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12 어뷰징 대란 =========================================================================
#298 어뷰징 대란(6)
-회장님! 질문하나만 드리겠습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소감 한 마디만 부탁드립니다!
-일각에서 서울에 대규모 투자를 계획하신다고 하는 데 사실인가요?
유재원이 입국장에 들어서자마자 한 번에 몰아 터지는 기자들의 아우성이었다. 미리 자기들끼리 논의해서 질문지를 만들고 대표로 한 사람이 물어보면 그나마 답변을 딸 가능성이 높을 텐데, 아직까지도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예전처럼 포토라인이 무너지는 참사는 없었다는 점과 기자들의 말이 다 높임말이라는 것이다.
포토라인이야 한국 경호팀이 나와서 질서를 유지한다고 해도, 자발적이 아니면 쉽게 바꿀 수 없는 게 기자들의 말투였다.
오늘은 몇 년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공손함이 확실히 담겨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유재원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업적을 달성하기도 했고, 그 수혜를 저들도 간접적으로나마 입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ID 그룹의 광고전은 아직 진행 중이다. 덕분에 대부분의 언론사들, 방송국은 대한 일보 그리고 그와 비슷한 성향의 몇몇 신문을 빼고는 12월부터 따스한 겨울을 나는 중이었다.
-상장 기념으로 5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보너스를 책정하셨는데, 사실인지요? 위화감 조성이라는 일각의 불만에 대해서도 아시나요?
역시 한국 기자들의 특성이 어디 사라진 건 아닌 모양이다.
게이트에서 나온 유재원은 기자들의 질문세례에 아무런 코멘트를 하지 않고 걸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포 공항 귀빈실에 따로 마련된 기자회견장에서 정식으로 질의응답 시간을 가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출국장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건, 유재원의 입국 장면 말고는 얻을 게 없다는 걸 기자들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질문을 던지는 건 혹시나 하나 건져내기만 하면 복권 당첨이나 마찬가지였던 탓이다.
그나마 좋은 질문이 나와서 기분은 좋았는데, 갑자기 한 놈이 툭 튀어 나와 던진 질문에 빈정 상하는 유재원이다.
위화감이라니.
임직원들에게 얼마를 주던 그건 유재원 마음이었다. 게다가 그냥 기분이라고 공돈을 주는 게 아니라 안드로이드 사 상장에 임직원들이 기여한 만큼 차등 지급된다.
모두가 평등하게 보너스를 받지만, 결과는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 이것만큼 합리적인 분배는 없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위화감이라니.
유재원은 걸음을 멈추고 해당 질문을 던진 기자를 돌아 봤다.
“한국경제신문 임수광 기자입니다. 경제지답게 친 재벌 성향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유재원과 나란히 걷고 있던 최강욱이 기자를 알아보고 소속과 성향을 바로 설명해줬다. 한국쪽 인맥에 있어 최강욱은 걸어 다니는 인명사전인가보다.
임수광 기자는 유재원의 차가운 시선에 헉 하고 뒤로 물러났다. 동료들 사이에 끼어서 질문을 던지는 건 쉬웠지만, 정작 질문을 받은 주인공이 눈빛을 보내니 버티지 못하고 화들짝 놀란 것이다.
그 모습에 유재원은 다시 걸었다.
한 마디 톡 쏘아주려다가 저런 사람하고 드잡이질 해봐야 자신만 손해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곧 도착한 기자회견장에도 기자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서울에서 활동하는 기자들 모두 다 공항에 모아놓은 듯싶었다.
이에 유재원에겐 뿌듯함이란 감정이 떠올랐다.
구름처럼 몰린 매스컴은 자신이 이제껏 열심히 달려온 길이 성공적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이니 말이다.
몇 분 후.
곧이어 유재원과 최강욱 등의 임직원이 회견장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기자회견이 시작될 수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체된 건 출입국장 앞에 진을 치다가 이제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오려고 해서 실랑이가 있었던 탓이다.
“지금부터 ID 그룹 유재원 회장님의 기자회견이 있겠습니다. 사전에 정해진 질문지도 없고, 순서도 정해지지 않았기에 조금 혼잡스럽더라도 너그러이 양해바랍니다. 그러면 질문 받겠습니다.”
