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53 테크노피아 1993 =========================
약속 장소로 가는 길.
오늘은 김대석 대신 유재원 옆자리에 앉은 레밍턴이었고, CIA와의 협상에서 있었던 모든 일에 관해 설명 중이었다.
협상 내용에 대해서 유재원이 특별히 알아야 할 내용은 없었다. 일단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까지 패키지로 도입하는 것에 대해서 CIA도 동의했기 때문이다.
“CIA 과학기술본부장은 존 맥마흔이라는 사람입니다. 특징이라면 대단히 보수적이죠.”
대신 레밍턴의 설명이 현직 CIA 과학기술본부장에 이르렀을 때, 유재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학기술과 보수적이라는 단어가 대단히 미스매치라고 느꼈던 탓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과학기술본부장이라면 CIA에서 사용하는 장비와 기술과 관련해 최고의 책임자였다. 또한, 조직의 역량 강화를 위해 연구와 개발도 병행하는 CIA 기술연구소를 운영하기도 한다.
“예, 저도 좀 이상하다는 건 압니다.”
유재원의 표정을 읽은 레밍턴이 부연설명을 시작했다.
들어보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다. 확실히 검증이 끝나지 않은 기술을 도입했다가 현장 요원들에게 피해가 가면 큰 타격이니 신기술에 대해선 보수적으로 접근을 한다는 이야기다. 동시에 CIA의 사정이 유재원이 아는 것과는 제법 차이가 있다고 한다.
유재원을 비롯한 일반인들에게 CIA는 국제적 첩보전을 수행하면서 화려한 장비와 기술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조직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또한, 어마어마한 지원을 받고서도 늘 엉터리 결과만 내는 삽질의 조직이라는 생각도 적지 않다.
“핵심은 예산입니다.”
“그러니까 CIA는 늘 고질적인 예산 부족에 시달리고, 제일 먼저 영향을 받는 곳이 과학기술 파트라는 거죠?”
현재 CIA의 빅데이터 검색기 도입에서 제일 큰 이견이 생기는 건 바로 가격이었다.
CIA는 저렴한 가격에 도입하고 싶어 했고, ID 그룹은 적어도 ID 테크놀로지가 발매하는 제품들의 이윤보다는 높게 받고자 했다. CIA에 납품한다더라도 유지보수를 위한 인력 파견이 필요하다. 더욱이 빅데이터 검색기라는 소프트웨어는 유재원만이 만들 수 있는 최신의 제품인지라 원가 책정도 힘들다.
레밍턴이 사장이라도 마찬가지였다. 하드웨어는 어느 정도 견적이 나오긴 하는데, 소프트웨어 가격 설정이 문제였던 탓이다.
덕분에 유재원은 레밍턴 사장을 위해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주었다.
빅데이터 검색기 패키지의 최소 가격이 2천만 달러라고 말이다. 1천만 달러 중에 하드웨어 원가는 4백만 달러였고, 소프트웨어 원가는 5백만 달러다. 그리고 유지보수용 예비 비용이 100만 달러이고, 나머지 1천만 달러가 ID 테크놀로지의 순수익으로 잡았다. 즉 마진율이 100%나 되는 비싼 물건이라는 이야기다.
“아마 존 맥마흔 부장이 할 말은 딱 하나일 겁니다.”
레밍턴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깎아달라는 거요?”
유재원의 물음에 레밍턴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순수익으로 잡은 1,000만 달러에서 얼마를 깎아주던 그건 유재원의 재량이었다. 이윤을 크게 잡았으니 수백만 달러 깎아주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사업하는 사람으로서 피 같은 순수익을 이유 없이 깎아 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이윤이 줄어든다면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더 받아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여깁니다.”
레밍턴과 이야기를 하는 중에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와우!”
유재원의 입에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약속장소라고 도착한 곳은 실리콘밸리 서쪽 엘 그라나다였다. 태평양과 맞닿은 작은 항만 도시로 해안가의 경치도 좋았고, 도시 뒤쪽으로는 주립공원도 자리하고 있다. 일에 지친 실리콘밸리 사람들이나 여행자들이 자주 찾는 휴양지였다.
