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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문득 미국의 소비 패턴에 대한 짧은 분석이 떠올랐다. 바로 미국인은 저축을 거의 하지 않는 다는 이야기다. 월급 혹은 주급을 받는 즉시 대부분을 써버리니 구매력이 무시무시하다는 이야기다.
“조금 민감한 질문이라 답변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혹시 레밍턴도 월급을 받으면 다 소비하나요?”
실제로 그런지 궁금해진 유재원은 레밍턴에게 대놓고 물어 봤다.
레밍턴은 유재원의 뜬금없고 민감한 질문에 살짝 놀랐다. 그렇지만 대답을 못할 것도 아니었다.
“후후, 예전엔 그랬죠. 탐정 일을 할 때는 뭐, 버는 것보다 나가는 돈이 항상 많았던 것 같습니다. 섀넌이 안 도와줬으면 진작 길거리로 나앉았겠죠. 지금은 잘나신 보스를 모시고 있는 덕에 돈이 쌓이고 있는 중이지요.”
레밍턴은 특별 계약직이라서 월급은 없다. 대신 계약된 연봉이 매주 나눠서 지급되는 형식이었다.
현재 레밍턴의 연봉은 대략 1,200만 달러였고, 매 분기 매출성과에 따라 약간의 인센티브가 나온다. 본인은 많다고 하는데, 유재원은 ID 테크놀로지의 1992년도 매출 규모에 비례해서 챙겨준 것뿐이다.
하여튼 매주 23만 달러를 받는 레밍턴이니, 돈을 물 쓰듯 써도 은행 계좌에 차곡차곡 돈이 쌓일 거다. 하지만 고소득 연봉을 받기 전에는 다른 평범한 미국인들처럼 별다른 저축 없이 다 소비한 건 맞는 모양이다.
하긴, 한국이라고 저축에 열심인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냥 은행에 대출을 받아서 아파트를 사고, 매달 대출금을 갚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다. 오히려 이율이 작은 정기저축보다는 아파트 대출금을 갚는 게 더 좋은 저축 방법일 수도 있다.
한국의 부동산 불패 신화는 이제 시작이었으니 말이다.
참고로 ID 그룹 회장인 유재원의 연봉은 3,600만 원이다. 예전 주주총회에서 정한 유재원의 월급 300만 원으로 몇 년 째 묶여 있는 것이다.
물론 유재원은 개인적으로 쓸 목돈이 필요하다면 스스로 배당을 의결하고, 입금을 받으면 그만이다.
몇 주 전, 아버지의 핸드볼 협회장 취임에 기념해 10억 원을 낼 때 마련한 돈도 배당으로 회사 돈이 아닌 배당을 받은 개인 재산이었다. 그러니 월급에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고, 덕분에 유재원의 월급은 매년 제자리였다.
하여튼 비싼 뉴 에그 2가 잘 팔리고 있다니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TG에서 만든 제품이긴 해도, ID 테크놀로지의 지분도 상당했다. 번들로 제공되는 운영체제와 사무용 소프트웨어는 ID 테크놀로지의 제품이었고, 뉴 디자인의 핵심인 알루미늄 프레임도 제법 비싼 물건이었다. 또한 ID 플래그쉽 스토어에서 판매가 된 제품은 별도의 수수료를 받기에 전체적으로 보면 전체 가격의 30%는 ID의 몫이다.
“입소문이 터지면서 주문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올해가 다 지나기 전에 50만 대를 팔아치울지 모르겠습니다. TG에서도 생산라인을 최대로 가동하고 있다고 하니 연말 성적을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93년은 이제 3개월 하고도 2주 정도 남았다. 남은 기간을 보면 50만 대까지 팔기엔 좀 시간이 부족할 것 같기도 한데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무지막지하게 팔리니 불가능한 숫자는 아니었다.
공들인 제품이 미친 듯 팔린다는 즐거운 보고를 마무리 한 레밍턴은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특별한 일이라고 지칭했던 그것이었다.
