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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364화 (364/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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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 파워 블로거(6)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인터넷 사이트를 만드는 건 제법 큰일이었다.

성능 좋은 컴퓨터를 사다가 서버용 운영체제를 설치하고, 서버 프로그램을 세팅한 다음, 일일히 홈페이지를 구성해야 했다. 소프트웨어 설정도 까다로워서 전문 인력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사람이 몰리면 화면에 뜨는 속도도 느려지니 전용선까지도 설치해야 그럴듯한 홈페이지 하나를 만들 수 있었다.

전부다 큰돈이 드는 일이었다. 덕분에 인터넷 홈페이지를 운영한다는 건 개인은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간단하지.”

그런 상황을 180도 바꿔 놓은 게 ID 테크놀로지의 기술력이다.

바로 클라우드 서버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엔 서버를 임대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지만, 이제는 흔했다.

아예 무료로 호스팅을 해준다고 광고하는 임대 업체가 우후죽순 생겨나는 중이었고, 여기에 월스트리트의 투기자본이 몰리면서 무료 호스팅 용량이나 속도도 날이 갈수록 폭증하는 중이었다.

그런 업체 중에서 제일 잘 나가고 있는 게 바로 ID 테크놀로지의 클라우드 서비스였다.

북미 정보고속도로와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인터넷 서비스에서 가장 중요한 속도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용량과 가용성도 무제한적이다. 물론 공짜는 아니니 본인의 주머니 사정에 맞게 계약을 해야겠지만, 직접 서버 컴퓨터를 사고 전용선을 설치하는 것에 비해 월등히 나은 서비스를 만들 수 있다.

“음, 그러면 하루 3기가바이트 정도면 충분려나?”

유재원은 ID 클라우드 서비스 홈페이지에 접속한 유재원이 결제 화면을 보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3기가바이트라는 건 하루에 제공할 트래픽의 용량이었다.

ID 클라우드 서비스의 전송속도는 언제나 최상을 제공하기에, 트래픽 용량에 따라 가격이 결정된다. 유재원은 비록 ID 그룹 회장이지만, 회사의 서비스를 사적으로 가져다 쓸 마음은 추호도 없다.

회사의 재산을 개인적으로 가져다 쓰는 것이 바로 횡령이고, 매우 큰 불법이었다. 그렇기에 며칠 전 스위스 바젤에서 샀던 시계도 개인적 선물과 회사 직원들에게 줄 선물의 지출도 칼 같이 나눠서 결재했다.

근속자에게 줄 시계는 법인카드로, 지인들 선물용으로 산 시계는 본인의 개인 카드로 결재했다.

이번에 만드는 블로그 사이트도 일단 유재원이 개인적으로 만들어 본 다음, 네티즌들의 반응을 보고 ID 그룹으로 편입할지, 아니면 개인 사이트로 남겨둘 지 결정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그 시작도 모두 개인 자금으로 했다.

하루 3기가짜리 트래픽의 가격은 월 3천 달러. 한국 돈으로 대략 240만 원 정도 되는 가격이다. 21세기 기준으로 순식간에 바닥날 용량이 제법 비싸다. 하지만 1994년인 지금은 21세기처럼 고화질 사진이나 동영상과 같은 멀티미디어 데이터가 많이 쓰이는 시대는 아니었다.

대신 화려한 비주얼로 치장한 사이트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유재원도 이번에 만들 본인의 블로그는 비주얼 쇼크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미지를 많이 써도 모니터 자체의 해상도가 낮은 만큼, 절대적인 용량 자체는 작다.

1994년도 기준으로 비주얼이 폭발하는 페이지 하나를 구성해도 1메가바이트를 넘지 않게 만들 자신이 있다.

“3기가바이트면 일간 1만 명 정도의 접속자는 감당할 수 있겠지.”

접속자 모두가 사이트를 구석구석 돌아본다면, 1만 명은 턱도 없겠지만, 첫 페이지만 보고 나갈 사람들이 최소 반은 될 테니 문제없다.

