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296화 (296/1,007)

00296  그레샴의 법칙  =========================================================================

며칠이 지났다.

유재원에겐 유독 바쁘게 느껴졌던 11월도 다 지나고 93년의 마지막 달인 12월이 되었다. 한국이었다면 칼바람이 불어와 바로 겨울이 되었다는 걸 인지했을 텐데, 일교차가 적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그냥 좀 서늘해졌다 싶은 정도였다.

그만큼 일이 많아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동시에 유재원과 직접 간접적으로 연관된 일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중대했다는 의미도 된다. 실제로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이와 관련된 뉴스들이 연달아서 터지기도 했다.

가장 먼저 대대적으로 보도된 건 일렉트로닉아츠를 대표로 하는 소프트웨어 개발사 연합의 넥스트컴캐스트 공동 소송이었다.

무려 10억 달러 규모이니 뉴스가 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선악구분하기 좋아하는 언론이었지만, 이 사안에 대해서는 누구의 편을 더 들어주거나 하지 않았다. 인터넷의 무단 공유로 큰 피해를 본 회사들의 이해가 되는 반면에, 그렇다고 회선을 제공한 넥스트컴캐스트의 책임을 물어보기엔 애매했다.

결정적으로 넥스트컴캐스트가 주도하는 정보고속도로 사업은 클린턴 행정부가 대대적으로 밀어주고 있는 사업이었다. 민주당 지지 계열 언론사들은 매우 사실적이고도 건조하게 보도했다.

그렇다고 공화당을 지지하는 보수쪽이라고 신나게 보도할 수는 없었다. ID 그룹이 푸는 광고비는 어마어마했던 탓이다. 일렉트로닉아츠를 비롯한 원고 연합을 다 합쳐봐야 ID 그룹을 넘지 못할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소프트웨어 업체들의 광고는 주로 전문 잡지에 한정된 반면, ID 그룹의 광고들은 텔레비전과 신문을 주로 활용했기에 생긴 일이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거라도 할 말은 다 한다는 미국이라지만 광고주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건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들 이번 소송으로 인터넷에 대한 첫 번째 규제가 생길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물 밑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인터넷 전쟁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유명했던 와레즈 사이트들이 시도 때도 없이 먹통이 되기 일쑤였고, 페이크 파일이 대량으로 범람하면서 사용자들의 신뢰를 빠르게 잃고 있는 중이었다.

날벼락을 맞은 사이트 운영자들은 서비스를 복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새로운 임시 사이트를 만들기도 하고, 자체 검증을 마친 파일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았다. 임시 사이트의 주소가 커뮤니티에 공개되기라도 하면 사람들이 대량으로 몰려들어 다시 마비되는 건 순간이었고, 검증을 마치고 올린 파일도 공개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순삭되었다. 파일 하나 당 무료로 전송되는 횟수가 있는데, 이게 순식간에 바닥나버린 거다.

와레즈 사이트의 운영자, 혹은 와레즈에 자료를 대량으로 올린 사람들 중에 바보처럼 주소나 신분을 드러낸 이들은 어마어마한 배상금이 적시된 고소장을 받기도 했다.

덕분에 이들은 와레즈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하는 곳이 ID 그룹이라는 걸 눈치 챘고 커뮤니티에 이를 고발하는 글을 열심히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호응은 적었다. 그나마 컴퓨터에 대해 관심이 있는 이들도 일렉트로닉아츠의 저작권 대표 소송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와레즈에 대한 법적 조치를 한다는 정도로 인식했다.

심지어 평소에 와레즈 사이트를 즐겨 사용했던 주머니 가벼운 게이머들도 불편함을 크게 느끼긴 했지만, 곧 대안을 찾았다.

조금은 옛날 게임이긴 해도 파격적인 무료 제공과 함께 최신의 게임들도 상상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할인 행사로 게임을 뿌리는 곳을 찾은 것이다. 보통 이러면 수량이 제한되는 게 기본인데, 여긴 수량 제한도 없었다.

바로 인터넷 커뮤니티 속에서 급부상한 ESD.com이란 사이트였다. 전자 소프트웨어 유통망(Electronic Software Distribution)이란 앞 글자를 따서 만든 사이트로 유재원이 며칠 전 당근책으로 런칭한 바로 그 서비스였다.

