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02 정의의 가격(Price of Justice) =========================================================================
-800명입니다. 참 아쉽게도 1천명을 채우진 못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최강욱 비서실장의 송구스러움 가득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아이고, 한 겨울에 800명이면 많이도 모은 거죠.”
800이란 숫자는 말 그대로 동원된 사람의 숫자라는 거다.
1심 선고가 내려졌던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앞에서 규탄 시위가 예정되었다.
언론의 대대적인 공세가 쏟아지고 나서, 조금 화력이 약해졌다 싶을 즈음 1심 판결이 나왔던 서울지방법원 동부지원 앞에서 시위를 하겠다고 신고장을 접수했다.
신고장을 넣은 주체는 위안부 피해자를 위해 결성된 정신대 문제 대책협의회로 수요일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열었던 행동력 있는 단체였다. 1990년 11월 16일에 37개 여성, 시민, 종교, 학생단체들이 연합된 단체였다.
여론의 지원을 힘에 얻은 정신대 문제 대책협의회는 평소의 수요 집회에 추가해서 법원 앞 시위도 계획했다.
날짜는 12월 5일이었고, 예상된 참가 인원을 100명 정도로 신고했다고 한다. 정신대 문제 대책협의회에서 평일 수요 집회를 열 때엔 수십 명 정도가 모였으니, 언론의 지원이 있는 지금은 그 2, 3배쯤 모일 거라고 예상했던 모양이다.
여기에 유재원이 힘을 보탰다.
800명!
최강욱 비서실장이 음과 양으로 힘을 써서 만든 숫자로 분명 인위적인 숫자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엔 상당한 폭발력이 있는 숫자였다. 이걸 보고 2차, 3차 집회에서는 더욱더 많은 숫자가 나타날 것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신기하네.”
최강욱의 보고를 듣고 통신을 끊은 유재원은 다시금 넥스트컴의 뉴스 페이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뉴스페이지에는 여전히 사법부의 의혹부터 강제징용의 역사나 청산되지 못한 한국의 친일파 등등의 기사가 가득했다. 제목이 먼저 나오고 신문사의 이름은 나중에 나오는 방식이었는데, 여기엔 작은 꼼수가 있었다.
기사 제목이 길어지면 신문사의 이름이 숨겨진다는 것이다. 이는 메이저 신문들이 유재원이 원하는 기사를 써주지 않을 거라는 예상이 담겨 있다. 문화신문이니 한국신문, 국제신문 등등 전국일간지 이긴 한데, 발행부수가 적은 신문들은 이번 이벤트(?)에 적극 참여할 거라고 충분히 예상은 했다.
신문의 영향력은 날로 줄어드는 추세였고, 신문 대신 TV로 기업들의 광고의뢰가 이동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최강욱의 전화기나 비서실로 쏟아진 신문사 영업부장들의 구걸도 주로 이런 신문사들이 많았다.
이러한 추세를 볼 때, 광고를 미끼로 유재원이 바라는 식의 기사를 써줄 신문사들은 중소 규모의 업체가 주를 이룰 거라고 보았다.
“대한 일보 빼고는 다 붙었네.”
그런데 그건 오판이었다.
신문사 중에 제일 큰 대한 일보를 제외한 모든 언론들이 유재원의 이벤트에 참가했다. 친일이나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를 다루거나 정부나 법원을 성토하는 기사를 쓰고 다음날 ID 그룹의 전면광고, 혹은 양면 전면 광고를 받는 건 이제 패턴화가 되었다.
대한 일보와 함께 유재원과 척을 지던 동하 신문이라는 2위 업체도 얼굴 두껍게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몇 년 전 사고를 유발한 것에 대한 사과가 없을 때까지는 광고를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워낙 사안이 급하다 보니 이번만 예외로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거기 데스크랑 직접 통화해서 그런 식으로 말을 하진 않았다. 실무의 총책을 맡은 최강욱은 매우 고단수의 방법을 동원해 일을 처리했는데, 직접적으로 기사를 써달라느니 하는 청탁을 넣지 않았다.
동하 일보의 케이스도 그쪽에서 먼저 기사를 썼고, 다음 날 광고가 들어간 것뿐이었다.
“아직은 카르텔 형성이 엄청나게 조직적인 수준은 아니었던 모양이네.”
