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3화
짧고 간결하게 비유도 사용하면서 본인의 주장을 담은 헨리 사장과 달리 줄리안 부사장의 방식은 완전 직설적이고 마초적이었다.
“회장님께서 큰 돈 쏟아 부어 만든 백본망을 왜 지역 네트워크에 임대해줘야 하는 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속담에는 죽 쒀서 강아지 준다는 말이 있다는 데, 우리가 그런 자선단체는 아니지 않습니까? 영업망이 필요하면 그 지역 네트워크 회사를 인수하면 됩니다!”
속담의 용법이 살짝 어긋나긴 했지만, 줄리안 부사장의 주장하는 바는 명확했다.
현재의 넥스트컴캐스트의 조직망이 부실한 지역은 지역 네트워크 회사를 인수해서 진출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영업망이 대폭 확대되겠지만, 조직도 그만큼 비대해질 것이다.
헨리와 줄리안의 방식은 그렇게 판이하게 달랐다.
그렇게 둘의 프레젠테이션은 모두 끝났다. 이어 임원들의 질의도 이어졌다. 두 발표자들은 철저히 준비한 모양인지, 어떤 질문이든 막힘은 없었다.
이제는 유재원의 선택만이 남았다.
#364 선택과 집중(6)
두 명의 발표자, 그리고 자리에 앉아 있던 임원들의 시선이 유재원을 향했다.
아무리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봐야, 결국 최종 결정은 유재원이 하는 것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더욱이 유재원의 결정은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기에, 상상 그 이상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발표를 마친 넥스트컴캐스트의 사장과 부사장은 긴장감 때문에 침이 고여도 삼키지 못할 만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일단, 발표는 잘 들었어요. 두 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마침내 유재원의 입이 열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누군가 하나를 선택한 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덕분에 헨리와 줄리안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일단 몇 가지 물어볼게요.”
“예, 회장님. 뭐든 답변 드리겠습니다.”
“두 분의 발표를 들어보면 일단 집중하고 있는 것에 대한 차이가 보이거든요. 헨리 사장님은 인터넷을 중심에 놓고 큰 그림을 그리신 거고, 줄리안 부사장님은 브로드캐스트 케이블을 중심에 놓은 거죠?”
유재원의 지적에 두 사람모두 움찔했다.
헨리 사장은 과거 PC용 모뎀을 만들 때부터 데이터 통신에 대해 관심이 있던 사람이었다. 유재원이 잽싸게 스카우트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브로드컴이라는 업체를 차리고 네트워크 장비를 만들며 시스코와 경쟁하고 있었을 것이다.
줄리안 부사장도 유재원이 중간에 컴캐스트를 합병하지 않았으면 로컬 네트워크 업체는 물론, 전국망이지만 하위권에 있던 QVC같은 업체와의 합병을 한다고 열심히 뛰어 다니고 있을 사람이었다.
“저는 말이죠, 방송용 케이블과 인터넷이 융합된 시너지 효과를 보고 컴캐스트를 인수한 거예요.”
케이블 방송이 보급된 가정에 인터넷을 넣는 것도 쉽다. 셋톱박스를 디지털 방식으로 완전히 교체를 한 덕에, 방송용 신호와 인터넷 패킷도 동시에 전송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화국이나 중계 센터가 있는 지역은 고속 ADSL이 우선이고, 주변에 전화국이 없는 곳은 케이블 모뎀을 보급 중이었다.
“그리고 저는 여기에 방송국도 넣고 싶은 욕심도 있어요.”
“오오!”
유재원의 말에 작은 탄성이 여기저기서 났다. 제일 쾌재를 부르는 건 역시나 줄리안 부사장이었다. 원래 컴캐스트에서도 방송국을 소유해서 자체적인 방송콘텐츠를 유통한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데, 남의 방송 송출만 해주면 아쉽잖아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줄리안 부사장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전죽 네트워크용 방송국을 보유한다는 것은 곧 조직을 대폭 확장하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소리였으니 말이다. 줄리안 부사장은 주먹을 불끈 쥐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반면 헨리 사장은 감정의 변화를 보이진 않았다.
