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권 1화
"음, 잘하시려나? 다 지인들일 텐데."
전화를 끊고 나서 유재원은 불안 감을 살짝 느꼈다.
외풍 문제가 아니라 내일 만나는 사람들은 한국 굴지의 재벌이지만, 전명헌과 개인적으로도 다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친분이 넘치다 못해 라이벌 관계도 있었고, 협력 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과연 전명헌 할아버지가 대통령 으로서의 위엄을 보여줄지 의문이 었고, 그 재벌 오너들도 대통령 전 명헌을 잘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마음 같아선 모임의 모습을 직접 구경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는 게 참 안타까웠다.
띵
-회장님, IMF측으로부터 답신이 왔습니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유재원을 현 실로 다시 데려온 것은 ID 인베스 트먼트 빈센트 그린힐 사장의 ID톡 이었다.
"그래서 뭐래요?"
유재원은 곧장 답신을 보냈다.
-우리의 제안을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한답니다. 대신 IMF의 캉드쉬 총재가 회장님을 만나 보고나서 최 종 결정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아 무래도 우리의 가용 자금의 규모나 한국의 구조조정 방안에 대해 회장 님의 의중을 들어보고 싶은 모양입 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약속을 잡아 주세요. 날짜나 장소는 언제 어디 라도 좋아요."
-예, 회장님.
빈센트 그린힐과의 ID톡도 그렇 게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다음, IMF
의 캉드쉬 총재와의 약속이 잡혔다. IMF 본부에서 보기로 했으니 워싱 턴 DC까지 날아가야 할 판이다.
이 대목에서는 살짝 마음이 상하 는 유재원이다.
본래 돈을 빌리기 위해서는 돈 있는 사람을 찾아가는 게 상식 아 니겠는가. 그러니 캉드쉬 총재가 샌프란시스코로 찾아와야 하는 게 순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묘하게도 마치 IMF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처 럼 맞춰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IMF의 캉 드쉬 총재는 유재원이 IMF의 이름 을 빌려 한국에 영향력을 확대하려한다는 의도를 파악했기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애초에 유재원은 IMF와의 협상 에 그런 의도를 숨기라고 지시하지 도 않았다. 그러니 캉드쉬 총재가 엄청난 직관력으로 이를 파악했다 고 과대평가할 필요도 없었다. 단 지 서로의 필요에 의해 협력할 뿐 이다.
IMF는 세계 경제에 제법 지분이 있는 동아시아의 외환위기를 조기 에 종결해 경제 위기가 미국이나 유럽에까지 확대되는 걸 막고, 유 재원은 IMF를 통해 한국에 보다 적극적인 개입으로 본인이 원하는 방식의 국가 대개조를 하려는 것이 니 말이다.
IMF와의 협상을 주도하고 있는 빈센트 그린힐 사장의 분석으로는 캉드쉬 총재는 한국이 보다 신자유 주의를 받아들이길 바라고 있고, 유재원도 이를 실현시켜주었으면 하는 의중이 있다고 했다.
신자유주의라니 몸서리가 쳐지는 이야기였다.
한국에 필요한 건 대규모의 차입 경영이나 정경유착, 양극화 같은 썩은 살을 도려내는 일이었는데, IMF가 요구하는 건 그런 암적인 요소는 적당히 손보고 뇌수술을 하자는 처방이었으니 말이다.
IMF가 한국에 내린 엉터리 처방 의 후유증은 유재원이 죽을 때까지 도 존재했었다. 이번만큼은 절대 그런 일이 없어야 했기에, 워싱턴 DC행을 준비하는 유재원은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지만 살짝 무거웠던 마음은 다음 날 한국에서 날아온 이야기들 로 인해 확 풀어졌다. 저번 통화로 전명헌의 의중은 확인했던 유재원 이지만, 실제로 이뤄진 행보는 상 상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저녁.
대통령 당선자 전명헌과 10대 재 벌 총수와의 접견은 서울 힐튼호텔 식당에서 이뤄졌다.
이번 접견은 매우 이색적인 자리 였다. IMF 체제였지만 10대 대기 업들의 위기감은 중소기업들에 비 하면 아직 작았던 탓이다. 시중에 돈이 마르면 기업 운영하기가 버거 운 중소기업들과 달리 대기업들은 아직 버틸만했다.
달러를 구하는 게 어려워서 문제지, 원화는 가득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유재원이 100억 달러를 한국에 들여온 덕에 외화를 구하는 데 숨통이 약간 트이기도 했다. 1달러에 2,000원에 육박하는 환율의 경우에도 수출 비중이 높은 대기업들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아 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가격 경쟁 력이 절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탈이 난다고 하더라도 공적자금이라는 도깨비 방망이 같 은 수단이 있기에 걱정이 없었다.
