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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 울티마 온라인(5)
전명헌의 휴대폰 백업파일을 두고 이어진 유재원의 고민은 길어졌다.
한참이나 이어졌던 고민 끝에 유재원은 파일을 컴퓨터로 옮겼다. 불법이라는 것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지만, 이를 감수하고 파일을 열어 보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사람 좋다고 믿었다가 뒤통수를 맞았던 건 전생의 경험으로 충분하다. 마음 놓고 믿을 수 있는 건 가족뿐이라는 건 전생의 일로 뼈저리게 알게 된 유재원이다.
전명헌의 경우엔 뜻밖의 인연으로 돈독해진 사이가 됐지만, 사람 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법이었다. 나중에 100배 사죄를 하더라도 지금은 열어 보고 싶다는 마음이 훨씬 컸다.
USB포트를 타고 복사 중인 백업 파일 속에서 믿음을 100% 높여줄 내용이 나올지, 아니면 반으로 깎아버릴 디버프가 나올 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슨 내용이 나오든 본인에게는 궁극적으로 나쁠 건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러면 시작해 볼까?”
파일 복사가 끝나자 유재원은 작업을 시작했다.
일단 암호가 걸려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음, 0000?”
유재원은 티파니 폰의 기본 암호인 숫자 0 네 개를 입력했다. 사용자가 암호를 정하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세팅되는 암호였다.
-잘못 입력된 암호입니다.
놀랍게도 0000은 아니었다.
전명헌이라면 전자기기를 잘 다루지 못할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래서 기본 암호로 간단히 해체될 줄 알았는데, 사용자 암호를 제대로 입력해 놓으신 것 같다.
“음, 시간이 좀 걸리겠네.”
0000이 아니라니까 0001부터 9999까지 숫자를 모조리 대입하는 방식을 써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9,999개의 암호가 모두 입력되기까지 멍하니 기다리고 있을 필요는 없다. 암호 입력기를 하나만 실행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개를 동시에 실행해서 찾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접속하는 거라면 한 번에 하나의 접속밖에 못하니 다중 실행은 효과가 없겠지만, 지금은 유재원의 컴퓨터에서 로컬 파일을 공격하는 것이라, 효과가 만점이었다.
유재원은 곧장 꼼수를 실행에 옮겼다.
“음, 그런데 내가 다른 일을 못하게 됐네.”
화끈한 유재원은 무려 20개의 무작위 암호 입력기를 실행했다. 각각 입력할 암호의 범위를 정해준 다음 실행하니, 컴퓨터가 다른 일을 못할 정도로 버벅거렸다.
서버용 보드로 인텔의 펜티엄 CPU가 4개나 꽂혀 있는 컴퓨터였지만, 다중 실행을 하니 역시 맥을 못 춘다. 그래도 무작위 암호 입력기의 효율이 떨어지진 않았다.
실행한 지 몇 분이 지나자 띵동하는 맑은 종소리가 났다.
암호를 찾았다는 알람이다.
“0817?”
무슨 숫자인가 생각해 보니 특정한 날짜인것 같은데, 무슨 의미가 담긴 날짜인지는 도통 짐작을 할 수 없었다. 전명헌의 생일도 아니었고, 전명헌 주변인들로 범위를 확대해 봐도 해당 날짜가 기념일인 사람은 없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암호를 찾은 유재원은 백업 파일을 해체했다. 그리곤 티파니 폰의 소프트웨어 에뮬레이터에 넣고 로딩시켰다.
로딩이 끝나자 유재원은 드디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전명헌의 휴대폰 데이터 내용을 열어 볼 수 있었다.
“흐음.”
데이터를 살핀 유재원의 알쏭달쏭한 반응이 이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기대했던 것만큼의 뭔가가 나온 건 없었기 때문이다. 전명헌에 대한 신용도에는 큰 변화가 없을 만큼, 백업 데이터 안에 든 자료들은 부실했다.
이통 통신과 메신저나 SNS가 크게 활성화된 21세기였다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졌을텐데, 지금은 휴대폰으로 할 만한 건 그다지 많지 않았다. 2세대 휴대폰의 강점인 데이터 통신을 통한 문자나 이미지 전송도 같은 휴대폰끼리 가능한데, 지금은 겨우 시범 서비스 중이라서 딱히 이런 기능을 쓸 사람은 전명헌 주변에 얼마 없었다.
