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2 그레샴의 법칙 =========================================================================
93년 말의 인터넷 트렌드는 자기들의 이름을 붙여 신뢰도를 높이는 것이었나 보다. 와레즈 사이트에도 챈들러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으니, 검색 사이트에도 제리와 데이비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어색하지 않았다.
“성능을 좀 볼까?”
유재원은 제리와 데이비드의 인터넷 검색 가이드라는 긴 이름의 검색 사이트에 여러 가지 키워드를 넣어 결과 값을 보았다.
“호오? 괜찮네.”
생각보다 결과의 질이 좋았다.
유재원이 알기에 제리와 데이비드의 인터넷 검색 가이드는 초창기엔 카테고리 분류 방식으로 사람들이 직접 사이트를 방문해 본 다음 데이터를 입력했다고 한다. 넥스트컴의 검색창과 똑같은 것이었다.
넥스트컴이 없었으면 제리와 데이비드가 만든 검색 가이드도 이런 방식이었을 텐데, 조금 달라졌다.
“시작부터 검색 봇을 쓰는 모양이네?”
자동분류 프로그램을 시작했던 모양인지 카테고리와 잘 어울리지 않는 항목들이 많이 보였다. 그런 결과 값에는 오토라는 조그만 아이콘이 붙어 있었다. 아이콘을 눌러보면 자동검색으로 분류한 항목이라는 짧은 설명이 붙어 있었다.
전체적인 퀄리티를 따지면 아직 넥스트컴만큼은 아니다.
넥스트컴의 카테고리 분류 방식이 낡긴 해도 긴 역사만큼 축적된 데이터는 제법 방대했다. 게다가 인지도도 최고였다. 그러니 사이트를 개설한 기업이나 개인들은 자발적으로 넥스트컴에 본인들의 사이트를 등록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인터넷 사이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생겨나는 중이었고, 수동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게다가 아예 넥스트컴에 등록하지 않는 사이트도 제법 있었으니 자동화는 필수였다.
“사람들 반응은 괜찮으려나?”
북미 최대의 커뮤니티 게시판으로 거듭난 2CH.com에 가보니 역시나 호평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넥스트컴은 합법적인 콘텐츠만 올리는 게 가능했다. 요즘 뜨는 와레즈 같은 사이트를 등록하려고 하면 당연히 막힌다. 성인물 역시 18세 이하는 접속할 수 없다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뜬다.
제리와 데이비드의 검색 가이드는 그런 차단 조치가 없었다. 덕분에 사이트의 콘텐츠가 무엇이든 검색할 수 있었다.
“뭐, 이 정도는 익스큐즈할 수 있지.”
넥스트컴의 약점 두 개를 잘 파악했고, 그걸 자신들의 강점을 만들었다.
제리와 데이비드라는 두 녀석이 제법 머릴 굴렸다는 게 딱 표시가 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유재원은 이 둘이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 기억 저장소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인터넷의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둘의 이름은 절대 모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야후!
구굴이 등장하기 전까지 인터넷 황제주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바로 그 야후의 전신이 바로 제리와 데이비드의 인터넷 검색 가이드였다.
원래 이 둘이 검색 사이트를 런칭하는 건 94년 초였는데, 넥스트컴이나 유재원에게 자극을 받은 모양인지 예정보다 훨씬 일찍 사이트를 열었다. 더구나 그 퀄리티도 이전보다 훨씬 좋으니 앞으로의 기대가 컸다.
유재원이 냉정히 따진다면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했으니, 긴장하는 게 맞겠지만 지금은 반가움이 훨씬 컸다.
제리와 데이비드가 스탠퍼드 동문이라서가 아니었다. 원래 유재원이 생각했던 인터넷 전쟁이란 인터넷 사이트의 인플레이션과 함께 수많은 검색엔진들의 난립이었다. 넥스트컴이 포털 사이트를 표방하면서 검색 기능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것도, 일부러 검색 사이트들의 난립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미래의 기술을 가진 유재원이지만, 혼자 앞서나가서 현재와 갭을 크게 만들면 결국 본인의 손해라는 결론이 나왔다. 시장 규모가 전보다 축소될 가능성이 높고, 독점으로 인해 집중포화를 당할 수도 있었다.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이 강제로 분할된 것처럼 ID 그룹도 강제로 분리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결정적으로 유재원이 기억 저장소에 품고 있는 밑천이 떨어지면 시장 전체에 쇠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유재원은 경쟁사들보다 딱 한 발만 앞에 있자는 전략을 쓰는 중이었다.