그것도 엘 그라나다 중에서도 번화가에 자리한 고급 주택가였다. 2층짜리 주택에 정원도 제법 넓다. 부잣집이라면 자연스레 연상되는 자동으로 열리는 문까지 갖춰진 곳이다.
“CIA가 돈이 좀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휴양지인 만큼 도시는 작아도 물가는 높았다. 당연히 집값도 실리콘밸리와 비견될 정도다.
“CIA 소유의 안가(安家)라고 하더군요. 냉전 시절 돈이 쏟아질 때 사들였다고 합니다.”
레밍턴의 부연설명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자동문이 열렸고, 저 멀리 정문을 열고 나오는 일단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중을 나온 CIA 사람들인 모양이다.
시답잖은 잡담은 그만하고 이제 비즈니스를 시작할 시간이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존 맥마흔입니다.”
로비에서 기다리던 존 맥마흔이 유재원 일행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유재원입니다.”
유재원은 악수하며 존 맥마흔을 찬찬히 살폈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맥마흔이라는 성씨를 보면 어쩔 수 없이 WWE의 악덕 사장이 연상되긴 했지만, 존 맥마흔 CIA 과학기술본부장은 확실히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체격도 유재원보다 조금 작을 정도였고, 도수가 높은 안경도 쓰고 있었다.
딱 봐도 줄을 잘 타서 낙하산 타고 떨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능력을 통해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개발자로서의 동질감도 느껴졌다.
존 맥마흔도 비슷했던 모양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재원의 액면가는 이제 겨우 17살. 조그만 연구실에 박혀 쏟아지는 실험데이터와 씨름을 할 나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본인과 비슷한 느낌이 풍기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덕분에 존 맥마흔도 유재원에 대한 알 수 없는 호감이 대폭 상승했다.
어린 나이에 대단한 기업을 일구고, 일반인은 상상도 못 할 연구 성과와 결과물을 쏟아내는 모습에 살짝 기가 질렸고,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인물 같았는데 체온을 나누는 악수 한 번으로 약간의 동질감을 느낀 덕이다.
곧이어 존 맥마흔은 레밍턴과도 악수하였다. 직접 만나서 협상을 몇 번 하기도 했기에 유재원보다 훨씬 가볍게 인사했다.
“그럼 안으로 가실까요?”
존 맥마흔이 훨씬 편안한 표정으로 유재원을 안가 안으로 안내했다. 물론 유재원 혼자만 가는 건 아니었다. 레밍턴과 함께 유재원의 경호원도 뒤를 따랐다.
바다가 잘 보이는 2층 응접실에 유재원과 존 맥마흔이 자리했다.
곧이어 음료와 가벼운 먹거리가 나왔다. CIA의 부장과 비밀스러운 미팅이라면 자연히 독한 술이 나올 것 같았지만, 정작 나온 건 시원한 콜라와 열대의 과일이었다. 유재원의 나이와 취향 때문에 선택의 폭이 대폭 줄어든 탓이다.
미국도 미성년자 음주나 흡연이 허용된 건 아니었지만, 유재원 또래의 나이대에서는 다 알아서 하고 있다. 그러니 유재원도 술을 잘한다는 정보가 있었다면 술이 나왔을 것이다. 협상하는 데 술처럼 좋은 윤활유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술이나 담배는 전혀 하지 않는 바른 생활 사나이(?)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대신 세팅은 정말 끝내주게 해놨다.
물과 얼음을 띄운 고급스러운 양동이에 콜라병을 그대로 담가 놓았다. 원래는 포도주나 샴페인이 들어가 있어야 할 자리였지만, 콜라도 꽤 어울렸다. 과일도 예술적으로 커팅을 해서 보기에도 좋았고 집어 먹기에도 좋았다.