몇 가지 생각을 마친 유재원은 곧장 하루 트래픽을 3기가바이트로 결정하고 1개월 분량을 결재했다. 만에 하나 인기가 폭발한다면 보다 높은 요금제를 사용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클라우드 서버에 본인만의 공간을 얻은 유재원은 곧장 블로그 사이트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라 그런지 몰라도 키보드 위를 달리는 유재원의 손가락은 빠르고 경쾌했다. 안드로이드 95 출시가 코앞인데 이렇게 다른 일을 해도 괜찮을까 싶지만, 유럽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본인이 할 일은 모두 끝낸 상태였다.

안드로이드 95의 핵심 기능들은 모두 완성했다. 이제 남은 건 버그를 잡고 호환성과 성능을 끌어 올리는 일이 남았다. 그나마 유재원이 관여해야 할 큰 일을 찾는다면, 보안영역을 담당할 업체를 선정하는 일이었다.

지원한 업체들이 보낸 보안용 소프트웨어를 일일이 테스트하는 건 유재원이 할 일은 아니었다. 그 일을 하는 건 다양한 환경에서 각종 실험을 해보는 개발팀에서 해야 할 일이었고, 유재원은 개발팀이 검증 후 보낸 보고서를 보고 최종 승인만 해주면 된다.

그것도 촉박한 일은 아니었다.

10월 중순, 늦으면 11월 초까지만 하면 된다. 그렇게 늦게 결정하더라도, 한국의 패키지 공장의 생산 능력이 좋아서 추수감사절 직전에 전 세계 소매점에 신제품을 쫙 도배할 수 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살인적인 무더위를 뿜어냈던 여름의 기세도 9월에 접어들면서 살짝 풀이 죽었다. 천만 다행이었다. 단순히 좀 더웠다는 뜻으로 살인적인 무더위라고 한 게 아니라, 폭염 때문에 죽는 사람들이 그 어느 해보다 많았던 8월 이었다.

그나마 유재원이 주로 머물던 레드먼드는 온도의 변화가 그다지 크지 않은 동네였기에, 무더위는 모르고 지나갔다.

또한, 덕진리에 살고 계셨던 부모님이나 친척들, 친구들도 유재원의 당부 덕에 큰 탈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유재원에겐 몇 개의 연락들이 쏟아졌다.

예전 국민학교 교장선생님과 담임 선생님 그리고 현미유 공장 사장님 등의 연락이었다. 시계 잘 받았다면서 고맙다고들 하셨다. 부담이라면서 돌려주겠다는 분들도 있었지만, 유재원은 본인이 가진 존경심에 비하면 사소한 선물이라면서 납득시켰다.

실제로 유재원의 통장계좌 잔고를 감안한다면 정말 사소한 선물이었다. 오히려 일이 바빠서 직접 전해주지 못한 게 미안했을 뿐이다.

다들 이러한 유재원의 마음을 잘 이해하셨고, 선물한 시계는 항상 차고 다닐 거라고 말씀해주셔서 유재원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덤으로 현미유 사장이었고, 지금은 부산 그룹 사장이 된 박상권으로부터는 매우 뜻밖의 소식도 전해들었다.

-재원아! 나 장가간다.

놀랍게도 박상권의 결혼 소식이었다.

“예? 사장님이 결혼이라고요? 누구랑 결혼하시는 거예요?”

-너도 아는 사람이야.

아는 사람?

잠깐 생각을 해보니장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유재원이 막 사업이랍시고 TG에 패키지를 납품하러 갈 때였다. 친구들 손을 빌려 완성한 패키지 박스를 옮길만한 차가 없었다. 그때 화물차를 빌려준 사람이 박상권이었다. 그 화물차를 운전해준 사람은 김대석이었고, 그 인연이 계속 이어지면서 결국 김대석은 유재원의 수행비서까지 할 수 있었다.

하여튼 차를 빌리러 사무실에 들렀을 때, 유재원을 귀여워 해주던 사람이 있었으니 현미유 공장에서 미스 김이라는 불리는 분이었다.

직책은 경리부장이지만, 작은 회사가 그렇듯 뭐든 다 하는 분이었다. 다들 미스 김이라고만 해서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은데, 아주 당찬 아가씨로 기억에 남았다. 회계사 자격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실전으로 익힌 능력 덕에 돈 계산 능력이 엄청나게 좋았다는 기억도 났다. 가장 강렬했던 기억은 인근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미모였다.

“미스 김이라고 했던 경리부장님이죠?”

유재원의 물음이 있은 후, 수화기 너머로 몇 초 뒤 헉 소리가 났다.

