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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 SPEED 010(10)
가입비 10만 원이 워낙 커서 기본요금 1만2천 원이니, 음성통화 10초에 10원이라는 항목은 유재원의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억! 유 회장님, 그건 말입니다…….”
TG모바일 기획본부장 정민호는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도 거의 사시에 가까운 눈으로 유재원의 반응에 예의주시 하고 있던 모양인지, 바로 해명을 시작했다.
“가입비는 통신회사들이 가입자들에게 부과하는 항목입니다.”
이렇게 운을 뗀 정민호는 매우 과학적인 방법으로 도출된 액수라고 항변했다. 그런데 과학적이라는 계산법에 담긴 논리는 매우 간단했다.
커버리지 영역을 늘리기 위해 땅도 사고 중계기도 여럿 들어오면서 발생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책정된 것임을 명분이란다. 그리고 10만원이란 액수는 가입자 예상 수치를 바탕으로 했다. 1년에 50만 명씩 신규 가입자를 유치해서 대략 8년간 모으면 투자비 본전을 회수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라고 했다.
“내년 신규 가입자 예상 숫자가 겨우 50만이라고요?”
50만이란 숫자는 어떻게 나왔느냐?
TG모바일 기획실에서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도출했다는 데, 유재원이 보기엔 완전 주먹구구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50만이란 숫자를 만들어낸 바탕에는 이통통신 서비스에 대한 소비자 시장조사가 있는데, 조사 방법이 동의하기가 힘들었던 탓이다. 일단 한국의 경제인 인구 중에 이동전화가 필요한 직업군의 숫자를 도출했고, 그중에서 TG모바일에 가입하겠다는 의향이 있는 사람들을 추려 보니 내년 1995년에는 20만 명, 1996년에는 40만 명, 다음엔 44만 명 수준으로 점차 확대해 나갈 거라고 했다.
그래서 평균을 내보니 대략 50만이라는 숫자가 나왔고, 이를 통해 적절한 투자비 회수 금액을 계산해보니 10만 원이 나왔다고 한다.
가입 예상 숫자부터 완전히 틀렸다.
“95년에만 100만이고, 96년에는 300만이 넘을 거예요. TG모바일 포함 다른 2개 통신사 합쳐서 말이에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요?”
“ID 그룹이 예상한 이동통신 서비스 예상 가입자 숫자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유재원은 말이 예상이지, 실제로 뉴스 라이브러리에 기록된 숫자를 말했다.
이용권 사장을 비롯해 TG 모바일의 사람들은 이동통신 서비스가 특정 직군만이 사용할 것으로 봤는데, 시작부터 틀렸다. 이동통신은 그냥 누구나 다 쓰는 대중적인 서비스였다. 딱히 상업적인 용도가 아니더라도 무리를 해서라도 다들 하나씩은 장만했다. 영업직에 있는 사람의 경우엔 2개 이상의 휴대폰을 쓰는 일은 흔했다.
“회장님 말씀대로라면 90년대 후반에는 우리나라의 경제인 인구는 모두 다 이동통신에 가입한다는 말이 됩니다.”
“맞아요. 제가 보기에 90년대 말쯤이면 성인들은 물론이고 학생들도 다들 하나씩 가지고 갈 거 같은데요.”
정민호 본부장이 깜짝 놀라 말했지만, 유재원 역시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실제로 90년대 말부터는 학생들도 휴대폰 하나 정도 가지고 다니는 건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심지어 IMF인 상황에서도 휴대전화 가입자는 줄지 않고, 늘어났다. 그만큼 한국이란 나라의 문화가 특이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사회인이든 학생이든 자신이 속한 집단과 떨어지는 걸 두려워하는 속성이 매우 큰 나라다. 그러니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휴대폰이 필수품이 되면서 TG모바일의 자체 조사 결과보다 훨씬 많은 가입자가 밀려들게 되는 것이다.
