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권 5화
한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예산 과 돈의 흐름을 관리하고 감독했던 재경원은 IMF를 불러온 원흉이기 도 했다.
거대한 자금을 만지는 만큼 행정 고시 합격자 중에 가장 점수가 좋 은 사람부터 순서대로 들어갔는데, 자기들끼리 엘리트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자부심을 바람직하게 쓰면 또 모르겠지만, 밀어주고 끌어준다 고 실수도 덮어주고, 비리가 나와 도 무마했다.
외환 위기가 오는 게 뻔히 보이 는 상황인데도 제대로 경고조차 하 지 못한 이유도 기득권의 카르텔이 큰 요소였다.
그렇기에 전명헌과 유재원은 재 경원이 가지고 있던 권한을 분할하 기로 하는 데 뜻을 일치했다.
국가 예산을 실행하는 부서는 재 경부로, 차기 예산을 기획하는 건 '부'보다 등급이 낮은 기획예산실 로, 감독권은 금융감독위원회로 떨 어뜨렸다.
내무부와 총무처는 통합되어 행 정자치부가 되었고, 과학기술처로 등급이 낮았던 것은 과학기술부로 승격해 장관급이 되었다.
말이 많았던 공보처는 그대로 존속하기로 했다.
원래대로라면 해체되어야 할 조 직이었지만, 국정 홍보나, 대외 홍 보는 정권 유지 차원에서 중요한 일이었다.
다만 이전까지 공보처에서 나온 작품들은 세련됨이 부족해서 문제 였기에, 외부 전문가를 수혈해서라 도 대대적인 개편을 하기로 했다.
대신 공보처가 가진 방송의 인허 가 업무의 경우엔 신설되는 정보통 신부로 이관하기로 했다. 정보통신 부에는 방송과 통신에 관한 규제 및 이용자 보호 등의 업무를 담당 하는 기능까지 했다.
일각에서는 외부 위원회를 두어 서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해야 한다 는 말도 있었지만, 전명헌은 대통 령에게 주어지는 권한을 일부러 나 눠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유재원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독 립시켜봐야 남 좋은 일만 시킨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전명헌의 의 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재미있는 점은 인사청문회라는 절차는 따로 없다는 점이다.
총리를 시작으로 각 부처 장관들 이 속속 발표됐는데, 총리직만 국 회 동의를 거쳤고, 나머지 장관들은 그냥 대통령이 임명장을 내주면 끝이었다.
인사청문회를 할 때마다 본인도 잊고 있었던 비리나 오점이 쏟아져 나와서 낙마를 하고, 그 인사를 누 가 추천했는지 따지는 게 개각 때 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인사청문회 자체가 없었다.
도무지 감추지 못할 오점이 있는 사람이라면, 언론이 폭로해서 낙마 가 되기도 했지만, 웬만하면 다 통 과였다.
그렇기에 전명헌은 본인과 뜻이 맞고 제대로 굴릴 수 있는 사람들 로 장관들을 구성했다.
덕분에 미래 그룹과 연관된 사람 들이 좀 많았다.
덕분에 청와대와 내각에 미래그 룹 비서실과 사장단을 차렸다고 침 소봉대하는 언론도 제법 있었다.
그러나 전명헌이나 유재원은 그 런 우려는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 다.
"사실 진정한 폭탄은 아직 나오 지도 않았다고."
미래 그룹 일색이라는 신임 장관 들의 출신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 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사회를 주 름잡고 있는 거대 기득권과의 싸움에서도 요긴하게 써먹을 조치를 당 연히 생각 중이었다.
-코드인사? 뭐, 이번 장관 인사 에 대해 그렇게 혹평하는 소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국민 중에도 이 의견에 동의하는 분도 제법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당연하지요. 아 무리 능력이 좋아 뽑았다고 해도, 특정 집단 출신 일색이라면 충분히 일리 있는 주장이지요. 그래서 저 는 그런 우려를 단박에 날릴 제도를 준비 중입니다. 바로 고위 공직 자 범죄 수사처라는 독립된 사정기 관을 만들 생각입니다.
모니터 속 전명헌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위 공직자 범죄 수사처, 일명 공수처에 대한 구상을 발표하 고 있었다.
유재원이 준비한 특단의 무기가 바로 공수처다.
