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권 21화
한창 안드로이드 98의 취약점을 건드려 보던 유재원은 눈이 살짝 침침해지고, 온몸이 뻐근해짐을 느 꼈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어두워 져 있었고, 별들도 하나둘 반짝이 고 있었다.
"아그그그."
기지개를 켜니 척추나 팔뚝에서 우두둑하는 소리가 났다.
정신적으로는 무한한 열정이 있 는 유재원인데, 그 젊은 몸도 과로 는 버티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평소에 8시간만 일을 했던 게, 이 제 패턴화가 되면서 그 이상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자 피로가 한 층 크게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저녁 먹을 시간도 살짝 지나 있었다.
"밥 때잖아."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잠깐 쉬는 건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었다. 유재원은 일단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거기엔 요리사가 만들어 놓고 퇴근한 저녁상이 차려 져 있었다. 한식으로 큰상 하나가 차려져 있었지만, 국과 밥만 빠져 있었다.
유재원은 밥솥과 국솥에서 본인이 적당히 먹을 만큼의 밥과 국을 떠서 혼자만의 저녁 식사를 시작했 다.
그러면서 개인용 휴대폰을 들어 부재중 통화나 메시지를 확인했다.
유재원은 본인 명의의 휴대폰이 여러 대 있었다. 그리고 번호에 따 라 용도를 여러 개로 구분해 놓았 다. 업무용 휴대폰도 북미용, 한국 용이 있다. 저번에 청와대에서 전 화가 걸려왔던 휴대폰이 바로 한국 지역 업무용 휴대폰이다.
청와대나 통일국민당 의원들, 몇 몇 기자들은 유재원의 개인번호라고 알고 있을 테지만, 엄연히 업무 용이다. 당연히 각별한 사이인 소 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준 완벽한 프라이버시용 핸드폰이 있고, 지금 유재원이 꺼내는 폰이 바로 그것이 다.
다행히 문자 메시지만 좀 있고, 부재중 통화는 없었다.
이들은 요즘 유재원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따로 연락을 하지 않고 있는 듯했다. 반면 다른 번호들은 요즘 부리나케 연락이 오 는 중이었다. 너무 많아서 요즘은 아예 김대석 비서실장에게 완전히 맡겨 놓고 필터링을 해서 몇몇 연락만 받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쏟 아지는 연락들은 모두 IMF에 관한 내용이었다.
혼자만의 저녁을 모두 즐긴 유재 원은 빈 그릇을 식기 세척기에 넣 고 돌린 후, 다시 서재로 돌아왔다.
"음, 뉴스만 살짝 볼까?"
바로 업무를 시작하기엔 살짝 아 쉬움이 남았던 유재원은 안드로이 드 98에서 웹브라우저를 열었다.
지구본 모양의 웹브라우저 아이 콘을 클릭하자 한 번에 바로 넥스 트컴의 뉴스 페이지가 떴다. 이뿐 만이 아니라 한국 넥스트컴의 뉴스페이지도 떴다. 이번 98버전에 탑 재되는 웹브라우저도 대대적인 업 데이트로 추가 기능이 많이 생겼는 데, 그중 하나가 바로 탭 브라우징 이었다.
웹서핑을 하다 보면 여러 사이트 를 동시에 띄워 놓고 인터넷을 하 는 건 누구나 경험해본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러기 위해 웹브라우 저를 여러 개 띄워 놓고 했어야 했 다. 그러면 컴퓨터의 소중한 리소 스도 과도하게 소모된다. 탭 브라 우징은 그러한 낭비를 최소화하고, 화면도 깔끔하게 유지할 수 있는 좋은 기능이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고, 많은 서드 파티 업체들의 인터넷 브라우저가 나오면서 경쟁에 따라 탭 기능도 나올 줄 알았는데, 이런 발상을 하 는 업체가 없었다. 답답해진 유재 원은 이번에도 먼저 앞길을 제시했 다.
하여튼, 탭 브라우징 덕에 웹브 라우저를 실행하자마자 미국과 한 국의 뉴스페이지가 동시에 열렸고, 유재원은 당연하게도 한국의 뉴스 페이지를 먼저 보았다.
