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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397화 (397/1,007)

제 519화

“안녕하세요. 유재원입니다.”

적극적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일성 그룹 전략기획실장 이혁재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혁재도 유재원의 손을 잡으며 본인을 간단히 소개했다.

“진짜요?”

그런 이혁재를 보며 유재원이 짓궂게 물었다. 영광이라는 게 진심이냐는 것이다. 그러자 이혁재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눈치였다.

입에 발린 소리 잘하는 사람들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잘하는데, 이혁재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유재원을 아이돌처럼 생각하는 청소년이나 젊은 층이 영광이라고 하면 진짜일 확률이 매우 높지만, 이혁재 같은 사람은 당연히 진심이 아니었다.

유재원은 ‘진짜요?’하고 되물어보는 짧은 말 한마디로 이 자리에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하지를 마라는 경고를 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 앉으세요.”

순간 말이 막힌 이혁재를 향해 유재원은 푹신한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본인도 맞은편에 앉았다. 둘 다 똑같은 높이의 똑같은 모양이었다. 누구는 의자를 가지고 치사하게 구는 게 당연한 행태였지만, 유재원은 그렇게 유치한 짓으로 이득을 볼 생각은 없었다.

“어제부터 계속 궁금했는데, 최현희 회장님이 말한 거부하지 못할 제안이라는 게 뭔가요?”

그렇게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혁재라는 사람과는 딱히 악연은 없었다. 최현희의 퇴장과 함께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양반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앞으로 잘해보자고 친분을 다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사이도 아니었다.

“예, 그러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혁재 전략기획실장도 유재원의 말투에 적응이 된 모양인지, 곧 입을 열었다.

“유 회장님께서 보유 중인 일성 그룹 계열사들의 주식을 되찾고 싶다는 회장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되찾고 싶다? 말만 들어 보면 제가 마치 강탈이라도 한 거 같네요?”

“아닙니다. 그런 의미는 전혀 아닙니다. 당연히 유 회장님께서 만족할만한 프리미엄을 드릴 겁니다.”

일성 그룹이 유재원을 가장 껄끄러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재원은 본인이 보유한 주식의 권리를 제대로 사용하는 주주였다. 주주의 이익 극대화라는 명목으로 회계 감사도 철저히 했고, 회사 돈이 엉뚱하게 쓰이는 것도 방지했고, 배당 액수를 늘리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한국의 상장기업들은 전통적으로 배당을 적게 하는 걸로 유명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최현희 회장만 보더라도 개인이 가진 일성 그룹 지분은 5%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배당을 해봤자 배당금 중에 5%만 본인의 몫인 것이다. 게다가 여기에 배당 소득세가 크게 붙으니 액수는 더욱 줄어든다.

그렇기에 한국의 재벌들은 그냥 회사 돈을 자기들 멋대로 사용하는 걸 선호했다. 법적인 처리는 기업에서 알아서 어떻게든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재원 등장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회사 돈을 멋대로 쓰고, 허위 서류 조작으로 무마하면 그건 횡령이었다. 새끼 계열사를 만들어 일감을 몰아주면 배임이다. 그렇게 유재원의 감시망에 걸려 감옥에 간 최현의의 측근들이 벌써 10명이 넘었다.

배당에 대한 압력도 상당했다.

덕분에 96년까지 일성 그룹이 유재원에게 지급한 배당금 누적 금액은 1조 원을 훌쩍 넘었다. 일성 전자가 메모리 반도체를 팔아 돈을 많이 벌어도, 가만히 앉아 있는 유재원에게 퍼주는 것과 같은 상실감을 맛보는 최현희 회장이었다.

그걸 참다못한 최현희 회장이 결국 극단적인 선택으로 블록딜을 선택한 것 같다.

“호오, 역시 흥미가 가는 제안이네요.”

미국 IT대형주에 투자한 규모에 비하면 일성 그룹 투자는 1/20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92년 대규모 투자 이후에 일성 그룹 계열사들의 주가도 상승하긴 했는데, 미국에 비하면 고만고만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투자하면 무조건 땅과 아파트가 일 순위였으니, 기업들이 우수한 실적을 내도 주식 투자에는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기업들의 회계가 투명하지도 않았고, 배당에도 소극적이었으니 주식 투자에 대한 선호도가 낮은 게 당연했다.

