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5 High Performance Computer =========================================================================
“혹시 엔비디아 사장님 이름이 젠슨 황인가요?”
“예! 어떻게 아셨습니까? 미스터 황의 실력이 실리콘밸리에서도 제법 유명한 모양이죠?”
존 카멕의 물음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유재원의 뇌리에는 여러 가지 추억들이 떠올랐다.
한국에는 젠슨 황이라는 정식 이름보다는 황사장님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했다. 동시에 황사장님의 통수는 두 번이라는 말도 그의 이름과 함께 따라 붙는 설명이기도 했다. 이는 그의 제품 출시 방식에 기인한 것으로 하이엔드 제품이 출시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이엔드 이상의 신제품이 또 나오고, 가성비도 훨씬 훌륭했다. 심지어 하이엔드 신제품이 나오고 나서 더 또 몇 달 지나지 않아 타이탄이라는 더 좋은 물건이 나오는 식이었다.
2010년엔 3D 가속 카드를 시장에 주도권을 쥐었고 2020년쯤엔 자율주행 자동차의 이미지처리와 인공지능 신경망 시장에서도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엔비디아의 승승장구는 계속되었고, 기술의 특이점도 엔비디아가 달성할 것 같았는데 2030년대 들어 급속도로 위축되었다. 비단 엔비디아뿐만이 아니라 인텔과 AMD 같은 전통의 강자도 마찬가지였다.
양자 컴퓨터라는 실리콘 반도체와는 비교를 거부하는 어마어마한 물건이 갑자기 툭 튀어 나와서 시장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범용 연산이 가능한 양자 컴퓨터 덕에 특정한 연산을 전문적으로 돌리는 칩은 효용이 사라졌다. 이미지와 사운드, 논리 연산까지 골고루 하면서도 전용 칩보다 몇 백배는 나은 성능을 보여주었다.
물론 처음엔 어마어마한 가격 때문에 대중화되진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가격이 내려오면서 엔비디아를 비롯한 비메모리 반도체 회사들의 역사도 끝났다.
“음 3DFX라면 로스 스미스 사장이죠?”
“예! 아주 근성 가이입니다. 기술력도 있고요.”
유재원의 물음에 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도 알고 있으니 로스 스미스도 미리 아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유재원에겐 3DFX라고 하면 좀 낯선 느낌이고 부두 가속카드라고 해야 친근하다. 3DFX에서 출시한 가속카드 모델명이 부두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엔비디아보다 역사가 훨씬 짧다.
90년대 중반에 창립했고, 2002년에 파산했다. 엔비디아의 역사에 1/4밖에 되지 않는 역사였다. 그렇지만 3D 가속카드에 남긴 임팩트는 컸다.
3D 가속카드가 태동했던 초기에 상당히 성능이 뛰어난 제품을 발표했었고, 독자적인 글라이드라는 API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또한, 한 화면을 여러 장의 가속카드로 나눠서 가속하는 SLI라는 기술도 3DFX에서 만든 것이었다.
전생부터 이어지고 있는 유재원의 게이밍 라이프에서도 3DFX와 연관이 있었다. 첫 번째로 구매한 3D 가속카드가 3DFX에서 첫 번째로 발표했던 부두 1이라는 카드였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렌더링으로 투박한 그래픽에 프레임도 느린 게임을 하다가 부두 1을 장착 하고나니 게임 세상이 확 달라졌다.
글라이드라는 전용 API를 지원하는 게임의 경우엔 시작부터 달랐다. 게임사 타이틀이 나오기 전에 3DFX라는 로고부터 뜨는데 두근거림이 커진다. 특히 디아블로 2라는 게임을 하면 부두의 진가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보면 단순한 그래픽이지만, 탁월한 입체감에 수많은 오브젝트가 쏟아져도 느려지지 않는 성능은 분명 잊히지 않는 감동이었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3D 라이브러리 이름이 글라이드가 된 건 부두의 영향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일단 두 회사가 제시한 기술이 뭔지 볼까요?”
