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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SPEED 010(7)
이재홍과 ID톡을 종료하고 대략 5분쯤 지났을까.
“이제 바뀌네!”
한국 넥스트컴의 뉴스페이지 1면의 기사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최상단에 있던 잔혹한 게임 어쩌고 했던 것이 내려가고, 그 자리를 ‘북미회담 가능성 높아진다! 미 백악관, 북한과의 대화에 긍정적’이라는 기사가 차지했다.
“이재홍, 이 사람 제법 일머리가 있네.”
넥스트컴 뉴스 페이지가 실시간으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본 유재원은 이재홍을 높이 평가했다. 유재원의 지시를 받아 무조건적으로 박상한 기사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비견되는 뉴스로 최상단 페이지를 채우기 시작한 모습 때문이다.
박상한 관련 가짜 뉴스들은 그냥 지워버려도 유재원은 괜찮았다. 그런 기사 따위 원칙에 따라 제대로 작성된 것이 아니니 한시 바삐 사라지는 게 세상에 이롭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재홍은 현실적일 수밖에 없었다.
박상한과 게임의 상관관계를 따지는 기사들이 일순간 사라지면 그게 또 뉴스거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뉴스 교체를 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다행히 한국에는 박상한 사건 말고도 한국에는 뉴스거리가 참 많았다.
그중에 최고는 북미정상회담 추진이었다.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의 긴장 관계가 일순간 풀린 것처럼, 만약 북미정상회담이 성공한다면 동아시아 정치 지형에 어마어마한 변화가 있을 만큼 커다란 뉴스였다.
박상한의 패륜 범죄 때문에 김 대통령이 미국 클린턴 대통령과 전화 통화도 하고, 특사도 파견하며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상황이 살짝 가려져 있었던 상황이다.
-국회, 임시국회 열어 비 쟁점법안 먼저 처리하기로 합의.
-개인정보 보호법, 인터넷 광고법 등등.
“이건 그나마 좋은 소식이군.”
뉴스가 바뀌는 걸 지켜보던 유재원에게 확 들어온 소식이다.
역시 최강욱 비서실장에게 맡기면 무슨 일이든 가시적인 성과는 확실히 일어난다. ID 그룹에 가장 민감할 수 있는 법안이지만, 유재원 개인적으로는 그렇게나 반가울 수가 없는 법안들이 한국에도 드디어 상정된다.
미국보다 훨씬 국민의 감시가 심한 나라가 한국이었다.
전 국민에게 모두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하고, 등록증에 사진까지 붙여 놓게 하는 건 소수의 나라에만 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국민 관리를 열심히 하는 분위기는 인터넷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회원 가입할 때 주민등록번호는 물론이고, 집주소와 가족 관계를 물어보는 사이트들이 하나 둘 나타나고 있다.
ID 그룹이 한국에서 서비스하는 인터넷 업체 역시 주민등록번호와 집 주소, 연락처를 기입해야 가입할 수 있다.
인터넷 사업자들이 최소한의 정보만 받고 싶어도, 법으로 강제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보통신 관련법에 의하면 가입자의 신원 확인을 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조항은 유선전화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법이었다.
유선전화가 막 상용화되었을 때, 한국의 정치인들이 가장 우려했던 건 국가안보와 관련된 일이었으니 말이다. 통신망을 국가가 관리하려면 전화기를 들인 개인의 정보도 확실하게 보유하고 있는 게 정답이었다.
이번에 올라가는 개인정보 보호법은 인터넷 사이트가 수집하는 개인정보의 수준을 알아서 정하도록 했고, 그에 따라 유출의 책임도 사이트 운영사가 훨씬 크게 명시하는 하는 법안이었다. 만에 하나 개인정보가 유출되었을 때, 무조건 사이트 운영사의 책임이고 그에 대한 배상의 범위도 설정하고 있다.
기본은 벌금이고 1인당 최소 10만 원부터 시작했다. 최고로 무겁게 때린다면 징역형까지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특이점이 하나 있다. 배상 방법을 정의하는 조항에서 집단소송제의 형태도 살짝 엿보인다는 점이다. 배상의 크기를 놓고 소송을 벌여 결과가 나온다면, 이를 피해자 그룹 전체에 적용해서 같은 소송을 여러 번 하는 수고를 원천 차단할 수 있도록 했다.
“개인정보 털려서 회사가 망하는 꼴을 몇 번 보면 다들 정신 차리겠지.”
개인정보의 가치를 법으로 1인당 10만 원으로 책정해놨으니, 예전처럼 몇 백, 몇 천만 개의 개인정보가 유출되었음에도 벌금 500만원 내고 끝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에 하나 100만개가 털렸다고 하면, 손해배상 총액은 최소 1천억원이다. 대기업이라고 해도 기겁할 액수다. 그러니 개인정보 보호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보안관련 분야도 빠르게 성장할 것은 자명했다.
이미 그러한 경향은 나타나고 있다.
V6라는 국산 안티바이러스 프로그램을 만든 김철수는 의대생의 길을 포기하고 벤처기업인으로 거듭났다. 그렇게 해서 만든 회사가 김철수 바이러스 연구소였고, 보통은 줄여서 김랩(Kim Lab)이라고 했다.