“줄리안 부사장님, 아직 좋아하긴 일러요.”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걸 헨리 사장은 진작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유재원은 넥스트컴캐스트를 만들면서 당연히 방송국을 소유하는 것까지도 계획하고 있었다. 앞으로 쏟아질 다양한 방송 컨텐츠 중에 무엇이 대박을 터트릴지 훤히 꿰고 있다. 그 가치는 돈으로도 따질 수 없을 정도다.
물론 유재원의 등장으로 이전과 달리 다방면에서 뭔가 흐름이 바뀌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큰 문제는 없는 수준이다.
증거는 바로 ID 엔터테인먼트의 영화 투자였다.
게이머들은 ID 엔터테인먼트를 명작만 만들어내는 개발사로 인식하고 있는데, 영화 업계에서는 마이다스의 손으로 보고 있다. ID 엔터테인먼트가 투자하는 영화는 대부분 성공이었기 때문이다.
타율은 무려 7할 이상.
열 가지 투자해서 하나만 성공해도 대박이라는 영화판에서 무시무시한 타율을 선보이는 중이었다. 덕분에 헐리우드에서는 ID 엔터테인먼트의 투자를 받았다고 하면 투자자가 더 몰리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방송 콘텐츠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만들어질 콘텐츠 중에 무엇이 잘 될지 훤히 알고 있다. 직접 만들어도 되고, 판권을 사와서 틀어주기만 해도 된다. 아예 프로덕션 자체를 인수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러한 유재원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규모의 조직력이 필수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넥스트컴캐스트가 이전 컴캐스트의 전성기 시절인 15만 명 이상의 종업원을 고용하더라도 충분히 용인할 마음이 있었다. 15만 명 모두에게 업계 최고 대우를 해줄 마음의 준비도 다 됐다.
하지만 여기엔 단서가 하나 있다.
“쉘북 좀 줘보실래요?”
유재원은 프로젝터와 연결된 쉘북을 가리켰다. 그러자 김대석이 움직이기 전에 가까이 있던 헨리 사장이 먼저 일어나 노트북을 전해줬다.
사람들의 시선은 당연히 유재원에게 꽂혔다. 뭘 하려나 싶었던 것이다. 이에 유재원은 쉘북에서 웹브라우저를 켜고, 넥스트컴캐스트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그리곤 고객의 소리 게시판으로 곧장 들어갔다.
뭘 하시려나 보고 있던 줄리안 부사장은 사색이 되었다.
“회장님, 거기는!”
이미 늦었다.
한국의 초고속인터넷은 클릭을 하자마자 바로 해당 홈페이지의 내용을 모니터에 띄워주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프로젝터와 연결되어 있으니, 쉘북의 모니터 화면은 그대로 모두가 볼 수 있는 스크린으로도 나타났다.
“AS요청한지 3일이 지났는데, 왜 연락이 없나요?”
“아랫사람 봐라. 나는 6일째인데 무한 대기 중이다. 유재원은 나가 죽어라!”
“사기꾼들! 모뎀보다 느린데, 고속 인터넷이래! ID 그룹이 인수해서 좋아질 줄 알았더니, 더 개판된 느낌이야!”
“나쁜 놈들! 나한테는 셋톱박스 공짜로 교체해준다고 해놓고, 집에 계신 연로하신 어머니한서는 돈을 받아갔어!”
유재원의 입에서 자유게시판에 올라온 글의 제목이 줄줄 읊어졌다.
그나마 순한 것들을 읽은 것이었고,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글들도 많았다. 모두가 넥스트컴캐스트의 서비스에 대해 말하는 것들이었다.
보는 것처럼 서비스의 품질은 매우 나빴다.
심지어 사기도 친 것 같다. 셋톱박스 교체는 전면 무료로 진행 중인 서비스인데, 돈을 줘야 신형으로 바꿔주는 것처럼 속여 고객을 등친 쓰레기도 있는 모양이다.
“회장님, 여기는 매우 극단적인 피드백만 올라오는 곳입니다. 넥스트컴캐스트의 서비스에 만족하는 다수는 이곳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줄리안 부사장이 다급히 변명했다.
“알아요.”