회상을 마친 유재원의 목소리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두 회사 모두 추억의 회사들이었다. 하지만 기억에 있던 때와 상황이 많이 달랐다. 컴퓨터 기술 발전이 원래보다 3년은 앞당겨졌다지만, 모든 회사가 그렇게 기술력이 좋아졌다고 할 수는 없다.
남들이 다 먼저 움직이니 젠슨 황이나 로스 스미스도 일찍 사업을 시작했겠지만, 과연 기술력이 이전과 같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음, 엔비디아는 텍스처 맵핑 유닛이라는 텍스처 처리에 관한 기술을 들고 나왔습니다. 폴리곤에 텍스처를 입히는 전용 함수와 이를 지원하는 전용 회로인데, 속도는 제법 좋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이 좋다 나쁘다를 결정하는 요소 중에서 텍스처는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찰흙덩이 같은 폴리곤에 텍스처를 입혀야 그럴 듯한 그래픽이 나오니 말이다. 그렇기에 텍스처를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데, 엔비디아는 이를 위한 전용 회로와 라이브러리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존 카멕의 뉘앙스를 보면 속도는 괜찮은데, 화질은 기존의 방법보다는 떨어지는 모양이다.
“3DFX는 안티 알라이싱이라는 기술을 제안했습니다. 그래픽 칩에서 직접 처리하는 방식으로 CPU의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였더군요.”
역시 3DFX는 실망시키지 않았다.
안티 알라이싱이란 폴리곤을 모니터에 표시할 때 나타나는 계단현상을 줄여주는 기술이었다. 컴퓨터 내부에선 모두 3D로 계산 되지만, 화면에 표시할 때는 결국 2D로 보여줘야 했다. 덕분에 오브젝트의 윤곽선은 뚝뚝 각이진 형태로 나오는데, 이걸 부드럽게 표현해주는 기술이었다.
“좋은데요? 그런데 기존 업체들이 반대하는 명분이 뭐예요?”
“그렇지요? S3, 매트록스, ATI 같은 업체들은 한 목소리로 시기상조라고 합니다. TMU나 안티 알라이싱을 넣느니 클럭 속도와 비디오 메모리를 높이는 게 급하다는 것이지요.”
순간적으로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3D 라이브러리인 글라이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였다.
3D 라이브러리라는 건 컴퓨터 내부에서 효율적인 이미지 처리를 위해 다양한 함수를 하나로 묶어놓은 것이었다. 기존의 업체들이 하는 주장은 3D 카드 제조사들이 해야 할 일이었고, 글라이드 X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해당 기능을 채택하면 이를 지원하기 위한 설계를 다시 해야 하니 그만큼 부담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존 카멕은 유재원이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 보다 자세히 설명했다. 당연하게도 그걸 모르는 유재원은 아니다.
원래 기득권을 갖고 있는 업체들은 보수적이 되고, 후발주자들은 경쟁을 위해 다양한 기술을 개발하는 게 모든 업계의 공통된 현상이었다.
그런데 기존 VGA업체가 글라이드 X의 기득권이 있나?
아니다. 글라이드 X의 저작권은 엄연히 ID 테크놀로지의 소유였다. 글라이드 X에 들어가는 함수 제작에 VGA 업체들과 협력을 하고 있지만, 제일 큰 투자를 하는 건 역시 ID 테크놀로지였다.
글라이드 X의 총괄은 존 카멕이고, 실질적인 제작은 MS 알파랩 소속이었던 제임스 어거스틴이 수십 명의 우수한 두뇌로 이뤄진 팀을 이끌고 있다. 이렇게 시간과 돈을 들여 만든 글라이드 X는 무료로 공개 중이었다.
반면 VGA 업체들의 기술 개발 속도는 유재원의 성에 차지 않았다.