“일본의 이토츄 상사라는 곳에서 우리가 보유한 기술 중 하나를 유통해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토츄 상사요?”
뜬금없는 일본 회사의 등장에 유재원은 다시 한 번 되물었다. 그러자 레밍턴은 본인의 컴퓨터를 조작해 문서를 열어 줬다.
그동안 몇 번 연락을 주고받았던 모양인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이메일이었다. 문서는 당연히 영문으로 작성되어서 유재원은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대전 엑스포에 ID 테크놀로지 관에서 운영 중인 포토 시스템에 대한 견적의 문의였다.
자세히 보니 즉석 포토 프린터에 대한 문의가 아니라,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실시간 보정을 해주는 시스템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어디다 어떻게 쓸 지는 조금도 언급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재원은 이토츄가 이 아이템을 어디에 써먹으려고 문의를 하는 지 잘 알고 있다.
스티커 사진기.
한국에도 90년대 말부터 적잖이 유행을 했던 스티커 사진기였지만, 진짜 큰 인기가 쏟아진 건 바로 일본이었다. 한국보다 훨씬 일찍 시작되었고, 인기도 길게 이어졌다.
주고받은 이메일을 보면 이토츄 소속의 바이어가 대전 엑스포에 왔다가 포토 프린터 기술을 보고 스티커 사진기 아이템을 생각한 것이 확실하다.
사업적인 감각이 특별한 사람이라면 그걸 보고 스티커 사진기를 연상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전 엑스포에선 스티커 사진기를 연상하기 쉽도록 대놓고 연출 했으니 말이다.
뉴 에그 2에 옵션으로 달린 웹캠, 혹은 태블릿 PC의 카메라 모듈 앞에서 적당히 포즈를 취하면 사진이 찍힌다. 여기서 포인트는 후보정이 아주 강하게 들어간 사진이 화면에 뜨는 것이다.
보정 하나 없는 생생한 얼굴이 그대로 뜨면 십중팔구는 흑역사가 생성될 게 뻔하니, 일단 피부부터 하얗게 만들어 놓고 시작한다. 여기에 턱은 갸름하게, 눈은 조금 크게 만들어주니 웬만큼 사진 찍는 실력이 없어도 인생 사진이 뚝딱 나온다.
이게 끝이 아니다. 사진에 예쁜 글꼴을 이용한 문구를 넣을 수도 있고, 준비된 아이콘을 찍을 수도 있다. 아예 마우스를 이용해 그림을 그릴 수도 있으니, 현대의 스티커 사진기의 기능은 모두 다 실현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걸 가지고 적당히 부스를 꾸미고, 가발을 비롯한 소품을 챙겨 놓으면 그게 바로 스티커 사진기가 아니겠는가.
“이토츄뿐만이 아닙니다. 일본의 여러 유통사들도 문의를 했습니다. 다만 구체적으로 액수까지 나온 건 이토츄뿐입니다.”
추가적으로 띄운 화면을 보니 미쯔비시 종합상사도 보였고 시미토모도 보였다.
역시 일본 사람들이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 동시에 미쯔비시의 삼광마크에 거부감이 팍 피어오르는 유재원이다.
저 마크를 볼 때마다 전쟁범죄 이미지가 동시에 떠오르는 건 한국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미 한국에서는 피해보상 소송을 진행 중이었다. 전에 최강욱 비서실장이 조만간 결과가 나올 거라고 하더니, 이후로 몇 달이 더 지났는데 새로운 보고가 올라온 게 없다.
이런 민감한 문제로 법원이 차일피일 선고를 미루는 건 익히 있었던 일이었는데, 이건 좀 심했다.
특히 반일 정서가 강한 문민정부라 살짝 기대 중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실망감이 크다. 이렇게 질질 끄는 건 분명 일본 쪽의 압력이 있을 거라 의심이 가는 건 합리적이다. 동시에 판결 결과도 좋지 않을 거라는 예상이 점차 굳어 지고 있다. 애초에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이렇게 판결이 늦어지지도 않을 거 아니겠는가.
“보스?”
