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396화 (396/1,007)

제 518화

92년 때 큰 사고를 쳤던 미래 그룹의 문제아 전재준이 드디어 한 건 했다. 문민정부 차원에서 월드컵 유치는 나름 역점 사업이었다. 이전의 노태우 정권이 올림픽의 덕을 톡톡히 보았고, 김 대통령 본인은 엑스포 덕을 좀 보았으니 말이다.

이제 남은 스포츠 빅 이벤트는 역시 월드컵이었다. 당연히 월드컵 유치를 추진했는데, 실무는 축구계 인사들이 유치전을 주도했다. 여기서 미래 그룹이 등장했다. 축구협회의 가장 큰 지원자는 미래 그룹이었고, 축구협회장은 의원직에서 짤린 전재준이 맡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 월드컵. 네 덕에 재준이도 겨우 한몫했었지.”

전재준이 제주도 유배(?)에서 풀린 건 유재원의 부탁이었다.

유재원도 김 대통령의 차남인 김영철의 부탁을 받고 말을 전해준 것인데, 김영철은 제주도에서 풀려났던 전재준을 이용해 통일 국민당을 좀 흔들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통일 국민당과의 연정도 제법 잘 굴러갔고, 전재준은 전명헌을 두려워해서 감히 당적 자체를 옮길 생각을 못했기에, 그 시도는 불발로 끝났다.

대신 제주도에서 풀려난 전재준은 유재원의 조언을 받고 월드컵 유치전을 시작했다.

방식은 간단했다. ‘축구로 이뤄지는 세계 평화’라는 캐치프라이즈를 걸고, 남북 공동 유치전을 시작한 것이었다.

당연히 남측 축구협회 혼자서 이런 소리를 한 게 아니라 오랜 침묵에서 깨어난 김정일도 이에 동의하면서 공동 유치가 구체화되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에서 축구로 평화라니. 피파에 어필하기에 이보다 강력한 카드는 없었고, 당여니 유치에 성공했다.

다만 인프라가 형편없는 북한과 조별 예선이나 토너먼트 경기를 공평하게 5:5로 나누기에는 현실적으로 부족했다. 북한에서는 평양의 능라도 경기장 하나만 사용하기로 했고, 조별 예선 일부와 결승전을 치르기로 했다.

결승전을 평양에서 치른다는 것에 일각에선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남북 화해 무드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었고, 남북 공동 유치가 깨지면 일본에 2002월드컵을 넘겨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면서 논란은 사라졌다.

“그런데 김정일이가 갑자기 마음 변하면 말짱 도루묵 아니겠느냐?”

“이제 와서 발 빼기엔 불가능할 걸요. 일단 IAEA 사찰부터 시작이니 이걸 잘 따르나 보면 되죠.”

북한에 결승전 경기를 넘겨주고 받아온 건 바로 IAEA의 영변 핵시설 사찰이었다.

95년 여름, 오랜 침묵에서 깨어난 김정일은 아버지인 김일성의 유지에 따라 한반도 비핵화를 추진해나갈 것을 천명했다. 그러면서 IAEA의 핵사찰을 수용한다고 했고, 월드컵 유치도 추진한 것이다.

“게다가 핵사찰을 잘 받으면 북한이 간절히 원했던 원자력 발전소도 생기잖아요.”

“그렇지.”

북한이 받는 건 월드컵 결승전도 있지만, 사실 그건 곁다리였고 가장 큰 선물은 역시 원자력 발전소였다. 작년 겨울 제네바에서 북한과 미국은 경수로 방식의 1기가와트급 원자력 발전소를 설치해주기로 하고 핵사찰을 성실히 받는 다는 합의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합의를 해준 미국은 경수로를 짓는 데 단 1달러도 지원하지 않았다. 그냥 허락만 해준 것이고, 실제 공사에 들어가는 자금은 한국과 일본이 부담하기로 했다. 북핵의 위기는 한국뿐만이 아니라 일본에도 크나큰 안보 위협이었기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는 건 당연했다.

다만 이전과 같이 북한이 IAEA의 핵사찰을 방해하고 거부하면 흐지부지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렇지만 이는 엄연히 상상 수준의 예측일 뿐이고, 이번엔 아예 다르게 전개될 가능성도 높다.