VGA업체들도 HPC인증을 받은 신형 가속 카드를 몇 달 전부터 출시 중이긴 했다. 그런데 아키텍처가 달라진 건 아니다. 단지 코퍼마인 공정을 적용해서 가속 칩의 작동 속도를 높이고, 비디오 메모리로 HPC 램을 채용한 것뿐이다.
이를 통해 기존의 모델보다 3배 정도 빨라졌다. 대신 가격도 2배가 올랐다.
완전 양아치 같은 짓이었다. HPC가 적용되었다고 해도 원가 상승 요인은 그다지 크지 않는다. 코퍼마인 공정이라는 게 기존의 생산설비를 최대한 바꾸지 않고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게다가 라이선스의 가격도 유재원은 비싸기 부르지 않았다.
10~15% 올리면 봐줄만 한 수준인데 성능만 믿고 100%를 불렀다.
1년 전만 해도 전문가용 가격대인 600달러 이상의 가속카드가 요즘은 10여 종이 넘는다. 심지어 몬스터 카드라고 해서 999달러짜리 제품이 나오기도 했다.
이렇게 비싸면 소비가 줄어들어야 하는데, 소비자들은 기꺼이 지갑을 여는 중이다.
미국 게이머들은 경제력이 있는 30대 남자가 주축이기도 했고,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인 미국의 경기가 점차 살아나면서 소득이 늘어나고 있기에 가능한 현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후발주자들을 배척한 기존 VGA업체들의 행태는 유재원에게 전혀 곱게 보이지 않았다.
“이거 경종을 좀 울려줘야겠는데요?”
유재원의 말에 존 카멕은 헉 소리를 냈다.
존은 유재원이 왔으면 업체들의 의견 충돌을 부드럽게 융합시켜 줄 걸로 기대했다. 그런데 경종이라니.
“결국 기존 참여자들의 주장은 신기술 탑재는 좀 미뤄달라는 거잖아요. 그런 요구를 들어줬다가 오픈GL 같은 컨소시엄에 밀리면 순식간에 도태되는 거죠. 글라이드 X는 이제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늘 신기술을 주도해 나가야 해요.”
오픈GL은 실리콘그래픽스가 주도하는 3D 라이브러리였다.
워크스테이션부터 슈퍼컴퓨터까지 다양한 하드웨어를 지원하는 라이브러리지만, 게임용도보다는 산업용이었다. 기본적인 캐드 프로그램부터 영화나 광고용 CG나 과학계에서 수치를 영상으로 바꿔주는 툴에서 활용된다.
글라이드 X와 오픈 GL은 지금 상태에선 그 용도가 판이하게 다르지만, 오픈GL의 강력한 확장성으로 순식간에 게임 시장에도 치고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처리하실 건가요? 저번처럼 3D 기솔 컨퍼런스 같은 걸 여실 건가요?”
존 카멕의 물음에 유재원은 고개를 저었다.
"예, 그런데 싫다는 사람들 억지로 초대해서 얼굴 붉힐 일은 없죠."
유재원은 그렇게 업계 전문가들을 모아놓아 봤자 자기 기술이 좋다고 목소리만 높아지지 의견이 통일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러니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기존 업체, 신생 업체 가릴 것 없이 각자 연구하는 기술에 대해 응모를 받고, 글라이드 X 개발팀에서 차기 글라이드 X에 포함될 기술을 자체 정리해서 그냥 발표하면 그만이다.
물론 사전에 3D 가속카드 제조 회사에 개발자 버전을 먼저 보내줘야겠지만, 차기 글라이드 X와 100% 호환되는 칩을 만드는 건 제조사의 역량에 달린 일이었다. 만약 자기만의 독자적인 기술을 사용하고 싶다면 그 제조사가 별도의 라이브러리를 내고, 게임 개발사와 따로 협력하면 된다.
물론 쉽지 않을 거다.
3D 게임에 사용되는 게임 엔진과 라이브러리는 둠 2 엔진이 산업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상태였으니 말이다.
“아. 제가 단호함이 부족했나보네요.”