딴 생각 중이었던 유재원을 레밍턴이 깨웠다. 아주 일상이다 보니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 미쯔비시 마크를 보고 살짝 기분 나빴어요.”
“미쯔비시 사람들이 보스에게 무슨 실례라도 저질렀습니까?”
기분이 나빴다고 하니 레밍턴이 바로 관심을 보였다.
“아, 개인적인 일은 아니고요. 대표적인 전범기업이거든요.”
유재원은 강제징용에 대한 짧은 설명과 함께 아직 살아 계신 피해자를 대신해 ID 파운데이션 산하 김&정 법무법인 주도로 소송 중이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레밍턴은 뜨악한 표정이었다.
아주 처음 듣는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그걸 보고 안 되겠다 싶은 유재원이다. 감정은 감정이고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라는 생각이었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러니 미쯔비시는 제일 좋은 조건을 제시하더라도 무조건 제외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뭔가 좀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도 그럴 것이 레밍턴의 반응에서 알 수 있듯, 일본에 대한 미국인들의 감정은 기본적으로 호감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적국이었지만, 이후 일본이 철저히 친미로 돌아서면서 악감정이 사라졌다.
여기에 미국 정치권에 일본이 들이는 노력도 엄청났다. 원폭 피해자라는 것만 강조하지,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해 알려지는 건 어떻게든 막고 있는 것이다. 로비도 엄청나서 친일본적 성향의 관료와 정치인들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덕분에 조금 전 레밍턴의 반응처럼 보수적인 성향의 인물도 일본에 대해선 비호감 정도는 매우 낮았다.
반면 한국은 아직도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나라 밖 사정에 대해선 조금도 신경을 쓰지 못한다. 심지어 전설을 쓰고 있는 ID 그룹의 위상도 한국에는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오죽하면 청와대 비서실장 나부랭이가 유재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반쯤 말을 놓은 것도 가능할까.
그나마 ID 파운데이션의 활동으로 이미지 재고에 나서는 중이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나서는 일본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예전과 달라지는 건 하나 없을 거다. 그러면 누군가 나서야 하는데, 결국 총대를 멜 사람은 유재원 본인밖에 없다.
‘아, 이걸 생각 못했네.’
문제는 마스터 플랜이다.
생각해 보니 마스터 플랜에는 결국 돈 잘 버는 계획뿐이었다. 주변을 챙기는 건 가족과 친척들 정도가 전부였다. 엄청나게 오랜 기간 만든 계획인데도, 이제 보니 빼먹은 게 상당했다.
다만 일본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을 걷어내는 건 단기간 이뤄질 수 없는 사안이었다. 21세기 초반은 지나서야 한류라는 게 좀 생길 테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미국 정치권에서도 친한파라고 할 만한 사람도 얼마 없다.
억지로 꼽자면 클린턴 대통령과 앨 고어였다. 유재원과의 친분이 절대적 이유겠지만 아직 친일적인 행보를 보이진 않았다. 게다가 클린턴 대통령의 경우엔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김대중을 꼽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덕분에 차기 한국 대선에서 김대중이 당선되면서 한미 공조가 제법 잘 이뤄지기도 했다. 문제는 앨 고어가 대선에서 부시에게 밀리면서 클린턴이 쌓은 북한과의 외교적 성과도 한미 공조도 와르르 무너져 내렸지만 앞으로는 모르는 법이다.
“미쯔비시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은 계속 배제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레밍턴은 대답뿐만이 아니라 그의 낡은 수첩에 직접 메모도 했다.
유재원은 아예 몇 가지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음, 혹시 은밀히 증거 수집을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까요?”
“그게 탐정이 주로 하는 일이죠. 아직 현장에 뛰는 제 친구들이 제법 됩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그 친구들을 찾으시죠?”
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떠올랐다.
바로 일제의 전쟁범죄 기록을 모으는 일이었다.
전쟁 직후부터 일본은 줄기차게 증거들을 제거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지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제법 된다. 증거들이 당장 큰 힘은 되지 못하겠지만, 분명히 나중에 폭발력을 발휘할 때가 있을 거다.