야후의 전신인 제리와 데이비드의 검색 가이드의 등장은 이 전략이 유효하다는 걸 증명해주는 일이었다. 야후가 나타났으니 이제 잉크토미, 라이코스와 알타비스타도 나타날 것이고 구굴도 조만간 등장할 것이다.
이전 생에 검색 시장을 평정한 건 구굴이었지만, 유재원과 ID 그룹의 등장으로 커다란 변수가 발생한 지금은 쉽게 승자를 점칠 수 없다. 당장 야후의 전신인 제리와 데이비드의 검색 가이드는 이전엔 없었던 검색 봇이란 신기능을 탑재했으니 말이다.
유재원은 이러한 인터넷 전쟁을 지켜보다가 승리한 검색엔진을 넥스트컴에 가져 오기만 하면 된다.
검색엔진들이 날고 기어봐야 결국 수익성에 발목이 잡히게 마련이고, 넥스트컴은 광고라는 수익 모델을 완성했으니 말이다.
문뜩 유재원은 제리와 데이비드를 만나보고 싶었다. 어떻게 검색 봇이란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조바심을 내진 않았다. 인터넷 사업을 한다고 하면 어차피 ID 그룹과 우호적이든, 대척점을 잡든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형성된다.
자연스럽게 만날 수밖에 없으니 시간이 해결해줄 거다. 더구나 제리와 데이비드는 유재원과 동문이니 학교에 자주 가다 보면 마주치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
행동력 좋은 유재원은 바로 실행에 옮겼다.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찾던 학교를 자주 찾기 시작했다.
당연히 학생이란 본분은 학교에 결석하지 않는 것이지만, 한참 전에 초심을 잃어버렸던 유재원인지라 처음엔 어색했다. 그런데 학교에 다니는 건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교수님들도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았고, 길버트 같은 동기와 만나 랜파티를 즐기는 것도 재미있었다.
랜파티라는 건 체육관 같은 곳에 자기의 컴퓨터를 들고 와서 함께 게임을 플레이하는 걸 말한다. 옛날 네트워크 환경이 좋지 않았던 때엔 이렇게 직접 연결하는 게 속도 면에서 최고였다. 지금은 넥스트컴캐스트의 ADSL 서비스로 인해 랜파티의 의미가 좀 달라졌다.
네트워크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목도모를 위해 직접 만다는 것이 주가 되었다. 곧 중간고사인데도 게임에 미친 녀석들은 시험공부엔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인지 죽어라 게임만 했다.
마지막으로 유재원은 티파니와의 데이트도 학교에서 즐겼다. 상당히 거대한 캠퍼스를 자랑하는 만큼 연인끼리 놀 수 있는 공간도 많았다.
이렇게 열심히(?) 학교에 다니다 보니 유재원은 어느 순간 원래의 목적이었던 제리와 데이비드는 뇌리에서 잊혀져버렸다.
11월 19일. 금요일이다.
유재원은 오늘까지만 학교에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주, 화요일 23일은 김 대통령과 클린턴의 정상회담이 예정된 날이었고, 그날 저녁에 있는 백악관 만찬에 초대되었다. 그리고 11월 말부터 12월까지는 연말 결산을 위해서 회사 일에 매진해야 했기 때문이다.
유재원은 이러한 이야기를 교수님들과 친구들에게 하며 당분간 학교에는 나오지 못할 거라고 알리는 중이었다.
“저기.”
조금 전 지도교수인 츄쳉 교수님과 면담을 하고 나오는 데, 유재원을 잡는 사람이 있었다.
“어?”
또, 사인 부탁인가 하며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사람을 확인한 유재원은 헉 하는 소릴 냈다.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유재원은 한 눈에 그 둘을 알아보았다.
먼저 말을 건 이는 스탠퍼드에서 많이 보이는 동양계로 둥그런 안경을 쓰고 있는 젊은 청년이었다. 그 옆에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는 금발 청년이다. 바로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제리 양과 데이비드 필로였다.
“어, 음! 유재원 회장님, 저는 제리, 이 친구는 데이비드라고 합니다.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이름을 붙인 검색 가이드 사이트를 운영 중에 있죠.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나요?”
제리 양이 대표로 매우 정중한 말로 시간을 구했다.
“그럼요!”
원래 학교에 자주 나왔던 게 바로 이 두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샛길로 빠져서 엄한 데 시간을 써버렸는데, 역시 만날 인연은 이렇게 만나게 되는 모양이다.
오늘따라 찬바람이 부는 날씨라서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긴 어려웠다. 조금 북적이긴 해도 근처 카페에서 자리를 잡았다.