청와대 수석들, 정부 부처 장관 들, 사법부의 검사나 판사 등등의 고위 공직자들만을 전담하는 사정 기구를 만들어 측근은 물론 사회지 도층의 비리에 단호히 대처하겠다 는 뜻을 밝혔다.
어마어마한 파급력이 있는 발표 였다.
더더욱 놀랄 일은 지금 중대 발 표 중인 전명헌이 있는 자리였다. 그곳은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컴 퓨터 모니터 속이었기 때문이다.
넥스트컴에 만들어진 대통령과의 대화 페이지에서 전명헌 대통령이 불과 같은 열변을 토하는 중이었다.
"네티즌 여러분, 저는 말입니다.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분 명히 취임식에서 국난 극복을 위해 뭉쳐야 한다고 말했고, 고통 분배 역시 여러 주체가 동등하게 나눠서 지게 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전명헌이 목소리를 높이는 곳은 구중궁궐이라 일컬어지는 청와대의 대통령 서재였다.
서재라고 하니 책이 가득해야 할 것 같은데, 지금은 일부가 치워져 있고, 그 자리를 최고급 방송 장비 들이 차지하고 있다.
보통의 방송 장비들과는 달리 색 다른 물건도 있었는데, 그것은 i웍 스 최신형 모델인 G2였다. i웍스가 나온 지도 3년은 되었기에 전체적 인 세대 교체가 있었고, 그렇게 바 뀐 모델은 G2라는 이름을 붙여주 었다.
G2의 가장 큰 특징은 멀티코어 CPU로 인텔 제온 CPU라는 전문가 용 CPU를 최대 4개나 장착할 수 있었다. 전명헌이 쓰고 있는 모델 의 경우엔 2개만 장착된 중간 등급 의 모델이었다.
컴퓨터 부품에 전문가라는 딱지 가 붙어 있으면 기본이 수백만 원 이었다. 가뜩이나 나라에 돈도 없 으니 적당한 수준의 스펙을 선택했 다.
전명헌을 찍고 있는 고성능 카메 라는 i웍스와 연결되어 있었고, i웍 스는 그렇게 입력받은 영상을 실시 간으로 인코딩해서 넥스트컴의 라이브 서버에 전송했다. 넥스트컴에 서는 청와대에서 전송한 영상을 받 아서 대한민국 전역에 중계 중이다.
지금 전명헌은 혼자서 카메라 앞 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터 넷이라는 가상의 세계를 통해 수십 만의 네티즌과 함께 만나고 있었다.
당연히 네티즌의 목소리도 전명 헌에게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수십만 명이 채팅을 치면 그야말로 난장판이고, 하나의 서버 에 그 사람들 전체를 연결할 기술 은 아직 유재원도 없어서 채널을 나눠놨고, 채널마다 관리자가 상주 해 네티즌이 올리는 채팅을 보고 괜찮다 싶은 걸 전명헌에게 전달하 는 식이었다.
때문에 전명헌의 자리에도 이를 확인할 수 있도록 책상 한편에 뉴 에그 G4가 자리하고 있었다.
뉴에그 화면에는 채팅창 하나가 크게 펼쳐져 있었는데, 폰트의 크 기도 36포인트로 지정되어서 채팅 창 관리자를 한 번 거친 네티즌들 의 채팅 문장들이 느린 속도로 떠 올랐다.
전명헌의 노안을 고려해 설정된 채팅창 설정이었다.
그야말로 철저한 준비였다.
덕분에 처음으로 인터넷판 국민 과의 대화를 진행하는 전명헌과 청 와대였지만, 사소한 오류 하나 없 이 라이브 방송을 매끄럽게 진행 중이었다.
"아, 네티즌 광천김씨 님. 이거 라이브 맞고, 저도 전명헌 맞습니 다."
전명헌도 기대 이상으로 적웅을 잘했다. 사전 리허설을 좀 많이 하 긴 했지만, 생방송에서는 무슨 사 고가 날 가능성이 매우 높았는데, 채팅창을 보고 직접 소통하기도 했 다.
광천김씨 라는 닉네임의 네티즌 은 생방송으로 하는 건지 집요하게 물었고, 전명헌의 답이 나오자 도 배가 뚝 끊겼다.
"흠흠. 하여튼, 조금 전에 말씀드 린 고위 공직자 범죄 수사처는 이 번 외환위기에 대한 정부와 사회지 도층 차원의 고통 분담이라 보시면 됩니다."