-어떻게 알았어?

박상권은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는 나름대로 철저한 선 긋기를 하면서 사귀는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산 그룹 때문에 서울로 올라가면서 둘 사이가 잠깐 멀어졌던 기간도 있었다. 그렇게 둘이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연애 소설을 썼다고 해도, 제3자인 유재원이 봤을 땐 그냥 그렇게 이어질 사이였던 것이다.

아니, 좀 늦은 것 같긴 했다.

한국서 박상권의 나이면 초등학교를 다닐 아이가 있을 연령대였으니 말이다. 다만 유재원과의 인연 덕에 가업인 부산 그룹을 얻으면서 일이 많아졌으니, 몇 년 늦춰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21세기 기준으로 보자면 엄청나게 늦게 결혼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결혼식은 언제 하세요?”

-어, 10월 8일이다.

기왕 결혼하기로 했으면 빨리 하는 게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 유재원이지만, 두 분 나름의 사정이 있을 수 있으니 충분히 이해했다.

컴퓨터에 달력을 띄워 보니 토요일이라 나온다. 더욱이 해당 날짜는 물론 앞뒤로는 별다른 스케줄도 없었다.

“다행이네요. 스케줄도 없으니 꼭 가서 축하해드리겠습니다.”

-너 바쁜 거 세상이 다 아는데, 괜찮다.

“아니에요. 이런 경사에 빠질 수 없죠. 청첩장도 꼭 보내주세요.”

-그리 생각해주니 고맙다.

훈훈했던 전화 통화를 마친 유재원은 곧장 김대석에게 ID톡을 보내 10월 8일 박상권 사장의 결혼을 스케줄에 올리라고 지시했다.

회귀 후 가장 큰 보람은 ID 그룹이 계획대로 잘 커나가는 것도 있었지만, 지인들과의 희노애락을 함께 즐기는 것도 컸다. 과거의 유재원이었다면 지인은 물론 친척들이 결혼까지도 관심에 없었지만, 이번엔 확실히 달랐다.

유재원은 곧이어 한국 넥스트컴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박상권 사장의 이름을 넣어 보았다.

결혼 이야기는 없었다.

보도 자료를 내기 전에 유재원에게 제일 먼저 연락을 주신 모양이다. 대신 부산 그룹의 동향에 대해서는 많은 기사들이 나왔다. 중공업에 진출을 타진한다는 이야기부터, 부산 건설이 부산 해운대에 고급 아파트를 지어 올린다는 것이나, 서울에 대형 쇼핑센터를 만들고 면세점도 노린다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맥주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유럽에서 맥주 시설과 기술자를 통째로 가져와서 만든 신상 생맥주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다는 기사도 있었다.

중공업과 건설 시장 진출에 대해선 좀 우려되는 부분이다. 중공업은 해외에서도 국내 업체끼리 경쟁이 붙어서 피바다가 펼쳐지는 시장이었고, 건설경기도 지금이야 파란 불이지만, 21세기에 진입하면 붉은 불이 켜지는 분야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다른 소비재 분야가 워낙 탄탄한 덕분에 회사에 잉여금이 많이 쌓였고, 덕분에 다른 기업들처럼 외화를 들여와서 펼치는 사업은 아닌 만큼,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 이건 아직도 난리야?”

박상권 사장님의 근황을 보려고 뉴스사이트에 접속했던 유재원이었는데, 잠깐 한눈을 팔자 다른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 한국에 있을 때도 본 기사인데, 주사파 파동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기사였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누가 좌파세력의 헤게모니를 가져갈 것인가에 대한 싸움이었다. 좌파 세력에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NL과 PD의 충돌이었다.

발단은 김일성 조문단이었다.

원래 역사에서 정부의 공식 조문단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유재원의 개입으로 인해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남북정상회담 성사되었고, 그 덕분에 조문단이 꾸려졌다.

조문단 대표를 전명헌이 맡았고, 유재원의 조언을 통해 각 정당에서도 거물급 정치인들과 함께 올라갔다. 그런데 조문단 구성을 그걸로 끝낸 게 아니라 시민단체의 인사들도 함께 갔는데, 여기서 문제가 촉발되었다.