초면이라 서먹한 분위기였지만, 인터넷 비즈니스라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순식간에 말이 트였다. 게다가 동문이라는 특성 덕에 곧바로 허심탄회한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 어떻게 검색 사이트라는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는지부터 이야기 했다.
심지어 제리 양과 데이비드 필로는 등록되지 않은 웹 사이트를 순회하면서 자동으로 목록과 분류를 해주는 프로그램도 만들었다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걸 다 들은 유재원은 검색로봇이란 단어 하나로 간단히 네이밍해주었다.
“와우, 검색로봇이라니, 자동분류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데 이보다 간편할 수는 없겠네요.”
“더 줄이면 검색 봇이죠.”
둘은 검색 봇보단 검색로봇이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동시에 둘에겐 작은 의문도 들었다. 자신들의 설명을 듣고 단어 하나로 정의하는 유재원이 어째서 넥스트컴의 검색 기능은 아직도 구식 카테고리 방식을 쓰고 있나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검색엔진에 대한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유재원과 제리, 데이비드는 곧 본론으로 넘어갔다.
“혹시나 하고 넥스트컴에 광고를 넣었는데, 효과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그만큼 두 분이서 만든 검색 가이드의 성능이 좋은 거겠죠. 네티즌이 원하던 것을 딱 맞게 긁어주셨잖아요.”
유재원의 칭찬에 다시 한 번 흐뭇해지는 둘이었다. 그러나 흐뭇함은 곧 걱정으로 바뀌었다.
“예, 사람들이 알아봐주셔서 고마운데, 문제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서버가 마비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는 겁니다.”
“전화가 올 때마다 혹시 학교 전산실이 아닌가 깜짝 놀라고 있어요.”
역시 이 문제일 줄 알았다.
제리와 데이비드의 인터넷 가이드는 스탠퍼드 대학교 전산망을 빌려 서비스 중이었다. 창업에 대해 학교 차원에서 권장하는 스탠포드였기에 도움이 필요할 땐 이렇게 학교의 자원도 열어주고 있다.
스탠퍼드 대학교 전산망은 수많은 학생들과 교수님들 그리고 세계의 네티즌들이 다들 접속하는 만큼 규모는 상당했다. 여유 분량이 제법 있었는데, 제리와 데이비드의 인터넷 가이드의 인기가 대폭발하며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급기야 학교 전체의 서버가 다운될 지경이었다.
그로 인해서 학교에서는 급히 제리 양에게 연락을 했단다. 이만하면 독립해도 될 거 같으니, 자체 서버로 독자적인 사업을 시작하라는 것이었다.
급히 대량의 서버를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건 ID 테크놀로지의 클라우드 서버 서비스였다.
“탁월한 선택이시네요. 저희 ID 클라우드 서비스만큼 안정적이고 고성능인 서버 서비스는 이 세상에서 찾기 어려울 겁니다.”
유재원은 콧대를 세우며 클라우드 서비스에 대해 자랑했다. 한 점의 거짓말도 없었기에,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예, 저희도 이 같은 상황에서 최고의 솔루션은 ID 클라우드 서비스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리 양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끝을 맺지 못했다. 데이비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이용료 때문이다.
ID 클라우드 서비스의 요금제는 사용량에 따라 비례한다.
요금 책정 방식은 조금 복잡하다. 고객이 클라우드 서버에 올린 데이터의 크기, 서버 프로그램이 점유한 CPU 사용량 그리고 하루 발생한 트래픽 크기로 요금이 책정된다. 서버 용량도 얼마 되지 않고, CPU 사용량도 적고, 트래픽도 얼마 발생하지 않으면 무료지만, 세 가지 모두 고르게 사용하면 요금이 점점 올라간다.
제리와 데이비드의 인터넷 가이드는 상당히 거대한 서비스인 만큼 요금도 높아진다. 검색로봇을 계속 운영하면서 새롭게 인터넷에 올라오는 서버 목록을 데이터베이스로 정리하고, 수십 수백만의 접속자가 입력한 키워드로 데이터베이스를 검색을 해서 나오는 결과를 돌려줘야 한다.
“아, 무엇이 곤란하신지 바로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할 까요?”
유재원이 입을 열자 제리와 데이비드 두 사람이 바로 귀를 기울였다.
“두 가지 방법을 제안 드릴게요. 하나는 제가 두 분께 지분 투자를 하는 거예요. 투자 금액은 ID 그룹의 전문가 평가에 따르겠지만, 분명 두 분이 만족하실 금액이 나올 겁니다.”