즉, 문자 메시지의 경우 유재원과 나눴던 게 대부분이었고, 갤러리에 있는 사진들도 중요한 건 없었다.
십여 장 있는 사진은 유재원이 휴대폰을 선물해준 시점에 찍어본 게 전부였다. 셀카 한 장과 총리 공관 주변의 꽃이나 눈 쌓인 정원의 모습이 가득하다. 딱 할아버지 취향의 사진들이었다. 뭔가 은밀한 사생활에 관련된 건 단 한 장도 없었다.
그나마 제법 숫자가 많은 데이터는 통화 송수신 기록이었다.
“통화 기능은 참 잘 쓰고 계시긴 하네.”
하루에도 수십 통의 전화를 사용한 기록이 빼곡하게 남아 있었다. 대부분 유선 전화 번호였지만, 011로 시작하는 TG 모바일 번호도 제법 된다. 이러한 번호들은 짧은 건 1분도 안 되는 것도 있었지만, 긴 통화는 2, 30분이 넘기는 기록도 있었다.
문제는 주소록에 이름이 저장된 게 유재원이나 전명헌의 가족들뿐이라는 것이다. 유재원이 기대했던 정부 부처 인사들이나, 통일 국민당의 주요 당직자나 네임드 의원들의 이름은 거의 없었다.
주소록이 이런 상태이니 해당 전화번호가 누구인지 알아보려면 일일이 찾아봐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가만. 전화번호부가 있잖아.”
다시금 고민에 빠졌던 유재원은 답을 금방 찾았다.
20세기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인식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바로 전화번호부라는 책이었다. 다른 데도 아니고 한국통신에서 만들었던 책자로, 가입자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가나다 순으로 모두 엮여 있는 책이었다.
예전 기억을 떠올려 보면, 어머니가 대호전자 영업을 위해 전화기를 제법 일찍 들여 놓으셨는데, 다음 해 발행된 전화번호부에 어머니의 이름이 들어가 있어서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지금도 선명했다.
거기서 전화번호를 찾아보면 이름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이름이 찾아지면 이를 바탕으로 전명헌이 어떠한 인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런 일은 유재원이 직접 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일을 해달라고 만든 게 정보팀이지.”
한국과 미국의 정보팀은 분리된 조직이었다. 덕분에 예전부터 미국보다 훨씬 자유롭게 활동했고, 권한도 많았다.
유재원은 곧장 백업 데이터에서 추출한 통화목록을 뽑아서 한국 정보팀에 전송했다.
최대한 은밀하게 해당 전화번호의 주인들을 찾아서 정리하고, 특이한 인물이 나오면 한 밤중에라도 지체하지 말고 전화하라고 특별히 명령했다.
한국 정보팀장인 안종철로부터 명심하겠다는 답변을 받은 유재원은 전명헌의 휴대폰 백업 파일 관련 프로그램은 모두 닫았다. 그리곤 본래 하려고 했던 동기화와 백업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음, 괜히 열었나?”
동기화를 다시 시작하며 유재원은 전명헌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일단 핸드폰에서는 위선적인 내용은 단 하나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아직 확인하지 못한 통화 목록이 있으니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더욱이 앞으로도 비슷한 경우가 또 생긴다면 그때도 이번과 같은 결정을 할 것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며칠이 지났다.
-ID 그룹 대대적인 사내 벤처정책 실시!
-1, 2호 기업 선정, 1호는 개인 간 중고 거래 사이트 P마켓, 2호는 게임 개발팀로 각각 20만 달러씩 투자하기로!
ID 그룹의 근황이 샌프란시스코 지역 신문에 크게 실렸다.
사내 벤처지원 정책이 시작된 지 며칠 됐다고, 벌써 2개 케이스나 선정이 된 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P마켓은 앞으로 만들어질 사이트의 이름인데, 유재원이 특별히 선물해준 것이었다. 단지 이름뿐만이 아니라 도메인도 직접 사서 선물했다.