단적으로 일성 전자의 주가는 92년 3만원이었고, 96년 기준으로는 6만원이었다. 그나마 요즘은 코스닥이 새롭게 출범하면서 어마어마한 상승률을 보여준 덕에 개미 투자자들이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였다.

“현재가의 100%를 드리겠습니다.”

100%?

그러면 일성 전자 기준으로 한 주 당 12만원으로 계산해서 값을 치러주겠다는 의미였다. 상당히 높은 프리미엄이었다. 앞으로 일성 전자가 12만원이 되려면 2000년대 초반은 되어야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유재원의 표정에선 아직 의문이 남아 있었다.

현재가의 100%라고 프리미엄을 계산한다면 유재원에게 줘야 할 현금은 대략 50억 달러가 넘는다. 이 돈을 최현희 회장이 어디서 만들어낼지 도통 예상을 할 수 없었다.

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호황이라고 돈이 좀 많긴 하다. 그런데 블록딜의 거래 대금으로 일성전자 돈을 쓴다고 하면 유재원이 나서서 거부할 거다. 그냥 배당으로 돌리는 게 훨씬 나으니 말이다.

“일성 전자가 사겠다면 거절합니다.”

유재원의 말에 이혁재는 다 예상했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회장님의 주식을 매입할 주체는 일성 자동차가 될 겁니다. 그리고 일성 생명보험이 이를 보증할 것이고요.”

일성 자동차와 일성 생명보험이라.

유재원은 두 회사의 이름을 듣자마자 이번 거래가 단순한 지분 확보 차원이 아니라는 걸 바로 감지했다.

일성 자동차는 바로 황태자를 위한 옥좌인 것이다.

유재원의 일성 그룹 계열사 주식의 대거 보유로 꽉 막혔던 후계 작업은 일성 자동차를 중심으로 다시 진행 중이었다.

이미 일성 자동차는 주식 교환의 방식으로 일성 생명보험이 가지고 있던 일성 그룹 계열사들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원래 일성 생명보험의 경영권은 엉뚱하게도 자연농원이란 놀이공원, 리조트 등을 보유한 회사가 가지고 있는데, 자연농원의 주인이 바로 최현희 회장이라서 이를 통해 일성 그룹 전체에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형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일성 자동차로 일성 그룹 지배권의 상당 부분이 넘어가 있었고, 여기에 유재원이 가진 일성 그룹 주식이 추가로 넘겨지게 되면, 일성 자동차의 주인이 곧 일성 그룹의 주인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

물론 아직은 유재원의 머릿속에서 이뤄진 비약이다. 하지만 이제껏 유재원의 감이 틀린 적은 없다.

“흐음, 일성 자동차가 그만한 돈이 있나요?”

“우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 일성 식구들이 해결할 문제이니 회장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혁재는 유재원의 의문에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이에 속에서 살짝 열이 올라오는 유재원이다. 일성 그룹이 가진 자본력을 마치 본인의 것인냥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걸 두고 면접관 증후군이라 하던가.

인사팀에서 면접관으로 오랫동안 일하다 보면, 본인이 마치 회사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들을 평가하고 있게 되는 걸 말한다. 유재원도 본인의 회사에서 그런 사람을 직접 보기도 했다. 2년 전쯤에 유독 팀원들의 퇴사나 이동이 잦았던 이유를 알아보니 면접관 증후군에 걸려서 팀원들을 못살게 굴었던 작자가 있었다. 겨우 팀장이었는데, 행동 거지는 마치 한국 법인의 사장과 같았다.

조사 결과를 받은 유재원은 당연히 퇴사시켰다. 그렇게 팀원들을 쮜어 짜 이뤄낸 성과가 다른 일반적인 팀에 비해 특출나게 뛰어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하여튼, 이혁재의 모습에 호감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유재원이다.