전명헌의 말이 끝나자 채팅창에 폭풍이 일어났다.
거기에는 부랴부랴 넥스트컴 계 정을 통해 접속한 기자들도 상당했 다. 기자들은 일반 네티즌과 달리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채팅을 했기 에, 관리자들의 눈에 띄어 전명헌 에게 전달되는 채팅이 제법 됐다.
그런 채팅을 본 전명헌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계속 발언을 이어 났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일각에서는 사법부에 검사와 판사가 있는데, 공수처를 왜 만드냐는 소리가 분명 히 나올 겁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 게 물어보겠습니다. 지난 정권에서 벌어졌던 사회지도층의 범죄에 대 해 사법부가 제대로 처벌을 완료한 경우가 몇 번이나 있었느냐고 말입 니다. 수백억 원에 달하는 횡령보다 슈퍼마켓에서 봉지 라면 몇 개 훔친 사람에게 떨어진 형량이 더 크다는 건 상식적인 사람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일 아니겠습니까?"
고위 공직자 범죄 수사처에 대해 서는 유재원과의 수차례 통화로 그 당위성에 대해 완벽히 이해한 상태 였다.
"높은 자리에 있고, 돈이 많은 사 람에게는 솜방망이 처벌은 어제 오 늘의 일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다 들 공감하시지요? 법이라는 게 만 민이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본인 역 시 기득권이었기에 분명히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대통령에 오른 전명헌에게 남은 마지막 목표는 성공한 대통령이었 다. 이를 위해서라면 자기 고백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외환위기의 재발을 막으려면 필 요한 건 많습니다. 경제를 살려 국 가의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외환보 유고를 높이는 거죠. 그런데 말입 니다. 외환위기를 부른 자들에 대 한 확실한 처벌이 없다면 언제고 외환위기와 같은 위기는 또 찾아옵 니다. 재발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 법은 잘못에 대해서는 일벌백계함 인데, 현재의 사법부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이미 증명이 되었습 니다."
사법부 사람들이 들으면 대단히 불쾌할 말이었지만, 전명헌은 거침 이 없었다. 성공한 대통령 다음에 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거대 권력 을 가진 이들은 이제까지 견제라는 걸 받지 않았습니다. 외환위기의 촉발 원인 중 하나인 한보 사태만 봐도 그렇습니다. 원칙적으로 따지 면 부실이 가득한 한보에는 대출이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은행의 부실도 막아 연쇄 부도 사태를 그나마 줄일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로 대출 승인이 난 겁니다."
전명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채 팅창의 반응이 쏟아졌다.
물론 전명헌이 보는 채팅창은 선 별된 채팅만 올라가는지라, 변화가 극적으로 보이지 않는데 일반 네티 즌들이 참여하는 채팅방에서는 그 야말로 뜨거운 반응이었다.
"또,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검 사나 판사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이 를 견제할 수단은 없습니다. 생각 해 보면 참 웃기는 일 아닙니까? 우리나라는 삼권분립으로 서로를 견제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까지는 견제는커녕 서로의 영역에 대해 일절 관여하지 않는 것이 관 행처럼 되었습니다. 그나마 통일국 민당 덕분에 사법 역사상 최초인 판사 탄핵이 이뤄지면서 겨우 한 번 견제가 작동한 것이죠. 그것도 일제강점기 피해자를 무시하려고 했다가 사달이 나서 일이 커지는 바람에 가능했던 것이지, 평소 같 으면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수처가 꼭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 온 것입니다."
전명헌의 논리는 완벽했다.
다만 그렇게 만들어질 공수처의 구성이나 수장의 임명권에 대해서 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점 에 대해서는 국회에서 치열한 토론 이 있을 예정이었기에, 지금 언급 할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 다."
할 말을 다한 전명헌은 종료를 알렸다. 그러자 채팅창에서는 더해 달라는 말이 쏟아졌다.
"당연흐], 이런 만남은 일회성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국민께 알려드 릴 일이 있으면 언제든 방송을 켜 서 직접 소통하겠습니다. 아, 다음 방송에서는 부동산 대책과 그리고 언론 문제에 대해 다뤄볼 생각입니 다."
다음을 기약하면서 전명헌은 첫 번째 국민과의 대화 방송을 마쳤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