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1화
#373 타임워너 넥스트컴
다음 날.
유재원은 티파니를 배웅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공항까지 따라갔다.
“이제 가면 언제 올 수 있는 거야?”
“흠, 그때 가봐야 알지. 자기도 알다시피 할아버지네 회사 분위기는 자기네랑은 완전 다르거든. 사내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면 일찍 끝낼 수 있다고 하니, 열심히 해볼게.”
티파니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짐짓 다부진 말투였지만, 티파니의 목소리에도 약간의 불안감을 숨길 수는 없었다. 한껏 애틋해진 덕분에 이 순간이 마치 애인을 군대에 보낼 때의 느낌이 나기도 했다.
아주 다른 느낌의 것도 아니었다.
작년 스탠포드 대학교를 졸업한 티파니는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잠깐 암중모색의 시간을 갖는 중이었다. 유재원이야 옆에 두고 항상 보고 싶었지만, 티파니는 본인의 진로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이 있었다.
처음에는 본인의 전공을 살려서 IT 벤처기업을 창업해보고 싶기도 했다. 특히 애인인 유재원이 IT 벤처기업에서 거대한 IT 기업으로 순식간에 성장한 것을 옆에서 지켜본 덕에 그쪽으로 마음이 강하게 쏠렸다. 그런 티파니의 진로가 순식간에 바뀐 건 그녀의 할아버지로부터 온 전화 때문이었다.
프레더릭 테일러 2세가 전화로 무슨 말을 했는지는 유재원도 모른다. 대신 프레더릭과의 전화통화 이후에 티파니의 진로에 대한 제법 길었던 고민은 끝났다.
셰브롱에 입사하는 것으로 말이다.
정확하게는 셰브롱 본사의 데이터 분석 파트에서 근무하기로 했다. 컴퓨터공학이라는 본인의 전공을 살린 것인데, 여기는 셰브롱 유전 탐사팀이 수집한 다양한 로우데이터를 컴퓨터로 분석해 유전이 있을 만한 지역을 발굴하는 부서라고 한다.
유재원으로서는 의외의 결정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었다. 셰브롱 본사는 샌프란시스코만 건너 샌 라몬에 위치해 있으니, 바로 옆 동네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의 가업에 힘을 보탠다는 모양새이기도 했으니, 나중에 상속을 받을 때에 좋게 작용할 수도 있었다.
다만 셰브롱의 상속에 대해 긍정적인 전망은 딱 거기까지였다.
유재원은 인턴쉽으로 들어간 티파니가 셰브롱 전체를 상속받는다는 건 1%도 기대하지 않았다. 티파니는 일단 장녀인 마리나의 외동딸로서 후계 순위도 한참 뒤에 있었고, 제이콥이라는 후계자도 멀쩡했다. 심지어 기억의 궁전에 저장된 뉴스라이브러리를 통해 제이콥이 셰브롱을 물려받았다는 기사도 무진장 검색할 수 있었다.
“인턴쉽 근무지는 아직도 결정이 안 된 거야?”
“응!”
“무슨 시스템이 이래?”
“외할아버지가 좀 엉뚱한 면이 있긴 해.”
단지 걱정되는 건 샌 라몬에 있는 셰브롱 본사에 정식 근무를 시작하기 전에 셰브롱 인턴쉽을 통과해야 하는데, 어디서 무슨 일을 할지는 티파니도 아직 모른다는 점이다. 심지어 인턴쉽 기간도 3개월이나 되니 꼼짝없이 생이별을 해야 할 판이다.
“할 수 있으면 ID톡은 계속 온라인 상태로 두고, 휴대폰도 항상 가지고 다녀.”
그나마 다행이라면 미국도 통신의 발달로 웬만한 지역에선 2G 이동통신 서비스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처럼 산간 지역에서도 잘 터지는 건 아니었고, 속도도 항상 최고로 유지되진 못했지만, 일단 도시 지역이라면 이동통신 서비스에 불편함은 없다.
프레더릭이 설마하니 애지중지 아끼는 티파니를 텍사스의 촌구석에 있는 유전시설 같은 곳에 인턴쉽을 수행하라고 보내진 않을 거 아닌가.
“내가 할 말이네. 자기도 잘해. 한눈팔면 알지? 응?”
티파니는 앙증맞은 왼손 주먹을 쥐어 보이며 위협했다.