최강욱이 먼저 일어나 기자회견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기자들끼리 있는 자리라면 이럴 필요는 없겠지만, 이 자리는 서울방송과 KBS 등의 공중파 채널을 통해 텔레비전 생중계 중이었다.
그만큼 한국에서 유재원의 존재감이 커졌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기자들도 이런 자리에서 경쟁사에 뒤쳐질 수 없다는 듯 최강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들 손을 번쩍 들었다.
“저기, 잠자리 안경 쓰신 남색 정장 기자분이요.”
유재원은 그런 기자들 중에 하나를 지목했다. 대충 보고 고른 건 아니고, 지목된 기자의 가슴에 달린 KBS 마크를 보고 찍은 것이다. 기자 중에서도 제일 급이 높은 KBS의 기자라면 엉뚱한 질문은 하지 않을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KBS의 최동호입니다. 우선 안드로이드 사의 성공적인 상장을 축하드립니다.”
역시 공중파 기자답게 예의가 있었다.
“그러면 질문 드리겠습니다. 안드로이드 사 상장에 어려움은 없으셨는지, 그리고 ID 그룹의 다른 계열사들도 상장하실 건지, 마지막으로 상장하실 때마다 이번과 같은 방식으로 세금이나 보너스를 결정하실 건지 묻고 싶습니다.”
칭찬은 취소다.
질의응답의 기본은 한 사람당 하나의 질문 아니겠는가. 최동호는 무려 세 개의 질문을 날리고 자리에 앉았다. 그나마 질문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어서 받아줄만 했다.
“앞으로는 기자 한 분 당 하나의 질문만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유재원의 눈치에 최강욱이 먼저 나서서 마이크를 잡고 경고의 말을 기자회견장 전체에 공지했다. 그렇게 엄포를 놓은 후에 유재원의 답변을 시작했다.
“PC 운영체제에 표준이 된 안드로이드 사는 사실 예전에 상장되어 있던 MS로부터 인수한 자산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상장 준비는 한참 전에 끝나 있던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덕분에 나스닥 상장에서 제일 어려웠던 건 주관사 선정이었네요. 다들 조건을 좋게 불려주셔서 딱 하나를 선택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은 기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잊고 있었는데, ID 그룹은 MS-DOS로 유명했던 MS를 인수했었다는 걸 지금 상기한 것이다.
기자답게 유재원의 MS인수가 몇 년 전인가 따져 보는 사람이 많았고, 유재원의 나이도 동시에 상기되었다. 그리고 자기들은 그 나이 때에 무얼 하고 있었나 생각했다. 둘이 비교를 해보니 그야말로 감탄밖에 안 나왔다.
“물론 다른 계열사들도 상장할 계획이지만 조만간은 아닙니다. 내실을 더 키우고, 적당한 때를 기다릴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상장할 때마다 당연히 지금의 방식 그대로 보너스를 책정할 겁니다.”
최동호 KBS기자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엔 웃음기도 도는 게 본인이 던진 질문 세 개에 대한 답을 모두 받아서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유재원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ID 그룹이 세계적인 그룹이라는 저만의 생각이 아닐 겁니다. 실제 ID 그룹의 전장은 미국과 유럽이지요. 세계 최고의 인재들이 모이는 나라가 미국이고, 그런 인재들을 무수히 보유한 기업들이 연일 신기술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특히 IT분야에서는 그야말로 치열하게 경쟁 중이지요. 세계와 경쟁하겠다면 그런 인재를 모아야 합니다. 또한, 인재들이 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고, 확실하게 지원해야 하죠.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덕에 돈으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최동호는 헉 소리를 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탓이다.
해외 진출하는 한국 기업의 기본 전략은 가격이었다. 경쟁자와 비슷한 수준의 물건을 남들보다 저렴하게 팔아서 이윤을 남겨야 했으니, 컨트롤하기 쉬운 직원들 임금이나 협력사를 쥐어짜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재원의 말은 상식 파괴였다. 그렇다고 마냥 외면하기도 어려운 게, 어마어마한 성과를 떡하니 내놓으니 아웃사이더로 취급하는 게 불가능했다.
기자들이 위화감 따위를 운운하는 현실이니 앞으로 이런 답변을 몇 번이나 해야 할 지 모른다. 그러나 몇 번을 물어도 유재원으로부터는 항상 같은 대답을 들을 것이다.