존 맥마흔 부장은 직접 살얼음이 잔뜩 붙은 콜라를 집어 오프너로 열었다. 그리곤 유재원 앞에 놓인 잔에 따라 주었다. 유재원도 반쯤 남은 콜라를 넘겨받아서 존 맥마흔 부장의 잔에 따라 주었다.
곧이어 수행원들의 잔도 콜라로 채워졌고, 건배까지 했다. 음료는 비록 콜라지만 할 건 다 하는 것이다.
“일단 유나바머에 소포 폭탄에 노출된 점에 대해 CIA를 대신해 사과드리겠습니다.”
대화 분위기가 시작되자 존 맥마흔 부장은 대뜸 사과부터 했다.
그게 사과를 받을 일인가 싶었는데,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유재원은 CIA에서도 특별히 관리되는 VIP였던 탓이다.
CIA가 유재원의 존재를 감지한 건 꽤 오래전의 일이다. 도스 호환 운영체제인 안드로이드 알파가 공개되었을 때부터였으니 몇 년은 되었다. 여기에 헤리티지 재단의 에드윈 풀러 이사장의 보고서도 한몫 크게 했다.
정보통신 분야에서 대단한 잠재력이 보이는 천재이니 중요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보고서였다. 이후 유재원은 CIA의 모니터링을 받았고, 놀라운 업적을 이룩할 때마다 CIA에서의 평가도 급상승했다.
높아진 평가만큼 CIA의 보호 단계도 격상되었다. 단지 유재원과 ID 그룹에 알리진 않고 자체적으로 보호하는 것뿐이다. 다만 정부 요인들을 보호하는 것처럼 엄청나게 극성이진 않았다. 이 때문에 유나바머의 소포 폭탄이 유재원의 집까지 올 수 있었다.
“오늘 협상이 불발된다더라도 앞으로는 확실히 보호해드리지요.”
존 맥마흔의 말에 콜라를 마시던 유재원은 얼른 내려놓고 두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제 안전은 스스로 챙길 겁니다.”
CIA의 보호라는 건 말만 그렇지 실제로는 감시라고 해도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많은 비밀을 품고 있는 유재원에겐 절대 사양이다.
“아,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존 맥마흔은 또 바로 수긍해버렸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방심하지 않았다. 어수룩해 보여도 CIA에서 서열 6위나 되는 사람이다. 저렇게 말은 해도 자칭 보호 활동 정확히는 모니터링 활동은 꾸준히 하는 게 CIA였다.
미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할 사안이다.
“게다가 그 유나바머도 제가 잡아서 사건도 종결되었지요. 그런데 유나바머를 잡아낸 방법에 대해 CIA에서 상당한 관심이 있으시다고요?”
유재원은 바로 말을 돌려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 그렇습니다! 유나바머 검거에 유 회장의 빅데이터 검색기가 쓰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셨을 겁니다.”
존 맥마흔도 바로 말을 받았다.
“빅데이터 검색이라니. 우리도 이론은 만들어 놓긴 했습니다. 한데 CIA와 협력하는 연구기관도 실제 구현에는 몇 년은 더 걸릴 거라고 했지요. 그런데 유 회장은 소포 폭탄을 받은 지 불과 며칠 만에 뚝딱 만들어낸 것을 보고, 관련 연구자들은 기절해버렸습니다. 오죽하면 실의에 빠진 이들도 상당했지요.”
유재원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존 맥마흔이 보기와 달리 매우 말이 많았던 탓이다. 그러니 가만히 듣고만 있으면 일반인은 모를 CIA의 속사정을 절로 알게 되니 말이다.
“그걸 보고 또 우리는 비슷한 걸 만들어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더군요. 마음 같아선 그 코요테 시티의 데이터센터를 직접 가보고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역시나 존 맥마흔은 옆에 앉은 수행원이 눈치를 주고서야 무의식적으로 쏟아내던 말을 멈출 수 있었다.
“흠흠, 아무튼 유 회장님은 본인이 만든 빅데이터 검색기가 얼마나 큰 잠재력을 품고 있는지 잘 모르실 겁니다.”
