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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노피아 1993
“잠깐 바꿔 보자.”
유재원은 본인의 쉘 북과 티파니의 잡지를 바꾸자고 했다.
“나야 좋지!”
티파니는 흔쾌히 잡지를 내밀었고, 쉘 북을 받았다. 그러더니 터치 패드를 능숙하게 조작해서 시스템 스펙부터 살폈다. 유재원이 전용으로 사용하는 쉘 북인만큼 일반의 것과는 다를 거로 생각한 모양이다.
정답이다.
작동 속도를 떨어뜨려 소비 전력을 낮추긴 했지만 3D 가속 카드도 장착되어 있고, 대용량 리튬 배터리로 한 번 충전에 5시간은 사용할 수 있는 변강쇠 같은 지구력도 갖춰진 올인원 버전이다.
덕분에 둠 2와 같이 고성능 PC에서만 구동되는 게임도 옵션 설정을 잘 맞추면 구동할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단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일단 일반 쉘 북보다 무겁다. 그리고 TFT-LCD의 성능도 아직 미완의 수준이다.
티파니도 게임 디렉터리에 둠 2가 설치된 걸 보고 곧장 실행했다. 화면 전환이 빠른 게임을 하기엔 잔상이 좀 있을 텐데도 게임에 푹 빠졌다.
잡지를 받은 유재원도 마찬가지였다.
표지 타이틀로 달린 레드핵이라는 해커 녀석과 독점 인터뷰 기사를 처음부터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음.”
유재원의 글 읽는 속도는 일반인보다 훨씬 빨랐다. A4지 4장 분량의 제법 긴 인터뷰였지만, 불과 몇 분 만에 확실히 정독을 마쳤다.
평가는 복합적이었다.
일단 잡지는 스스로의 본질을 잃지 않았다. 바로 가십이라는 거다. 레드핵이 유재원의 PC를 해킹했다는 것에 대해 그저 가십 정도로만 취급하고 있었다. 이는 레드핵이란 해커 녀석이 해킹했다는 증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탓이 크다.
ID 톡의 이미지 처리 방식의 취약점을 노렸다는 아이디어는 좋다. 그렇지만 그걸로 공격 목표로 잡은 PC의 루트 권한을 빼앗을 수는 없다. 그러니 원격으로 공격 대상의 PC를 조작할 수 없으니 겨우 한다는 게 혐짤을 뿌려주는 것뿐이다.
결정적으로 공격한 사람은 공격이 성공했는지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그러니 레드핵은 자신의 공격이 성공했다는 증거로 제시한 건 ID 톡의 긴급 패치 배포였다.
패치가 배포되고 나서 이미지 처리 취약점을 이용했던 방식은 완전히 차단되었으니, 이는 본인의 공격이 성공했기 때문에 배포된 것이라고 강변했다.
그러면서 맺는말로 앞으로도 이와 같은 활동을 계속해 여러 소프트웨어 회사에 경각심을 주고 소프트웨어의 완성도도 끌어 올려 사용자를 돕는 진정한 해커가 되겠다는 포부까지 밝혔다.
“재미있는 녀석이네.”
잡지는 그저 눈에 확 띄는 제목으로 구독자를 모으기 위한 가십으로만 취급했지만, 유재원은 상황이 달랐다. 직접 공격을 당한 당사자였으니, 가십 따위로 치부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레드핵이란 해커는 생각보다 훨씬 허술한 녀석이었다.
“아니, 인터뷰를 ID 톡으로 하는 패기는 뭐지?”
자칭 해커이니 기자와 직접 대면한 인터뷰는 아닐 거라고 예상은 했다. 그런데 비대면 인터뷰 수단이 ID 톡이란 건 유재원도 순간 깜짝 놀랄 패기였다.
어떻게 이걸 알았느냐 하면, 인터뷰 지면 한가운데 레드핵과 잡지사 기자가 접속한 대화창을 그대로 캡처한 사진이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레드핵의 ID 톡 아이디는 물론 인터뷰했던 기자의 아이디도 버젓이 공개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런 스크린 샷은 모두 다섯 장이나 된다. 공격하는 데 사용한 혐짤도 모자이크로 대충 가려놓고 올려놓았다.
아무래도 글자만 가득한 인터뷰 기사만 실리면 가독성도 떨어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가십성 기사만 쓰는 잡지라도 레드핵이란 녀석의 주장을 뒷받침하려면 그럴듯한 증거는 필요하니 ID 톡 대화창을 올린 모양이다.
이 시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인터넷은 익명성을 확실히 보장해줄 거라는 생각이다. 완벽한 착각이다.
ID 톡이 이미지 처리에 조금 실수가 있긴 했어도 둘 사이의 대화는 확실히 지켜주는 건 맞다. 주고받는 대화 메시지나 파일은 AES 암호화 방식으로 인코딩을 하기에 제삼자가 중간에 패킷을 빼돌린다고 해서 알아볼 수는 없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대화 메시지를 공개하면 이를 기반으로 둘 사이 대화 메시지를 암호화하는데 사용한 AES 키를 유추해낼 수 있다. 게다가 모든 대화 메시지는 서버의 중계를 거치고, 주고받은 데이터는 최소 3년은 저장된다.
