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373화 (373/1,007)

제 495화

#358 워크래프트와 아이들(8)

유재원의 머릿속에 수많은 경우의 수들이 생겨났다.

본인이 직접 정성들여 작성해서 올린 제보글이 의도적으로 묻혔다는 것에 화가 나는 게 먼저였고, 다음으로 전명헌이 어디까지 관여되어 있는 지 따져 봐야겠다는 생각이 뒤를 따랐다.

본인이 먼저 수성대교 이야기를 꺼낸 걸 보면,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는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안전 점검단은 움직이지 않았으니, 묻어버리자는 쪽에 힘을 실어준 거 아니겠는가.

“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유재원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말을 돌리지 않고 물어 봤다.

-음, 그게 말이다.

그러자 전명헌이 짐짓 곤란하다는 투로 말을 시작했다.

전명헌은 당시 보고가 올라왔을 때, 무심코 넘겨버렸던 사안이었는데, 그게 자신이 제일 총애하는 유재원이 올린 글이었다고 하니, 이제야 당황하게 된 것이다.

이제와서 생각해 보니 인터넷 신문고 담당 비서관이 좀 이상했다. 누군가 익명을 이용해 악의적으로 동아건설을 음해한다는 식으로 구두 보고를 했던 탓이다.

담당 비서관은 수성 대교의 상판이 좀 뒤틀린 것은 단순한 노후화의 결과이지 시공의 실수나 관리 소홀은 아니었다고 했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글을 올려서 멀쩡한 건설사인 동아건설의 주가를 조작하려는 거 아니냐는 분석이었다.

“그 비서관님은 직접 현장에 다녀와 보셨데요?”

-흐음, 아마 아닐거다.

유재원의 추궁이 이어졌지만, 전명헌은 좋은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할아버지답지 않으셨네요.”

할 말 많은 유재원이지만, 하지 않았다.

때로는 말을 줄이는 게 효과적인 상황이 있었고, 지금이 바로 그 때였으니 말이다. 전명헌도 온갖 경험을 다 해봤던 사람으로서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바로 견적이 나왔을 테니 말이다.

-수성대교가 그렇게 심각한 상황이냐?

“비단 수성대교만 그러겠어요.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7, 80년대 고도성장기에 지어진 건물이나 교량 등이 얼마나 날림으로 지어졌는지 말이에요. 그래서 안전 점검단을 만들 때에도 흔쾌히 동의하신 거고요.”

-그렇지.

“그런데 수성대교는 좀 심해요. 제가 서울에 나올 때 몇 번 이용해 봤는데, 다리 상판 상태만 해도 단차가 눈으로 보일 정도거든요. 차도 엄청 덜컹거렸어요. 그래서 따로 알아봤는데, 무게를 지탱하는 하부프레임을 결속 상태도 엄청 불량이래요. 볼트가 손으로 돌리면 그냥 풀릴 정도라고요.. 제 느낌에는 바로 통행금지 시키고 정밀 진단 들어가지 않으면 몇 주 안에 큰 일 날 거 같아요.”

유재원은 괜히 터져 나오려는 화를 꾹 눌렀다.

전생에서 봤던 그 거짓말과 같은 속보가 말을 하는 도중에 막 떠올랐던 탓이다.

-세상에. 그렇게 최악이란 말이냐. 그러면 직접 말해주지 그랬느냐.

“저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그림을 그리고 싶었죠. 파리만 날리는 인터넷 신문고의 기능도 살리고요. 인터넷 신문고 제보를 받고 긴급 출동한다는 건 아직 미국도 못 보여주는 모습이잖아요. 그런데 그 비서관이라는 분은 동아건설이랑은 상관없는 사람이죠?”

유재원의 의심은 인터넷 신문고 담당관에게 향했다.

애써 만든 인터넷 신문고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 사람인 것 같다는 심중이 확 들었던 탓이다.

정보팀이 수집한 고급 정보를 담은 유재원의 게시물도 이렇게 무시하는 판에, 네티즌들이 올린 글이라고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으음, 알아보마.