“알아요.”
유재원은 시크하게 답했다.
“네, 그래서 제가 그 가능성을 하나……. 예?”
“잘 알고 있다고요.”
존 맥마흔은 아마도 유재원이 잠자코 듣고만 있을 줄 알았나 보다. 대놓고 알고 있다고 하니 순간 말을 잊었다.
당연히 유재원의 말은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었다. 이번에 선보인 빅데이터 검색기의 핵심 알고리즘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얼마나 광범위하게 쓰이는지는 유재원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나바머를 찾을 땐 단순히 텍스트만 넣어서 추출했지만, 여기엔 음성이나 영상까지도 넣을 수 있다. 물론 음성과 영상을 해석하는 모듈을 추가로 장착해야 하고, 그만큼 분석용 컴퓨터의 성능도 커져야 하지만 다양한 데이터 속에서 원하는 정보를 추출하는 기능엔 변함이 없다.
실생활은 단순한 문서 검색부터 메타 파일 검색, 저작권 관리, 여론 조사 등에 활용할 수 있고, 군사적으로도 활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첩보전 역시 마찬가지.
단적으로 미국에 널리 설치된 교통 카메라와 빅데이터 검색기를 결합만 한다면 카메라만으로 용의자의 차량을 실시간 추적이 가능하다.
유재원은 이러한 21세기의 빅데이터 검색기를 활용한 방법 중 몇 가지만 말해 주었다. 그것으로 말 많은 존 맥마흔의 입을 꾹 다물게 시키기엔 충분했다. 오히려 CIA 소속 연구원들도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로 인해 충격을 받았을 정도다.
역시 CIA 공인 초특급 인재답다는 말이 절로 존 맥마흔의 뇌리에 떠오를 정도였다.
“빅데이터 검색기는 프리즘이로군요.”
역시 존 맥마흔도 보통은 아니었다. 감탄으로 나온 한마디 말이 빅데이터 검색기의 본질을 꿰뚫었다. 빛은 섞일수록 밝아져서 하얗게 된다. 그렇게 섞인 빛 속에서 원하는 색을 찾으려면 프리즘이 필요하다. 빅데이터 검색기의 아이콘으로 쓰기에 손색이 없다.
이와 함께 유재원의 표정이 묘해졌다. 마치 던진 떡밥을 잘 물은 물고기를 보는 듯 했다. 그렇지만 그 표정도 빠르게 사라졌다.
무표정으로 돌아온 유재원은 덤덤이 말을 시작했다.
“예, 유나바머가 아니었으면 빅데이터 분석기를 외부에 알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특허도 등록하지 않았어요.”
특허 등록이 마냥 좋은 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특허를 등록하려면 빅데이터 검색기의 핵심 알고리즘도 공개해야 한다. 이를 통해 상업적인 이용은 차단한다더라도, 다른 나라들이 외부에 밝히지 않고 무단으로 기술을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
제대로 작동하게 하려면 클라우드 시스템을 세팅하고, 네트워크 장비도 정교하게 갖춰야 하며, 운영체제도 잘 세팅해야 하지만 결국 시간이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다른 기업들도 엄청나게 중요한 기술이라면 특허 등록 자체를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나마 CIA라고 해서 협상을 진행토록 한 것입니다.”
유재원의 한 마디는 결정적이었다.
CIA와 협상을 진행토록 한 것 자체가 특권이었다는 뜻이었고, 그러니 돈을 깎아 달라는 소리가 아예 나오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도입하겠다면 CIA가 안정적으로 운영하도록 우리의 엔지니어를 파견해 도와주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결국, 존 맥마흔은 깎아달라는 소리 한 번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정부 기관은 물론 민간에서도 CIA의 위상은 엄청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D 그룹 유재원 앞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유재원과 존 맥마흔 과학기술본부장은 다시 한번 악수하는 것으로 협상은 끝이다. 만약 유재원의 뒤가 켕기는 게 많았다면 협상은 이런 식으로 흘러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잘 나가는 것도 결국 압도적인 기술력과 자본력을 가진 깨끗한 인물 앞에서는 CIA의 힘도 평범해질 수밖에 없다.