“미국은 물론, 한국이나 아시아 지역에서 활동을 하셔야 할 거예요. 임금이나 활동비는 제가 사비로 지급하죠.”
한국에도 정보팀이 있으니 상식적으로 보면 미국에서 인원을 파견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한국의 정보팀은 유재원이 따로 내린 임무를 수행 중이라서 당장 동원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냥 특별 팀을 꾸리는 게 낫다.
“사비요? 그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사회공헌이나 추모 사업으로 처리하면 얼마든지 비용처리가 가능합니다.”
레밍턴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저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고 싶다. 또한,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인 게 세법이다 ID 그룹은 다국적 기업이긴 해도, 본사는 한국이니 나중에 책잡힐 일은 아예 뿌리부터 제거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렇게 잠깐 무거운 이야기로 빠졌던 레밍턴과의 미팅은 곧 본론으로 돌아왔다.
“아, 포토 프린터 기술에 일본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스티커 사진기 아이템일 거예요. 우리가 직접 하면 좋겠지만, 일본의 유통망은 엄청나게 폐쇄적이니 어려울 거고, 결국 일본의 파트너가 필요하죠. 이토츄라면 괜찮을 거 같네요.”
이토츄상사도 현미경을 들고 따져보면 유재원의 심기를 거스르는 역사가 좀 있을 거다. 회사의 역사가 1858년에 시작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미쯔비시만큼은 아니었다. 다만 섬유나 의류가 전문인 이토츄가 스티커 사진기 유통을 잘 할지 의문이긴 했는데, 일본 소매유통망도 갖추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보았다.
어차피 스티커 사진기는 들여 놓자마자 대박이 터지는 아이템이 누가 가져가든 상관없었다.
“예, 협상을 해보고 구체적인 결과가 나오면 보고 드리겠습니다. 스페셜 팀도 믿을만한 사람을 엄선해서 준비하겠습니다.”
레밍턴의 믿음직한 보고를 마지막으로 유재원은 다음 스케줄로 이동했다.
“회장님, 오랜만이네요.”
리사 슈 박사와 반도체 사업부 개발팀원들이 유재원을 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인사말 그대로 실제 대면하는 건, USB칩 이후로 처음이니 진짜 오랜만 이었지만 불평은 조금도 없었다.
“외출 준비는 끝났습니다.”
“그럼 바로 가죠.”
미팅 시간이 점심시간 근처였기에 사무실 근처에서 함께 밥을 먹기로 해서 다들 외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꾸몄다는 건 아니다.
회사에 출근할 때의 차림인데, 오늘은 유재원과 점심을 먹는 다고 조금 더 신경을 쓴 게 전부다. 아무래도 리사 슈가 본인과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을 모은 건지 모르겠지만, 다들 외모엔 그다지 신경을 쓰는 건 아니었다.
유재원도 비슷했다.
청바지에 반팔 셔츠인 가벼운 캐주얼 차림이었고, 그렇기에 점심 식사를 먹을 식당도 차려 입고 가는 정통 레스토랑이 아닌, 가볍게 갈 수 있는 스테이크 하우스였다.
실리콘밸리에 ID 테크놀로지가 막 자리를 잡던 시절 자주 찾아가던 그 가게였다. ID 테크놀로지가 성장한 만큼, 스테이크 하우스도 많이 달라졌다.
가게도 확장했고, 인테리어도 바뀌었다. 바뀌지 않은 건 맛이었다. 고기의 크기도 맛도 예전과 달라진 것 하나 없이 여전히 맛있다.
처음엔 다들 고기를 먹는데 집중했지만, 배가 어느 정도 채워진 후부터는 대화가 많아졌다. 당연히 대화의 주제는 반도체였다. 특히 얼마 전 출시된 CPU가 메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뉴 에그 2를 주문하려는 데 예약이 벌써 한 달은 밀렸다더라고요.”
