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2화
“좋겠다.”
유재원은 신나게 호텔을 나서는 블리자드와 RTCW팀 개발진을 보며 짧게 푸념했다.
제주도에 도착해서 본인이 주관한 짧은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이들은 자유 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제주도의 겨울바람은 좀 강하긴 한데, 다들 두껍게 차려 입고 자동차로 이동할 테니 바람은 큰 문제는 아니었다.
반면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은 유재원은 팔자 좋게 여행을 시작하는 저들이 참 부러웠다. 그렇다고 실무진처럼 힘든 일이 남은 건 아니라 다행이다.
물론 회사의 존망을 좌우할 선택을 앞두고 있는 것이니 다른 경영진이라면 몸으로 때우는 것보다 훨씬 큰 스트레스를 받았을 테지만, 유재원은 평범한 존재가 아니었기에 그런 스트레스는 조금도 없었다.
단지 임직원들이 열심히 준비하고 있기에, 이에 맞춰 유재원도 고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게 좀이 쑤실 정도였다. 중문 관광단지 중에 제일 큰 너비를 자랑하는 스위트룸이긴 했는데, 자기가 살던 집이 아니니 불편한 게 많았다.
“인터넷이나 좀 할까?”
유재원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호텔 측에서 기본 제공해주는 전자기기에 TV, 전화기와 함께 컴퓨터가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뉴에그2 컴퓨터로 스펙도 무척이나 좋아서, 따로 가져온 쉘북을 꺼낼 필요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모든 객실에 뉴에그2가 깔린 건 아니고, 디럭스룸 이상의 객실에만 들어가는 물품이라고 한다.
인터넷도 고속 ADSL이라서 무려 8Mbps를 자랑했다. 그런데 인터넷은 기본으로 제공되는 용량이 있고, 이 이상을 쓰면 사용한 만큼 추가 요금이 발생하는 구조였다. 속도가 빠르다고 막 썼다간 체크아웃 할 때 요금 폭탄을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긴, 호텔전화도 공짜는 아니지.”
너무하다는 생각과 함께, 그럴 수도 있다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이젠 돈 걱정은 하지 않아 도 되는 유재원이지만, 예전 소시민적인 마인드도 상존하는 상태였기에 복합적인 감정이 생기는 것 같다.
컴퓨터의 부팅이 끝나고 바탕화면이 나타났다.
설치된 응용 프로그램은 ID 오피스가 전부였다. 이것도 뉴에그2에 기본 제공되는 번들 소프트웨어니까 따로 돈 드는 프로그램은 하나도 설치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나마 운영체제나 ID 오피스 모두 렌탈 라이센스도 완벽했다.
“호오, 이런 건 완벽하네. 역시 5성 호텔이라는 건가?”
뉴에그2 컴퓨터이니 운영체제나 ID 오피스는 당연히 정품이었을 것이다. 소비자 가격에 정품 가격도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렌탈 라이센스까지 설치되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마지막 디테일까지 완벽했다.
숙소로 잡은 하얏트 호텔에 대한 유재원의 마음 속 호감도가 부쩍 상승했다.
렌탈 라이센스는 가격이 좀 세서 많이들 외면하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니 기분이 좋았다.
“여러 사람 돌려쓰는 곳에선 당연히 렌탈 버전을 써야지.”
렌탈 라이센스가 그냥 비싸기만 한 건 아니다. 렌탈 라이센스용 CD키를 설치하면, 숨겨진 기능이 활성화되는데, 바로 락(LOCK)이었다. 미리 설정한 세팅을 일반 사용자들이 바꿀 수 없게 할 수 있다. 또한, 엉뚱한 프로그램들이 설치되는 걸 차단해준다.
아무나 막 쓰는 컴퓨터는 세팅이 엉뚱하게 바뀌어 있거나, 온갖 잡다한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컴퓨터가 느려지는 경우도 종종 일어난다. 렌탈 라이센스를 설치한 후에 세팅에 락을 걸어두면, 사용자가 컴퓨터를 아무리 지저분하게 써도 리부팅 한 번으로 원래의 환경으로 돌아갈 수 있다.
소소한 발견으로 기분이 좋아진 유재원은 경쾌한 손놀림으로 웹브라우저를 실행하고 넥스트컴에 접속했다.