확실한 건 지금과 같은 남북 화해 무드라면 97년 대선에는 예전처럼 북풍을 쓰진 못할 거라는 점이다. 덕분에 97년 대선에서 전명헌이 안게 되는 리스크는 딱 하나, 고령의 나이 뿐이었다. 나이 말고는 모든 점에서 전명헌에게 우호적인 상황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그럼요. 걱정 마세요.”

유재원 역시 92년 대선은 두고두고 아쉬웠다. 이번에는 후회 없이 최고의 성과를 한 번 내보고 싶었다.

-새천년을 대비하는 ID 글로벌헤드쿼터 빌딩 개장!

-유재원 회장, 제2의 도약기 선언!

-글로벌헤드쿼터 빌딩으로 업무 효율 최대화! 계열사 간의 시너지 효과도 극대화한다.

-긴급 입수! ID 인베스트먼트 이번에도 나 홀로 비관적 전망!

-ID 그룹 새해 기조, 긴축으로 바뀌나? 협력 업체 초비상!

-역대 최대의 럭셔리함을 자랑하는 101빌딩 펜트하우스!

-재벌 회장님도 처음 본 자동차 전용 승강기, 슈퍼카 전시관까지!

-빈티지 와인 콜랙션은 물론, 유명 화가들의 역작들도 가득. 럭셔리함의 끝을 보여주는 펜트하우스.

언제나처럼 유재원은 아침에 일어나자 넥스트컴에 올라온 뉴스부터 확인했다.

“예상을 빚나가진 않네.”

101빌딩의 기사들을 보며 유재원은 중얼거렸다. 24일 개장식을 했지만, 다음 날인 25일은 휴일이었기에, 제대로 된 기사는 오늘 26일부터 나왔다.

전명헌이 말했던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어서 제법 읽을 맛이 났다. 바로 ID 인베스트먼트 리포트에 대한 기사였다. 김광일 비서실장에게 준 USB에 담긴 문서를 검토하는 데엔 최소 며칠은 걸릴 텐데, 하루 쉬고 바로 기사가 나와 버렸다.

이걸 볼 때, 아예 대놓고 세팅을 해놓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펜트하우스의 럭셔리함에 대해 장황하게 쓴 기사도 바로 뒤를 이었다.

펜트하우스까지 초대된 VIP들 사이에 당연히 기자는 없었다. 1층 로비에서 있었던 리본 커팅식이나 행사들은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지만, 펜트하우스까지는 아무나 올라올 수 없었다.

나름 기자정신이 있다고 자부하는 양반들은 억지로 밀고 들어오려고 했다는데, 시큐리티에 막혀 단 한 명도 무단 침입에 성공한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트하우스에 대한 묘사는 대단히 사실적이었다. 초대된 사람들 중에 누가 기자의 빨대 역할을 제대로 해준 모양이다.

그렇게 대비되는 기사를 연달아 띄운 것에는 의도가 있었다.

나라 경제가 어렵다고 하면서, 혼자는 사치를 부린다는 걸 부각하려는 모양새였으니 말이다. 이를 통해 ID 인베스트먼트의 리포트 신뢰도를 떨어뜨리려는 의도가 빤히 보였다.

“에휴, 이젠 나도 모르겠다.”

유재원은 컴퓨터를 껐다.

이렇게까지 해줬는데도 말귀를 못 알아먹는 사람들에겐 정말 답이 없으니 말이다. 앞으로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피해볼 평범한 이들을 위한 대책이나 마련하는 게 더 좋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유재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말이지만 아직 유재원에겐 할 일이 많았다. 특히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온 터라 면담 신청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비서실에서는 신청자들의 이름값이나 면담 내용 등을 모두 고려해 우선순위로 스케줄을 짰다.

그렇게 정리된 스케줄에 제일 먼저 이름이 올라와 있는 사람은 바로 일성 그룹 전략기획실장 이혁재였다.

“으리으리하구먼.”

차에서 내린 이혁재는 ID 글로벌헤드쿼터 빌딩을 올려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얼마나 높았으면 그냥 올려보는 것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허리와 고개를 꺾듯 올려 봐야 겨우 마천루의 끝이 보일 정도다.

“판자촌 가득했던 도곡동 땅에 이런 건물이라니.”

도곡동은 일성 그룹의 최현희도 눈여겨보고 있던 땅이었다.

일성 물산이 도곡공원 남쪽의 빈 땅에 특이한 아파트를 짓겠다고 올린 기안서가 최현희 회장까지 올라왔기 때문이다. 쇼핑몰 등의 상업 건물과 주거 지역이 결합된 복합 건물이라는 기안이었는데, 미국에는 흔하지만 한국에는 낯선 그런 형태였다.

