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48 테크노피아 1993 =========================================================================
“한 번 더 연락을 해보고 말자.”
고심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어마어마한 인내심을 보인 것이다. 회귀한 지 이제 5년 차에 접어든 유재원이지만, 21세기의 경험은 이보다 12배는 많다. 당연히 유재원에게 고정된 시간 감각은 21세기 중반이었다. 그때의 감각과 지금 1993년의 감각을 비교한다면 하이퍼루프와 비둘기호의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연락한다는 건 어마어마한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유재원은 전화기를 들었고 유나바머 TF팀의 전화번호를 빠르게 눌렀다. 사건의 당사자이니만큼 전화번호를 누르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예, 스키너입니다.
그것도 스키너 팀장의 책상에 있는 직통 번호였다.
통화는 3분도 안 될 만큼 짧았다.
아무래도 스키너 팀장과 유재원은 상성이 그다지 좋진 않았기 때문이다. 친하게 대화를 붙이려고 해도 냉동인간 같은 스키너의 태도는 여전했다. 그렇지만 통화의 내용이 부실하거나, 핵심을 전달하지 못한 건 아니다.
소포 폭탄의 분석이 왜 이렇게 늦었는지 물어보았고, 또한 자신이 제안했던 유나바머의 디지털 분석은 수용할 생각이 있는지도 물어보았다. 예의를 차린다고 말을 돌리는 것도 없이 스트레이트로 날렸다.
-유 회장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현실적인 난관이 있었소이다.
스키너의 답변도 일반적이었다.
현실적인 난관이란 유재원이 예상했던 그대로다.
유나바머가 6년간 잠적 상태가 되면서 유나바머 수색을 위한 TF팀도 그 숫자가 크게 줄었단다. 유재원에게 날아온 소포 때문에 줄어든 TF팀이 재소집 중이라고 했는데, 현실적인 이유로 그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또한, 팀원들 사이에 이견을 조율하기도 쉽지 않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6년 전에는 의욕적으로 한팀처럼 움직였지만, 지금은 이제 막 합류한 사람들의 경험과 생각에 차이가 크게 났다. 이러한 팀 내 이견을 하나로 조율하는 일이 스키너 같은 냉혈 인간도 쉽지 않다고 할 정도이니 대충 짐작이 된다.
게다가 행정적인 문제도 있다. 민간인인 유재원에게 유나바머의 정보를 공유하는 일은 몇 가지 절차가 필요했다.
-유 회장의 제안에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소, 6년이라는 시간 동안 기술은 계속 진보했고, 그중에서도 컴퓨터 기술은 제일 빠르게 나아갔으니, 사람이 놓친 단서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소.
그나마 스키너 팀장은 유재원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참 다행이다. 유나바머 TF팀에서 팀장의 권한은 절대적이었으니, 내부 정리만 끝나면 바로 유재원에게 연락해올 것이라고 했다.
“제가 우려하는 건 활동을 재개한 유나바머의 소포 폭탄은 저에게 온 거 하나로 끝나진 않을 거라는 거죠. 저는 운이 좋아서 개봉 전에 알아차렸지만, 다른 사람은 모를 가능성이 더 크잖아요.”
-알고 있소. 최대한 일찍 결론을 내도록 하겠소.
다 알고 있다는 사람에게 중언부언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었으니, 유재원은 그쯤에서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딱 3분 걸린 통화였다.
“어휴, 답답해라.”
앞으로 정부와 일 할 일이 수두룩한 유재원은 걱정이 태산이다. 스키너 팀장은 그나마 말이 통해서 다행인데도 이렇다. 그런데 말이 통하지도 않는 사람과 일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정말 까마득해진다.
“내 할 일이나 해야지.”
유재원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손을 풀고는 곧장 프로그래밍을 시작했다.
원래 하던 작업을 이어 하는 것이 아니라, 백지부터 새로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바로 빅데이터에서 원하는 자료를 추출하는 검색기였다. 단순히 키워드 검색만 하는 게 아니라, 입력된 자료를 다방면으로 분석해 특징을 뽑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비슷한 문서를 추출하는 고차원의 검색기였다.