며칠 만에 독립 서비스로 런칭한 것에 비해 내실은 알찼다. 소프트웨어의 유료 판매는 넥스트컴에서 지속적으로 개선했고, 판매되는 소프트웨어 숫자도 늘려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넥스트컴 안에 있어 접근성이 좋지 않았고, 패키지 판에 비해 가격이 파격적으로 저렴한 것도 아니었기에 큰 이익이 나지 않았을 뿐이다.

유재원은 이 서비스를 넥스트컴에서 분리 시켜 별도의 인터넷 서버를 두고 독립적인 서비스를 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쉽게 신규 웹 페이지를 만들었다.

오히려 독립된 이름을 지어주는 게 더 어려웠다.

그때 유재원은 얼마나 머릴 굴렸는지 모른다. 오죽하면 전생에 대표적인 ESD 업체였던 스팀을 비롯해 오리진이니 험블이니 하는 이름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렇지만 그 이름들을 그대로 쓰는 건 양심에 걸렸다.

그러다가 머릴 번뜩이는 생각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전자 소프트웨어 유통망의 머리글자를 따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온 ESD라는 단어였고, 여기에 마법과 같은 접미사 닷컴을 붙이니 그럴듯한 회사 이름이 뚝딱 나왔다.

ESD.com 조직은 최대한 간결하게 만들었다.

넥스트컴에서 유료 소프트웨어 판매 페이지를 관리하던 팀을 그대로 독립시켜 관리자로 삼고, 평직원으로는 이제 막 대학교를 졸업한 신입생 10여명으로 채운 ESD.com가 탄생했다. 물론 평직원이라고 들어온 사람들 중에 반은 스탠퍼드 졸업생이고 나머지 반은 다른 실리콘밸리 회사에 인턴으로 다녔던 재원들이니 업무수행능력은 두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ID 하이테크 연구소에서 열심히 만든 원클릭 결제 시스템을 더하자 완벽한 온라인 소프트웨어 판매 사이트가 되었다.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어야 쉽게 결제할 수 있다는 게 문제이긴 한데, 신용카드 보급률은 매년 큰 폭으로 상승 중이니 큰 걸림돌은 아니었다.

실제 런칭을 하고 보니 생각보다 매출이 좋았다.

간편한 결제에 다운로드도 금방이었고, 어마어마한 할인까지 더해지니 필요치 않은 게임까지 통째로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탄력을 받은 유재원은 최대한 많은 게임유통사와 접촉해서 온라인 유통 계약을 맺도록 지시했다. 패키지 시장에서 출시한 지 1, 2년쯤 지난 게임들은 매출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이걸 온라인으로 옮기고 할인을 시작하면 마법처럼 매출이 일어났다. 아예 상품성이 사라졌던 게임이 기사회생하는 것이기에 할인 폭이 커도 문제는 전혀 없다.

최근 ID 엔터테인먼트에 2천만 달러로 인수된 오리진 시스템즈도 윙커맨더와 울티마 등의 게임을 ESD.com에 개제하고 판매를 시작했다. 골수팬이 많은 오리진 시스템즈였기에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유료 다운로드 숫자가 만 단위를 훌쩍 넘었다.

덕분에 오리진 시스템즈의 사장인 리처드 게리엇은 온라인에 대한 인식이 매우 좋아졌고, 유재원이 제안한 온라인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러한 굵직한 사건 말고도 샌프란시스코 지역 뉴스가 전국을 한 번 강타하기도 했다. 제리와 데이비드가 터트린 400만 달러의 잭팟 소식이었다.

넥스트컴의 메인 검색엔진을 스탠퍼드 대학생 둘이 만든 야후를 채택했고, 그에 대한 대가로 400만 달러를 지출했다는 소식이 전국 뉴스를 탔다.

유재원도 대박을 치긴 했는데, 그 규모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라서 현실감이 적었다면, 제리와 데이비드의 대박은 그야말로 누구나 실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덕분에 야후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폭발했고, 검색엔진의 외부 수혈이라는 파격적인 선택을 한 넥스트컴에 접속해 보는 네티즌들도 많아졌다.