최현희 회장도 이에 관심을 보였고, 다음 수순으로는 당연히 이혁재가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땅을 알아보는 중에 갑자기 도곡동 일대의 땅 주인이 순식간에 유재원으로 바뀌었고, ID 글로벌헤드쿼터 빌딩이라는 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혁재에게 다행인 것은 최현희 회장의 눈에는 도곡공원 남쪽 땅보다는 좀 더 밑으로 내려와 양재천과 접한 지점이 들어다는 것이다. 그 땅에는 2000년 입주 예정인 주거 상업 복합형아파트를 공사 중이었는데, 그 이름이 타워팰리스였다.

타워팰리스가 기안되었을 때는 도곡동 일대에서 우뚝 솟은 랜드마크가 될 것이며 모두의 선망을 살 거라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101빌딩 때문에 평범한 아파트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조금은 씁쓸했다.

이혁재가 보기에 파격적으로 지으려면 101빌딩처럼 해야 하는데, 일성 그룹의 사람들은 이런 파격이 많이 부족했으니 말이다.

여러 감회에 빠져 잠깐동안 ID 글로벌헤드쿼터 빌딩을 살펴본 이혁재는 로비로 향했다. 통짜 유리로 된 번쩍거리는 로비 앞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혁재 기획실장님, 방문을 환영합니다.”

“최강욱 비서실장님?”

최강욱이 로비 앞으로 나와서 이혁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이혁재의 얼굴에는 살짝 놀라움이 일었다. 최강욱이 직접 나와서 마중을 해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예, 그동안은 전화통화만 했고, 직접 뵙는 건 처음이죠?”

이혁재보다 15살은 젊은 최강욱이 먼저 인사를 했다.

“그런 거 같습니다. 이거 제가 먼저 찾아가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일이 많아서 시간을 내지 못했습니다.”

이혁재도 인사를 받으면서 명함을 꺼냈고, 서로 교환했다.

명함 교환을 하면서 이혁재의 얼굴은 조금 밝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최현희와 유재원이 틀어지게 된 계기가 본인의 무신경함에 있다는 생각이 늘 마음 한편에 부담으로 남아 있었다. 어리다고 무시했다가 지금까지 큰코다치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중차대한 임무를 가지고 유재원과의 면담을 신청했을 때에도 성사되지 못할까 걱정이 컸다.

다행히 엄청난 조건을 걸은 덕에 성사가 되었고, 날짜가 잡혀 오늘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데, ID 그룹의 2인자인 최강욱이 직접 마중을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자, 올라가시죠.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안내 부탁드립니다.”

최강욱과 이혁재는 나란히 로비를 통과했다. 그렇다고 보안 검색 절차가 생략되진 않았다. 공항에 있는 검색대 같은 걸 넘은 다음에야 펜트하우스로 직행하는 고속 엘리베이터에 탑승할 수 있었다.

그렇게 101빌딩의 최상층에 오른 이혁재는 드디어 유재원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뭐지?’

이런 반응에 본인도 놀랐다.

반백살이 한참 전에 넘은 이혁재라서 심장이 뛸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마치 젊은 시절처럼 두근거렸으니 말이다.

이혁재는 북쪽 거실로 안내했다.

북향이긴 해도 한강과 함께 서울의 전경이 다 보이는 탁 트인 시야를 가진 거실이었다.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북쪽 거실에는 통유리가 쓰였는데, 단순히 크고 두꺼운 유리가 아니라 냉난방과 안전을 위한 복합 유리가 쓰였다.

참고로 북쪽 거실이라는 말이 따로 있다는 건 유재원의 펜트하우스에는 여러 개의 거실이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요소였다. 실제로 북쪽 거실 말고도 남쪽과 동쪽, 심지어 안방에도 거실이 있다.

집이 매우 커서 이런 식으로 복수의 거실을 만들고도 공간은 남아돌았다. 그래서 북쪽 거실은 물론이고 북쪽 구역은 앞으로도 비즈니스를 위해서 쓰기로 확정해 놓았다.

“회장님, 이혁재 일성 그룹 전략기획실장이 도착했습니다.”

북쪽 거실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컴퓨터를 하고 있던 유재원은 최강욱과 나란히 걸어들어 오는 이혁재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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