분석하는 과정에서 머신러닝 기법을 도입한 오버테크놀로지였다. 대량의 컴퓨팅파워가 필요하긴 한데, 데이터센터를 만들어놨기에 큰 문제는 없다.
핵심 알고리즘은 유재원의 머릿속에 그대로 있어서 타이핑을 하는 속도에는 막힘이 없었다. 적어도 3일이면 쓸만한 빅데이터 검색기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걱정은 단 하나.
스키너 팀장의 연락이 늦지 않게 걸려오는 것이었다.
다음 날.
세상이 유나바머의 재등장으로 떠들썩했지만, 대다수의 일상은 어제와 같았다. 심지어 유재원도 유나바머로 인한 파동은 딱 하루에 불과했다.
바로 경영 일선으로 복귀해서 의욕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물론 ID 테크놀로지 본사로 출근했다는 건 아니고, 평소처럼 ID 톡의 동영상 미팅 기능을 이용한 원격 회의였다.
“여기에 공항 검색대에서 이용하는 엑스레이 검사기도 추가로 도입하겠습니다.”
여기에 유재원은 직권으로 엑스레이 검사기를 추가했다.
엑스레이는 보통 사진을 찍어서 보이지 않는 내부를 확인한다. 병원에서 유용하게 사용하는데, 이를 실시간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만든 게 엑스레이 검사기였다. 공항에서 총이나 칼 혹은 마약과 같은 걸 밀반입하는지 확인하는 데 유용했다.
유재원은 그 엑스레이 검사기를 도입해서 ID 그룹에 들어오는 편지와 소포를 모두 확인하도록 만들 작정이다. 이를 위해 엑스레이 검사기를 10대가 넘게 발주했다.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것보다는 돈을 좀 들여서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게 훨씬 남는 장사라는 판단이었다.
-좋은 결정입니다.
-이의 없습니다.
레밍턴을 비롯한 임원들도 이의제기가 없었다.
이미 유재원 앞으로 소포 폭탄이 온 상황에서 쓸데없는 데 돈을 쓴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음 안건은요?”
-예, 제가 준비했습니다.
유재원의 물음에 나선 사람은 한국으로 돌아간 최강욱 비서실장이었다. 이에 유재원도 모니터에 좀 더 집중했다. 최강욱이 보고한다는 건 한국에서 무슨 일이 생겼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전 어르신의 은밀한 전언입니다.
ID 그룹에서 어르신 소리를 들을 사람은 몇 명 없다. 유재원의 부모님이나 은사님 몇 분, 그리고 지인들이 전부다.
그중에서도 전 씨 성을 가진 어르신이라면 딱 한 사람 전명헌 총리뿐이었다.
총리라고 하니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재원은 회장님이나 후보님 그리고 할아버지라는 호칭만 불렀던 탓이다. 총리님이라고 불러본 건 며칠 전 유나바머 소동으로 전명헌이 전화를 먼저 했을 때가 처음이었다. 물론 총리님하고 들었던 전명헌도 어색하다시면서 평소대로 부르라고 했다.
그때 통화에서 전명헌은 별말이 없었다.
거들먹거리는 거 말고는 총리가 할 일이 없다고 한탄하는 게 전부였다.
87년에 만들어진 헌법은 원래 내각제를 염두에 두고 총리제를 만든 것이었다. 그래서 헌법을 보면 장관의 임명에 총리의 임명제청을 받게 되어 있다. 만약 총리를 국회에서 뽑고, 헌법 조문 몇 개만 바꾸면 바로 내각제가 된다.
지금은 대통령이 총리를 뽑고, 장관들도 통솔하는 체제인지라 총리가 별도로 할 일이 지극히 드물었다.
덕분에 대한민국의 역대 총리들은 대통령의 보좌관이었고, 욕먹을 일이 생기면 먼저 욕을 먹는 것이 방패막이였다.