대한민국 기득권이 가진 카르텔은 엄청나게 조밀하고 단단했다.
단순히 이익을 공유하는 걸 넘어서 언론, 재벌 그리고 정치인들이 혼인을 통해 촘촘히 연결된 상태인지라 일반인들은 파고들 여지 자체가 없었다.
아직은 93년도였고, 87민주화가 이뤄진지 10년도 지나지 않았다. 정치권력도 군부에서 민간으로 교체되며 대변혁을 맞이했고, 경제 분야 역시 21세기 수준으로 성장하진 않았다. 언론의 영향력도 낮았고, 이를 조직적으로 활용하는 집단도 없는 상태다.
반면 유재원의 경우 넘치는 자본력과 함께, 강력한 정치권력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든든한 우군은 전명헌 총리였고, 전명헌 총리는 통일 국민당이란 원내 정당에 50석이 넘는 의석까지 보유했다. 여기에 김 대통령과 김영철의 지지도 일단은 받아 놓았다. 민자당 의석 중 2/3 정도는 이들이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야당 민주당이 남았지만,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 긍정적이었다.
민주당도 친일에 대해선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지지기반을 생각하면 친일 세력에 손을 들어주진 못한다. 오히려 야당이라는 처지에서 여당의 민주 세력보다 훨씬 더 강경한 태도를 보여야 하는 처지였다.
“3월이 되기 전에 끝장을 봐야 하는데.”
유재원은 모니터에 94년도 달력을 띄우며 중얼거렸다.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의 패소 이전에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슈는 없었다. 덕분에 언론의 관심을 오로지 일제강점기 피해자들 그리고 이와 연관된 이슈로 묶을 수 있었다. 그런데 3월이 되면 남북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초대형 이벤트가 있다.
만약 일제강점기 피해자들 이슈가 없었다면, 이산가족 상봉에 관한 뉴스가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다.
3월이 되면 이산가족 상봉 이벤트가 있고, 5월에는 남북정상회담이 있으니 최대한 빨리 처리해서 3월 이전에 이 문제를 끝내놓는 게 유재원에겐 최상의 결과였다.
“그나저나 반격은 없나?”
일을 시작한 지 이제 곧 일주일이다.
반대편 세력은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다. 즉각적인 반발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 무소식이라서 유재원은 괜히 불안했다.
21세기에 보면 자신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는 건 득달처럼 달려들어 난도질을 했던 게 기득권이었다. 언론의 십자포화는 물론이고 어버이 연합이라는 사조직을 만들어서 백색 테러를 저지르는 것도 기본이다.
사법부와 친일 세력이 일주일이나 얻어맞고 있는데 아직 반격이 없는 게 좀 이상했다.
“상대의 실력을 너무 높이 잡았나?”
미지의 상대를 과대평가하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상대를 얕잡아 보는 것만큼, 상대의 실력을 과장해서 평가하는 것도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올바른 전략을 만들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였다.
그럼에도 방심은 금물이다.
전체 계획 중 아직 반에도 오지 못했다. 지금이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어도, 조만간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시작할 수도 있다.
12월 5일.
예정되었던 법원 규탄 시위가 열렸다.
참여한 숫자는 무려 1천 명이 넘었다.
원래 시위를 신고했던 정신대 문제 대책협의회 회원들 80여명에 최강욱이 알뜰히 모은 800여명, 그리고 온라인에서 시위 소식을 듣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네티즌이 합세해서 엄청난 성황을 이룬 것이다.
규모가 워낙 크니 신문은 물론이고 TV에서도 다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법부 규탄 집회, 역대 최대 규모!
-들끓는 민심, 이게 독립을 찾은 내 나라 맞느냐는 외침 이어져!
얼마가 들었는지, 아직 결산하진 않았지만 분명 돈을 주고 동원한 인원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유재원의 기대 이상으로 열심히 시위했다. 어쩌면 돈을 받고 움직인 프로라서 그런지 자발적으로 나온 이들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너무 뜨거워져서 까딱하면 80년대식 폭력 시위가 날까봐 주최 측에서 자제 시켜야 할 정도였다.
유재원은 시위가 있을 경우엔 무조건 평화로워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최강욱에게도 몇 번이나 강조했다.