다만 이렇게 미국 쪽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모두 유재원에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왜 내가 리눅스 진영을 공격한다는 루머가 퍼졌을까?”

서재의 컴퓨터 앞에 앉은 유재원은 모니터에 2CH.com은 물론이고 소규모의 리눅스 커뮤니티를 띄워 놓은 상태다.

방금 나온 혼잣말처럼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엔 유재원이 리눅스를 죽이려고 공격을 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도는 중이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인터넷을 보면 아예 기정사실이 된 것처럼 인식이 되고 있다. 오죽하면 리눅스 개발에 앞장서고 있던 리처드 스톨먼으로부터 전자 우편이 날아올 정도였다.

다행이 리처드 스톨먼은 오해를 하진 않았다. 게다가 전자 우편에 담긴 문장도 정중했다. 예전 제1회 시큐리티 챌린지를 통해 생긴 좋은 인연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톨먼과의 오해는 생기기 전에 풀긴 했는데, 대중들의 오해가 문제였다.

“와레즈 사이트 공격 건 때문에 그러나?”

유재원이 DDOS라는 이 시기엔 신기술이나 다름이 없는 방식으로 챈들러의 자유소프트웨어 라는 와레즈를 공격한 일이 있었다. 챈들러의 자유소프트웨어 사이트의 서버 운영체제는 리눅스였고, 유재원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물론 안드로이드 엔터프라이즈 버전을 사용한 서버 사이트도 DDOS에 무릎을 꿇었다. 같은 컴퓨터 스펙이라면 엔터프라이즈 버전이 리눅스보다 더 많은 트래픽을 처리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하드웨어의 물리적 성능 이상으로 쏟아지면 엔터프라이즈 버전이라도 버틸 수는 없었던 탓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공격을 실제로 감지한 사람들은 없었다. 데이터센터도 ID 그룹 산하였고, 인터넷 회선 관리도 ID 그룹이 하고 있으니 와레즈 박멸을 위해 터프한 수단을 쓰고 있다는 것이 밖으로 세어나갈 일은 없다.

여기에서 오해가 비롯되었다.

네티즌 일부는 와레즈 사이트의 연속적인 먹통이 서버 시장에서 점유율을 늘리고 있는 리눅스를 유재원이 공격한 거라고 착각했고, 곧장 루머를 퍼트렸다.

자극적인 소문의 확산력은 무척이나 빠르다. 특히 온라인이라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고 순식간에 북미의 모든 커뮤니티 사이트로 이어지면서 지금은 기정사실처럼 되어 버렸다.

“음, 이게 딱 온갖 음해에 시달렸던 게이츠의 포지션이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제 사라졌다. 그런데 유재원을 만나기 이전, 잘 나갔던 시절에는 온갖 루머의 근원지였다. 이제 그 위치를 유재원이 넘겨받는 중인 건가 보다.

대중에게도 일인자로 인식되고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루머의 중심이 되는 건 반갑지 않았다. 그렇다고 싫다고 해봐야 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이걸 즐겨야 하는 건가?”

유재원 개인으로도 회사 차원으로도 대응하기도 뭐한 사안이었기에, 시간이 지나 네티즌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길 기다리는 방법뿐이다. 그때까진 그저 즐기는 것 밖에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차라리 리눅스를 제대로 공격했으면 억울하지도 않지.”

유재원은 리눅스에 대해 유감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리눅스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리눅스가 작은 지분이더라도 운영체제 시장에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으면 ID 그룹을 분할하라는 소리는 나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실제로 유재원은 알게 모르게 리눅스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었다.

단적으로 USB의 드라이버 지원이다. 하드웨어와 운영체제를 이어주는 드라이버 제작은 전문적인 프로그래머들이 만들어주지 않으면, 리눅스 진영은 무척이나 애를 먹을 사안이었다. 유재원은 USB의 출시와 함께 안드로이드용은 물론 리눅스용도 만들어 배포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3D 가속의 표준이 된 글라이드 X의 리눅스 컨버팅 프로젝트도 일단은 지켜보는 상태였다.

리눅스는 소스가 완전히 공개되어 있는 운영체제였다. 그렇기에 기능의 추가나 버전업도 자발적으로 참여자들의 기여를 통해 이뤄지는 데, 이를 다른 말로 풀어 보면 중구난방이다.