대마불사라는 바둑계의 용어가 괜히 재계에도 통용되는 게 아니었 다. 그렇기에 이번 자리도 대기업들이 나서서 먼저 만나달라고 해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전명헌 당선 자가 먼저 만나자고 해서 만들어진 자리였다.
"구 회장, 뭐 들은 거라도 있습 니까?"
"김 회장님은요?"
"없으니까 물어보는 거 아니겠습 니까."
둥그런 원탁에 자리한 총수들은 대부분 말이 없었지만, 일부 친분 이 있는 사람들은 실없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대호 그룹의 김의중 회장과 금성그룹의 구한일 회장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김의중은 본인보다 나이가 어린 금성의 구한일 회장에 게 편하게 말했고, 다른 이들보다 김의중 회장과 안면이 익었던 구한 일도 그나마 김의중과 대화는 가능 했다.
하여튼 각자 한국에서 한가락 하 는 사람들이고, 자체적인 정보통도 있었지만, 이번 자리가 왜 만들어 졌는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 렇지만 차기 권력으로 확정된 존재 였고, 재계에서도 존재감이 넘치는 전명헌이 부르는 데 응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그나저나 최 회장 표정이 말이 아니군."
김의중 회장이 가리킨 일성의 최 현희 회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런데 다른 사람들과 달리 최현희 회장은 이번 자리가 매우 불편한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조금은 경직되긴 해도 안색이 나쁜 건 아 니었는데, 최현희 회장은 얼굴이 완전 굳어서 펴질 줄을 몰랐다.
"그럴 수밖에요. 뭐, 우리도 사실 비슷한 처지잖아요."
구한일의 말에 김의중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사실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이 번 대선에서도 재벌 총수들은 관행 대로 선거자금에 돈을 보태주었다. 공동으로 돈을 모아서 누구 하나를 콕 찍어서 한 건 아니고, 각자 판 단에 따라 여당부터 야당까지 골고 루 돈을 돌렸다.
그렇게 나간 돈의 규모는 상상 이상으로, 기업들마다 수백억 원 단위였다. 하지만 그들의 돈을 거 부한 사람이 딱 하나 있었으니, 전 명헌이었다.
정치판에서 전명헌은 매우 특이 한 사람이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항상 돈이 부 족했고, 돈이 넘치는 기업인들에게 그 모자란 자금을 의지했다. 그리 고 당선된 다음에는 그렇게 돈을 대준 기업인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 는 것으로 보답했다.
반면 전명헌은 이미 돈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가장 돈이 많이 깨진다는 대통령 선거를 몇 번 더 치러도 아무런 타 격이 없을 만큼, 전명헌이 가진 부 의 크기는 컸다. 그렇기에 이번 선 거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저번처럼 낙선이나 했으면, 모두가 행복했을 거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고, 전명헌은 후보 딱지를 버리고 당선자 신분이 되었다.
전명헌이 총리 때 벌인 일을 생 각해보면, 그야말로 관행이나 관습 에 구애받지 않았다. 이제 대통령 이 되었으니 파격적인 것들이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최현희 회 장은 전명헌 말고 누가 당선되어도 좋으니, 누가 되든 되라고 사상 최 대의 지원을 했다. 누가 되든 전명 헌보다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전명헌에게도 선을 대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전명헌 옆에는 자타공인 가장 확실한 관계인 유재 원이 딱 붙어 있었으니 비집고 들 어갈 틈이 없었다.
"다들 오래 기다렸지요?"
그렇게 다들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전명헌이 수행원들과 함 께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약속 시 간보다 1분 빠른, 그야말로 칼 같 은 시간이었다.
"제가 여러분들을 모은 건, 신정 부 출범에 앞서 한국 경제를 선도하는 여러분들의 불안감을 해소시 켜드리고, 위기의 한국을 극복하는 데 힘써 주십사 부탁 말씀을 전하 기 위해서입니다."
자리에 앉은 전명헌은 인사를 시 작하지마자 본론으로 바로 들어갔 다.
다들 본인보다 나이가 어린 후배 들이었지만, 높임말도 쓰면서 당선 자의 품격을 그대로 살렸다. 동시 에 이런 격식을 갖추는 모습이 자 리에 앉은 10대 재벌 총수들에게도 새롭게 다가왔고, 낯설게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미래그룹 총수로 자리한 전재구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제가 약속드릴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여러분들께 비자금 따위를 달라고 징징거리는 일은 없을 거라 는 겁니다."
