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권 19화
원래는 이 사면을 두고 말이 많 았다.
그런데 유재원이 최근 알아본 바 에 따르면 사면 결정은 바로 김 대 통령이 결정했다는 것이다. 유재원 이 이걸 걸고넘어진 이유는 간단했 다. 바로 다음 달 있을 대선 때문 이었다. 김 대통령이 역사바로세우 기 작업을 하면서 두 명의 전직 대 통령을 감옥에 넣자 지지율은 크게 올랐다.
그런데 한국의 모든 지역에서 그 런 건 아니다.
보수 세력의 성지와 다름이 없는 대구, 경북 지역은 오히려 지지율 이 하락했다. 삼당합당으로 만든 지지기반 중에 1/3이 떨어져 나간 것이나 다름이 없다. 김 대통령은 그 상황을 대선까지 끌고 가고 싶 지 않았다.
국난 앞에서 국민대통합을 명분 으로 삼아 두 대통령의 사면을 하 는 것이 김 대통령의 큰 그림이었 던 모양이다.
당연히 유재원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전직 대통령이 지금 그대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게, 사회 정의에도 부합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여당의 세력이 삼당합당 이전처 럼 조각나 있는 게 전명헌의 대선 가도에도 좋은 일이다.
-음, 그것은 곤란하오.
전화가 끊어진 건가 생각이 들만 큼 말이 없었던 김 대통령에게서는 역시 곤란하다는 말이 나왔다. 유 재원이 생각하는 것만큼, 김 대통 령도 계산기를 두드려보고 결정한 일이었다. 사면 결정을 파기하는 순간 대구경북의 지지는 완전히 끝 나는 것이고 정권연장의 가능성도 희박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면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
-음, 정말 방법이 없소?
유재원에게 재고를 요구하는 김 대통령이지만, 앞으로도 이 생각은 바뀔 일이 없다.
-부디 나라를 위해 다시 생각해 주시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지금 통화 를 마치는 대로 현재의 모든 데이 터를 재검토를 해보겠습니다. 대통 령님도 생각이 바뀌시면 바로 알려 주세요."
-크흠. 유 회장의 생각은 잘 알 았소.
결국 김 대통령은 화가 났음을
숨기지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말 투만 보면 후회하게 해주겠다는 말 이 나올 것도 같았는데, 그 말이 끝내 나오진 않았다.
목소리를 들으면 화가 잔뜩 난 게 다 느껴질 정도였지만, 대통령 으로서의 품위는 확실히 지키고 있 었다.
이유는 이뿐만이 아닐 것이다.
현재 쏟아지는 여론조사에서 전 명헌이 다른 후보들을 여유롭게 따 돌리면서 1위를 달리고 있는 게 분 명 큰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 다. 괜히 유재원에게 후회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가 정권이 넘어가게 되면 큰일 아니겠는가.
안타까운 점은 그렇게 개인적인 처신은 뛰어났음에도 한 나라의 경 제상황 전체를 볼만한 능력이 부족 했다는 점이다.
이 상황에서 100억 달러라면 무 슨 조건이든 다 받고도 남을 자금 이었는데, 그걸 또 정치적인 손익 을 따져 보고 있으니 말이다.
전화를 끊은 유재원의 입안에는 씁쓸한 맛만 맴돌았다.
며칠이 더 지났다.
-코스피, 코스닥 사상 최대 쌍둥 이 폭락!
-원화 환율 1달러당 1,000원 돌 파!
암울한 징조들이 쏟아졌다.
정부의 환율 개입도 이제 한계에 다다르자, 환율은 매일같이 변동 상한선을 치면서 야금야금 상승했 다. 1일 환율 변동폭이 2.25%에 불과했지만, 몇 달 사이에 꾸준히 상승하면서 드디어 1천 원 대의 벽 을 넘어섰다.
문제는 김 대통령, 아니 문민 정부의 오락가락 행태였다.
강경식 경제부총리는 미국이나 일본 등의 우방으로부터 돈을 빌려 보겠으나 여의치 않으면 IMF로 가 야한다고 김 대통령에게 설명했고, 김 대통령도 사실상 동의 했다. 바 로 다음 날 캉드쉬 IMF 총재가 극 비로 방한해서 강남 삼성동 인터콘 티넨탈 호텔에서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IMF의 구제 금융 요청을 발표해야 하는데, 같 은 날 재경원에서는 사실 무근이라 면서 부인했다.