“아니에요. 평소라면 의견을 모아 중재안을 내는 것이 보편적인 방법이긴 하죠.”
이번에도 존 카멕은 한수 배웠다는 말투였고, 유재원은 고개를 저었다.
계속 이렇게 독불장군식이면 곤란하지만, 필요한 때에는 과감하게 나가야 한다. 대전에 짓던 ID 디스플레이 제1 공장도 그랬다.
유재원의 지시에 샤프에서 나와 있던 엔지니어들은 모두 짐을 싸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당연히 일본 샤프 사에선 난리가 났다.
현재 ID 테크놀로지만큼 LCD를 많이 사주는 업체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ID 디스플레이를 통해 LCD 시장에서 점유율 확대를 노렸던 샤프였다. 그런데 기술 지원을 나갔던 엔지니어들로 인해서 협력이 무산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에 대한 샤프의 대응은 사장의 사과였다.
일본으로 돌아갔던 엔지니어를 샤프의 2대 사장인 마치다 가쓰히코가 직접 데리고 한국으로 입국했다.
엔지니어들의 불량한 태도에 대해 본인도 사과했고, 태업을 저지른 엔지니어들도 직접 사과하기 위해서였다.
사과는 공장장인 강찬호와 최강욱이 받았다. 마치다 사장은 미국까지 날아와 유재원에게도 사과를 하려고 했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유재원의 말에 사과 소동은 한국에서 마무리 되었다.
마치다 사장과 엔지니어들의 사과가 진심인지는 아니면 보여주기 위한 쇼였는지는 유재원도 모른다.
다만 이날 이후부터 샤프에서 나온 엔지니어들이 본인들의 주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춰 처신한다는 게 중요하다. 거들먹거리는 것도 없어졌고, 접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샤프 측에서 한국어 소통을 위해 재일 한국인 출신 직원도 파견했다.
글라이드 X도 마찬가지다.
VGA 제조사의 아쉬운 소리를 모두 들어줄 필요는 없다. 유재원이 그리는 로드맵을 따라 올 테면 따라오고 싫으면 그만 두면 된다. 최종 결과는 소비자들의 선택으로 좌우될 거다.
며칠 후.
-ID 소프트웨어, 글라이드 X 3.0 발표 예고
-텍스처 처리 유닛 지원, 안티 알라이싱 지원 등 이미지 처리와 품질 향상에 집중.
두 개의 뉴스가 단신으로 짧게 보도되었다.
일반 신문에선 나오지도 않았고, 컴퓨터를 메인으로 다루는 매체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기사였다.
존 카멕은 선택에 있어 무척이나 신중했지만, 선택이 끝나면 유재원처럼 과감하게 밀고나가는 성격이었다. 글라이드 X 3.0의 방향성이 정해지자 뒤 돌아보는 것도 없이 밀고 나갔다. ID 소프트웨어와 접촉하며 강하게 의견을 표출했던 기존의 업체들은 발표가 나자 벙 쪄지는 건 당연했다.
심지어 오보라고 생각하는 회사도 있었다. 하지만 IT 뉴스를 통해 기사가 나고 동시에 유재원과 존 카멕이 참여한 작은 컨퍼런스도 ID 소프트웨어 대강당에서 열리자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부 업체들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면서 컨퍼런스에 불참했다. 대신 그들의 빈자리를 3DFX나 엔비디아, 베리테, 넘버나인 등 신참들이 채우면서 대회의실은 빈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불참했던 ATI에서도 차기 글라이드 X의 설계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소리가 나왔다. 자사의 신제품 박스에 글라이드 X 100% 지원이라는 마크를 넣고 싶다면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새 아키텍처를 연구해야 할 거다.
댈러스에서 일을 잘 마친 유재원은 집으로 복귀를 시작했다.
비행기에서 내렸고 준비된 차를 타고 베이쇼어 프리웨이를 시원하게 달려 금문교를 넘었다. 지금 가고 있는 집은 몇 주간 장기 투숙 중이었던 호텔로 가는 게 아닌 앞으로 계속 살 진짜 집이었다.