그나마 이번에는 유재원의 활약을 통해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치적 거래로 탄생한 총리였다. 덕분에 실질적인 권한과 책임을 준다는 ‘책임 총리’ 권리를 얻어내긴 했는데, 대통령이 워낙 잘하고 있어서 전명헌이 해먹을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유재원도 툴툴거리는 전명헌에게 당분간은 대북 사업에 집중하라는 조언을 주었다. 김일성이 죽기 전에 정상회담을 성공시키기만 한다면, 전명헌이 총리 타이틀로 낼 수 있는 최상의 결과를 내는 것이다. 설사 정상회담을 못 하더라도 대북경제협력 사업으로 북한에 진출할 기반을 마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여튼, 그때 전화를 했을 때 은밀히 전할 말은 없었다. 게다가 총리가 은밀히 전해야 할 만한 일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최강욱의 말이 이어졌다.
-ID 인베스트먼트의 투자상품 청약 열기가 뜨겁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라는 건 아실 겁니다.
이에 유재원은 당연한 소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투자자라고 자부하는 사람 중에 ID 인베스트먼트가 이룩한 찬란한 성적표를 보고도 가만히 있으면, 그건 투자 감각이 없는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차라리 채권이나 정기예금만 하는 게 본인에게 좋을 것이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을 만큼, ID 인베스트먼트의 성적표는 전설적이었다.
이처럼 전설적인 성적표는 당연히 투자자를 불러모으는 데 가장 강력한 페로몬과 같았다.
몇 달 전부터 시작한 투자자 모집이었는데도 아직도 그 열기는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중이었다.
이러한 열기로 모인 투자 금액은 억 단위를 넘어서서 조 단위를 찍고도 계속 달리는 중이다.
세계적으로 보자면 수십 조 규모의 사모 펀드도 많이 나타나지만, 이제 막 투자은행사업을 시작한 한국에서 단기간 이렇게나 성장한 건 분명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이 열기를 우려해서 뭔가 규제를 할 거라는 이야기인가요? 그리고 이걸 먼저 알게 된 할아버지가 은밀히 알려주신 거고요”
-정확합니다.
최강욱의 설명이 이어졌다.
-일단 모금 상한선이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전 어르신이 최대한 높여 본다고는 했지만 3조 원 이상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상한선? 투자는 개인의 의사인데, 그걸 인위적으로 제한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최강욱의 말에 레밍턴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자유와 자본주의의 나라인 미국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투자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개인의 것이었다. 투자 실패도 개인의 몫이었고, 그렇기에 투자 이익도 개인의 것이었다. 그런데 상한선이라니.
유재원도 레밍턴과 비슷한 심정이다. 하지만 관치금융이 그대로 살아 있는 한국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음으로 투자상품 운용의 투명성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몇 가지 논의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아마 투자 결과에 대한 실시간 공시라던가, 투자금을 어떤 식으로 운용하고 있는지 공지를 하도록 강제하는 방식으로 될 것 같다고 합니다.
이것도 문제다.
투자 결과에 대한 공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뺄지, 아니면 투자를 확대할지 결정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지표이니 말이다. 하지만 투자금 운용 방식에 대한 공지는 ID 인베스트먼트의 노하우를 공개하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전 어르신의 생각엔 이러한 조처들이 김 대통령의 입김으로 만들어지는 것 같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도 저번 대선의 남은 감정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최강욱의 의견에 유재원도 동의했다.
유재원이 아니었으면 김영삼 대통령은 쉽게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재원이란 변수의 등장으로 87년 선거와 같이 똥줄이 타는 경험을 또 하게 된 김영삼 대통령이다. 유재원이야 과학적인 여론조사를 통해 김영삼의 당선을 일찌감치 예상했지만, 김영삼 본인이나 민자당에선 전명헌의 무시무시한 추격에 비상이 걸렸다.
이 때문에 국회 운영이나 차기 정권 중에 상당 부분을 통일 국민당 그리고 전명헌과 함께 나누는 거래에도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불만을 국정파트너인 통일 국민당에게 풀 수는 없으니 결국 유재원을 타겟으로 노린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위에서 한다는 데 따라야죠.”