보통은 암호화된 키를 모르니 서버에 저장된 데이터는 단순한 백업용 그 이상도 아니지만, 이렇게 대놓고 공개하면 ID 톡의 보안 시스템은 완전 무력화되는 것이다.
그러니 레드핵은 해커로서 실격이다.
아이디어는 좋은데, 유명해지고 싶다는 공명심 때문에 치명적 단서를 노출했다. 이건 완전히 나 잡아가라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아무래도 한국에 가기 전 할 일이 하나 더 생긴 것 같네.”
상대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잡아주지 못하면, 그것 또한 비매너 아니겠는가.
그렇게 잡지를 샅샅이 훑은 유재원은 비로소 눈을 뗐다. 티파니에게 돌려주려는데, 그녀는 한창 게임 삼매경에 푹 빠진 상태였다. 게다가 플레이도 굉장히 훌륭했다. 전에 코퍼마인 쇼케이스의 일환으로 열린 둠2 대회에 열광했을 때부터 알아봐야 했는데, 게임 마니아인 게 확실하다.
쉘 북의 작은 화면과 게임을 하는 데 불편하기 그지없는 키보드를 가지고도 게임 속에선 그야말로 천하 무쌍을 펼치는 중이다. 싱글 플레이 속에서 활약이지만, 하는 걸 보면 온라인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다.
괜히 잡지를 돌려준다고 산통을 깨는 것보다는 즐기게 두는 게 나을 것 같다.
유재원은 다시 잡지를 펼치고 끝까지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잡지 열독은 LA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LA 공항에 내린 유재원과 티파니 그리고 경호원은 준비된 차에 바로 올라탔다.
렌터카는 아니었다. 비서실이 미리 준비한 자동차로, 유재원이 짠 이동선에게 맞춰 미리 가져다 놓았던 차다.
차에 오른 유재원 일행은 다른 곳에 들리는 것도 없이 바로 디즈니랜드로 직행했다.
평일인 덕에 길은 뻥 뚫려서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예약된 티켓을 찾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이라는 디즈니랜드의 정문을 넘은 시각은 오전 11시를 막 넘긴 때였다.
그야말로 쾌조의 출발이었다.
“이제 제대로 된 것 좀 먹자.”
스페이스 마운틴과 스플레쉬 마운틴 그리고 지금 막 인디아나 존스 어드벤처를 끝내고 나온 유재원의 푸념이었다.
이에 대한 티파니의 반응은 상식 밖이었다.
“응? 벌써?”
벌써라니.
11시에 들어와서 놀이기구 3개를 연달아 탔다.
페스트 패스로 제일 먼저 탄 건 스페이스 마운틴이었다. 설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는 놀이기구인데, 본질은 청룡열차였다. 대신 레일 주변을 마치 우주처럼 화려하게 꾸며서 우주선을 타고 달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스플레쉬 마운틴은 후룸라이더다. 옷이 좀 젖긴 했지만 시원하게 물을 튕기면서 질주하는 느낌이 무척이나 좋았다.
방금 타고 나온 인디아나 존스 어드벤처도 괜찮았다. 영화 속 세트장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걸 보니 과연 미국 스케일이란 이런 거구나 싶을 정도였다. 21세기 중반쯤에 가보았던 디즈니랜드와는 기술적 차이가 컸지만, 압도적인 물량 덕에 재미가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다만 페스트 패스라고 해서 바로 놀이기구에 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줄을 서는 것보다는 빠른데, 약간의 대기 시간은 있었다.
유재원의 우려대로 페스트 패스를 끊은 사람들끼리 또 줄을 서야 했던 탓이다. 21세기 수준의 독한 맛 디즈니를 겪은 건 아니지만, 페스트 패스란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옆에 생글거리는 티파니만 없었으면 불평이 폭발했을 거다.
덕분에 점심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지나가다 샀던 군것질거리도 때워야 했다. 다른 건 다 해도 밥 굶는 건 못하는 유재원은 이제 한계였다.
“알겠어! 그러면 점심과 저녁은 내가 살게.”
티파니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저녁까지 책임지겠다고 장담했다.
놀이기구를 원 없이 타다 보니 하이 텐션 상태인 모양이다. 저녁 코스까지도 잘 설계했던 유재원이지만, 본인이 사주겠다는데 마다할 일은 아니었다.
“음, 저기로 가자!”
티파니는 유재원의 손을 잡아끌고 바로 출발했다. 구피의 주방(Goofy's Kitchen) 캐릭터 레스토랑이었다. 데이트코스 사전 조사를 할 때 점심 식사 식당으로 고려했을 만큼 평이 좋은 식당이었다.