중앙에서 제어를 하지 않으니 그냥 하고 싶은 걸 막 해보는 거다.

그러다가 최근엔 공통적으로 관심을 두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해당 기능을 만드는 커뮤니티를 이루기 시작했다. 이런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커뮤니티 중에 제일 큰 건 어이없게도 2CH.com이었다.

리눅스 개발자 모임은 2CH.com의 게시판 중에서 제법 큰 규모를 자랑했다.

이렇게 탄생한 커뮤니티 모임 중에 제일 뜨거운 건 리눅스에서 안드로이드용 게임을 구동해 보자는 모임이었다. 안드로이드나 리눅스나 비슷한 유닉스 체계를 쓰고 있기에 프로그램 실행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라이브러리가 문제였다.

덕분에 글라이드 X의 리눅스 호환 버전을 만들자고 용을 쓰고 있는 게 현재의 시점이다.

글라이드 X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개된 라이브러리지만 안드로이드라는 운영체제 안에서의 자유였다. 리눅스로 포팅 하는 건 엄연히 불법이었다.

그럼에도 유재원은 일단은 관망 중이었다.

아직은 선을 넘지 않았고, 억지로 포팅을 해봤자 안드로이드에서 돌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구동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길게 보았을 때 리눅스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사업도 제법 많았다.

덕분에 리눅스를 도우면 도왔지, 공격할 생각은 조금도 없는 유재원인데, 엄한 오해를 사고 있으니 속이 답답했다.

더구나 유재원이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은 미국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이 캐시카우라면 유재원의 근원이자 안방은 한국이었다. 한국도 요즘 보통 시끄러운 게 아니었다. 당연히 유재원이 벌인 일과도 매우 큰 관련이 있었다.

-청와대 한미정상회담 성공 자평.

-클린턴,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 화해무드 이어질 경우 경협도 가능!

-한반도비핵화라는 절대가치 사수에 합의!

한국 넥스트컴 뉴스 페이지에 가보면 일반 제목보다 두 배는 크고 굵은 글자로 쓰인 기사들은 아직도 며칠 전 있었던 한미정상회담 관련이었다.

머리기사들은 매우 긍정적인 뉴스이지만, 한 페이지만 넘기면 혼돈의 카오스가 벌어진다.

-전농, 한미정상회담에 쌀시장 개방 이면합의 있다!

-대규모 상경 투쟁 결의!

전농이란 전국농민총연합의 줄인 말로 주로 쌀농사를 지으시는 농민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정보력도 좋은 모양인지,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흘린 모양인지 우루과이 라운드에서 쌀시장 개방에 합의하는 걸 알고 펄쩍 뛰었다.

전농의 경우라면 생계와 직결된 문제라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유재원이야 우루과이 라운드가 타결되면서 국제 무역체제가 가트(GATT)에서 WTO체계로 변화된다더라도 일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건 잘 안다.

정부가 미국과 FTA를 추진하긴 했지만, 자국 산업 특히 농업이나 반도체, 자동차 등을 지키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했다. 게다가 미국산 농산물이나 자동차는 한국에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오히려 지금은 신경 못 쓰고 있는 축산물이 나중에 문제가 될 거다.

“여기가 문제네.”

-전대협, 대규모 규탄 대회 연다.

전농 기사 바로 아래에 있는 것이 바로 전대협의 대규모 규탄 대회였다.

유재원이 보기에 참 뜬금없는 타이밍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라는 거대한 대학생 조직이 참전했다.

이들이 들고 일어난 이유는 자주적이고 주체적이 되어야 할 남북정상회담에 외세(?)인 미국을 끌어들여 오염시켰다는 것에 대한 규탄이었다.

“어휴, 저게 뭐하는 짓인가 몰라.”

이때만 해도 운동권의 세력은 무척이나 강대했다. 87년에는 무척이나 긍정적인 효과를 주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민족자주, 일명 NL노선을 타게 되면서 친북과 반미 성격이 크게 강해진 것이다.