그러면 이 제안을 엎어 버리면 그만인데, 몇 개월 뒤에 찾아 올 외환 위기가 걸린다. 외환 위기 상황에서 한국의 주식 시장은 초토화된다.

지금 프리미엄을 받고 넘긴 다음에 외환 위기 때 다시 찾아오는 게 바람직한 방법 아니겠는가.

유재원은 마음을 굳혔다. 대신 좀 분위기에 익숙해졌다고 본래의 뺀질거리는 태도가 슬슬 나오는 이혁재 때문에 유재원은 조건을 추가하기로 했다.

“좋아요. 대신 대금은 미국 달러로 주세요.”

“달러 말씀이십니까?”

“ID 그룹의 주요 활동 무대는 미국이잖아요. 괜히 원화로 받아서 이중환전하는 건 불편하죠.”

“음, 알겠습니다.”

“그리고 프리미엄 100%로는 좀 부족해요.”

“네? 100%가 부족하다니요?”

“일성 전자만 생각하면 100%는 괜찮지만, 다른 계열사들이 일성전자만큼 성장한 건 아니잖아요. 일부 계열사는 더 떨어진 것도 있고요. 그러니 120%정도로 하죠?”

유재원은 20%를 더 불렀다.

일단 들어보면 작게 부른 것 같은데, 유재원이 가진 일성 그룹의 주식의 규모가 상당했기에, 20%라고 해도 수천억 원 단위였다.

이혁재는 순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 정도도 결정못할 권한을 가지고 이 자리를 찾은 건 아니시죠?”

“당연히 아닙니다. 전화로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저는 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조건이 추가된다 우리 회장님께 연락을 드려봐야 합니다.”

전권이 있다면서 전화는 또 뭔가. 그래도 못 들어줄 일은 아니었다.

“알겠어요. 그러면 대신에 전체 대금의 30% 정도는 회사채로도 받겠다고 해주세요. 일성 전자 회사채로 말이죠.”

“회사채 말씀이십니까?”

유재원의 말에 이혁재가 반색했다.

그도 그럴 것이 회사채라는 건 회사가 돈을 빌리고 나중에 갚겠다고 하는 증서였다. 시중 은행보다는 높은 금리를 제시하는데, 회사마다 신용도가 제각각이라서 국체보다는 높은 위험성을 자랑한다.

대신 증권에 직접 투자하는 것보다는 안전하다. 만에 하나 회사가 부도가 나면 증권은 종잇조각으로 변하지만, 채권은 회사가 완전히 청산될 때까지는 권리가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일성 그룹 입장에서도 당장 현금을 줘야 할 게 아니었으니, 블록딜에 대한 일성그룹의 부담이 더더욱 줄어드는 일이었다.

“물론 채권도 달러화로 발행된 걸 주셔야 합니다.”

추가 조건이 달렸지만, 논의는 급진전되었다.

이렇게 모든 조건을 확인하고 나서 이혁재는 위에 보고한다며 잠시 밖으로 나가서 전화 통화를 했다.

-어린 녀석이 조건을 까다롭게 다는구먼. 하지만 내 코가 석자니 받아야지.

최현희 회장은 유재원의 조건에 툴툴거리면서도 결국 동의했다. 한국 재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블록딜 거래가 이뤄진 것이다.

언론에 공표가 된 건 ID 그룹과 일성 그룹의 법무팀이 움직여 제대로 된 계약서가 만들어지고, 유재원과 최현희의 사인도 이뤄진 다음이었다.

그날이 97년 1월 6일이었고, 언론에서는 사상 최대 규모의 블록딜이라며 속보를 띄웠다. 동시에 ID 그룹과 일성 그룹의 협력 관계가 이번 빅딜로 더더욱 깊어질 거라고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하지만 유재원에겐 겨우 이 정도로는 빅딜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진짜로 진행되는 거대란 거래는 따로 있다.

-헤이, 친구, 결정은 했나? 설마 또 결정을 뒤로 미루는 건 아니겠지?

유재원의 휴대폰을 타고 유쾌하게 들리는 목소리. 타임워너의 부회장인 테드 터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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