-코스닥 지수 100선 붕괴
-코스피 지수 400선 붕괴
역시나 가장 크게 보이는 건 경 제 뉴스였다. 특히 코스닥 지수 100선 붕괴라는 제목은 가장 크고 굵게 작성되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코스닥 지 수의 100선 붕괴라면 그 의미가 자 못 심각했기 때문이다. 지수 100이 라는 건 코스닥이 막 거래를 시작 했을 때보다 더 가격이 떨어졌다는 이야기였다. 거품이 꺼지다 못해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의미했다.
코스닥의 대장주식이라고 할 수 있는 킴랩이 반 토막이 났다. 안드 로이드 98의 출시가 코앞에 있다는 호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한 가를 연달아 당했다.
"부도 이야기도 여전하네."
이밖에도 한국의 뉴스 사이트는 경제가 파탄 난 나라가 어떻게 되 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고려 증권도 부도가 났고, 한라그룹과 영진약품도 부도가 났다. 그나마 좋은 소식이라면 IMF 의 1차 지원 금인 20억 달러가 입금되었다는 소 식이었다.
-정부, 자본시장 전면 개방.
-정부 환율 변동 제한폭 폐지 고 려.
소 잃고 외양간 고쳐보려는 문민 정부의 소식도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제는 너무 늦은 타이밍이었다는 점이다.
하려면 일찍 했어야지, 이제 와 서 이렇게 한다고 효과가 크지는 않았다. 오히려 타이밍을 재던 헤 지펀드에게 안방 문을 활짝 열어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헤지펀드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타이밍이 정부 가 환율 방어를 포기한 순간인데, 환율 변동 제한폭 폐지는 완벽한 항복 선언이었으니 말이다.
"흠, 이제 슬슬 개입할 타이밍이네."
유재원은 한국 시장에 들어갈 타 이밍으로 원화 환율이 1,600원 이 상으로 치솟을 때를 잡았다. 원화 환율이 폭등할 때에는 2,000원을 넘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최고점 이나 최저점을 잡으려다가 실수하 기 마련이니 일찍 개입하기로 했다.
다만 방법의 문제가 있었다.
어떤 식으로 개입하느냐에 따라 새판 짜기의 양상은 달라지니 말이 다. 유재원이 생각하는 건 두 가지 였다.
그중에 최우선적으로 고려되는
건 바로 IMF와의 직접적인 협상이 다. 무슨 말인고 하니, IMF가 한국 에 지원할 자금을 유재원이 대신 내놓고, 유재원이 IMF의 협상단이 되어 한국의 구조조정을 직접 하는 것이다.
현실성이 많이 없어 보이긴 하는 데,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IMF에 지금 돈이 없기 때문이 다. 아시아 금융 위기에 한국은 거 의 마지막에 해당했다. 유재원은 이것을 일본까지 확대할 작정이었 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한국이 마 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 말인즉슨,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먼저IMF의 구제 금융을 받았다는 이야 기다.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 돈을 빌려주다 보니 지금 한국에 지원할 자금을 만드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IMF는 550억 달러의 지원을 약 속했지만, 이제까지 들어온 건 겨 우 20억 달러였다. 당장 외채를 갚 아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갈증 해소 는커녕 목만 더 타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유재원이 100억 달러 정도를 IMF에 납입하면 캉드 쉬 총재도 분명 반색할 것이다. 물 론 그 100억 달러의 사용처를 한국긴급 구호 자금이라고 한정을 해야 할 것이고, 상환 계획도 잘 받아둬 야겠지만, IMF의 위상을 살리면서 동사이가 외환위기에 급한 불도 끌 수 있으니 말이다.
다른 한 가지는, 약간의 위험성 을 내포하고 있는 방법이었다. 바 로, ID 테크놀로지의 한국 증시 상 장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ID 테크놀로지의 위상은 말 해봐야 입이 아픈 수준이었다.
ID 오피스부터 온갖 첨단 기술, 인터넷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클 라우드 컴퓨팅은 물론 휴대폰과 컴퓨터 제조까지. ID 그룹에서 안드 로이드 사를 능가하는 사업체가 바 로 ID 테크놀로지였다.
당연히 ID 테크놀로지의 지분을 판다고 한다면 월 스트리트에서는 빚을 내더라도 사겠다는 사람이 한 가득이었다. 빈 말이 아니라 이제 까지 회사에 제안을 넣은 회사나 부자들의 숫자가 학교 운동장을 가 득 채우고도 남았다.