“구직자 여러분, ID 그룹으로 오세요. 발휘하시는 능력만큼 확실한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답변의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인재 모집에 무한한 탐욕을 보이는 것으로 유재원은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다음 질문 받겠습니다.”
최강욱의 진행에 다시금 기자들이 손을 올렸다.
이후로 이어진 기자회견의 진행은 무난했다. 무난한 질문과 무난한 답변의 연속이었다. 유재원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런데 질문자체가 무난하니 튀는 답변을 할 수가 없었다. 혹시나 재미난 질문을 해줄까 싶어 대한일보 기자를 지목해 봤는데,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략 30분 정도 이어졌던 질의응답을 마친 유재원은 VIP 통로를 통해 대기 중이던 자동차로 이동했다.
“이게 그 차예요?”
유재원을 기다리고 있던 건 처음 보는 검은색 자동차였다.
예전에 한국에서 타고 다니던 자동차는 하얀색 그랜저 리무진이었다. 중고로 가져 왔던 그랜저가 완파 당하고 난 후에 전명헌이 선물로 준 차였다.
지금 유재원 앞에 있는 건 1994년형 뉴 그랜저였다.
각이 딱딱 들어갔던 1세대와 달리 모서리가 둥글게 바뀐 디자인이었다. 내부의 장비도 환골탈태를 했는데 에어백이나 TCS, 열선 시트와 쿨링박스, 노면 상태에 따라 서스펜션 세팅을 능동적으로 바꿔주는 ECS까지 장착된 미래 자동차의 기함이었다.
“예, 2세대 그랜저 리무진 모델입니다. 미래자동차에서 회장님을 위해 협찬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협찬이라니.
그건 아니다. 분명 전명헌의 지시가 있었을 거라고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리무진 모델이기 때문이다. 유재원이 알기로는 시판된 뉴그랜저에 라인 중에는 리무진 모델은 없었다. 1세대에서도 리무진 라인은 없었다. 그때도 억지로 몇 대 만들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하신 모양이다.
“미래자동차 사장님께 고맙게 타겠다고 전해주세요.”
선물 주는 사람 마음을 생각해서 유재원은 한국에선 이 차를 전용차로 삼기로 했다. 마음만 먹으면 벤츠나 BMW는 기본이고 더 나아간다면 롤스로이스나 벤틀리를 타도 금전적으로는 조금도 부담되지 않는다.
하지만 공무원들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국산차를 타는 것처럼, 유재원도 한국에서는 국산차를 애용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와 같은 논리로 미국에선 미국차를 타고, 유럽에서는 유럽차를 탈 것이다.
뉴그랜저 리무진을 탄 유재원의 자동차는 곧 공항을 나섰다. 경호는 평소보다 강화되어서 앞뒤로 경호원들의 자동차가 둘러쌌다. 파파라치에게 당하는 건 한 번으로 족했기에 좀 과하다는 느낌이었지만, 유재원은 군소리 없이 경호팀의 의견을 따랐다.
그렇게 해서 서울로 입성한 유재원이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도곡동에 있는 ID 인베스트먼트 서울 본점이었다.
ID 인베스트먼트의 본진은 서울이다.
본사 건물은 뉴욕에 있지만, 본사가 운영하는 투자자금 중에 가장 많은 돈을 모집한 나라가 한국이었고, 그중에서도 서울이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한다. 물론 이보다 훨씬 많은 건 유재원의 개인투자자금이긴 해도, 민간 모금액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 갔다.
그도 그럴 것이 노대통령시절 생긴 투자은행법 이후로 우후죽순 생기는 업체 중에 ID 인베스트만큼 확실한 성적을 낸 건 전무하다는 게 실적을 통해 밝혀졌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파격적인 수익률은 아니지만, 지금 진행 중인 IT섹터 투자에서도 벌써 30%에 이르는 수익률을 찍고 있는 중이었다.
더욱이 예전에는 한 번 투자 모금을 하면 끝이었지만, 현재는 투자와 청산이 언제든 가능했다. 투자 시점을 기준으로 투자수익률을 계산해 보여주는 HTS시스템이 있어서 누구나 쉽게 투자가 가능했다.
누적 모금된 금액은 한참 전에 조 단위를 넘었다.
덕분에 황재홍도 ID 인베스트먼트에서 존재감이 달라졌다.