-미쉘 캉드쉬 IMF 총재
"한국 금융시장은 동남아 국가와 같은 위기상황 아니다!"
심지어 언론에는 캉드쉬 IMF 총 재의 입을 빌려 한국의 경제상황이 탄탄하다는 걸 어필하면서도, 캉드 쉬 총재의 극비 방한을 숨겼다.
심지어 IMF와 협상 중이었던 강 경식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경제수 석을 전격 경질하고 통상산업부 장 관이었던 임창렬이라는 사람을 신 임 경제부총리 겸 재경원 장관으로 임명했다외국 자본이 한국에 투자를 꺼려 하는 이유 중 제일 큰 건 북한 문 제였지만, 그 다음이 불투명한 정 책결정이었다. 시각을 다투는 이상황에서도 경제정책 최고 라인을 전격적으로 교체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IMF를 거부하기 위해 서 사력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얼 마 전만하더라도 역대 대통령 인기 순위 1위에, 정권 연장도 기본이라 는 말이 나올 만큼 좋았는데, 불과 몇 달 사이에 이렇게나 나라 사정 이 나빠졌다는 게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김 대통령에게 더는 물 러설 자리는 없었다.
1997년 11월 21일, 김 대통령은 오전에 영야 영수회담을 전격 실시 했다. 그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 구체적인 발표는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10시 임창렬 경제 부총리가 IMF에 구제 금융을 공식 신청했음을 발표했다.
한국에 지옥의 문이 열렸다.
#375 사다리 걷어차기
-캉드쉬라는 작자, 참 웃기는 녀 석이더구나!
유재원의 휴대폰에서 전명헌 할 아버지의 분개하는 목소리가 가득 했다. 조금 전 걸려온 전화였는데, 받자마자 이런 소리셨다.
"다짜고짜 그렇게 말씀하시면, 무슨 일인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차근차근 말씀해주세요."
캉드쉬라는 이름 하나로 대충 무슨 일인지 짐작은 됐지만 일단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순서 였다.
-그러니까 말이다, 이 작자가 나 를 비롯한 대선 후보를 불러 모으 더니 백지 수표를 요구하는 거 아 니겠느냐?
아!
이어진 전명헌 할아버지의 말에 유재원은 본인의 생각이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유명한 사건이 일어났던 모양이다.
무슨 사건이냐 하면, IMF의 캉 드쉬 총재는 문민정부의 긴급 IMF 구제 금융 신청에도 바로 돈을 빌 려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는 것이었다. 만약 정권이 교체되 면 IMF와 했던 약속들이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으니, 유력한 대통령 후보들도 협정서에 사인을 해야 지 원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전생에는 김대중, 이인제, 이회창 이렇게 세 후보가 함께 사인을 했 다면, 지금은 전명헌, 이회창, 김대 중 후보 이렇게 셋이 불렸다.
보는 바와 같이 이인제 후보가 사라지고, 전명헌이 2회 차에 참전 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이인제라는 양반이 통일국민당에 입당해서 선대위원장 자리를 맡고 있기 때문 이었다. 이전보다 강대해진 통일국 민당 세력이 일으킨 변화 중 하나 였다.
여기에 최장수 총리를 역임하면 서 지지도가 한층 두터워진 전명헌 덕에 이인제 경기도지사의 지지율 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로 인해 서 이인제 경기도지사는 한나라당 경선에 출마하는 게 아니라, 통일 국민당 입당을 선택했다.
덕분에 여당인 한나라당에서는 경선 후유증 없이 후보를 선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인제와 마찬가지로 전명헌과 김대중이라는 강 력한 투톱에 밀리고 IMF사태라는 원죄가 있는 정당 출신인지라 지지 율은 좋지 못했다.
"요구 조건이 제법 가혹했던 모 양이죠?"
-가혹하고 말 것도 없이, 그냥 백지였단다. IMF의 요구에 무조건 따르라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재 미없을 줄 알라고 하더구나.
이 대목에서 유재원은 전명헌의 말을 살짝 걸러 들었다.
전보다 하얀 머리가 많아지고, 주름이 늘어난 전명헌이 말하는 것에서는 과장이 늘어났던 탓이다.
아마도 IMF는 한국을 신자유주 의의 전초기지로 만들기 위해서 여 러 가지 조치들의 이행을 강조했을 것이다.
자본시장 전면 개방부터, 환율 자율화는 기본이고 노동 자율화와 민영화까지. 한국에 필요한 건 단 기 외채를 갚을 수 있는 외화와 기 업의 체질 개선 정도였는데, 말기 암에 걸린 환자처럼 극단적인 조치 를 요구했다.