유재원은 간단히 대답했다.
관치금융이나 다름이 없는 한국에서는 방법이 없다. 차라리 미국 영업망을 확대하는 게 더 났다.
아쉬운 건 애꿎게 피해를 볼 투자자들이었다.
미국의 IT버블이 생성되는 것과 함께 전 세계의 금융자산은 폭발적으로 팽창한다. 말 그대로 우주의 빅뱅이 일어나는 것처럼 자본의 액수가 커져 버리는 것이다.
IT 빅뱅에 숟가락이라도 올려놓을 수 있다면 수저의 재질이 변하는 건 일도 아니다. 반면 투자가 무섭다고 은행에 그대로 놓아둔다면 약간의 이자 소득밖에 얻지 못한다. 인플레이션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오히려 돈이 줄어드는 것과 다름이 없다.
유재원은 그러한 자본의 빅뱅 상황에서 한국 사람들도 최대한 많은 과실을 얻길 바라는 마음으로 배려했다. 김 대통령이 이렇게 나온다면 억지로 이어갈 마음은 없다.
당연히 김 대통령의 공격에 맞고만 있을 생각도 없다.
유재원이 동원할 수단은 많다.
미국에 비하면 기초체력이 너무도 부족한 나라가 한국이다. 그러니 몇 가지 조치만 취하면 본인의 불편한 심기를 김 대통령에 바로 전할 수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세금이다.
정확하게는 법인세다. ID 그룹의 이름으로 매년 한국에 내는 법인세는 조 단위에 들어선 지가 오래다. 특히 ID 인베스트먼트가 결산이라도 한다면 국세청에 내는 법인세는 폭발한다.
단번에 한국 신기록을 세울 만큼 어마어마한 금액이었고, ID 그룹은 별다른 조정도 없이 바로 한 방에 내버렸다.
앞으로 그러지 않을 거다. 탈세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세금은 낼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방법도 어려운 게 아니다. 금융 투자의 경우 투자를 계속 이어가기만 해도 법인세 산출 근거가 되는 영업이익금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아참, 금융실명제 대비는 잘하고 계시죠?”
금융실명제 건은 김 대통령이 최소한의 측근들만 데리고 실행을 준비 중일 테니, 전명헌의 귀띔에서 빠져 있는 건 당연했다. 어쩌면 김 대통령이 유재원을 겨냥한 실질적인 무기는 금융실명제일 것 같다.
투자 은행이라고 해서 금융실명제의 예외로 인정해줄 건 절대 아닐 테니 말이다. 게다가 대통령 긴급 명령으로 실행되니, ID 인베스트먼트에 딴죽을 걸기에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혹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안타깝다.
최강욱이 믿음직스럽게 대답한 것처럼 금융실명제에 대한 대비는 일찌감치 해놓았으니 말이다.
다음 날.
FBI에서 연락은 없었다. 대신 유재원 앞으로 커다란 택배 하나가 왔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처럼 택배가 왔다는 회사의 연락에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의문의 택배는 아니었다.
택배를 보낸 사람, 그의 소속은 너무나도 분명했으니 말이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프로젝트를 이끄는 쿠타라니 켄이었다.
택배 안에는 플레이스테이션의 프로토타입 1대, 개발자용 플레이스테이션 1대 그리고 데모 디스크라고 담긴 CD 한 장, 마지막으로 간단한 사용설명서와 서신 한 부가 들어 있었다.
“크기가 크네.”
개발자용 플레이스테이션은 미들타워 PC랑 비슷한 크기를 자랑했다. 내장된 프로그램은 플레이스테이션용 개발 도구인데, 최대한 컴퓨터와 비슷한 환경을 만들려고 애를 쓴 모양새였다. 그렇지만 제대로 동작하는 기능은 그다지 없었다. 단지 이런 식의 기능이 생길 거라고 청사진을 보여주는 정도였다.