폭력으로 변질되었을 때, 좋았던 의도는 사라지면서 동시에 기득권이 물어뜯기 좋은 먹잇감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시위는 평화적으로 끝났다.
위에서 뭔가 지시를 받은 게 있었던 모양인지, 경찰에서도 쓸데없이 시위대를 자극하지 않았다. 처음에 분위기 모르던 몇몇 이들이 살짝 폭력적으로 나올 때, 이를 빌미 삼아서 시위대를 자극하고, 이렇게 서로 격화된 분위기가 마들어지면 곧장 강제 진압을 할 수도 있었다.
80년대에 만들어진 시위 진압의 교과서였다.
그런데 오늘 시위는 최악으로 흐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유재원이 김 대통령과 김영철에게 엄포를 놓은 게 작용된 것 같았다.
더욱이 오늘 시위에서는 유재원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건전한 결과도 나왔다. 자유발언에서 유재원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걸 주장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익명의 시민이 모금 제안하셨습니다.
“모금이요?”
-피해자 분들 대부분 열악한 환경에 거주한다고 합니다. 일본의 제대로 된 사과를 받을 때까지 모두가 건강히 살아 계시려면 주거 환경 개선 필요하다고 하면서 즉석해서 모금통을 만들어 돌렸습니다.
“설마 먹튀?”
-먹튀라니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놀란 유재원은 오죽하면 최강욱의 보고에 우려가 먼저 생겼다.
“모금통은 잘 회수 했나요?”
말 그대로 먹고 튀려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났을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모금을 하자고 분위기를 띄운 다음 모금통을 돌린 후에 잠적해버리는 거 아닌가 싶었다.
실제로 21세기에 몇 번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는데, 집행부와는 전혀 상관없이 모금통을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예, 시위 집행부에 잘 돌아 왔습니다. 십시일반으로 모인 자금이 500만 원이 넘습니다.
다행히도 그 사람의 의도는 순수했고, 모금통도 잘 돌아 왔다고 한다. 게다가 갑자기 만들어진 모금행사 치고는 제법 큰돈이 모였다.
“흐음, 반향이 괜찮네요.”
-회장님처럼 이번 사건에 대해 분노하시는 시민들이 많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최강욱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유재원은 좋은 생각이 났다.
“그러면 이거, 우리가 제대로 판을 키워 볼까요?”
피해자 분들의 처우 개선이라면 유재원 혼자서도 너끈히 처리할 수 있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닌 수많은 국민들의 성원들로 모아 조성된다면 그 의미는 훨씬 뜻이 깊어지고, 피해자분들의 상처 치유에도 큰 힘이 된다.
동시에 일본과 정부, 그리고 사법부에 대한 큰 압력도 된다. 혼자서 싸우는 게 아니라, 모두가 한뜻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니 말이다.
-무슨 좋은 생각이 있으십니까?
“음, 그러니까 민간 모금액만큼 저희가 따블로 내는 거죠. 대신 모금 기간은 지금부터 딱 한 달간만 하기로 하고요.”
돈이란 물건은 무조건 다다익선이다.
모금액이 많을수록 보다 많은 피해자분들의 환경과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다. 민간에서 모은 금액만큼 ID 그룹에서 기부를 하면 보다 확실한 조처기 이뤄질 거다. 당연히 큰돈을 낸 만큼 기부 효과도 있을 것이고, 기부금이 바르게 쓰이는 지도 모니터링할 수 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곧장 발표해도 되겠습니다.
“예, 그렇게 하세요.”
유재원은 그냥 질렀다.
민간에서 열심이 모금을 해봐야 얼마 되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유재원은 큰 배신감을 느꼈다.
-김&정 법무법인 김창환, 정병우 각각 3억 원 쾌척!
-ID 그룹 유재원 회장님의 통 큰 기부에 동참하기로 결단.
-이번 사건 맡으며 피해자분들의 아픔에 분노와 공감. 1심 패소에 대한 책임감 깊이 느껴!
다음 날 아침 한국 넥스트컴 뉴스페이지를 대문짝만하게 장식하고 있는 건 정병우와 김창환이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둘이 합쳐 6억 원이다.