예전엔 지사장 급이었는데, 지금은 정식으로 한국지사 사장이 되었다. ID 그룹 내에서도 황재홍의 존재감은 확실히 부각되었다. 예전엔 학력이 부족하다고 은근히 무시하는 일도 있었는데, 실적이 발표되고 나선 후엔 그런 사람들이 싹 사라졌다.
이렇게 직급이 달라질 때마다 황재홍의 삶도 확 달라졌다.
80년대 말만 해도 부평초처럼 떠돌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서울 강남에 커다란 아파트도 가지고 있고, 굴리는 차도 많아졌다.
유재원이 어디 가서 꿀리지 마시라고 준 도요타 크라운 자동차가 보물 1호인 것은 틀림없다. 다만 많이 낡아진 지금은 신형 자동차를 타는 일이 많았다. 다른 기업인들처럼 정부 사람들이나 정부 행사에 참석할 땐 국산차를 타지만, 돈 많은 투자자들을 만날 땐 롤스로이스가 정답이었다.
조만간 가정도 꾸릴 예정이다. 94년도 기준으로 황재홍은 분명 노총각이지만, ID 인베스트먼트 한국지사 사장이라는 직함은 그 나이를 무효로 만들어버리는 마법의 카드였다.
“회장님. 황재홍이 인사 올립니다!”
덕분에 황재홍이 유재원에게 올리는 인사는 그렇게나 정중하고 예의바를 수가 없었다.
“황 사장님, 오랜만이네요! 화상 채팅으로는 잘 못 느꼈는데, 직접 보니 신수가 확 달라지셨어요.”
처음 봤을 땐 완전히 두꺼비 상이었던 황재홍이었다. 지금은 피부도 눈에 띄게 좋아졌고, 얼굴에 구김살도 확 펴지면서 딴 사람 같았다. 미남이라고 하기엔 무리지만, 호남이라고 해주기엔 충분했다.
“모두 회장님 덕분입니다. 요즘처럼 신바람 나는 적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최근엔 분위기 좋은 제주도까지 다녀왔으니 좋지 않을 수가 없지요.”
황재홍은 화통하게 웃으며 모든 공을 유재원에게 돌렸다. 그런 황재홍 때문에 유재원은 더 미안했다. 특히 제주도 건은 살짝 마음에 걸리는 일이기도 했다.
21세기 초부터 중반까지는 제주도는 한국의 대표 관광지로서 엄청난 인기를 끄는 섬이었다. 반면 지금은 신혼여행지 정도였다. 해외여행 금지가 풀린 지금은 해외로 관광객을 빼앗기고 있는 실정이다.
제2의 제주도 붐이 일어나려면 적어도 21세기 초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황재홍이 한겨울에 제주도를 다녀와야 했다.
“출장 경과 보고준비도 마쳤습니다. 바로 사무실로 모시겠습니다.”
황재홍의 안내에 유재원은 바로 사무실로 올라갔다.
황재홍의 사무실은 5성급 호텔 부럽지 않을 인테리어를 갖추고 있었다. 크기도 넓고, 가구와 도자기, 그림 등등 웬만해선 볼 수 없는 값진 것들이 걸려 있었다.
전에도 화려하긴 했는데, 지금은 차원이 달라졌다.
“고객님들 취향에 맞추다 보니 좀 화려해졌습니다.”
괜히 마음에 걸린 황재홍이 사무실을 둘러보던 유재원에게 살짝 변명했다.
“괜찮아요.”
유재원은 진심이었다.
이렇게 인테리어를 하는 데 든 돈은 웬만하면 다 비용처리가 끝났다. 세금을 정칙하게 내는 것과는 별개로 세금공제 혜택도 알뜰하게 챙기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콜렉션도 아주 마음에 드네요. 저건 행복한 눈물이죠?”
황재홍 사무실의 인테리어로 걸릴 그림 구매에 일일이 지침을 줄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었다. 예술품 구매에 대한 자금을 집행하긴 했는데, 품목을 정하는 건 황재홍이 알아서 하도록 했다.
그런데 황재홍의 안목이 이렇게 좋았나 싶을 만큼 잘 꾸며져 있었는데, 역시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다.
“예! 라움 미술관 관장님이 팝아트를 추천해주셔서 대표작을 골라봤습니다.”