원래 해당 팀에서는 원래 벼룩시장으로 이름을 지으려고 했다. 유재원이 보기엔 영 아닌 이름이었다. 확장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름인 탓이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Person to Person 거래라고 해서 P마켓으로 네이밍해줬다.
지금이야 중고 거래 사이트로 시작하지만, 나중에 초거대 인터넷 쇼핑몰 사이트로 성장하는 것까지 염두한 이름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제일 뜨거운 ID 그룹의 행보는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특히 사내 벤처 육성 정책은 실리콘밸리의 다른 벤처기업들이 매우 민감하게 반응 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재원의 개인적인 투자부터 ID 인베스트먼트의 엔젤투자까지, ID 그룹은 제법 큰 돈을 실리콘밸리에 뿌리고 있었다.
그런데 사내 벤처 정책을 시작으로, 외부에 대한 투자 주는 것은 물론이고 강력한 라이벌들이 새로 등장하는 거 아니냐는 경계심이 큰 것이다.
ID 인베스트먼트의 빈센트 사장이 엔젤투자의 규모가 축소될 일은 없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지만, 실리콘밸리의 경계심과 걱정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유재원은 본인의 일에 충실했다.
사내 벤처정책을 운영할 조직인 운영팀을 만들어 비서실 밑에 두는 것을 시작으로, 애플사의 파워맥에 대응하는 새로운 전문가용 워크스테이션 제작도 이미 착수됐다.
-나는 i웍스에 한 표! 똑똑하게 일해준다는 느낌이야!
“그렇단 말이지? ‘나는 하찮은 일꾼입니다’하는 느낌은 없는 거지?”
전문가용 워크스테이션에서 제일 고심하는 건 건 디자인이나 스펙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에 콕 박히는 이름을 정하는 일이었다.
-응? 그런 건 없는데.
“좋아! 그러면 i웍스, 너로 정했다!”
티파니의 반응에 유재원은 워크스테이션의 이름을 i웍스로 최종 확정했다.
후보로 iCOM, iPAC등등의 이름이 있었다. i에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약자를 붙여서 만든 단어들이었다.
-이렇게 빨리? 제대로 조사해보고 결정하는 게 어때?
괜히 자기 의견대로 따랐다가 망하면 큰일이니 티파니가 추가로 의견을 냈다. 그렇지만 유재원도 사실 여러 후보 이름 중에 i웍스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COM이라고 하면 너무 단순해 보였고, PAC이라고 하면 맥을 따라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먼 미래까지 보자면 제일 적합한 이름은 i웍스였다.
-그러면 언제쯤 볼 수 있는 거야?
“음, 아마 이번 달 말이면 프로토타입 정도는 나올 거야.”
-이번 달 말? 그러면 몇 주 남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빨라?
“응! 일단 시스템만 구동 되게 만들어 보는 건 빠르지.”
-우와! 그럼 그때 나도 구경시켜줄거야?
“그럼, 당연하지.”
유재원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티파니의 입이 무겁다는 건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프레더릭 테일러 2세였으면 진작에 알렸을 테니 말이다.
더욱이 티파니의 컴퓨터에 대한 관심도 진짜였다. 남다른 감각도 있으니 프로토타입을 보고 좋은 조언을 많이 해줄 것이다.
시간적으로도 큰 문제 없다.
케이스는 일본에서, 메인보드는 대만, 메모리와 각종 주변기기는 한국에서, CPU와 VGA, 하드디스크 같은 중요 부품은 미국에서 만들어서 조립만 하면 된다.
이미 디자인도 끝냈다.
무광택의 헤어무늬가 들어간 풀 알루미늄 하우징의 미니 타워형 케이스였고, 옆구리에는 강화유리로 해서 안이 다 보이는 형태로 만들었다. 여기에 내부의 CPU와 VGA의 쿨링팬과 케이스 쿨링팬 주변으로 녹색 LED를 박아 놓을 생각이다.
내부뿐만이 아니라 전원 버튼이나 케이스 바닥면 등에도 넣어서 컴퓨터 전체적으로 신묘한 분위기를 자아낼 예정이다.