남북 경제협력을 누구보다 바라는 전명헌이지만, 주체사상이 뼈속까지 박힌 자주파들을 데려갈 수는 없었다. 그러다 선택의 폭이 좁아졌고, 어쩌다 보니 PD쪽 사람들만 데려가게 된 것이다.

한국에 남게 된 NL세력은 큰 소외감을 느꼈다. 동시에 위기감도 같이 밀려왔다 왔다. 사상적 지주인 김일성 조문을 가지 못했으니 정통성에 큰 훼손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위기감에 사로잡힌 NL은 사고를 치고 말았다.

서울의 유명 대학교 안에 멋대로 김일성의 임시 조문소를 차린 것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대학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졌다. 심지어 그걸로 끝나지 않고 온갖 강경한 발언들을 쏟아냈다. 오죽하면 조문을 다녀온 PD쪽 인사들을 향해 정부의 개가 되었다느니, 정성이 부족했다느니 하는 폭언까지 나왔다.

남북평화 시대라고 해도 이건 너무 나간 발언이었다. 더욱이 한국에는 625를 겪은 세대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황이었으니 절대 두고 볼 수 없는 사안이었다.

급기야 김 대통령이 움직였다.

북한의 새로운 독재자인 김정일이 어떤 사람인지 탐색 중이어서 조심스러웠던 김 대통령도 이 사안에 대해선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기자회견을 통해 국가보안법으로 엄히 처벌하겠다고 했고, 그러자 검찰이 움직였다.

경찰에 의해 대학생들이 연행되었고, 학생회는 이를 막아서면서 폭력적 충돌이 일어났다.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좌파세력의 헤게모니 싸움은 더욱 복잡하고 뜨겁게 타오르는 중이었다.

“쯧쯧, 등 따숩고 배부르니 저런 일도 하는 거겠지.”

기사를 닫은 유재원은 혀를 찼다.

남북 관계는 지금이야 이념 논쟁이 전부 같지만, 결국엔 경제문제로 귀결되고, 이를 통해 해결되는 일이었다.

IMF가 터진 후, 혹독한 21세기가 도래해 다들 먹고 살기 팍팍해지면, 누구하나 관심을 주지 않을 일인데 죽기 살기로 싸우는 꼴이 우수웠다.

이뿐만이 아니라 국회나 김 대통령도 곱게 보이지않았다.

미국의 경우엔 이미 인터넷 관련 법들이 모두 만들어졌다. 반면 한국은 아직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미국보다 일찍 언질을 주었음에도 그대로였다.

“나중을 생각해보면 지금 저리 싸우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네.”

두 세력 중에 누가 이기든 어차피 국민들에게 단단히 찍혔다. 정치적으로는 이미 둘 다 사망한 거나 다름이 없다. 이번 주사파 파동의 후폭풍을 유재원이 가늠해 보았을 때, 가장 큰 타격은 운동권 출신들의 국회 입성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이번 일로 전보다 몇 년은 더 뒤로 미뤄질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대신 저런 막장 싸움으로 문제가 될 사람들이 미리 걸러지면, 그만큼 한국의 미래가 밝아지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사람은 망각의 속성이 있다. 특히 한국사람들은 빠르게 끓어 오르고, 빠르게 식는다. 그러니 지금 사고를 치는 사람들은 분명 몇 년 쥐죽은 듯 있다가 다시 기어 나올 게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 만큼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아귀다툼을 하는 지금의 모습들을 잘 수집해 놨다가 정치판에 기웃거릴 때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현안에 대한 대응 보다는 활활 타오르는 주사파 파동이 잘 타오르도록 장작만 던져 넣고 있는 정부 여당도 마찬가지다.

“아차! 지금 나 뭐하는 거지?”

시계를 보니 순식간에 20분은 넘게 지나 있었다. 남는 것도 없는 기사였는데, 시간은 순삭이었다.

“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집중하자!”

유재원은 각오를 다지며 한국의 뉴스 기사가 가득 띄워져 있던 웹브라우저를 종료했다.

끝이 보이면 더욱 빠르게 달려 끝장을 보는 게 유재원의 성격이었기에 집중도를 끌어올린 유재원은 미련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며칠 후.

한국과 미국의 넥스트컴에 커다란 전면 광고가 떴다. 세계 최초의 서비스형 블로그 사이트, 파워블로그닷컴의 시작을 알리는 광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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