덕분에 존 맥마흔은 유재원으로부터 호감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생겼다. 눈앞의 젊은 존재가 앞으로 얼마나 놀라운 것들을 만들어낼지, 어느 만큼 더 위로 올라갈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유 회장님을 귀찮게 하는 것들이 많을 줄 압니다. 저번 폭스 뉴스를 보니 말도 아닌 것들을 쏟아내고 있더군요.”
“개인정보 관련해서는 민감할 수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있어요. 차라리 이번 일로 인해 온라인상에서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지면 더욱 좋죠.”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해한다는 투였다. 폭스 뉴스가 자극적으로 보도해서 그렇지 개인정보 관련해서 한 번쯤 뉴스에 오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소프트웨어 업계 중에 가장 강력한 보안 수준을 갖춘 건 ID 테크놀로지의 제품들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차라리 이렇게 개인정보 관련한 이슈가 커져서 일찌감치 인터넷상에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법률 등이 마련되면 인터넷이 대중화될 때의 혼란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예. 그렇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늘 긍정적으로만은 흐르지 않지요. 제가 현장과는 제법 떨어져 있긴 해도 속한 곳이 CIA다 보니 제법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중엔 회장님이나 회장님의 사업에 관한 이야기도 있지요.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아무래도 이번 일이 그렇게 쉽게 잠잠해질 것 같지 않습니다. 이른바 회장님을 싫어하는 세력이 건수를 좀 잡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더군요.”
유재원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을 싫어하는 세력이라니. ID 그룹의 부상으로 손해를 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을 하니 까마득했다. ID 그룹이 거대해진 만큼 이해관계도 그만큼 복잡하게 얽혀 있는 탓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장님이 우릴 배려해준 만큼 저희도 성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뭘 어떻게 성의를 보인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성의를 보인다는데 싫다고는 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고맙습니다.”
그렇게 유재원과 존 맥마흔이 합의를 끝내고, 세부적인 계약서가 즉각 마련되었다.
한 푼의 할인 없이 2천만 달러에 빅데이터 검색기를 CIA의 랭글리 본부에 설치해준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이밖에도 CIA의 빅데이터 검색기 운영에 있어 ID 테크놀로지가 적극 합력하기로 했고, 검색기의 성능을 올리거나 튜닝을 하고자 할 때는 다시 견적을 내기로 하는 내용이다. 다만 단서 조항이 하나 있었는데, 이번 계약에 대해 정부가 먼저 공표할 때까지 비밀로 하자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개인정보 관련해서 이슈가 크게 되는 판에 CIA가 빅데이터 검색기까지 도입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유재원도 흔쾌히 동의했다,
오랜만에 큰 비즈니스를 성공적으로 마친 유재원은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정히 차려입었던 정장을 벗어서 세탁물 바구니에 던져 넣는 일이었다.
CIA 과학기술본부장을 만난다고 차려입은 옷이었다. 맞춤 정장이라 편안하긴 했지만 캐주얼 의류 만큼은 아니었다. 집에서 입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유재원은 곧장 서재로 가서 풀썩 앉았다.
곧이어 발가락으로 컴퓨터를 켜는 건 패시브 스킬처럼 자연스러웠다. 역시나 컴퓨터를 켜니 알람이 쏟아졌다.
“어라?”
그런데 오늘은 좀 특이한 게 보였다. 유재원 앞으로 오는 연락들은 보통 회사 안에서 생기는 보고가 대부분이었다.
“한국에서 왔네?”
그런데 지금 열린 이메일은 한국에서 온 것이었다.
한국 임직원들 보고도 아니었고, 한국의 정보팀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전명헌 할아버지도 아니다.
“이분이 무슨 일이지?”
발신인에 표시된 이름은 전에는 체신부 장관, 지금은 대전 엑스포 조직위원장을 역임 중인 오명 위원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