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8 그레샴의 법칙 =========================================================================
“어? 니치콘이 우리 그룹이었어요?”
“오넥스도?”
미팅룸에 놀라운 목소리가 가득했다. 원래 ID 그룹의 스타일이 원채 자유로운 것이라서 유재원이 참석한다더라도 경직된 분위기는 아니었다.
놀란 이들은 대부분 휴대폰 개발이나, 쉘북, 뉴에그 개발을 이끌고 있는 프로젝트 팀장 들이었다. 필요한 소재나 부품이 생기면 직속상관에게 말하거나,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유재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유재원까지 올라가면 문제가 100% 해결되었다. 덕분에 개발팀에서는 유재원을 두고 치트키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다. 그런데 유재원이 제시한 해법 중 반은 일본의 기업을 연결시켜주는 것이었다. 해당 기업에서 프로젝트 팀이 원하는 스펙의 부품이나 소재를 보유하고 있었고, 공급 협상도 무척이나 순조로웠다.
그런데 그 회사들이 ID 인베스트먼트이 보유한 일본 투자 법인인 신일본투자은행 소유였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일본투자은행은 몇 년 전 일본의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세계 일류 기술력을 보유하고도 유동성 부족으로 파산하는 알짜 회사들을 인수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여기에 소요된 자본금은 91년 당시 40억 달러였는데, 현재 이들 기업의 시장 가치는 대략 100억 달러 정도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닛케이지수는 일본의 저금리 정책에 힘입어 무섭게 상승 중이었다. 최저점으로 떨어졌을 때 1만5천 포인트까지 떨어졌던 것이 지금은 2만선을 회복했다. 상승의 수혜는 ID 그룹으로 편입된 신일본투자은행에 속한 기업들이 제대로 받았다.
산요배터리와 오넥스는 쉘북과 뉴에그2에 부품을 공급하면서 실적이 몰라보게 개선되었다. 특히 앞으로 열릴 휴대폰 시장에 대한 기대감은 산요배터리의 주가를 몇 배로 튀어 오르게 했다. 수천만 대가 팔릴 휴대전화에 탑재될 2차 배터리로 리튬이온은 확정된 상태였고, 리튬이온 배터리 소재 생산에 산요배터리만큼 준비된 기업은 또 없었다.
다만 빈센트 그린힐 사장은 포괄적인 부분에 있어서 간략히 보고했고, 디테일한 정보는 표시조차 하지 않았다.
신일본투자은행 소속 기업들의 정확한 현황이나 앞으로의 계획 같은 건 유재원에게 직접 보고할 사안은 빼고 공개할 수 있는 것만 추리다 보니 슬라이드가 간단해졌다.
“마지막으로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대한 투자 보고를 하겠습니다.”
벨포트는 타이밍 좋게 빈센트 그린힐의 발언에 맞춰 슬라이드를 넘겼다. 그러자 화면에 나타난 건 빌보드 싱글 차트 HOT 100의 1993년도 차트였다.
그중에서도 1위부터 10위까지의 리스트가 쭉 떴다. 100개가 되는 곡을 모두 다 담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미국에서 제일 뜨거운 곡들이었고, 저기에 자기 곡 하나만 올릴 수만 있다면 가수로서는 더 없는 영광이었다.
특이한 점은 리스트 왼쪽에 ID 로고가 찍힌 곡이 제법 있었다.
1월부터 빌보드를 휩쓴 휘트니 휴스턴의 I Will Always Love You부터 영국 레게 밴드 UB40의 Can't Help Falling in Love도 ID 마크가 선명했다. 실크라는 가수의 Freak Me라는 곡도 있었다.
다들 의아해 하는 상황에서 빈센트 그린힐이 짧게 말했다.
“ID 로고가 달린 곡은 앨범 제작에 우리의 투자비가 들어간 곡입니다.”
그제야 차트가 다시 보였다. 그리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빌보드 연간 차트에서 상위권에 랭크된 곡 중에 ID 로고가 달린 곡은 1/3가 넘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타율이었다.
그러나 놀라기엔 이르다.