김랩의 V6 안티바이러스 프로그램은 도스 시절부터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에 특화되었고, 유닉스 커널로 이전한 지금에도 안드로이드를 가장 빠르게 지원하는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이었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PC시장 점유율이 90%를 넘어가고, 인터넷 사용자 숫자도 폭증하면서 바이러스가 부쩍 늘어났다. 그에 따라 안티바이러스 시장도 크게 확대되었다. 덕분에 김철수의 V6는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많이 쓰이게 되었고, 덕분에 투자유치도 이어졌다.
심지어 해외의 대형 보안업체인 맥아피나 노턴에서 수백억원에 이르는 인수 제안을 해오기도 했다.
이처럼 보안 분야가 엄격해지니, 일각에서는 이렇게 강력한 처벌 조항을 넣으면, 벌금 무서워서 인터넷 벤처기업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볼멘소리가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신 인터넷기업쪽에도 득이 되는 조항이 몇 개 있다.
필수적으로 받아야 하는 개인정보의 숫자도 확 줄였고, 사용자 인증이나 보안 방식도 기업의 자유의사에 따라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사용자에게도 괜찮은 법률이다. 본인이 자기 암호를 잘못 관리한 경우가 아니면, 가만히 있어도 절로 보상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법에서 강제한 방식으로 보안시스템을 만든다고 쓸데없이 이상한 외부 프로그램을 덕지덕지 설치하지 않아도 된다.
유재원은 한국의 액티브X에 학을 뗀 덕에 이러한 법률이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유재원이 MS를 먹어버린 상태인지라, 액티브X 같은 게 만들어질 일도 없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게 있으니 아예 법으로 금지해버렸다.
인터넷 광고법 역시 미국의 법안을 그대로 가져온 형태였다.
인터넷에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모든 광고는 광고라고 명시해야 한다는 것과, 어뷰징에 대한 금지를 담고 있는 법률이었다.
“역시, 한국을 움직이려면 미국을 지렛대로 쓰는게 최고야.”
미국이 움직이니 한국이 따라하는건 21세기 중반까지도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인터넷 광고법은 사실 선거법이기도 했다. 어뷰징 관련한 것은 정치적인 문제가 훨씬 큰 사안이었으니 말이다. 갑자기 새로운 매체의 등장으로 정치 구도의 변화가 일어나는걸 반기는 기성 정치인은 없었기에, 매우 빠르게 합의가 이루어졌다.
반대로 인터넷 바람을 타고 거물로 성장할 사람들에겐 좀 안좋은 법률이긴 했다. 하지만 이미지 광고가 아닌 제대로 된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언제고 떠오를 것이니 유재원은 큰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통해 인터넷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던 조작을 예방할 수 있는 단초가 만들어질 거라는 것에 큰 의미가 있었다.
“인터넷은 이걸로 됐고.”
넥스트컴의 뉴스 페이지가 바뀌는 걸 확인한 유재원은 다시 ID톡을 열었다. 박상한 사건이 내려간건 넥스트컴 하나뿐인지라 이제부터 시작이다.
띵!
-회장님, 최강욱입니다.
예술적인 타이밍으로 유재원이 ID톡의 명단 중 하나를 클릭하기도 전에 최강욱으로부터 메시지가 날아왔다. 유재원이 클릭하려던 이름이 최강욱이었는데, 때마침 연락이 오니 안성맞춤이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6월 22일 임시국회에서 개인정보 보호법과 인터넷 광고법이 통과될 것입니다.
“아, 방금 기사 봤어요. 근데 그 기사엔 날짜 언급은 없었는데 확정이 된 거예요?”
최강욱의 보고에는 구체적인 날짜까지 보고되었다.
-예, 오늘 저녁 뉴스에 나올 겁니다. 다만 노동법을 비롯한 경제개혁법은 조금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해서, 날짜를 확인 받지 못했습니다.
“네, 두가지만 해도 생각보다 빨리 이뤄졌네요. 고생하셨어요.”
노동법이나 집단소송제 같은 것이 하루아침에 입법될 거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다. 보나마나 큰 의견충돌이 일어나고, 어쩌면 전생과 같이 날치기로 통과시켜야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한국의 경제 상황이 너무나 좋은 덕에, 노동법 개정에 대한 논의 자체가 쉽게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유재원의 눈에는 이미 경고등이 많이 들어온 상태다.
경제 상황을 좋다고 명확히 말할 수 있는 건 참 좋은 일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 언제나 경제가 나쁘다는 소리만 나오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런데 경제 상황이 좋다는 핑계로 방만한 경영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었다.
정부의 SOC예산은 폭증하고 있고,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온갖 토목 사업을 벌이는 중이었다. 여기에 기업도 한몫 크게 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거대 자본이 드는 대규모 설비 투자를 진행하고 있었고, 빌딩이나 거대 쇼핑센터 등의 건축물도 지었다.
사회에 돈이 넘쳐난다는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미래백화점의 사은대잔치 경품으로 걸린 압구정동 미래 아파트였다. 미래 계열사이니 시가보다는 싸게 가져왔다고 해도, 백화점 경품으로 아파트가 걸린다는 건 상상 그 이상의 일이었다.