유재원의 날카로운 물음에 전명헌의 답변이 초라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인터넷 신문고 담당 비서관으로 앉혀 놓은 사람은 전명헌을 미래그룹 시절 보좌했던 인물이었다. 미래그룹이 태동하던 때부터 함께 한 사람은 아니고, 10년 정도 함께 한 사람인데, 엘리트 코스만 밟아 온 명석한 녀석이었다.

전명헌이 참 똑똑하다 해서 똘똘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만큼, 일머리가 좋았다. 게다가 전명헌 주변에 제일 젊은 사람이라서 최신식 문물인 인터넷 신문고를 담당하라고 붙여준 것인데, 이렇게 뒤통수를 크게 친 것이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둘 중 하나다. 똘똘이 녀석이 동아건설의 뒤를 봐줬다는 것이 하나다. 그게 아니라면 유재원이 억하심정으로 동아건설을 매도한다는 것이니 말이다.

상식적으로 따져 봤을 때, 똘똘이 녀석에게 의문의 시선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전명헌은 그래도 순서를 아는 사람이었다.

지금 급한 건 수성대교이지, 인터넷 신문고 담당 비서관을 추궁하는 건 나중의 일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안전 점검단 설립법을 보면, 치명적인 하자가 발견된 시설물에 대해 긴급 점검을 할 수 있는 조항이 있어요. 이를 근거로 수성대교 통행을 당분간 금지하고, 초정밀 조사를 시작하면 되요. 기왕이면 기자화견 크게 여시고 시작하면 효과가 더더욱 좋겠죠.”

-수성대교면 통행량이 좀 많을 텐데, 시민들이 많이 불편하지 않겠느냐?

“안전을 위해서라면, 불편함도 좀 감수해야죠. 게다가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많을수록 임팩트는 커지는 법입니다. 총리님을 다시 보게 될 거예요. 이제껏 누가 안전을 위해서 이렇게 까지 하는 사람이 있었나요?”

-없었지.

“그러니 할아버지가 최초로 하는 거니 존재감이 딱 박히는 거죠.”

더욱이 검사 후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나오면 불편함이 불만으로 이어질 테지만, 치명적힌 결함을 미리 발견해 조치한다면 호평으로 싹 바뀔 것이다.

“다만 걱정이 되는 건 수성대교 시공사인 동아건설의 반발이네요.”

벌써부터 비서관 하나에 이렇게 입김을 넣어 무마시키는 걸 보면, 정밀조사에 들어가면 노발대발 할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유재원의 이번 제안은 동아건설 자체를 살리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잘나가던 동아건설이 건설시장에서 거의 퇴출되다시피 한 원인이 수성대교 붕괴사고가 시작이었다. 동아건설이 좋아서 붕괴사고를 막으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동아건설에도 큰 이득이 되는 조치인데, 죽기 살기로 막으려고 할 게 뻔히 보인다.

-그놈들은 내가 맡으마. 내가 이런 쪽으로는 전문아니냐?

전명헌은 덤덤한 투로 말했다.

그런 목소리가 더욱 듬직한 유재원이었다. 비록 최신 문물에는 취약하신 분이지만, 한 다면 하는 사람이 전명헌 아니겠는가.

-그리고, 비서관 일은 내가 미안하다.

뜬금없이 미안하다는 말이 이어졌다.

평소엔 얼굴 간지럽다고 그런 소리는 전혀 하지 않으시는 분이었는데, 비서관 문제가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다.

“괜찮아요. 할아버지가 잘되면 저도 좋은 거니까요.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그렇게 통화는 끝났다.

앞으로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분이지만, 수성대교의 일은 잘 해결될 것 같았다. 이제 남은 건 대회만 잘 치르면 된다.

마음 한 구석 묵직하게 남아있던 문제가 잘 풀려서 그런 것일까.

행사장에 도착한 유재원은 제법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까치PC방의 대회 준비 상태가 기대 이상이었던 것이다.

까치PC방이 입주한 건물 한쪽 면을 다 가릴 만큼 커다란 현수막은 물론이고, 입구에는 풍선으로 만든 아치조형물까지 있었다.

“우와.”