“만약 내년도 가입 예상자가 100만이라면 가입비는 1/5인 2만원으로 내려올 수 있겠네요. 음, 구차하게 2만원씩 받느니 아예 가입비를 없애버리는 게 좋겠는데 말이죠.”
“헉! 그건…….”
유재원의 말에 정민호 본부장이 말을 잇지 못했다.
가입자 숫자가 유재원의 말대로라면 가입비를 줄여도 된다. 아니, 없애더라도 매우 빠른 속도로 투자비를 회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천억에 달하는 수익을 포기하는 건 정민호 본부장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재원아, 그건 좀 곤란하다.”
당연히 이용권이 나서야 할 일이다.
이용권은 TG모바일뿐만이 아니라 TG그룹 운영에 있어 유재원의 의견을 적극 따라 주었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프라를 만든다고 쓴 돈이 상당해서 TG 모바일에 남은 여유자금은 이제 거의 바닥상태였던 탓이다.
커다란 마케팅 행사나 이동통신 통화영역을 전국권으로 확대하기 위해서는, 빚을 내거나 돈을 벌어서 충당해야 하는 수준이다. 물론 자금 사정이야 신세기 통신보다는 나았지만, 제3의 사업자인 선경그룹이 공격적인 마케팅을 예고한 상황에서는 빠듯했다.
서비스 요금을 받는 것도 매우 번거로운 일이었다.
자동이체라는 게 활성화되지 않은 상황인지라, 대부분 요금은 지로 용지를 발급하거나 대리점을 통한 수납이 대세였다. 수납을 대행해주는 것으로 발생하는 비용의 비중도 제법 있고, 연체자 발생 확률도 높았다.
“가입비는 가입 할 때 현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단다. 물론 이게 부담이 되는 고객도 있을 테니 첫 번째 달 요금에 포함시키거나, 3회 분납으로 낼 수 있도록 했지. 그렇지만 먼저 받을 수 있다는 게 핵심이다.”
“흠, 그렇군요.”
이용권 사장의 설명을 들은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불필요한 가입비에 대해 완전히 납득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렇게 하죠. 내년에 TG모바일에 가입자가 폭증해서 제가 말한 수치에 도달하면, 그때 가입비 항목을 폐지하는 걸로 말입니다.”
“음…….”
TG그룹의 내부 조사 자료와 유재원이 말한 수치의 괴리가 상당해서 이용권은 곧장 뭐라고 말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유재원이 뭔가를 예상해서 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유재원이 말한 내년도 가입자 수치가 사실이라면, 확실히 가입비의 의미가 퇴색된다.
이용권은 이동통신 시장에서 최소한 50% 이상의 점유율을 가져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그러면 내년도에 50만이고, 내후년에는 200만이다. 그리고 그 숫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 이들 가입자들이 매달 꼬박꼬박 현금으로 이용료를 납부한다면, 엄청난 잉여금을 축적할 수 있다.
여러 가지로 고민하는 이용권을 보는 유재원 역시나 이동통신 사업자와 인터넷 사업자 사이의 이해관계는 확실히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걸 실감했다.
여러 가지 모바일 사업을 계획 중인 유재원에겐 모바일 이용자 숫자가 많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쉽게 가입할 수 있어야 하고, 이용요금도 저렴해야 했다. 요즘 물가에 가입비가 10만 원씩 하면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매우 부담스럽지 않겠는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데이터사용료는 유재원의 주장대로 매우 저렴하게 책정되었다는 점이다. 기본 요금제를 사용하더라도 기본으로 주어지는 데이터가 100MB나 되고, 기본 데이터를 모두 소진했을 시, 1KB당 1원이라는 매우 저렴한 요금이 책정되었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1MB를 받아도 추가 요금은 1천원 밖에 나오지 않는다.
물론 지금이야 LCD화면이 없는 2G 휴대폰도 나오는 마당에, 모바일 사업은 꿈도 꿀 수 없다. 그나마 노트북이 있으면, 휴대폰으로 연결해서 이동중에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전생의 상황과 대비해보면, 그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이렇게 누구나 모바일 인터넷에 부담없이 접근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놓으면, 커다란 화면을 장착한 스마트폰이 대세가 되었을 때, 시너지 효과들이 폭발할 것이다.