다음으로는 개봉영화의 흥행 순위를 보여주는 박스오피스 1993이 다음 슬라이드로 나왔기 때문이다.
쥬라기 공원, 미세스 다웃파이어, 도망자,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쉰들러 리스트, 클리프 행어.
박스오피스 탑10 중에 6개에 ID 로고가 선명히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대표적인 산업이었다. 손익분기점을 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고, 대박을 터트리는 건 더더욱 어려웠다. 블록버스터 공식이 있긴 한데 그게 항상 맞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ID 인베스트먼트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그렇지만 사장단과 임원들의 경이로운 시선이 몰린 빈센트 그린힐은 좀 부끄러웠다. 자기가 찍은 건 모두 꽝이었고, 대박은 유재원과 스테판 바버가 고른 것에서 다 나왔던 탓이다. 대중적인 작품을 고르는 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던 스테판 바버는 그 공으로 ID 엔터테인먼트의 사장으로 임명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스테판 바버보다 놀라운 건 회장 유재원의 안목이었다. 스테판 바버의 적중률이 50% 조금 모자랐다면 유재원은 8, 90%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석유선물 투자를 할 때부터도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수준이었데, 영화 투자에 이르러서는 그저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젠 거의 종교적 수준에 이르렀다. 다만 이 사실을 본인과 극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게 아쉬웠다.
이미 유재원은 소프트웨어와 반도체 분야 그리고 수학에서 어마어마한 천재성을 보이며 세상을 급격히 변화시키는 중이었는데, 영화나 음반까지도 잘한다고 하면 더 부담이라고 하면서 엔터테인먼트의 성과는 ID 인베스트먼트의 강력한 분석력으로 해낸 것이라며 공을 넘겼다.
빈센트 그린힐은 그저 미안하고 감사할 따름인지라 유재원을 향해 눈빛 인사를 했다. 빈센트 그린힐의 눈빛을 받은 유재원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여줬다.
유재원이야 어려울 건 없었다.
기억 저장소에 담아온 미래 지식 덕이었으니 말이다. 마음만 먹으면 적중률 100%를 찍어내는 것도 일도 아니다. 단지 그렇게 하면 의심이 밀려들 것이기에 확률을 조금 조정했을 뿐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도 미미했다.
회귀 그리고 기억의 저장소는 전생에서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가져온 것인 만큼, 적당히 사용한다면 문제될 거 없다는 생각이었다.
빈센트 그린힐은 마지막으로 엔젤 투자에 대한 보고를 하는 것으로 발표를 마쳤다.
이제까지 투자된 엔젤 투자의 전체 규모는 대략 2억 달러 규모였는데, 월스트리트나 막강한 재산을 가진 개인투자자들을 모두 능가하는 수치였다.
참고로 ID 테크놀로지도 엔젤 투자를 하고 있었는데, 둘의 차이라면 투자대상 스타트업의 선정 방식이다. 전자인 테크놀로지의 투자는 유재원의 안목으로 선정한 것이었고, ID 인베스트먼트의 엔젤 투자는 투자분석팀의 분석을 바탕으로 대상을 선정했다.
몇 년 후에 투자 결과를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거다.
빈센트 그린힐의 발표 마지막에 이르러 ID 인베스트먼트의 자산 현황이 나왔다. 시장 가치로 평가한 현재 총 자산은 169억 달러라는 압박적인 숫자였다.
이는 월스트리트 터줏대감인 JP모간의 현재 주가총액인 380억에는 모자라지만, 월스트리트의 투자 은행 순위 중에 최소 10위 안에 드는 엄청난 결과였다.
유재원이 보았을 때도 이만 하면 최선이었다.
현재는 ID 인베스트먼트의 가장 큰 자산이 신일본투자은행이지만, 몇 년 지나면 미국 IT 섹터에 뿌려놓은 씨앗들이 대폭발을 할 테니 말이다.
빈센트 그린힐의 발표가 끝나고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ID 인베스트먼트도 준비한 슬라이드가 숫자만큼이나 발표할 게 많다 보니 거의 30분이나 걸렸다.