이런 돈은 다 밖에서 들어온 외국의 자본인데, 유재원이 힘들게 번 돈에 몇 십 배의 규모를 자랑했다. 갑자기 세계 경제 사정이 나빠지고, 외국에서 들어온 돈이 싹 빠져나가면 외환 위기의 규모는 이전보다 훨씬 커질 수도 있었다.
양대 노총이 보기엔 이제 좀 먹고 살만해진 거 같은데, 욕심 많은 자본가들이 호황기를 핑계로 정규직을 무너뜨리려고 한다고 오해했다.
지옥과 같은 미래를 봤다고 말해줄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참으로 답답한데, 여론은 다행히 크게 나쁘진 않았다. 여의도 정치인들 대다수는 친기업적인 성향이었고, 국민들도 노총에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대다수 노동자인데, 노총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노총의 구성원들이 대다수 운동권이었고, 정치적 참여도 열성적으로 하는 중이라 호불호가 크게 갈릴 수 밖에 없었다.
하여튼, 한국의 여러 가지 정치적 지형 때문에 노동법은 유재원의 방식으로 채택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대기업들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여러 가지 조건이 달려 있긴 해도 비정규직이란 새로운 고용형태가 생긴다는 건 이득이었다.
물론 대기업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비정규직을 확대할 흑심을 품고 있을 테지만 유재원이 막아서는 한 절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박상한 사건 말이에요. 좀 이상하지 않나요?”
최강욱으로부터 입법 상황부터 한국의 요즘 이야기에 대해 보고를 들은 유재원은 본래 하려던 말을 시작했다.
-아, 그건 저도 느끼고 있던 바입니다.
답변도 즉각 돌아왔다.
한국에서 최강욱은 유재원을 대신하는 완벽한 이인자였다. 실제 경영에도 관여했고, 유재원 만큼은 아니지만, 정보 보고도 받는 중이었다. 그러니 언론이 박상한 사건을 가지고 게임과 엮어 ID 그룹을 공격하는 기류에 대해 모를 수가 없었다.
-대한일보가 시작이고, 이에 부화뇌동하는 매체가 좀 많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이를 조장하는 기업이 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놀랍게도 최강욱은 유재원보다 한 발 더 앞서 있었다.
박상한 사건의 원인을 게임으로 지목하는 일은, 전생에도 있었다. 그래서 게임 때문에 ID 그룹이 공격을 받는 건 짜증나는 일이긴 해도 인위적인 요소가 개입된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직은 조사 단계라서 회장님께 정식 보고 드리기에는 부족합니다.
“알겠어요 정리되면 알려주세요. 그리고 이번 박상한 사건은 절대 가만히 있을 수 없어요.”
-예, 저희가 할 수 있는 조치를 다 하겠습니다.
유재원과 최강욱 사이에는 이걸로 충분했다.
부화뇌동한 신문사들에 광고를 다 끊어버리라느니, 반박 기사를 준비해야 한다느니 하는 식으로 구체적인 지시를 내릴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유재원은 이렇게 하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다시는 흉악 범죄와 게임을 연관시키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려면, 단순히 언론만 단속하는 것으로 불충분하다는 판단이다. 국민들 모두가 공감대를 가질 수 있게 제대로 짚고 넘어가 줘야 한다.
“혹시 박상한 사건을 다루는 공중파 토론회 같은 게 있을까요?”
-아, 공중파 토론회 말씀이십니까? KBS의 심야 토론이 있습니다. 설마 출연하시려고 그러십니까?
100분 토론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아직은 시작도 못한 프로그램이었다. 지금은 겨우 심야 토론 정도가 정통 시사토론 프로그램의 명맥을 잇고 있는 중이었다.
“예, 제가 직접 나가서 오해를 풀어드리고 싶네요.”
여러 토론회를 보면, 포인트를 못잡고 엇나가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분명 박상한 사건으로 토론회가 열릴 텐데, 거기서도 헛다리를 잡을 게 분명하다. 스스로 말하기엔 좀 그렇지만, 움직이면 핫 이슈인 본인이 아니던가.
유재원이 참여하는 토론이라면 화제성은 남다를 것이고, 뼈가 부러질 만큼 팩트로 후려쳐 주면 분명 여론은 반전될 것이다.
-음. 회장님, 차기 안드로이드 제작하신다고 레드먼드까지 가셔서 집중 근무 하는 거 아니셨습니까?
“괜찮아요. 이동전화 시범서비스 건도 있고, 제주도 투자 건도 있고 하니 한국에 들리긴 해야할 타이밍이잖아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유재원의 뜻이 확고하다는 걸 인지한 최강욱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더욱이 유재원의 토론회 출연을 싫어할 PD는 세상에 없었다. KBS측과 매우 빠른 속도로 협의가 진행되어서 구체적인 날짜도 거의 다 정해졌다. 그렇게 출발을 며칠 앞둔 6월의 마지막 주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김일성 사망!
북한조선중앙텔레비전의 속보가 한국을 넘어 전 세계로 전파되기까지 불과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