여기에 덤으로 무제한 요금제라는 것도 있다. 월 6만 원이면 음성 통화와 데이터 통신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다.
다만 문자는 제외다. 문자까지 무제한으로 주면 스팸 공해를 유발할 수 있기에, 문자는 건당 30원의 요금을 받기로 했다.
“어, 음. 그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가입비 문제로 살짝 맥이 끊겼던 프레젠테이션이 다시 시작되었다.
정민호 본부장의 태도는 그야말로 신중함 자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본인은 무난하다고 생각했던 가입비 부분에서 지뢰 밟았으니, 조심해질 수밖에 없다. 다행히 가입비 말고는 딱히 유재원이 책을 잡을 부분은 없었기에, 무난하게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깜짝 놀랄 거다.”
이용권이 자신 있게 말했다.
유재원의 다음 일정은 TG그룹이 자랑하는 신공장을 견학하는 것이었다. 폭증하는 주문량을 용산의 조그만 설비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자, TG는 김포공항과 가까운 부천의 산업단지에 새로운 공장을 지었다.
부천을 선택한 이유 중에 가장 큰 요인은 김포공항과의 거리였다.
컴퓨터 제작에 필요한 주요 부품은 크기가 작고 단가는 높아서 항공편으로 조달 받는데, 공항이 옆에 있으니 즉각 수령이 가능했다. 여기에 영종도에 신공항이 들어설 것까지 예상하고 선정한 입지였기에 항공 노선에 큰 변화가 발생해도 문제없다.
또 다른 장점은 바로 자동화였다.
연간 1천만 대가 넘는 PC를 조립하는 규모인지라, 자동화 공정은 필수였다. 대만에서 반쯤 조립된 보드가 납품되면, 여기에 각 모델별로 독자적인 기능을 넣거나 빼는 방식으로 탄력적인 대응을 할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유재원이 태블릿 PC, 물리 CPU가 4개나 꽂히는 i웍스 같은 신제품을 구상할 때에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저력이 자동화 설비에 있다.
보드에 저항과 IC칩 등을 다는 것부터 티파니폰에 들어가는 마이크로보드까지 유연하게 대응할 수도 있다. 다만 완벽한 자동화는 아니었고, 공정 중간에 사람이 직접 바꿔줘야 하는 단계도 많았다.
“와, 확실히 예전의 용산 공장하고는 차원이 다르네요.”
간소한 의전이 곁들인 환용 행사를 치른 후에 공장에 입성한 유재원은 감회가 새로웠다.
몇 년 전 용산에 있던 TG컴퓨터의 조립 시설을 견학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메인보드나 CPU와 같은 것들이 통로 중간에 놓여 있었고, 전 과정이 수동이었던 용산 공장이었다. 벽에 시멘트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먼지도 많았다.
반면 지금 들어선 신공장은 마치 반도체 공장과 같았다.
백색의 공간에 외부의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차단막도 확실히 되어 있었고, 직원들도 깨끗한 유니폼에 머리카락까지 가리는 모자도 착용했다. 물론 먼지 차단의 수준이 진짜 반도체 공장 정도는 아니지만, 확실히 깨끗했다.
특히 자동화 설비가 된 파트는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반 조립된 보드를 올리면 기계 안에서 준비된 부품이 착착 장착되었고, 납땜도 자동이다. 납땜을 하는 중에 나오는 유독성 기체가 직원들의 작업 공간으로 번지지 않게 밀폐도 확실했다.
그렇게 자동화설비에서 조립된 보드는 케이스에 장착 전 전수 조사로 불량을 테스트했다. 나중에 쓰려고 봤다가 확장포트나 내장 랜이 불량이라는 걸 확인한 것처럼 짜증나는 일은 없으니 꼼꼼하게 점검했다.