역시 티파니와 맞는 부분이 많구나 싶은 유재원은 발걸음이 가벼웠다.
결과적으로 디즈니랜드 데이트는 성공적이었다.
유재원과 티파니는 디즈니랜드의 피날레인 불꽃놀이까지 구경하고 나서 나왔다. 디즈니랜드에 가서 하루 동안 놀이기구 4개를 타면 대성공이라고 하는데, 둘은 무려 7개를 탔다. 페스트 패스에 유재원이 불평을 하긴 했어도, 돈값을 하긴 했다.
거기다가 디즈니랜드의 랜드마크도 다 돌아보면서 사진도 왕창 찍었다. 유재원은 카메라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티파니가 소형 필름 카메라를 챙겨온 덕에 여러 가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카메라 필름을 무려 4번이나 갈아 끼웠으니, 건질만 한 사진이 분명 몇 장은 나올 거라고 기대했다. 게다가 카메라도 보통이 아니었다. 라이카 M6라는 작지만, 성능 하나는 확실한 회사의 제품이라서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그렇게 디즈니랜드 투어를 마친 유재원 일행을 티파니는 근처의 고급스러운 식당으로 이끌었다. 저녁까지 책임지겠다는 본인의 말을 지킨 것이다. 심지어 그렉과 피셔에게도 근처에 자리를 만들어주고 같은 코스요리를 시켜주었다.
“음료수는 뭐 먹을래? 와인? 나는 맥주!”
티파니는 다짜고짜 술부터 시켰다.
저녁을 사는 사람은 티파니니 시켜주는 걸 그대로 먹을 참이었던 유재원에겐 약간의 난관이기도 했다.
“아, 나는 아직 술 생각이 없어. 그냥 물이면 충분해.”
유재원의 말에 티파니의 눈이 조금 커졌다.
대학생이니 술은 당연히 할 수 있는 줄 알았던 거다. 그러다가 유재원의 나이가 상기된 모양인지 아차 싶은 표정이 올라왔다. 그렇지만 그 표정도 금세 사라지고 다시금 아리송해졌다. 표정 변화가 참으로 다채로웠고 확실한 덕에 보는 재미가 있는 티파니였다.
“왜?”
티파니의 짧은 물음에는 이 맛있는 걸 왜 안 먹느냐고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사실 미국도 청소년에게 술을 금지하는 법이 있긴 했는데, 그걸 제대로 지키는 아이들은 얼마 없다.
그걸 고지식하게 지키겠다는 유재원이 티파니에겐 무척이나 특이하게 보인 모양이다. 이 때문에 소심한 성격으로 보이긴 싫은 유재원은 부연 설명을 짧게 추가했다.
“미국 유학을 허락해주신 부모님과의 약속이기도 하고, 스스로와도 약속이거든. 솔직히 안 지켜도 상관은 없지. 그런데 원대한 포부가 있는 사람이 부모님이나 나와의 약속도 못 지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말을 하고 보니 데이트 마지막에 초를 쳐버린 것 같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냥 적당히 분위기에 맞게 먹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 법도 한데 괜히 고집을 부린 것 같다. 차라리 티파니가 다시 한번 권하면 못 이기는 척 마실까 하는 생각이 드는 유재원이다. 그런데 유재원의 생각과는 달리 티파니는 자세까지 달리하면서 유재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급기야 질문도 다시 던졌다.
“무슨 꿈을 꾸는데? 이미 ID 그룹이라는 걸출한 기업까지 일궜잖아. 이보다 더 큰 성공을 꿈꾸는 거야?”
유재원은 티파니의 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ID 그룹은 유재원에게 있어 목표를 이룰 도구이지 최종 목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목표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기에, 적당히 말을 돌려야 했다.
“음, 나는 꿈을 꾸지 않아. 현실에서 이뤄나가기 위해 내가 할 일을 할 뿐이지. 금주 약속도 그중에 하나인 거야.”
맨정신으로 이런 말을 하고 보니 손발이 오글거린다. 그렇지만 속에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니 유재원은 떳떳했다.
실제로 본인이 열심히 일궜던 꿈속 세상과 회귀의 권능을 주고받은 거래를 한 이후로 지금까지 유재원은 꿈을 꾸지 않았다.
회귀 후에도 마찬가지로, 단 한 번의 꿈도 없었다. 눈을 감으면 잠이 들고, 눈을 떠보면 아침이다. 꿈이 없는 삶이지만 나쁘진 않았다. 현실에서 차근차근 이뤄나가는 재미가 있었으니 말이다.
“와. 우와!”
유재원은 그저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뿐인데, 티파니는 그 말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감탄과 함께 눈빛이 반짝였다. 낮에 디즈니랜드에서 놀이기구를 탈 때보다 훨씬 강렬했다. 무려 며칠의 시간을 들여 설계한 데이트 계획보다 얼떨결에 나온 한 마디가 티파니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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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네요~!
더위가 점점 깊어지는 데, 건강 잘 챙기시길! 그럼 다음 주에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