그중에서도 유재원의 눈에 딱 들어온 건 건물 한쪽면을 다 덮고 있는 현수막이었다.

현수막의 내용은 간단했다. 워크래프트의 패키지 표지에 사용된 오크와 인간의 이미지였으니 말이다. 대신 출력물의 해상도가 무척이나 높아서 대단히 임팩트가 있었다.

여기에 까치PC방배 워크래프트 대회라는 문구 그리고 1등 500만 원, 2등 300만 원, 3등 각각 100만 원이라는 금액도 확실히 들어가 있다.

원래는 1등에게만 100만 원을 주는 대회였다. PC방 업자가 스스로 만든 대회인지라 100만 원이라고 해도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그런데 그게 10배로 늘어난 건 당연히 유재원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수막에도 하단에 ID 엔터테인먼트 공인 대회라고 명시되어 있었고, 후원에도 유재원이라는 이름이 딱 박혀 있었다.

덕분에 자기가 후원금을 내고 자기가 상금을 받아가게 될 모양새였지만, 유재원은 당당한 표정이다. 1등은 본인이 침발라 놓았다고 해도 무방했지만, 전에는 없었던 2등이나 3등이 신설되었고, 이들에게 주는 상금은 이전보다 훨씬 커졌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게 전부가 아니다. ID 엔터테인먼트 공인 대회라는 단순해 보이는 문구가 시사하는 바는 상상 이상이었으니 말이다.

“저 현수막을 뽑아주는 회사가 있어요?”

홍보나 마케팅 쪽으로 아직은 많이 발달되지 않은 시점이라 저 정도 크기의 현수막을 만드는 건 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확 드는 유재원이다.

“일본에서 가져왔습니다.”

김대석은 짐짓 담담한 척 말했지만, 자신감이 가득했다.

일본에도 워크래프트가 출시했다. 그러면서 홍보용으로 사용한 대형 현수막인데, 천만 다행히 일본어는 하단에만 적혀 있어서 그걸 잘라내고 걸었다고 한다.

역시 김대석의 능력도 해가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는 게 이런 식으로 증명이 되었다. 하지만 진짜는 아직 드러나지도 않았다.

PC방 안으로 들어가니 기대 이상의 광경이 펼쳐졌다.

일단 사람부터 가득했다.

그러다가 유재원이 들어오니 와 하는 소리가 절로 터졌다. 마치 유명한 연예인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다. 이미 유재원은 한국 사람들에겐 기업인이 아니라 셀럽의 비중이 훨씬 더 커졌던 탓이다.

특히나 요즘엔 비즈니스 관련이 아닌, 필즈상을 받은 것이나 파워블로그 관련해서 뉴스에 나오는 일이 많았기에, 그냥 유명인으로 취급하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까치PC방의 모습은 유재원의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추억의 모습과 완전히 일치했다. 기다란 책상에 주루륵 놓여 있는 PC들이나, PC방 관리 프로그램 없어서 게임 아이콘들이 그대로 노출된 바탕화면은 90년대 감성을 제대로 보여줬다.

전산으로 사용 시간을 관리하는 게 없는 상황인지라, 요금 계산은 그냥 종이장부에 써서 계산하는 것도 그대로였다. 그나마 이곳은 의자에 힘을 좀 준 모양인지, 푹신한 사장님 의자였고, 컴퓨터 사이의 간격도 제법 있었다.

당연히 설치된 PC는 용산에서 업자들이 조립한 PC였다. 그나마 설치된 안드로이드나 게임들은 PC방용이라서 유재원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PC방 관리 프로그램도 만들어 볼까?’

부족한 걸 보고 자연스럽게 비즈니스적인 사고를 하는 유재원은 PC방 관리 프로그램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네트워크로 묶여진 다른 컴퓨터들을 제어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건 그다지 어려운 작업도 아니었다. 클라우드 시스템을 만들면서 생산된 라이브러리를 이용하면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완성할 수 있다. 그렇게 간단하게 만들 수 있지만, 효용은 확실한 프로그램이다.

유재원이라면 하루 정도 바싹 달리면 만들 수 있는 규모이니 용돈 벌이용으로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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