“HPC 완전체 제품이잖아요. 다른 데는 한두 가지씩 빼먹고 HPC 컴퓨터라고 하는데, 뉴 에그 2는 CPU부터 메모리, 비디오카드 심지어 사운드카드까지 모두 HPC 인증이니 믿고 사는 거죠.”
누군가의 말에 리사 슈가 자랑스럽게 답했다.
에그 시리즈에 있어서 리사 슈는 최고의 전문가와 같은 수준의 지식이 있었다. 게다가 본인이 유재원과 직접 작업했던 코퍼마인 공정이 적용된 제품들이 잔뜩 들어가 있으니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두 개 빼 먹고 HPC 컴퓨터라고 선전하는 업체가 있단 말인가? 미국도 용파리 마인드를 장착한 회사가 있다니, 살짝 충격이었다. 하지만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건 어디에나 있으니 호구취급을 당하지 않으려면, 소비자도 구매 전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하는 수밖에는 없다.
물론 유재원은 ID 테크놀로지가 설계하는 제품들은 앞으로도 쭉 스펙으로 장난 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다가 문뜩 유재원은 재미있는 비밀 하나가 생각났다.
“그런데 이거 아세요? 사실 지금 나온 HPC CPU 성능은 반쪽짜리라는 거?”
“예? 그게 무슨 소리세요?”
역시나 다들 깜짝 놀라는 모습이다. 지금 나온 HPC 성능도 엄청난데, 이게 반쪽이라니. 무슨 소리인가 하는 표정이다. 그렇지만 유재원이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인텔은 신형 CPU의 이름을 펜티엄 II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사실 이보다 먼저 나왔어야 하는 게 펜티엄 MMX라는 모델이었다. MultiMedia eXtension의 약자인 멀티미디어 특화 명령어 세트인데, 이를 통해 단일 명령어로 다수의 동일한 형태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다. 그래픽, 사운드처럼 동일 형태의 데이터를 연속으로 처리하는 데 있어 놀라운 효율을 자랑한다.
실제 인텔이든 AMD든 MMX 확장 명령어 세트는 다 만들어 놓은 상태인데, 이번에 출시된 CPU에는 적용하지 않았다.
공정 전환으로 다른 부분은 신경 쓰지 못할 수도 있다지만, 유재원이 보기엔 속이 좀 보이는 일이었다.
“그러면, 그때는 CPU만 바꾸면 되겠네요!”
누군가의 속편한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소켓이 동일하니 CPU만 바꾸면 컴퓨터의 성능을 다시 한 번 끌어 올릴 수 있다. 또한,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모를 일이다. 유재원이 컴퓨터를 열심히 다뤘던 21세기 초엔 CPU가 바뀌면 메인보드도 바꾸는 게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회장님, 우리에게 주신 과제가 정말 CPU 개발이 맞나요?”
신형 CPU에 대한 이야기가 마무리 될 쯤, 리사 슈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최근 그룹의 주요 현안은 조직 개편이었다. 그렇지만 반도체 사업부는 해당 없는 이야기였다. 대신 유재원은 반도체 사업부에 정식으로 CPU 개발 과제를 내려줬다.
두루뭉술하게 새로운 CPU를 만들어 보라는 식이 아니라, 엄청나게 구체적인 지침을 주었다. 콘셉트는 초소형, 초저전력이다.
이를 위해 CPU 명령어를 최대한 단순화시킨 RISC 방식으로 하고, x86호환도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또한 칩의 면적도 최대한 줄여서 생산성을 극대화 했다. 그렇다고 성능이 너무 떨어지면 안 되고 안드로이드 기본 코덱으로 인코딩된 320*200 해상도의 동영상을 무리 없이 재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과제를 받은 리사 슈가 보았을 때, 이걸 대체 어디에 써야 할 물건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인텔이나 AMD CPU를 대체하기엔 성능이 너무 부족했다. 심지어 노트북이나 대전 엑스포에서 개념을 완성한 태블릿 PC에 넣어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전자계산기에 넣기엔 상당히 과한 성능이었다.
“휴대폰에 들어갈 물건이에요.”
유재원의 답은 간단했다.
휴대폰 하나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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