프로토타입 플레이스테이션도 비슷한 크기였다. 둘 다 공통적으로 32비트 RISC방식의 프로세서에 3D 가속칩이 장착되어서 3D 처리 능력이 대폭 늘어났다.
하지만 유재원의 성에 차진 않았다. 원래 플레이스테이션의 단점이었던 메모리 용량도 전과 같이 2MB밖에 되지 않는 크기였고, 비디오 메모리도 1MB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SVGA환경이 표준이 된 PC에 비하면 여러모로 떨어지는 스펙이었다. 결정적으로 조이패드에 라이브 포스 피드백 기능도 없고, 아날로그 스틱도 없었다.
아무래도 원가절감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모양이다.
쿠타라니 켄의 편지를 읽어보니 역시나 구구절절 예산 이야기만 가득했다.
소니의 경영진은 플레이스테이션의 원가를 최대한 낮추려고 했고, 쿠타라니 켄은 쏟아져 나오는 신기술을 최대한 담으려고 했다.
이러한 타협의 결과가 반쯤 반영된 게 지금 유재원 앞으로 온 프로토타입이었다. 분명 이것은 SCE의 특별 대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웬만한 파트너사에게 프로토타입을 보내주는 일은 없다. 기술이 유출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역시나 공짜는 아니었다. 곱게 쌓인 서신을 읽어보니 쿠타라니 켄의 간곡한 부탁 하나가 담겨 있었다.
쿠타리니 켄의 목표는 코퍼마인 공정이었다.
“이럴 줄 알았어.”
반도체를 만지작거리는 사람 중에 코퍼마인 공정에 관해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은 없다. 예외가 있다면 일성 전자 하나뿐이다.
따로 알아본 바로는 일성 전자도 코퍼마인 공정을 도입하고 싶어 한다고 한다. 하지만 회장인 최현희가 유재원에게 악감정이 있다는 건 일성의 임원들이 익히 아는 사안인지라 회사의 이익이 어느 쪽에 있는지 알면서도 머뭇거리는 중이다.
쿠타라니 켄이 이번에 커다란 택배를 보낸 것도 CPU와 메모리, 3D 가속칩에 코퍼마인 공정을 도입해 성능을 높이고 싶어서였다. 또한, 한 푼의 원가라도 낮추기 위해 어떻게 싸게 도입할 수 있을지 조심스럽게 문의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유재원의 대답은 간단했다.
“흠, 이건 쉽게 풀릴 일인데 말이지.”
코퍼마인 공정으로 만든 HPC급 부품을 사용하고 싶다면, 라이센스를 얻어서 직접 제작하는 것보다 더 간단한 방법이 있다. TSMC나 UMC와 같은 파운드리 업체를 통하면 된다. 이들 업체는 진작에 코퍼마인 공정을 라이센스했다.
이곳에 생산을 의뢰하면 간단히 해결된다.
만약 수백만 개씩 대량 주문을 한다면 파운드리 업체끼리 경쟁도 붙일 수 있으니 훨씬 저렴해질 것이다. ID 테크놀로지는 어떤 공장에서 무슨 제품을 만들든 상관없이 부가가치세를 받는 것처럼 원천징수되는 로열티를 받으면 그만이다.
유재원은 이러한 내용을 담은 문서를 작성해 법무실장인 앨런 슈미트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이메일을 받은 앨런은 법률적인 검토 후에 격조 높은 공식 문건을 만들어서 일본 SCE의 쿠타라니 켄에게 팩스를 전송했다.
이를 마지막으로 공식 업무를 마친 유재원은 풀어 놓았던 프로토타입 플레이스테이션에 전원을 넣고 돌려보기 시작했다.
기술적으로는 무척이나 단순한 물건이었지만, 역사적 아이콘의 프로토타입을 만져본다는 감동 덕에 그날 하루는 푹 빠졌다. 그렇지만 호기심과 깊은 감동의 유통기한은 딱 하루에 불과했다.
다음날.
유재원이 그렇게나 기다리던 스키너 팀장의 응답이 왔기 때문이었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