그런 ID 테크놀로지가 상장된다 고 하면, 돈을 싸들고 올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한국에 상장한다면 그 숫자가 조금 줄어들 긴 할 거다.
원인을 따져 본다면 북한 리스크 와 외환위기, 이 두 가지 요소의 존재감이 서로 비등비등할 것 같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상장이 실패하 진 않을 것이다. 믿을 수 있는 지 인들에게 물어 봤을 때, ID 테크놀 로지가 어디든 상장되면 투자하겠 다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ID 테크놀로지의 가치를 아무리 보수적으로 평가하더라도 안드로이 드 사보다는 비싼 가격이라는 건 확실했다. 월 스트리트에서는 대략 3, 400억 달러 정도로 평가했다. 물론 이는 자산 가치였고, 상장 후 에 각종 펀더멘털이 확인되어 주가 상승에 탄력이 붙으면 어디까지 오 를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이야기하 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ID 테크놀로지를 한국 주 식 시장에 상장하는 건 용 잡을 칼 로 닭을 잡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아무런 대가 없이 달러화 를 끌어들이는 데 있어 이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한국 증권시장에 상장된 ID 테크 놀로지의 주식을 사려면 당연히 한 국 돈이 있어야 하고, 그러면 주식 매입을 위해 다량의 달러화를 가지 고 들어와 환전할 사람들이 널렸으 니 말이다. 더욱이 한국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이를 이용해 한국에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 서는 최고의 방식이었다.
두 가지 모두 마스터플랜의 핵심 계획으로 전생에서부터 세운 정교 한 방안이었다. 그러니 실패할 거 라는 걱정은 단 한 점도 없었다.
유재원은 이러한 계획을 ID 테크 놀로지의 앨런 사장이나 레밍턴, 최강욱 두 부회장들에게 알렸고, 은밀히 준비하도록 했다. 원화 환 율이 1,600원이 되면 바로 실행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응? 이건 뭐지?"
계속해서 한국의 뉴스를 살펴보 는데 이상한 기사 하나가 눈에 들 어왔다.
-사형수 24명, 곧 형 집행 예정.
사형 집행 소식이었다.
뉴스를 클릭해보니, 김 대통령은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기로 하고, 사형 집행 명령서에 사인을 했다는 뉴스였다.
그런데 이상한 건 사형수들의 숫 자였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이번이 한국 의 마지막 사형 집행이었다. 이후에는 사형제 존폐 논란이 시작되고, EU와의 무역 규모도 커지면서 사 형 집행 명령서를 묵혀두는 방식으 로 사형제를 사문화 시켰다.
제법 존재감이 있는 이야기인지 라, 유재원은 사형 집행 숫자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23명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명이 더 추 가되어 24명이 된 것이다.
"누구지?"
유재원은 추가된 한 명의 정체가 궁금했다. 하지만 일부러 알아보려 고 하지 않아도, 그의 정체는 곧 알려졌다. 그리고 97년 대선에서 가장 큰 논란거리로 확대되었다.
심지어 미국에서 제 일만 하고 있던 유재원까지도 휩쓸린 거대한 논란이었다.
다음 날.
유재원이 알고 있던 23명의 사형 수 숫자가 갑자기 24명으로 된 이 유가 밝혀졌다.
추가된 한 명의 이름은 전직 대 통령이었던 전두환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사형 집행 명령서에 대통령 서명이 담기자, 사형은 지체 없 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여론이나 지지자들이 무슨 반응을 할 사이도 없이, 가족들의 참관도 없이 그야 말로 전광석화와 같이 사형이 집행 되었다.
-긴급 속보! 전두환 전 대통령, 사형 집행!
-파란만장한 삶, 사형으로 마감.
-사면 기대했던 민정당 출신, 큰 충격!
-김 여사 실신! 사면 논의 중에 사형 집행이라니! 김 대통령에 대 한 배신감,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IMF 관련 뉴스가 끊이지 않았던 한국의 공중파 텔레비전도 관련 소 식이 전해지자 정규 방송을 끊고 긴급 속보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전직 대통령의 사형 집행 이라는 건 너무도 파격적인 일이었 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