팀 데스메치나 프리포올과 같은 룰도 익숙하기 그지 없어서 유재원의 랭크는 빠르게 치솟았다.

둠 2에서 강화된 랭크 시스템 덕에 싱글보다 멀티 플레이를 즐기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인터넷 보급률이 낮아서 그렇지, 인터넷을 쓰고 둠 2를 산 사람이라면 무조건 멀티 플레이를 했다.

그렇지 않아도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성수기를 맞은 컴퓨터 업계는 그야말로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둠 2의 활약 덕에 인터넷 서비스를 신청하는 사람도 늘어났고, 멀티플레이에서 이기기 위해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하고, 더 좋은 3D 가속 카드를 사는 사람들이 매일매일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12월 27일.

크리스마스 연휴의 마지막 날이었지만, 유재원의 모습은 25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먹고 자고 게임하는 것. 그것이 지상 과제인 것처럼

-트리플 킬!

고급스러운 스피커에서 경쾌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한 번에 적 3명을 연달아 죽이면 나오는 알람 메시지였다.

“후훗, 트리플 정도는 껌이지.”

보통 게이머라면 펄쩍 뛸 만큼 하기 힘든 탁월한 플레이지만, 유재원은 오늘도 7번, 이번까지 포함하면 8번이나 해냈기에 무덤덤한 그 자체였다.

“윽! 죽었네.”

오히려 남은 적들을 끝내 죽이지 못하고 먼저 죽은 것을 안타까워했다. 트리플 킬이나 펜타킬은 많이 보았지만, 상대편을 모두 죽이는 올 킬은 아직 달성하진 못했던 탓이다. 게다가 경기도 끝나버려서 다음 방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굳었던 몸을 쭉 펴며 기지개를 하는데 쿵쿵하는 소리가 났다.

새로운 게임이 시작된 줄 알고 얼른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지만 아니었다.

“응?”

환청을 들은 건 절대 아니었다.

곧이어 따르릉하는 전화 소리가 났다. 밖의 경비 초소와 연결된 인터폰이었다.

“네, 무슨 일인가요?”

집 밖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을 주는 장비였기에 유재원은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 너머로 몇 마디 말이 들렸고 유재원은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문을 벌컥 열었다.

거기엔 경비원과 함께 어색한 표정의 리사 슈가 있었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크리스마스 연휴란 그저 랩업 하기 좋은 날일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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