파란색 LED가 아직 개발되지 않아서 RGB효과는 낼 수 없는 게 참 아쉽다.
그렇지만 고급스러운 풀 알루미늄 케이스에, 은은한 녹색의 LED 빛이 어우러지면 지금까지 나타난 투박한 워크스테이션과는 격이 달라질 것이다. 에그 시리즈로 PC 시장에 디자인 열풍이 불어오긴 했지만, 워크스테이션까지는 아니었다.
i웍스가 계획대로 완성되어 세상에 등장한다면 워크스테이션 업계에도 판도가 확 바뀔 거라고 유재원은 확신했다.
“문제는 모니터를 뭐로 삼을까 하는 건데.”
딱 하나 옥의 티라면 모니터다.
디자인만 보자면 LCD 모니터가 정답이다. 열심히 만든 대전의 ID 디스플레이 공장은 늦가을쯤부터 가동을 시작하며 월간 수만 장의 LCD 패널을 만들어낼 것이다. 일본 샤프사와 협력하면서 현존 최고 사양의 LCD 패널을 완성했다.
색감과 반응 속도에서 많은 개선을 이뤄냈다. 하지만 TN 방식이라는 근본적인 한계로 인해 시야각 문제도 크고, 색의 균일성도 브라운관 모니터에 비하면 많이 약했다.
무엇보다 워크스테이션은 전문가들의 연구 활동 보조와, 콘텐츠 제작자들이 콘텐츠를 만들 때 사용하는 물건인지라 선명한 색이 필요했다.
“브라운관 모니터로 트리니트론만큼 좋은 건 없는데 말이지.”
문제는 그 좋은 트리니트론 모니터는 거의 다 일제라는 것이다.
일본과 한국의 사이는 김 대통령 시대에 들면서 급속도로 나빠졌다. 거기엔 유재원도 한몫 단단히 하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 제작하자고 제안한 일로 인해서 유재원은 일본에 단단히 찍혔다.
추진력 하면 유재원 아니던가.
서울시, 혹은 도로변에 땅을 가진 주인들로부터 손바닥만 한 땅을 샀고 거기에 세워질 각종 동상의 디자인 공모를 받는 중이었다. 열정이 넘치는 예술가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한풀이 중이었다.
아직 제 자리에 놓인 것도 아닌데, 일본의 정치권 특히 극우세력들은 엄청나게 발악 중이었다. 오죽하면 ID 그룹과 협력 중이었던 소니나 소프트뱅크 등등의 여러 자국 기업들이 심한 눈총을 받는 중이었다. ID 그룹의 일본 지부라 할 수 있는 신일본투자은행 휘하 기업들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하여튼 한일관계는 이전보다 훨씬 나빠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i웍스의 번들 모니터로 일제 제품을 사용하면 나중에 여러 가지 말이 많이 나올 수도 있었다.
차라리 미국산 제품 중에 대안을 찾아보고, 그것도 안 되면 그냥 OEM 방식으로 눈가리고 아웅 하는 게 최선인 것 같았다.
띠링!
한참 모니터를 두고 고민 중이었는데, 유재원의 컴퓨터에서 알람 소리가 났다. 이메일이나 쪽지가 왔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뭐지?”
서류를 덮은 유재원은 모니터를 봤는데, 오른쪽 하단에서 알람창이 하나 떠 있었다. ID톡에 새로운 친구 요청이 떴다는 표시였다. 그것도 회사 이메일이 아니라, 사적인 용도로 쓰는 이메일을 통한 친구 요청이었다.
얼마 만에 보는 친구 요청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더욱 이상했다.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등록된 상태였고, 최근에 딱히 추가될 사람은 없었기에 때문이다.
“헉!”
친구 요청을 걸은 사람이 누구인가 확인했던 유재원은 헉 소리를 낼 만큼 놀랐다. 친구요청을 한 사람의 이름이 딱 뜨는 데, 전혀 생각도 안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프레데릭 테일러 2세가 친구 요청을 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유재원은 수락하기를 누르려다가 멈칫했다.