당연히 전미에 소재가 알려진 스탠퍼드 대학교 앞에 있는 집도 아니고, 샌프란시스코 북쪽 부촌인 소살리토에 새롭게 구한 집이다.
레밍턴 사장과 정보팀이 은밀히 구한 집으로 중개인은 계약서에 사인하기 직전까지도 구매자가 유재원이라는 걸 몰랐다.
소살리토 지역 자체가 협소해서 철제 대문도 없고, 커다란 정원이나 수영장도 없었지만 최근 지어진 최신식 3층 집으로 유재원 혼자 지내기에는 엄청나게 큰 대궐과도 같았다. 결정적으로 티파니네 집과 차로 3분 거리 밖에 되지 않을 만큼 가깝다는 것도 유재원이 쉽게 사인을 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유재원도 이제껏 몇 번 방문한 게 전부였지, 숙식을 해보는 건 처음인지라 집과 가까워질수록 두근거림이 커졌다.
따르릉.
두근거림은 갑자기 울린 벨소리로 산통이 깨졌다.
전화는 옆자리에 앉은 김대석이 벨소리가 두 번이 나기 전에 받았다. 유재원도 짐짓 관심이 없는 척 창밖을 보았지만, 귀에는 신경을 집중했다.
“이사장님!”
김대석의 이사장님이란 호칭에 관심 없는 척 돌려져 있던 유재원의 시선이 바로 돌아왔다. 김대석이 이사장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본인의 아버지인 유봉만 뿐이었기 때문이다.
“예, 바로 옆에 계십니다. 바꿔드리겠습니다.”
“아버지?”
-응! 재원이냐?
“예! 무슨 일이세요? 혹시 집이나 마을에 무슨 일이라도 났나요?”
이제까지 유봉만은 아들인 유재원에게 전화를 먼저 걸어본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어머니의 경우엔 종종 전화를 하긴 했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연결된 전화를 넘겨받아서 안부를 좀 물어 보고는 다시 어머니에게 돌려주는 게 전부였다.
이런 아버지가 먼저 전화를 했다면 집안에 무슨 큰일이 난 거 아닌가 싶었던 유재원이었다. 큰집이나 친척들 혹은 연로하신 교장 선생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아, 그런 일은 없단다.
다행히 그쪽으로 일이 난 건 아닌 모양이다.
한숨 돌린 유재원은 아버지와 서로의 안부와 근황에 대한 대화를 짧게 하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 그게 말이다. 최근에 하도 이상한 요청이 많이 와서 말이다.
“요청이요?”
-나보고 협회 좀 맡아달란다.
“협회요? 무슨 협횐데요?”
-핸드볼 협회인데, 회장할 사람이 그렇게도 없나 보더라.
수화기 너머로 전해진 아버지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볼은 협회장 구하는 게 어려울 만 했다. 한국에 비인기종목이 많긴 했는데 핸드볼은 손에 꼽을 만큼 앞에 있는 종목이었다.
88 올림픽 때 여자 핸드볼 팀이 역전에 재역전을 이뤄내는 드라마틱한 금메달로 커다란 감동을 주었고, 바로 작년 92년에도 금메달을 땄지만 자국 리그는 여전히 비인기였다.
보통 스포츠협회는 기업 임원이나 재벌들이 맞는데 핸드볼은 마케팅 효과도 볼 수 없으니 맡기를 거부하다가 ID 그룹까지 오게 된 모양이다. 유재원도 거부를 하려다가 멈칫했다.
아버지가 이렇게 직접 전화를 했다는 건, 한 번 맡아 보고 싶은 의향이 있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다른 재벌처럼 상업적인 측면만 따질 건 아니었다.
잠깐 따져 보니 생각보다 고려해야 할 게 많았다. 게다가 마스터 플랜에도 체육계와 관련이 있는 계획들이 제법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