유재원이 보기에 이건 세력 과시였다. 전대협 체제는 93년 올해까지만 하고, 내년부터는 한총련이란 이름으로 확대 재편될 예정인데, 이번 일을 계기로 피날레를 크게 지르고 싶은 모양이다.

학생 운동 쪽으로는 유재원은 따로 계획을 세워 놓은 게 없었기에, 그냥 두고 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대학교 운동권은 사회가 안정되고 민주주의가 정착되면 자연스레 약해진다. 괜히 지금 스트레스 받으면서 나설 이유는 전혀 없다.

“사실 이게 제일 큰 문젠데 말이지.”

그런데 유재원의 진짜 걱정은 따로 있다. 뉴스페이지에서 제일 인기가 없는 경제 섹션의 기사들이었다.

-일성, 일본과 미국에서 대규모 외화 유치 성공!

-일성 자동차 출범 청신호, 내년 3월 첫 삽 뜬다!

-대호 김우중,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세계 경영 선포!

-미래, 신의주 특구와 금강산 관광 개발 이권을 두고 내부 갈등 폭발!

일성과 대호를 시작으로 대규모 외자 유치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재미있는 건 지금 들어오는 외화는 일본 자금이 상당했다는 점이다.

예전 유재원은 일본에서 큰 이득을 보았다. 그게 불과 2년 하도고 몇 개월 전이었는데, 이후 일본은 빠른 속도로 경제 위기를 해결한 것처럼 보였다. 이는 일본이 자국의 은행의 금리를 0에 가깝게 낮춰 자산의 유동성을 크게 증가시킨 결과였다.

경제 체질의 변화가 아닌 효과가 빠른 스팀팩 처방으로 이뤄낸 것이기에, 부작용이 컸다. 그것 중 하나가 엔화의 캐리 트레이드(Carry trade)였다. 자국의 은행에서 저리의 자금을 조달해 이율이 높은 외국 자산에 투자하는 거래였다.

단적으로 엔화를 빌려 미국 채권을 사는 것만으로 연 5%이상의 수익이 나온다. 이것도 작다 하는 사람들, 일명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을 선호하는 이들은 고금리 회사채를 선택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일성과 대호 등의 한국 재벌들이 대규모의 외화를 유치할 수 있었던 거다.

“참, 파국이 뻔히 보이는데도 막을 수도 없고.”

ID 인베스트먼트로 경고를 하고 있긴 한데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없었다. 더구나 언론들의 마사지로 인해서 외자 유치라는 건 절대 선처럼 취급을 받고 있는 중이다. 유재원은 위대한 외자 유치라고 칭송하는 기자들의 이름만 따로 메모했다.

이 이름 중에 외환 위기가 터지면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딴 소리를 해댈 작자들이 얼마나 있는 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잠시 후.

“회장님, 이제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김대석이 노크와 함께 서재로 들어왔다.

“예, 저는 준비 됐습니다.”

유재원도 기다렸다는 듯 컴퓨터를 끄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평소엔 간편한 차림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면, 지금은 완전무장한 풀 슈트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있는 행사는 ID 그룹의 연말 결산을 위한 사장단 회의였다. 말이 사장단이니 소위 임원들도 모두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였다. 심지어 모스크바 하이테크 연구소에서도 보고를 위해 책임자가 날아왔을 정도다.

수십 명이 한 번에 참석해 각자 맡은 조직의 성과 혹은 연초에 내려줬던 과제를 얼마나 수행했는지 보고하고, 내년 94년도를 대비하기 위한 지침을 받는 행사다.

그런 커다란 회의를 치를만한 사무실이 없어서 작은 호텔 하나를 빌렸다. 행사장으로도 쓰고, 멀리 서 온 사장단과 임직원들의 숙소로 쓰기 위해서다.

ID 그룹의 한 해 농사를 직접 확인하는 자리였기에 유재원의 발걸음은 더 없이 가벼웠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이쯤해서 ID 그룹 전체 결산을 한 번 집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최대한 간소하게 요약하고 싶은데, 벌려 놓은 일이 많으니 쉽게 될 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무더위가 너무 길어져서 그런지 요즘 몸 컨디션이 최악이네요. 몸이 무겁고 머리도 뭔가 묵직한 게 얹혀 있는 느낌이네요.

설마, 아니겠지만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인가 싶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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