라움 미술관이라면 일성 계열 아니던가?
“라움 미술관 관장님은 우리 지점의 제일 큰 고객님이시기도 합니다. 개인적 투자라고 확답을 받아 놓기도 했습니다.”
일성이란 소리에 유재원의 얼굴에 깨름칙한 표정이 뜨자 황재홍이 얼른 변명했다. 고객이라는 소리에 표정이 좀 풀렸다. 아무리 대단한 고객이라도 ID 인베스트먼트의 투자정보는 비밀이었고,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포인트는 여기에 그림이나 조각 등의 예술작품은 황재홍 개인의 소유가 아니고 ID 인베스트먼트의 자산으로 잡혀 있다는 점이다.
리움 미술관에서 나중에 딴 소리를 해도 여기 있는 작품에 대해 딴소리는 절대 할 수 없다.
“여기가 회장님 자리입니다.”
황재홍의 말처럼 사장실 중간에 유재원과 최강욱 그리고 수행원들의 자리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 앞에 프로젝터로 띄운 프레젠테이션 화면도 세팅된 상태였다. 책상에는 따듯한 커피와 생강차 그리고 적당한 다과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면 제주도 답사의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유재원과 수행원들이 자리를 잡자 스크린 옆에 선 황재홍은 레이저 포인트를 집고 발표를 시작했다. 곧이어 스크린에 제주도에서 찍어온 사진과 여러 자료들이 띄워졌다.
월정리, 김녕, 협제 등등.
황재홍이 제주도에 갔다 온 것에서 알 수 있듯, 유재원이 생각했던 대규모 부동산 투자의 대상은 제주도였다.
유재원은 평당 몇 백 원, 몇 천 원씩 한다는 황재홍의 보고보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제주도의 모습 자체에 빠져들었다.
지분 매각 대금을 제주도에 투자하겠다고 결정한 것에는 21세기 초 제주도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는 팩트는 그다지 고려 대상은 아니었다.
애초에 유재원의 목적은 시세 차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사면 다시 팔 생각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제주도가 관광지로 재조명되면서 가치가 폭등한 건 21세기 초였다. 그렇지만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무분별한 개발과 중국화로 인해서 제주도를 다시 찾는 관광객들 숫자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뒤늦게 자연 복구를 시도했지만, 망가진 게 워낙 심해 인간의 힘으론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유재원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제주도를 개발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은 누구도 찾지 않지만 21세기에 재조명되는 지역을 선점하기 위해 황재홍을 파견했다.
“다만, 당장 회장님이 집어주신 모든 땅을 다 매입하는 건 어렵습니다.”
천혜의 자연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겨울 제주도의 운치 있는 모습에 빠져 있던 유재원은 어렵다는 말에 산통이 깨졌다.
팔지 않겠다니?
유재원은 땅값을 후려칠 마음은 추호도 없다. 또한, 개발 이익도 이전과 달리 중국 부자들이나 소수의 사람들이 독점하는 것과 달리 현지인과 나누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를 테면 재개발된 상가를 현지인에게 초장기 임대해주는 것은 물론 각종 이권도 나눌 예정이었다.
“땅주인들 사이에는 도민들 끼리 거래는 해도 외지인에는 땅을 팔지 않겠다는 공감대가 강하게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어진 황재홍의 설명에 유재원은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제주도는 아픔이 많은 땅이었고, 그러한 사건들 대부분은 외지인들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특히나 94년도인 지금은 역사 청산도 안한 상태이니, 그 감정은 유재원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 당장 살 수 있는 건 얼마인가요?”
“예, 전체 목표 중에 대략 40% 정도입니다. 예산으로 따지면 320억 원 규모입니다.”
아쉬운 수치였다. 원래 유재원의 목표는 1차 투자로만 800억 원이었다. 미국 돈으로 1억 달러다. 최종적으로는 10억 달러 정도를 투자하려고 했다. 단순한 땅만 사는 게 아니라 숙박시설부터 관광과 체험 그리고 힐링 등등 여러 가지 테마를 가진 종합 개발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시작이 이러면 목표 달성에 대한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질 거 같다.
“일단 그걸로 만족해야죠. 우리는 다르다는 걸 직접 보여주면 달라질 거예요.”
원한다고 억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니,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해 나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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