경제 주권 자체를 강탈해 가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인을 거부하셨어요?"
-내 마음 같아선 박차고 나오고 싶었는데, 그러진 못하겠더구나. IMF의 지원도 안 되면 나라가 거 덜나게 생겼다는데.
전명헌 할아버지의 푸념은 계속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명헌은 본인이 차기 대통령이 된다는 것에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문제는 나라 상황 이었다. 불과 1년 전 하더라도 경 기가 단군 이래 최고치라는 평을 들을 정도였고, 그에 따라 나라의 재정 상황도 최고였다.
그런데 지금은 폭삭 망한 것과 다름이 없는 상황을 물려받게 되었 으니 불만이 터져 나올 수 밖에 없 었다.
"그래요. 잘하셨네요. 일단 급한 불을 끈 다음에, 추가 협상을 하든, 조기 상환을 하든 IMF의 간섭을 최소화하면 되죠."
-그래. 네 말이 정답이다. 그러 면 다음에 또 전화하마.
유재원에게 실컷 하소연을 했던 전명헌 할아버지는 전화를 뚝 끊었 다. 유재원도 티파니폰을 내려놓으 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IMF의 단점은 이루 말할 수 없 을 만큼 많았다. 하지만 IMF 체재 가 완전하게 부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단적으로 한국의 모든 계층, 그 러니까 정계와 재계는 물론 전 국 민까지 지금의 상황이 나라가 부도 가 날 만큼 매우 위중한 상태라는 걸 알리고, 동의를 받을 수 있다. 21세기에 접어들면 정부의 조치는 개밥의 도토리 취급을 하는 게 재 벌들이었지만, 지금은 한마디 한마 디에 벌벌 떨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다.
이를 통해 이전 체제에서는 절대할 수 없었던 사회경제적인 대규모 의 구조 조정도 가능하게 한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여기에 100% 부합했다. 전에는 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었는데, 이번엔 제대로 살려볼 작정인 유재원이었다.
이전 생에 수십 년간 준비했던 마스터플랜은 방대하고 치밀한 계 획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 모든 계획들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 으니, 바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였 다.
유재원은 IMF 체계의 시작과 함 께 슬슬 치국의 단계에 들어섰다는 확신이 들었다.
전명헌 할아버지가 대통령이 된 다면 본격적인 개입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만에 하나 대통령 이 되지 못한다더라도 이제껏 쌓은 개인적인 역량이라면 충분히 한국 의 상황에 개입할 수 있으니 문제 없었다.
-아시아의 4마리 용, 모두 추락 하는가?
-한국도 IMF 구제 금융 신청에 IMF, 550억 달러 지원 결정!
-연방통신위원회 넥스트컴캐스트 와 타임워너 합병 승인-넥스트컴캐스트 재상장 완료. 기록적인 상승 기록!
-타임워너 주가도 동반 상승!
한국이 IMF로 전 국민이 큰 충 격에 빠졌을 때, 미국에도 그 소식 이 전해졌다. 하지만 전체로 봤을 때에는 한국의 IMF 소식의 비중은 매우 적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점까지는 한국이 그렇게 매력적 인 투자처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의 자본이 한국에 많이 들어가지 않았고, 그에 따라 그 여파는 크지 않았다.
대신 월스트리트를 뒤흔드는 빅 이벤트는 연방통신위원회의 합병승 인과 넥스트컴캐스트의 재상장이었 다.
타임워너와의 합병을 위해 차근 차근 절차를 진행 중이었는데, 가 장 큰 관문으로 여겨졌던 연방통신 위원회가 이런저런 조건을 걸지 않 고도 합병을 승인했다.
타임워너 측이나 유재원의 로비 력이 힘을 발휘한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두 거대 기업 간의 합병에 법적인 문제가 하나도 없었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가장 큰 걸림돌이 사라지면서 합병에 가속도가 붙었 다.
특히 넥스트컴캐스트가 나스닥에 재상장되면서 월스트리트의 투자자 들은 축제와 같은 분위기를 즐겼다. 얼마나 열광을 했으면, 월드컴과 MCI커뮤니케이션이라는 두 통신 회사가 MCI월드컴이라는 회사로 합병됐다는 소식이 묻힐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IT섹터의 주식들 이 대폭등을 하는 동안 군침만 홀 리고 있던 주식이 바로 넥스트컴캐 스트였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