-김철수, 대한민국 IT의 성공 신화를 쓰다.
-킴랩, 김철수 사장. 철저한 보안 서비스로 한국의 자존심 세울 것!
역시나 가장 먼저 보이는 기사는 아직도 김철수 관련 기사였다. 굴뚝 산업에 비해 초기 자본금도 크지 않고, 사무실과 컴퓨터 그리고 빛나는 아이디어 하나면 시작할 수 있는 IT사업이었다.
이제까지는 유재원 말고 다른 성공 신화가 없어서 조금 시들한 느낌이었는데, 킴랩이 대박을 터트리면서 재조명된 것이다.
물론 킴랩의 대박에는 유재원의 선택이 있었지만, 그 선택을 받기까지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끌어올린 건 킴랩 자체의 역량이었다.
-킴랩, 안드로이드 95 발매 대비해 대규모 채용 실시 예정.
-킴랩, 주식회사로 전환. 내년 개장할 코스닥에도 상장 추진!
“흐음?”
유재원의 입에서 의문의 소리가 났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재원이 보고 싶은 기사는 이런 게 아니었던 탓이다. 원래 찾아보고 싶은 건 킴랩 직원들의 복리후생이나 이번 대박에서 성과급은 얼마나 받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쏟아지는 기사는 킴랩과 김철수의 이름만 띄워주는 기사만 가득했다.
특히 코스닥에 상장을 추진한다는 많이 실망스러운 기사였다.
아직 본격적인 비즈니스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곧장 코스닥행이라니. 만약에 킴랩의 보안 프로그램이 이후 성능 미달로 퇴출 되기라도 하면 큰일 아니겠는가.
유재원은 그럴 일이 없길 바란다. 하지만 성공의 문턱까지 다가왔던 기업들이 문턱을 넘지 못하고 쓰러졌던 경우에는 십중팔구 조직관리를 못해서였다. 특히 보안업체의 경우엔 프로그램 자체가 잘못되어 망한 경우보다 내부 유출로 인해 망하는 일이 훨씬 많았다.
조직 관리의 핵심은 성과에 대한 공정한 평가와 보상이라고 유재원은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번에 큰돈 들어온 김철수도 함께 헌신한 직원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봤는데, 그런 소식은 전혀 없고 신규 직원들을 뽑고, 코스닥에 상장을 한다고만 하니 답답했다.
‘스톡옵션이라도 주려는 건가?’
유재원의 취향은 현금이지만, 주식도 나쁘지 않다.
요즘 한국 경제의 흐름을 보면, 코스닥이 생기면 당분간은 무조건 오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재원이 단언할 수 있는 건 은행이나 기업이 푸는 돈의 양이 어마어마했던 탓이다.
시장에 굴러다니는 돈이 너무 많으니 주체를 못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까. 덕분에 아파트 가격이나 땅값은 계속 상승 중인데, 이 와중에 IT붐을 타고 코스닥이 생기면 이렇게 이리저리 몰리던 돈이 코스닥으로 막 쏟아져 들어올 게 분명했다.
“코스닥하니 새롬기술 생각나네.”
코스닥 초기의 거품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는 종목이 바로 새롬기술이었다. 액면가 5천원짜리 주식이 300만 원이 넘었을 만큼 무시무시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상승을 보여줬지만, 실체는 불분명했다. VoIP를 이용한 무료 전화 서비스가 전부였던 탓이다.
반면 킴랩은 안드로이드 사와의 계약으로 이미 수익을 올렸다. 게다가 컴퓨터와 인터넷이 널리 보급될수록 보안에 대한 수요도 꾸준히 생긴다.
새롬기술보다는 수익모델이 확실한 킴랩이 뜨는 게 바람직한 것 아니겠는가. 실제로 새롬기술의 주식은 종이조각이 되었지만, 킴랩은 그래도 꾸준히 살아남았다.
“알아서들 하겠지.”
유재원의 상념은 거기까지였다.
코스닥이 열리더라도 새롬기술은커녕 킴랩에도 투자를 할 의향은 하나도 없었으니 말이다.
똑똑.
때마침, 밖에서 노크소리가 났다. 때가 된 모양이다.