프로필을 비롯해, 사적으로 맺은 친구들과 공유하고 있는 사진첩이나 파일 항목을 먼저 점검했다. 친구들 사이에 웃으며 보는 내용이라도 프레데릭에겐 나쁘게 보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다행히 그런 건 몇 개 없었다.
“인터넷 세계에 접속하신 걸 환영합니다.”
티파니의 외할아버지에게 무슨 말로 ID톡을 시작해야 할 지 감을 잡지 못했던 유재원은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장 무난한 말을 보냈다.
-안녕하십니까? 유재원 회장님, 저는 집사 알프레드입니다. 프레데릭 님께서 티파니 님의 권유로 최근 이메일을 만드셨고, 이메일을 만드는 김에 ID톡에도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프레데릭 님의 전언이 있다면, 저를 통해 전해질 것입니다. 유재원님도 프레더릭님께 하실 말이 있다면, 언제든 ID톡을 주십시오. 제가 제일 빠르게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천만 다행히도 프레더릭 테일러 2세가 아닌 알프레드 집사님이었다.
알프레드 집사님도 프레더릭만큼이나 나이가 많아 컴퓨터는 어려워하실 것 같은데, 놀랍게도 컴퓨터에 무척 익숙하신 모양이다. 인사말을 보낸 지 몇 초 만에 저렇게 긴 문장이 뚝딱 올라왔으니 타이핑 속도도 매우 빠르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서로 잠깐 이야기를 나눈 유재원과 알프레드 집사의 대화는 곧 종료되었다. 용무가 확실했고, 사적인 이야기를 길게 할 사이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시간은 흘렀고 유재원은 약간의 조바심을 느끼는 중이다.
티파니에게 장담했던 4월 말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i웍스의 프로토타입은 아직 미완성이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각 부품 제조사에서 보낸 부품들이 모두 유재원에게 도착해서 i웍스의 프로토 타입이 만들어져야 했다. 그러나 유재원은 생각지도 못했던 암초에 부딪치고 말았다.
필수 부품 중 딱 하나가 빠졌기 때문이다. 바로 비디오 카드였다.
비디오 카드 시장은 2D가속에서 3D가속으로의 대전환이 이뤄지면서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특히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곳은 엔비디아와 3DFX였다. 2D에서 강했던 기존 제조사들이 갈피를 못잡는 가운데, 3D에 한층 강력한 가속 능력을 보인 두 신생회사는 서로 경쟁하면서 무섭게 성장 중이었다.
유재원이 i웍스의 출시를 결정했을 때만 해도 제일 빠른 비디오카드는 엔비디아의 리바TNT라는 카드였다. 그런데 불과 한 주 전에 3DFX에서 부두라는 새로운 카드가 등장했기에, 유재원은 3DFX에도 접촉했다.
i웍스는 당대 최고의 스펙으로 무장하려고 했으니, 유재원은 당연히 3DFX의 부두를 테스트 해보기 위함이었다.
“이거 뭐지?”
그런데 오늘까지 오기로 했던 물건이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3DFX사에 연락해보니 물량이 달려서 유재원의 주문 처리가 뒤로 미뤄진 것이라고 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아직 정식 발표되지도 않은 카드였기에, 물량이라는 말은 어패가 있었다.
지금은 비디오 카드 제조사나 ID 그룹과 같은 대형 PC제조사에 샘플을 보내서 성능을 어필해야 할 단계였다. 당연히 ID 그룹의 뉴에그2의 판매량을 보면 북미에서만 톱3에 들어갈 정도였으니 최우선으로 넣어줘야 할 회사였다.
더욱이 ID 그룹은 단순히 컴퓨터 부품을 모아 조립만 하는 회사가 아니라 운영체제까지 만드는 회사였다.
결정적으로 실리콘밸리에서는 ID 그룹이 새로운 PC를 준비한다는 소문이 쫙 풀린 지 오래다. 덕분에 ID 테크놀로지 실리콘밸리 본사로는 수많은 부품 제조사들이 견적서와 샘플을 들고 먼저 찾아오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부품 공급업체로 선정만 되면 매출은 폭발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사업을 시작한 지 2년도 안 된 3DFX의 배짱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의문이 풀린 건 얼마 후 최초의 리뷰가 뜨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