“그러면 지금부터 20분간 쉬었다가 다시 하죠.”
20분의 휴식 시간으로 화장실도 가고 커피도 좀 마시면서 쉬었다가 다시 회의가 재개 되었다. 이번에 박수를 받으면서 단상에 오른 사람은 안드로이드 사의 케빈 존슨 사장이었다.
MS를 ID 그룹이 인수하면서 고용이 승계된 소수의 임직원 중 한 사람이었다. 일반 직원들과 프로그래머들은 원하는 사람 모두를 고용 승계했지만, 임원급은 거의 대부분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다.
ID 그룹의 기업문화를 기존의 MS조직에 이식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중간관리자의 교체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조직 장악을 위해서도 교체는 필수였다. 그런 상황에서 케빈 존슨은 유재원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와 함께 뛰어난 능력까지도 발휘해서 안드로이드 사의 사장까지 올라온 인물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드로이드 사업부 사장 케빈 존슨입니다.”
깔끔한 인사와 함께 그가 준비한 ID 프레젠테이션의 슬라이드 쇼가 시작되었다. 이전 슬라이드들은 완전 자유분방하게 만들어졌다면, 케빈 존슨이 띄운 슬라이드는 MS의 딱딱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는 93년도를 괄목할만한 성장의 해로 만들었습니다.”
슬라이드에서 강조된 것은 93년도에 전 세계적으로 판매된 신규 PC이었다. 여름까지는 486부터 586까지 중구난방 판매되었다면, 여름 이후 발표된 HPC로 급격한 세대교체가 빠르게 이뤄지는 중이었다.
여기에 인터넷과 멀티 플레이어게임이 대 흥행을 하면서 PC 판매에 신기록을 견인했다.
“12월 말까지 전 세계적으로 판매된 신규 PC의 양은 3,600만대로 거의 확정되었습니다. 새로 출하된 PC 중 우리 안드로이드 운영체제가 기본으로 탑재된 건 전체의 80%인 2,800만대입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점유율이다.
저렴하기도 하고 기능도 막강했고 안정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니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PC 운영체제로 안드로이드의 대안이라고 해봐야 리눅스 혹은 구식의 도스 그리고 IBM의 OS/2라는 독자적인 운영체제였다.
그나마 OS/2가 완성도는 제일 높았지만, 응용 프로그램 숫자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킬러 소프트웨어인 ID 오피스는 물론이고 매일 쏟아져 응용 프로그램과 게임은 안드로이드 세상이었다.
곧이어 케빈 존슨은 전체 매출액도 띄워 주었다.
안드로이드 2.0의 대기업 공급가격은 9.9달러였다. 그렇지만 대량 구매 할인 정책이 있어서 실제 매출액은 2억3천만 달러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 사이에 작은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2억3천만 달러라는 액수도 적은 건 아니지만, 이전에 발표한 ID 인베스트먼트와 비교가 되니 머릿속에 물음표가 띄워지는 임직원이 많았던 탓이다.
이는 점유율도 압도적이고 출하량도 엄청나긴 했는데, 리테일 가격이 워낙 저렴하다 보니 생긴 일이었다. 만약 MS가 그랬던 것처럼 패키지 하나에 120달러씩 받았다면 매출액은 10배가 커졌을 거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앞으로도 개인용 운영체제에 대한 가격을 상향할 생각은 없었다. ID 그룹의 힘은 바로 운영체제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사무용 소프트웨어와 게임 그리고 인터넷에서 훨씬 더 큰 수익을 내면 그만이다.
더구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로 자선사업만 하는 건 아니었다.
“안드로이드 엔터프라이즈 버전의 수요도 지속적으로 상승했고, 12월 현재 시점까지 224만 장이 팔렸습니다.”
기업용 운영체제인 엔터프라이즈 버전이 있다.