동시에 전명헌은 여전히 파격적 이었다.
이 자리에서 아주 대놓고 비자금 을 운운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전명헌의 아 들인 전재구도 마찬가지여서, 아주 뜨악하는 표정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저도 회사 일을 해봐서 잘 압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돈을 뜯길 때마다 얼마나 짜증 이 났는지 잘 알지요. 그리고 그렇 게 뜯긴 돈을 다시 채워 넣느라 불 법적인 일도 감행해야 했다는 사실 도 압니다. 그런 일은 우리 신정부 에서는 절대 없을 거라고 장담합니 다. 아, 혹시 신정부 관료들이 나쁜 버릇을 고치지 못할 수도 있겠군요. 그렇게 뒷돈을 요구하는 놈들이 있 거든, 언제든 망설이지 말고 신고 하세요. 아주 혼찌검을 내줄 테니 까. 알겠습니까?"
전명헌의 말에 다들 얼떨떨한 표 정으로 대답했다.
"대신 내가 여러분께 바라는 건 매우 단순합니다. 성실히 기업 활 동을 하는 겁니다. 가뜩이나 어려 운 경제 상황인 탓에 여러분이 지 게 될 무게감은 굉장할 겁니다. 그 래서 신정부도 기업인들을 위한 지 원 정책을 잔뜩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용기와 희망을 잃지 마시고 열심히 활동을 해주세요. 그렇게 해서 좋은 일자리도 많이 만들고, 세금도 확실히 내주시면 됩니다."
전명헌은 어려운 과제도 아무렇 지 않게 툭 던졌다.
IMF의 파급력은 이제 시작인데 고용과 세금이라니. 파격적인 면모 를 각오하긴 했지만,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전명헌의 말은 아직 끝 나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최현희 회장님께 나름 기대가 큽니다."
최현희 회장이 언급되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에 그에게 꽂혔다. 뭘 기대하고 있다는 건지 다들 궁금해졌다.
"최현희 회장님께서 과감하게 상 속을 준비하시는 모습에 얼마나 감 탄했는지 모릅니다. 일성이라 하면 모름지기 한국의 2위 대기업인데, 상속세가 얼마가 될지 무척이나 기 대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어려운 때에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거침없는 전명헌의 말에 순간 정 적이 흘렀다.
자리에 앉아 있던 재벌 총수들은 얼굴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했다.
상속이라는 건 재벌 총수들에게 가장 민감한 사안이었다. 이걸 잘 못 했다간 공들여 일군 기업이 와 르르 무너질 수도 있는 민감한 사 안이었다.
더욱이 상속 중에는 외부에서의 개입도 쉬워져서 헤지펀드 등의 공 격에도 취약하다. 국가적으로도 한 국 굴지의 기업들이 외국에 팔려나가는 건 좋지 않은 일이라서, 상속 에 대해선 암암리에 편의를 봐주던 경향이 있었다.
전명헌은 아주 대놓고 기존의 관 행을 깨겠다는 작심하고 선포한 것 이다.
사실 이 자리에 있는 총수들이 착각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전명헌의 본심은 최현희가 상속 을 삶아 먹든 구워 먹든 별 상관이 없었다. 관건은 바로 상속 중에 발 생하는 세금이었다.
지금 당장 전명헌에게 필요한 것 은 이번 외환위기를 넘기는 것이었고, 궁극적으로는 다시는 이런 식 의 외환위기가 오지 않도록 한국 경제의 체질 개선을 바라고 있었다. 이를 통해 경제 정책으로 성공하는 대통령이 되어 군부 출신들, 혹은 정통 정치인들의 성과를 단번에 뛰 어넘는 것이 전명헌의 큰 그림이었 다.
필요한 건 돈이었고, 돈이 나올 구석은 역시 대기업들이라는 걸 누 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전명헌이었다.
이를 위해서 전명헌은 유재원이 제시한 파격적인 구조조정 방침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사실 유 재원이 그보다 더한 방식을 내놓았더라도, 전명헌은 0K하고 받았을 것이다. 유재원에 대한 전명헌의 믿음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해 도 믿을 수 있는 수준에 다다랐던 탓이다.
하여튼 비자금 주머니 따로 찰 생각이 없으니, 세금이나 성실히 내라고 했던 발언은 완벽한 진심이 었다.
"응?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전명헌은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대신 냉정함이 가득한 시 선이 최현희 회장에게 직접 꽂혔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