그렇게 불량 테스트를 통과한 보드는 케이스와 조립되는 라인으로 보내졌다. 아쉽게도 이 부분부터는 사람이 직접 해야한다. 케이스에 보드를 부착하고 각종 커넥터를 연결하는 정교한 작업을 수행할 만큼 로봇 기술이 발전되진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작업대에서 정신없이 조립 중인 분들이 로봇과 같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셨다. 에그 1부터 뉴에그2까지, 비슷한 컴퓨터를 계속 조립하니 다들 숙련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보드와 케이스를 결합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고, 커넥터를 연결하는 속도도 빨랐다.
빠르기만 한 게 아니라 정확하고, 꼼꼼했다. 선 정리도 유재원이 정한 그대로 케이블타이를 사용해서 고정했다.
유재원은 그렇게 뉴에그2 컴퓨터 한 대가 완성되는과정까지 모두 구경했다.
흠 잡을 것 하나 없을 만큼 깔끔한 공정이다. 뉴에그2의 불량률이 다른 컴퓨터 제조사보다 훨씬 떨어지는 이유를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뜩 빠뜨린 것 한 가지가 떠올랐다.
“그런데 케이스나 모니터 같은 외장 부품은 어떻게 들여오고 관리가 되고 있거예요? 여기선 바로 조립만 하네요?”
“아, 그건 죄다 일제라서 부산에서 검수한단다.”
트리니트론 모니터와 폴리카보네이트, 알루미늄 합금을 적절히 사용해 만든 에그 시리즈의 케이스는 전량 일본에서 들여오고 있었다. 유재원이 신일본투자은행을 통해 보유 중인 일본 회사들이 공급하는 것들인데, 부피가 제법 커서 배로 들여오고 있다고 한다.
“품질 검사도 꼼꼼히 하시죠?”
“당연하지.”
“성분 검사도요?”
“성분이라니?”
유재원의 질문을 그대로 되물어 보는 이용권 사장의 물음에는, 알루미늄 합금이 네 회사에서 오는 건데, 그것까지 검사해야 하냐는 뜻이 담겨 있었다.
“꼭 하셔야 해요.”
당연히 유재원이 소유한 회사에서 나오는 건 문제 없을 것이다. 성분비를 조작해 단가를 후려치라는 지시는 절대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헌데, 순간적으로 공급량이 부족해지면 다른 철강업체의 생산품을 가져가 쓰게 될 텐데, 그러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일본 하면 사람들은 보통 장인정신이니, 신용이니 하는 걸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를 이용해 주작을 일삼으며 부당 수익을 올린 이력이 나중에 밝혀지면서 큰 문제가 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설마, 장인 정신하면 일본인데 그러겠니?”
“돈이 걸리면 하고도 남죠. 다만 어디 가서 알려주지는 말고, 우리만 열심히 검사하는 걸로 해요. 나중에 써먹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아, 알겠다.”
유재원의 장담에 이용권도 고개를 끄덕였다. 납품된 부품의 품질 분석은 늘 하던 일이었고, 여기에 하나 더 추구한다고 큰 문제될 건 없었으니 말이다.
순조롭게 신공장 사찰을 마친 유재원은 기대 이상의 품질관리와 직원 분들의 숙련도에 만족했다. i웍스와 티파니폰의 대량 생산도 여기 신공장이라면 문제없이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서울로 돌아 갈 거니? 같이 저녁이라도 먹자.”
이용권도 유재원의 확답에 안도하면서 이대로 헤어지는 걸 아쉬워했다.
“아, 이성희 의원님이랑 저녁 약속이 있어서요. 제가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에 먼저 연락을 드릴게요.”
아쉽게도 유재원에겐 선약이 있었다.
통일국민당의 이성희 국회의원과의 저녁 식사 약속이다. 국회의원이랑 만난다고 해서 뭔가 정치적인 일을 논의하는 건 아니다.
이성희 의원의 전직이 가수였고, 오늘 만나서 이야기할 것도 대중음악과 관련된 일이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