기업 실무를 처리하기 위한 네트워크 구성부터, 서버나 워크스테이션 구축까지도 완벽히 지원하는 엔터프라이즈 버전은 패키지 당 120달러라는 가격으로 판매 중이었다. 일반판에 비해 12배나 비싼 가격을 자랑하지만, 경쟁제품인 유닉스보단 저렴했다. 다른 유닉스 라이크 운영체제도 서버 기능이 있긴 했지만, 기능의 완성도나 사후지원에 있어서 안드로이드를 능가하진 못했다.
상업용 서버 시장에서 엔터프라이즈 버전은 빠르게 지분을 늘려 나가는 중이었고, 덕분에 123만 장이라는 판매고를 찍을 수 있었다.
“엔터프라이즈 버전의 총 매출액은 2억 6천8백만 달러입니다.”
일반판 보다 훨씬 적게 팔렸음에도 단가가 높으니 일반판의 매출액을 순식간에 넘어섰다.
더구나 할인을 잘 해주는 일반판에 비해 엔터프라이즈 버전은 일절 없다. 덕분에 매출액 계산과 정산도 매우 쉬웠다.
안드로이드의 두 가지 버전을 모두 합친 매출액은 총 4억 9천8백만 달러다.
참 안타깝게도 5억 달러를 넘지 못했다. 12월이 아직 많이 남아있긴 했는데, 매출액을 구할 때 12월의 주문량도 다 계산한 것이라서, 상승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도 한국 돈으로 계산한다면 4천억 원이 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기대가 되는 건 94년도다. 올해보다 훨씬 더 많은 PC가 보급될 것이고 그만큼 안드로이드 사의 매출도 늘어난다는 이야기니 말이다.
“하드웨어 부문도 있습니다.”
안드로이드 사가 소프트웨어만 파는 줄 아는 사람이 많은데, 하드웨어에서도 상당한 강자였다. 하드웨어 사업부가 만들고 판매 중인 키보드와 마우스 그리고 조이스틱과 조이패드는 게이머들이 알아주는 명품이었다.
특히 라이브 포스 피드백이라는 진동 기능은 게임의 몰입도를 한층 증대시켜주는 아이템으로 본인이 게이머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최소 한 개는 가지고 있어야 할 물건이라고 인식된 상태였다.
그렇지만 하드웨어도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는 탓에 전체 매출 규모는 1억 달러를 조금 넘는 규모였다.
여기에 더욱 놀라운 점은 엄청난 마진율이다.
지출이 큰 비용 항목은 인건비와 마케팅비였다. 공장을 돌리는 것도 아니고, 거대한 유통망을 유지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프로그래머들이 열일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안드로이드뿐만이 아니라 ID 톡이나 ID 웹브라우저, 프라임 컷을 비롯한 여러 프로그램도 동시에 개발 중이고, 그만큼 능력 좋은 프로그래머의 수요도 폭발적이었다. 보다 좋은 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해 보수도 파격적으로 책정 중이었지만, 회사 전체적으로 보았을 땐 그다지 큰 부담은 아니었다.
심지어 법률 업무는 ID 그룹에서 처리하고 있어서 특허나 소송에서도 안드로이드사가 지불할 일은 없었다.
“총 마진율은 72%로서 93년도 예상 순이익은 4억 3천만 달러가 예상됩니다. 덕분에 상장 준비도 순조롭습니다.”
상장이라는 소리에 사장단의 귀가 쫑긋 섰다.
유재원은 ID 그룹을 언제까지 비상장 그룹으로 둘 생각은 없었다. 거대한 사업을 하려면 막대한 자본조달은 필수였는데, 주식시장만큼 손쉬운 곳은 없었다. 물론 모든 자회사를 상장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ID 테크놀로지나 ID 엔터테인먼트는 얼마든지 상장할 수 있다.
“현재 시장에서의 평균 PER은 13.4입니다. 이를 이용해 안드로이드 사의 예상 주가총액을 따져본다면 57억 6천만 달러입니다.”
케빈 존슨의 발언이 끝나자 사장단의 반응이 둘로 나뉘었다.