이를 시작으로 뜻 있는 분들의 성금이 답지하기 시작했다는 기사였다. 발표한 지 아직 만으로 하루도 지나지 않았으니, 벌써 큰돈이 모였다고 보긴 힘들다. 분명 과장이 50%는 될 거다. 그런데 김창환과 정병우의 기부는 진짜였다.
일단 시작부터 6억은 깔고 간다는 이야기였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독지가들이나 기업들이 참여하면 그 끝은 얼마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유재원에게도 이건 큰일이었다. 그런데 기득권 세력에게도 이 사건은 적색 경고로 받아들어졌던 모양이다.
모금 운동이 구체적으로 일어나자, 보수 기득권세력 거두인 대한 일보가 드디어 포문을 열었다.
-한일협정으로 대일청구권 소멸.
-안타깝지만, 법적으로는 마무리 된 일.
-일본 정부, 현재 한국의 상황 매우 우려스럽게 보고 있는 중.
-새천년을 대비한 새로운 한일 관계 모색이 필요.
대한 일보는 대일청구권으로 일단 못부터 박고 시작했다.
대일청구권에 대한 논란은 예전부터 있었다. 동시에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문제적 대통령과도 연관된 사안이었다. 21세기 들어 재평가가 이뤄졌고, 그의 딸이 제대로 사고를 친 덕에 거품이 상당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은 93년도였고 그의 존재감은 여전했다. 대한 일보는 그 점을 제대로 치고 들어왔다. 살짝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에게 눈길을 주었던 보수 성향의 사람들은 이 기사를 보고 움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일청구권이 무슨 전가의 보도는 아니지.”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의 배상 소송을 묵살하는 데 한일기본조약의 대일청구권은 한국이나 일본 정부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무기였다. 그러나 여기엔 심각한 결점이 있었다. 이른바 한일기본조약에 담긴 밀약이었다.
한일기본조약은 아직 그 전문이 공개되지 않았다. 심지어 기본조약과 함께 밀약도 체결되었다는 걸 모르는 상태다. 비밀이 해제되는 건 2030년 중반인데 그 파장이 엄청났다.
당연히 유재원의 머릿속에는 그 모든 내용이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저장된 상태였다. 이걸 지금 터트리면 핵폭탄에 비견될 파괴력이 나올 거다. 하지만 물질적 증거 없이 단순한 말로는 냄비처럼 빠르게 끓어올랐다 식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비공개 문건 중 일부를 확보하고 나서야 터트릴 수 있다. 지금은 때가 아닌 것이다.
“그나저나, 이게 전부야?”
유재원은 싱거웠다.
반격이라고 온 것이 대한일보가 기사 몇 개 낸 게 전부였던 탓이다. 적어도 여당의 기득권 출신 거물급 정치인이 몇 마디 한다거나, 대법원의 대변인이 재판이 공정했다고 말해주면 참 좋을 텐데 그런 게 없었다.
그렇게 하루가 흘렀다.
유재원은 오늘도 보람찬 시간을 보냈다 생각하며, 내일을 기약하기 위해 침대에 기어들어갈 때쯤, 휴대폰이 울렸다.
최강욱이었다.
-한국 넥스트컴에 폐쇄조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급박한 목소리로 전하는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경찰에서 한국 온라인 여론을 주도하며 최전방 공격수로 뛰던 넥스트컴을 폐쇄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이유가 뭐래요? 명령이 나온 있을 거 아니에요?”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합니다. 넥스트컴의 현대철학동호회에서 사노맹 등의 사회주의 계열 단체의 선언문을 올리고 공유했다는 이유로 내일부터 임시 폐쇄 조치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저희가 즉각 폐쇄조치 가처분신청을 냈지만, 가처분결과가 나오는 것보다 폐쇄 조치가 이뤄지는 시간이 더 빠릅니다.
최강욱의 말이 빨랐다.
무척이나 다급한 게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단계에서 넥스트컴이 막히면 유재원이 보유한 스피커의 반은 날아간 것이나 같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작 보고를 끝까지 들은 유재원의 표정은 평안 그 자체였다.
당연했다.
현대철학동호회 파동은 전생에서도 유명한 사건이었고, 그 말은 이미 유재원의 예측 범위 안에 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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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마지막 단락에서 고구마 향기를 느끼셨다면...
이번 챕터에선 고구마 드시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