연인에 대한 걱정은 비단 유재원만 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냉정하게 따지면 티파니의 근심이 더 컸다. 조건만 놓고 보면 유재원이 혼자 됐다고 하면 육탄 돌격할 사람들은 셀 수도 없이 많을 테니까.
“당연하지.”
유재원도 왼손을 들어 보이며 답했다. 두 사람의 왼손 약지에는 은색으로 반짝이는 반지가 있었다. 이번에 한국에서 맞춘 커플링이었다. 광택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평범한 은반지였지만. 담겨 있는 마음은 진짜였다.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둘은 다시 손을 잡았다. 하지만 이별의 시간은 금방 찾아왔다. 비행기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티파니는 탑승 수속을 밟아야 했던 탓이다. 유재원은 티파니가 탄 비행기가 무사히 활주로를 이륙할 때까지 배웅을 하고서 몸을 돌렸다.
“본사로 가죠.”
티파니의 배웅을 마친 유재원의 다음 일정은 당연히 본사 출근이었다.
팔랑팔랑.
이 소리는 종이 신문이 흔들거릴 때 나는 소리다. 그것도 매우 격한 손놀림으로 말이다.
“보스, 이 소식 들어 보셨습니까?”
레밍턴 사장이 ID 테크놀로지의 본사로 출근하자마자 신문을 팔랑팔랑 흔들며 호들갑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흔들면 아무리 동체 시력이 좋은 사람도 뭔지 모르겠는데요?”
“아, 여기 있습니다.”
흥분해서 신문을 흔들던 레밍턴이 유재원의 말에 신문을 넘겨줬다.
샌프란시스코 지역 신문이었는데, 1면에는 ‘빅딜’이라는 단어 하나가 타이틀로 크게 박혀 있었다.
당연히 빅딜이라는 건 유재원의 넥스트컴캐스트와 타임워너의 합병에 대한 이야기였다. 만약 승인될 경우 1천억 달러가 넘는 합병 기업이 탄생할 것이며, 방송, 영화, 출판, 신문이라는 전통의 미디어와 인터넷 1등 기업이 결합하여 전에는 없던 압도적인 지배력이 등장할 것임을 예측했다.
논조는 당연히 부정적이었다.
20세기 초, 미국에 등장했던 여러 독점 기업들이 독점의 폐해가 무엇인지 미국인들에게 뼛속까지 각인될 만큼, 화끈한 맛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네, 사실이에요. 며칠 전에 타임워너의 테드 터너 부회장이 제안을 했습니다. 저도 고민이 좀 있긴 했고, 어느 정도 견적이 나와서 저도 한 번 해보자고 했죠. 그랬더니 어제부터 기사가 쏟아지더군요.”
“헉! 세상에!”
유재원의 수긍에 레밍턴 사장이 깜짝 놀랐다.
“거기 한국에 갔던 게 약혼식 때문에 가셨던 거 아니었습니까?”
티파니의 부모님도 한국에 입국하셨던 건, 단지 101빌딩 개장식 축하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본래의 목적은 상견례와 약혼식이었고, 이는 덕진리에서 별 탈 없이 조용하게 치러졌다. 아침 공항에서 서로 확인했던 반지는 단순한 커플링이 아니라 약혼 반지였던 것이다.
언론 발표도 조만간 할 예정이었는데, 이보다 먼저 타임워너의 넥스트컴캐스트 합병 타진 소식이 지면을 장식하게 되면서 약혼 발표 타이밍이 애매해졌다.
“하여튼, 보스는 움직이기만 하면 어마어마한 일을 만드시는군요.”
레밍턴 사장은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미안해요. 제가 좀 즉흥적이긴 하죠.”
유재원은 먼저 레밍턴이나 그룹 임원들에게 언질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함을 담아 부연 설명을 했다.
“아닙니다. 그게 또 회장님만의 매력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그렇게 해서 지금껏 실패한 적도 없고요.”
레밍턴 사장은 두 손을 저으며 괜찮다는 듯 말했다.
“회장님, 사장단 전체 회의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곧이어 김대석이 회의 준비를 마쳤다는 보고를 하자 유재원과 레밍턴은 나란히 일어났다.