이제 막 사장단에 오른 스테판 바버는 우와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탄성을 냈다. 반면 레밍턴과 빈센트 그린힐은 겨우 57억 하는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스테판이 입사하기 전에 ID 테크놀로지는 MS를 합병했었다. 일이 터지기 전에 MS의 주가 총액은 60억 달러를 넘긴 상태였지만, 안드로이드의 매서운 약진에 흡수당하고 말했다.
합병 작업을 직접 수행한 게 레밍턴과 빈센트 그린힐이다.
현재 안드로이드 사는 그때의 MS보다 훨씬 더 강력한 시장 지배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주가 총액이 그보다 못하다는 건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단순 계산이니 만큼, 오차가 상당합니다. 더구나 안드로이드 사의 가치는 나스닥 상장사의 평균보다 훨씬 높지요. 이러한 오차가 발생한 데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안드로이드 게이밍 에디션의 가격이 9.9달러라는 것 때문입니다. 만약 예전 MS가 그랬던 것처럼 개당 120달러를 책정했으면 어떻게 될까요?”
변수 설정을 다시 하고 계산에 들어가는 케빈 존슨이다. 수식이 간단한 만큼, 답도 금방 나왔다.
330억 달러.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물론 이런 계산법은 현실과 괴리가 무척이나 크다.
안드로이드의 무지막지한 보급률은 저렴한 가격이 가장 큰 이유다. 가격을 올리면 판매량은 분명 하락한다. 심지어 아직도 심심치 않게 보이는 불법복제품 유통도 크게 상승할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컴퓨터는 운영체제 없이 작동하지 않는 물건이고, 대기업 제품은 운영체제 비용을 제품 가격에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비용을 전가하면서 탑재를 했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하여튼 단순 계산으로 따졌을 때 순이익의 크기는 단번에 10배 이상 올라간다. 이 금액을 가지고 업계 평균인 PER 13.8을 이용해 주가 총액을 예상해보면 330억이라는 숫자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다만 유재원은 개인용 PC 운영체제의 가격을 올리실 의향이 없기에 이 숫자가 그대로 적용되기는 무리다. 그렇지만 공모 가격이 많이 깎이더라도 최소 120억 달러 이상의 주가총액을 바라보는 건 무리가 아니다.
1993년 연말 결산의 분위기는 너무 좋았다.
ID 테크놀로지부터 안드로이드 사까지 괄목할 만 한 성장이 계속되고 있다는 걸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장단과 고위 임원들도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ID 그룹이 너무도 건실한 재정과 조직력을 자랑한다는 걸 직접 확인하는 계기도 되었다.
다만 넥스트컴캐스트는 정보고속도로 사업과 셋톱박스 교체 사업, ADSL 보급 사업 등으로 적자 폭이 컸다.
그렇지만 헨리 사무엘 사장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유재원과 같은 비전을 공유하는 헨리 사무엘은 대규모 투자가 끝나고 나면 넥스트컴캐스트는 ID 인베스트먼트에 비견되는 캐시카우로 성장할 거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실제로 빠른 속도로 넥스트컴캐스트의 ADSL이 보급되는 캘리포니아는 적자에서 흑자로 빠르게 전환 중이었다.
케이블 TV도 마찬가지다.
신형 셋톱박스의 보급을 통해 케이블 도둑도 빠르게 줄고 있었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전송했던 케이블 방송은 선을 따서 무인가 셋톱박스와 연결하기만 하면 훔쳐보기가 쉬웠다. 위성 아날로그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이걸 디지털로 전환하니 무단으로 케이블 방송을 보는 걸 완전히 차단하면서 건전성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게다가 셋톱박스 교체로 화질도 좋아지면서 시청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다만 아날로그 셋톱박스에 비해 채널 변경에서 약간의 딜레이가 생기는 문제로 불평이 좀 있긴 했는데, 큰 건 아니었다.
하이테크 연구소의 보고도 넥스컴캐스트와 마찬가지였다.