고객의 소리 게시판은 원래 불만이 많은 사람들만 접속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올라온 고객님들의 불만은 다 해결하고 있나요?”
“어, 그건……. 저는 재무 담당이라…….”
“회장님, 죄송합니다. 당장 알아보겠습니다.”
줄리안 부사장은 어설픈 변명으로 빠져 나가려고 했고, 헨리 사장은 그냥 사과부터 했다.
이렇게 불만의 글이 올라오면 해결을 빨리 해야 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넥스트컴캐스트는 그런 모습이 없다는 게 사장과 부사장의 반응에서 알 수 있다.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사람 상대하는 게 제일 어려운 법이다. 진상 고객이라도 만나면 그날 하루 기분은 최악이니 말이다. 하지만 서비스 개선의 의지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특히 넥스트컴캐스트처럼 B2C기업이라면 이보다 중요한 의지는 없다.
그런데 아직 넥스트컴캐스트에는 그런 게 없었던 모양이다.
“저는 넥스트컴캐스트가 지금보다 10배는 더 커졌으면 하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지금의 구조로 몸집만 불려 나가는 건 100% 반대에요.”
이전에 등장했던 컴캐스트가 무려 15만에 달하는 종업원 수를 자랑했음에도 북미의 대표적 블랙기업으로 선정된 건, 서비스가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과 똑같이 고객의 불만은 폭주하는데 개선의 의지는 전혀 없었다. 그러면 실망한 고객이 다른 케이블 회사로 넘어가지 않겠느냐 싶겠지만, 그런 경쟁 업체를 인수하는 방법으로 성장한 것이라 대안이라는 게 없었다.
그렇게 독점 시장을 만들어 놓고 돈만 뽑아가니 당연히 블랙기업이 될 수 밖에.
반면 유재원은 생각이 달랐다.
지금은 죽었다가 다시 돌아와서 얻은 기회였다. 당연히 세계 최고에 올라서고 싶다는 욕심이 가득하지만, 욕을 퍼먹으며 올라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고객님께는 최고의 서비스와 경험을 제공하면서 업계 최고가 되겠다는 것이 유재원의 기본적인 방침이었다.
“저는 우리 고객님께서 전화든 인터넷이든 사용해 센터에 불만을 접수하면 다음 날 해결되었으면 좋겠어요. 늦어도 3일 안에는 완벽히 끝나야 하고요.”
“세상에. 그런 서비스는 지구 상에선 불가능합니다.”
“여기 한국은 가능한데요?”
한국의 AS체계는 끝내줬다.
AS기사님들에 대한 처우는 문제가 많았지만, AS시스템 자체는 좋았다. 당연히 유재원은 직원들을 착취하는 방식의 AS센터를 운영할 생각은 없다.
“두 분 프레젠테이션 준비는 따로 하셨죠? 그러고서 이 자리에 올 때가지 이야기 한적도 없고요.”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두 분 아이디어를 잘 조합하면 좋은 그림이 나올 것 같은데요. 고객님들을 상대할 조직은 랩터처럼 기민하게 움직이는 거죠. 그러면서 M&A를 동원한 영업망 확대도 하고요.”
이렇게 확대된 넥스트컴캐스트에 화룡점정으로 방송국까지 더해지면 유재원이 생각하는 미래의 넥스트컴캐스트 모습이 딱 나온다.
그야말로 거대한 미디어 제국이다.
“저는 욕심이 많아요. 돈도 벌고 싶고, 동시에 박수도 많이 받고 싶어요. 당연히 이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은 제 자존심이 크게 상하는 일이에요.”
돈을 벌면서 대중의 박수를 받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마른 걸레에서 물 짜내듯 쥐어짜는 식으로 극한의 이윤만 노리면 문제가 되지만, 적한 수준에서 절제를 보이면 박수를 받는다는 걸 유재원은 잘 알고 있었다.
“이를 위해 투입할 자금도 의지도 충분히 있어요.”
묵묵히 제 할일을 하고 있는 ID 인베스트먼트는 조용하면서도 강력했다. 안드로이드사 상장과 함께 시작된 IT붐은 수많은 정보통신과 컴퓨터 관련 산업의 주가를 하늘 높이 쏘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