“다들 신문 기사를 보셔서 알고 계실 테지만, 타임워너에서 넥스트컴캐스트과의 합병을 제안했습니다. 저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긴 한데, 합병이 확정된 건 아닙니다. 합병방식에 대해선 아직 어느 것 하나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하나도 없어요. 이제 서로 가진 카드를 맞춰가야죠. 조건이 영 아니면 언제든 깨버릴 수도 있고요.”
유재원의 발언에 회의실에 참석한 이들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레밍턴이나, 화상 연결을 통해 참석하고 있는 빈센트 그린힐, 최강욱, 케빈 존슨, 황재홍 그리고 이번 일의 당사자인 헨리 사무엘 사장 모두 비슷한 표정이었다.
이러한 미묘한 표정을 앉은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새롭게 갖춰진 화상 미팅 시스템도 획기적이었다.
세 대의 고화질 프로젝터를 이용해 21:9 비율의 대형 스크린에 원격 화상 미팅으로 연결된 이들의 영상을 실물 크기로 띄웠다.
화상 미팅 프로그램도 유재원 본인이 직접 새로 설계해서 반응 속도를 최적화시켰고, 영상의 품질도 HD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보안성도 높여서 실시간으로 암호화된 데이터를 사용했기에 산업 스파이들이나 정보 조직에서 중간에 패킷을 가로채도 무슨 내용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당연히 영상을 찍어 보내는 쪽도 특별하게 세팅된 카메라와 송출 시스템을 갖추었다.
“제가 짐작한다면, 두 회사의 자산을 모두 합쳐 하나의 통합 회사를 만들고 지분을 나눠 갖는 형태가 유력합니다. 왜냐하면 타임워너에는 넥스트컴캐스트의 인수 대금을 치를 현금이 없거든요.”
유재원의 말에 사장단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넥스트컴캐스트의 자산 가치에 대해선 월스트리트에서 평가한 게 있었다. 최소 500억 달러 이상이라고 말이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인터넷에서 가장 거대한 영토를 가진 업체가 넥스트컴캐스트였고, 케이블TV에서도 무섭게 치고 오르는 중이었다.
나스닥에 오른 수많은 IT기업들이 온갖 기술들을 화려한 수사를 통해 설명하고 있었지만, 정작 수익 모델에 있어서는 물음표가 떠오르는 게 수두룩했다. 하지만 넥스트컴캐스트는 완벽한 수익 모델을 갖추고 있었다.
광대역 인터넷 가입자와 케이블TV 가입자로부터 매달 받는 사용료, 수많은 기업과 학교, 정부 조직 등에 임대해주는 전용망 사용료 등등. 매달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액수는 상당했으니 말이다.
더욱이 신규 가입자 숫자는 매년 늘어나고 있어서 주가 결정의 중요한 요소인 성장 가능성도 최고였다.
타임워너가 거대 미디어그룹이라고는 해도 이렇게나 큰돈을 만들 수는 없다. 그러니 서로의 자산을 합치고 그 비율대로, 새로운 합병 회사의 지분을 나눠 갖는 방식으로 합병이 이뤄질 공산이 크다.
-아, 그러면 서로의 자산 가치에 대한 평가가 중요해지겠군요.
헨리 사무엘 사장이 바로 핵심을 짚었다.
“맞아요.”
자산 규모에 따라 경영권도 좌우된다.
당연히 유재원이나 타임워너 측이나 각자 가진 경영권을 놓칠 생각은 전혀 없을 테니, 한쪽으로 무조건 흡수되는 형식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지분에 따라 이 사회를 구성하고, 의결을 하는 방식의 공동 경영 체제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과거 AOL과의 합병도 이와 같은 방식이었는데, 덕분에 시너지 효과가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AOL의 모뎀 기반 통신망으로는 타임워너의 콘텐츠를 유통하기가 힘들었고, 두 회사의 기업 문화도 극단적으로 달랐으니 말이다.
유재원은 AOL 타임워너라는 확실한 반면교사를 두고 있으니, 이번엔 전과 다르게 어마어마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볼 작정이었다.
그러자면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기회에 우리 주력 계열사들을 상장심사에 준하는 실사를 받아봤으면 좋겠어요.”
“주력 계열사라시면?”
레밍턴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테크놀로지, 인베스트먼트, 넥스트컴캐스트,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한국 지사 이렇게 다섯 곳이면 충분하죠.”
유재원의 말에 지목된 회사의 사장들이 움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