원자력부터 통신과 항공 기술, 컴퓨터 보안, 심지어 드론까지 연구하고 있는 하이테크 연구소는 ID 그룹의 진정한 블랙홀이었다. 하지만 엑스포에서 여러 가지 선보인 최신 기술이 팔려 나가기도 했고, 드론의 경우엔 미국 정부에서 연구비를 지원해줄 테니 같이 연구하자는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
또한, 하이테크 연구소의 카스퍼스키 팀이 개발한 원클릭 온라인 신용결제 기능도 상용화되어서 빠르게 온라인 쇼핑에 혁신을 일으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올해 출범한 ID 엔터테인먼트의 스테판 바버 사장의 보고를 끝으로 93년 결산은 끝이 났다.
ID 엔터테인먼트는 ID소프트웨어를 제외하면 이제 겨우 시작하는 단계라서 딱히 보고할 게 없이 빠르게 끝날 수 있었다. 그래도 의미 있던 대목을 뽑아보자면 둠 2의 판매량이 500만 장을 돌파했다는 소식이었다.
출시된 지 좀 된 게임이었지만, HPC의 보급과 최신 3D가속 카드에 기본 제공되는 게임으로 선정되면서 판매량이 크게 늘어났다. 또한 요즘 판매되는 둠2는 CD버전이라는 것도 특징이다. 그만큼 CD롬의 보급도 빠르다는 의미였다.
이제 남은 건 유재원의 94년도 계획 발표였다. 바로 발표에 들어가는 건 아니다. 각자 발표시간들이 예정보다 길어진 탓에 예상시간보다 길어져서 30분간 휴식 시간을 갖기로 했다.
유재원은 딱히 체력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나이 많은 사람들 배려차원에서 기존의 쉬는 시간보다 10분 더 연장했다. 덕분에 유재원은 호텔방으로 올라가 쉘 북을 펼쳐놓고 김대석과 함께 발표할 슬라이드를 점검했다.
한참 스크립트를 보는데 드르륵 하는 작은 소리가 왔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봤더니 양복 상의였다. 거추장스러워 벗어놓은 건데 상의 안주머니에서 났다. 진동은 조용한 곳에서 전화가 왔다고 알려주기 위함인데, 진동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크니 벨소리랑 별 차이도 없었다.
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는 건 유재원과 매우 밀접한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가장 높은 확률로는 티파니가 있고 다음으로 부모님이나 친구들이었기에 유재원은 김대석에게 넘겨주지 않고 본인이 직접 받았다.
“여보세요?”
-회장님, 저 정병우입니다!
기대했던 티파니 목소리 대신 웬 굵직한 남자 목소리였다.
정병우?
이름을 듣고 몇 초가 지나서야 ID 파운데이션 소속의 김&정 법무법인의 파트너 변호사라는 정보들이 기억이 났다. 그러고 보니 김 대통령과 김영철이 김&정 법무법인이 맡은 일제 강제징용과 위안부 피해자 소송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기뻐해주십시오! 드디어 결심 공판일이 잡혔습니다.
“오! 진짜요?”
12월 중순까지 소식이 없으면 다시 전화를 해보려고 했는데, 약속을 지킨 모양이다.
-예! 12월 9일입니다.
9일?
오늘이 4일이니 5일 후에 1심 판결이 나오는 것이다. 이제껏 아무런 반응도 없다가 위에서 움직이니 순식간에 결정됐다는 티가 너무 난다.
-꼭 좋은 소식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판결이 나면 바로 연락주세요.”
통화를 끝내고 보니, 휴식 시간이 곧 끝이었기에, 유재원은 벗어 놓은 정장 상의를 입고 다시 방을 나섰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놀라운 성과로 가득한 ID 그룹의 1993년 결산만큼, 일제 피해자 배상 소송도 좋은 소식이 날아올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중요한 사업체들은 훑은 것 같네요. 혹시 더 궁금한 게 있으면 리플로 남겨주세요.
그리고 이야기 전개 속도 지적에 대해 한참 전부터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챕터도 예전보다 짧게 잡아가고 있는데, 아직 고쳐지지 않은 거 같네요. 다음 챕터부터는 템포가 좀 빨라질 지고 긴장감도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래서 부작용이 쫌 있을 거 같긴 한데, 지금은 빠르게 달리는 것에만 신경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