투자라는 소리에 두 사람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다른 하나는 넥스트컴에 두 분이 만든 검색엔진을 탑재하는 거죠. 물론 탑재하는 대가로 적당한 비용을 치를 거예요. 이뿐만이 아니라 서비스 운영에 필요한 서버도 우리가 준비할 거고요.”
선택의 순간이다.
재미있는 건 제안을 던진 유재원보다, 제안을 받은 제리와 데이비드가 훨씬 긴장했다는 것이다.
“다, 당장 결정해야합니까?”
유재원은 마음 같아선 그렇다고 하고 싶었다.
자신이 보기에 이걸로 딱히 오래 고민할 건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두 가지 방안 모두 야후에게 너무도 너그러운 방안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둘에겐 따져야 할 게 많았던 모양이다.
“음, 그러면 다음 주 토요일까지 연락주세요. ID 톡이나 비서실로 넣으면 됩니다.”
매우 간절한 표정인지라 어쩔 수 없이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11월 22일 월요일 아침.
유재원은 워싱턴 DC로 가기 위해 먼저 공항으로 이동했다. 저녁에 있을 김 대통령 주체 만찬에 참석하기 위함이다.
“여깁니다.”
이번엔 레밍턴까지 배웅을 나왔다. 역시 이유가 있었다. 공항에서 유재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걸프 스트림 3이라는 비즈니스 제트 비행기였다. 놀랍게도 수직꼬리날개에는 ID 그룹의 로고가 선명히 박혀 있었다. 동체의 페인팅도 ID 그룹의 대표색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보리 색으로 되어 있었다.
알고 봤더니 ID 테크놀로지에서 1년 동안 임대한 전용기라고 한다. 사업장이 미국은 물론 캐나다까지 넓게 퍼져 있는 ID 그룹이었고, 출장을 할 때마다 불편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비행기 요금이나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다 따져 보면, 그냥 전용기 하나를 임대하는 게 더 쌌다고 한다.
이렇게 임대된 걸프스트림 3의 첫 번째 비행은 레밍턴의 철저한 준비로 유재원의 워싱턴 DC행이 되었다.
“우와, 고마워요!”
전생에서도 누리지 못했던 호사였다. 게다가 미리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던 터라 기쁨이 더욱 컸다.
역시 전용기는 편했다.
승무원들은 오직 유재원과 수행원만을 위해 서비스를 해주었는데, 이게 컸다. 비즈니스석이나, 퍼스트클래스도 만석이 되면 조금 불편한 게 사실인데, 전용기 안에선 뭐든 눈치 안보고 할 수 있었다.
쉘 북을 선반에 올려두고 사운드 빵빵하게 켜놓고 게임을 할 수도 있었다.
비행도 생각보다 안정적이었다. 조그만 비행기라 흔들림이 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없었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 걸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전용기에 타서 비행을 했던 유재원은 뉴욕에서 내렸다.
워싱턴 DC가 아닌 뉴욕에 내린 이유는 시간이 넉넉했기 때문이다. 백악관 만찬 행사는 정상회담이 끝난 다음에 있는데, 그때까지는 거의 하루 정도 시간이 남았다. 그러니 가까운 뉴욕에서 자신의 사업장을 점검해볼 생각이었다. 또한 맨해튼에서 매입하기로 한 후보 건물들을 둘러보는 일정도 있었다.
기업이 거대해진 만큼, 유재원의 일을 대신할 사람은 많았지만, 유재원의 성격이 중요한 건 본인이 직접 챙겨야 속이 풀리는 스타일이었다.
이동 중인 유재원의 자동차안 카폰이 울리기 전까지만 해도 그 일정엔 변함이 없었다.
“여보세요? ID 그룹 유재원 회장 수행비서 김대석입니다.”
카폰이 울리자 바로 김대석이 받았다.
휴대폰이 생긴 후로부터는 유재원의 사적인 전화는 모두 휴대폰으로 왔고, 카폰은 공적인 일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설정되었다.
“누구시라고요?”
김대석의 말투가 점점 딱딱하졌다. 아무래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가 매우 강압적이었던 탓이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지 않겠는가. 그래도 유재원을 대신해서 전화를 받는 것이니 만큼 정중함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저기 회장님, 전화를 받아보셔야겠습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상대가 먼저 떨어져 나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엔 김대석이 밀렸다. 그 모습에 오히려 궁금증이 생겼다. 도대체 누구기에 이런 반응일까 싶었다.
“김 대통령의 차남 김영철이라는데,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김영철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유재원은 무슨 상황인지 바로 이해했다. 그리곤 곧장 김대석으로부터 전화기를 넘겨받아 통화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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