넥스트컴캐스트의 미래를 좌우할 프레젠테이션은 유재원의 스위트룸에서 이뤄졌다. 프레젠테이션의 화면으로 넥스트컴캐스트의 기업비밀이 다 쏟아져 나올 것이기에 이벤트룸에서 일반 행사처럼 치르는 건 어불성설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마냥 딱딱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한국 기업은 물론이고, 미국의 여러 IT기업들과 비교해서도 무척이나 자유로운 것이 ID 그룹의 기업 문화였다.
쉘북에 이동식 프로젝터를 연결하고 하얀 벽을 스크린 삼아서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환경을 만들었다.
청취자들을 위한 자리는 스위트룸의 의자들을 가져다가 만들었다. 유재원이 가운데 상석에 앉았고, 옆으로 최강욱 비서실장과 이현우 전략기획실장, 황재홍 사장 등등을 비롯한 임직원들이 자리했다.
이현우 전략기획실장은 최강욱보다는 젊은 30대 초반의 나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카락의 반은 하얗게 새어서 액면가로 보면 최강욱보다 나이가 들어 보였다.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해서 그렇다고 한다.
그만큼 여러 모로 경험이 많고 다방면에서 실무에 뛰어났다. 유재원이 뭔가 새로운 일을 만들면 그걸 실체적으로 실행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하는 역할이었다. 몇 달 전부터는 황재홍과 함께 제주도 관련된 일을 도맡아 처리 했는데, 드디어 오늘 그 빛을 보는 날이었다.
넥스트컴캐스트의 프레젠테이션 다음으로 예약된 발표가 황재홍과 이현우 실장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준비가 끝나자 유재원의 말에 헨리 사장이 일어나는 것으로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되었다.
“드로마이오사우르스?”
ID 로고는 하단에 작게, 넥스트컴케스트 로고는 중앙에 크게 박혀 있는 첫번째 슬라이드를 넘기자 대표적인 육식 공룡인 랩터가 나타났다. 헨리 사장은 순간 당황했다. 본인이 알고 있던 이름과는 다르게 유달리 긴 이름이 나왔으니 말이다.
“예, 랩터입니다.”
다행히 드로마이오사우르스와 랩터가 비슷한 종류라는 걸 알아차리고, 바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예, 회장님. 우리 넥스트컴캐스트가 지향해야 할 목표점은 바로 저 랩터와 같은 기민한 포식자입니다.”
랩터는 포식자이면서도 소형이었다. 덕분에 기민하고 빠르게 무리지어 움직이면서 사냥을 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는데, 헨리 사장은 이러한 모습을 넥스트컴캐스트에 그대로 이식하는 게 맞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트렌드에 맞게 넥스트컴을 바꾸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의 요구에 따라 여러 인터넷 사이트를 런칭하기 위해선 작고 날렵한 조직이 필수였다. 또한, 케이블 사업도 마찬가지다. 정보고속도로 같은 백본망이야 필수불가결하게 직접 설치하긴 했지만, 자그마한 도시까지 직접 진출하는 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가입자가 대폭 늘어나는 건 좋지만, 이를 관리할 직원들까지 늘려야 한다. 이익의 크기만큼 치러야 할 비용도 늘어나니 지금처럼 지역 케이블에 임대를 주고 꼬박꼬박 목돈을 받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헨리 사장의 생각은 저번 달에 보낸 보고서에도 담겨 있었는데, 이번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한층 정돈되고 명확한 내용으로 가다듬어져서 발표되었다.
반면 다음으로 앞에 나온 현 넥스트컴캐스트의 CFO이자 부사장인 줄리안 A. 로버츠가 나왔다. 줄리안이라는 이름은 왠지 그 이름의 주인이 마치 미소년인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마력이 있다. 하지만 지금 유재원 앞에 선 사람은 헨리 사무엘 사장의 1.5배에 달하는 덩치를 자랑했다.
CFO라는 건 최고재무책임자라는 직책으로, 컴캐스트 쪽의 자금 운용을 담당하고 있다. 구 컴캐스트의 임원들 중에 승계된 몇 안 되는 사람인데, 그만큼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증명이다.
“회장님!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돈 자루들이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기업가라면 당연히 그걸 잡아야하지 않겠습니까!”
프레젠테이션 스타일도 헨리 사장과 완전히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