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권 15화
일간지 신문에는 실리지 않았지 만, 가십성 이야기가 잔뜩 올라오 는 월간지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그러면서 기사를 쓴 기자의 이름은 밝히지 않은 익명의 기사였다.
익명의 기사였고, 신빙성 떨어지 는 월간지에 실렸지만, 안에 담긴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아주 이름까지 대놓고 언급되었다. 김경 자라는 여자와 외도를 했고 김현주 라는 장성한 딸이 있다고 말이다. 전명헌은 김현주라는 딸도 본인의 호적에 올리려 했지만, 가족들의 반대도 있고 후계 구도 문제도 있 어서 불발로 끝났다고 한다.
기사의 마지막에는 미래가의 속 사정에 대해 더욱 자세한 정보를 담은 후속 보도도 준비 중이니 기 대하라는 식으로 기사가 끝났다.
스캔들 기사가 터진 시점은 참으 로 공교로웠다.
김오중의 귀국을 종용하기 위해 인터폴 수배가 고려 중이라는 소식 이 뜬 다음이었다. 마치 김오중이 자신을 더 궁지에 몰아넣으면 폭로 를 이어가겠다는 협박의 시그널로 도 해석할 수 있었다.
신기한 점은 그렇게 충격적인 폭 로가 터져 나왔음에도, 전명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명헌이 혈기 왕성하던 시절에 는 거칠 게 없었다. 절약이 뼛속까 지 베인 전명헌은 사치하는 건 자 신은 물론 식구들, 심지어 회사 직 원들에게까지 금지시켰다. 하지만 여자 문제에서는 카사노바 부럽지 않게 방탕했다. 그렇다고 책임을 지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방탕한 생활로 생긴 혼외 자식들도 웬만하면 본인의 호적에 다 넣어줬다. 단적으로 2남 전재구, 4남 전재근, 막내인 전재준 모두 배다른 자식이었다. 다른 재벌 가 문들보다 형제들 사이가 유독 서먹한 것에는 이런 이유가 절대적이었 다.
신기한 건 국민들의 반응이었다.
국민들은 전명헌의 혼외자 스캔 들이 터졌다고 해서 지지를 철회하 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게 무슨 문 제냐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마 치 경제만 살리면 뭐든 용서해줄 수 있다는 그런 이상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더욱이 전명헌의 스캔들 이야기 는 바다 건너에서 넘어온 특종으로 인해 깔끔하게 묻혀버렸다.
-ID 그룹, 유재원 회장. 회생 전
문 백호펀드 창설
-백호펀드, 운영자금 230억 달러 규모!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규모 에 차별하지 않을 것.
유재원의 발표가 특종이 되어 한 국을 뒤흔들었다.
일단 규모 면에서부터 메가톤급 이었다. 한국의 1998년 국가 예산 은 70조 원이었다. 97년 예산이 75 조였는데, IMF로 인해 5조원이 줄 어버린 것이다. 경제 성장률과 함 께 보폭을 맞춰 항상 증가하는 나 라 예산이었는데, 5조 원이 줄어버린 건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유재원이 백호 펀 드로 동원한다는 자금이 무려 230 억 달러였다. 현재 환율은 1,500원 대였으니 230억 달러는 한화로 34 조 5천억 원이었다.
어마어마한 자금이었다. 34조 5 천억 원이라는 돈은 98년도 국가 예산의 48%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자금이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처음에는 유재원의 발표 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개인이 그렇게나 많은 자금을 동 원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구심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당연히 한국 ID 그룹에 문의 전 화가 쏟아졌다. 단순히 기자들뿐만 이 아니라 다른 기업들이나 청와대 에서도 연락이 올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의구심을 풀어주 기 위한 가장 확실하고도 쉬운 방 법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백호 펀드의 운영 자금에 대해 정부 관계자의 문의가 순간적으로 뚝 끊겼다. 바로 빈센 트 그린힐 ID 인베스트먼트 사장이 송금을 위한 법적인 절차를 모두 마치고, 한국에 송금을 한 시점이 었다.
한국도 OECD 가입으로 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워지긴 했고, 미국은 처음부터 자본주의의 글로벌 스탠 다드이긴 했지만, 230억 달러처럼 거대한 뭉치의 자금이면 이동을 하 는 데 있어 법적인 절차가 필요했 다.
그렇게 법적 절차를 마치면, 자 동으로 재경부에 감지가 되니, 자 연스레 청와대에서도 인지를 할 수 있었다.
최강욱이나 황재홍 둥, 한국 ID 그룹의 고위 임원들을 귀찮게 했던 일이 뚝 끊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대신 기업들의 문의는 더 많아졌 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많은 자금을 보유한 건, 은행도 아니고 일개 개 인펀드에 불과한 백호펀드였던 것 이다. 어떻게 해서든 달러를 얻어 보고자 하는 이들의 숫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많아졌다.
비슷한 시각.
-역시, 재원이 너밖에 없다! 네덕에 한시름 놓았다.
유재원에게 고맙다고 전화하는 전명헌의 목소리는 한껏 흥이 돋아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업을 할 때마다 당장 이뤄질 것처럼 장담해 도 실제로 계약이 이행되기까지 여 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반면 유재 원은 항상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심지어 장담했던 것보다 더 뛰어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도 여러 번이 었다.
이번에도 200억 달러가 아닌 230억 달러를 만들어 오면서 청와 대 식구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었다.
더욱이 이번에는 전명헌의 혼외 자식 스캔들 기사들이 백호 펀드 기사로 묻히면서 한숨 돌릴 수 있 게 된 것도 사실이다.
"뭘요. 저도 다 수익 활동을 위 해서 하는 건데요."
유재원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 했다.
실제로 이번 백호펀드로 유재원 은 절대 손해를 보지 않을 생각이 었다. 나스닥의 IT버블을 제대로 타서 정말 쉽게 번 돈이지만, 그래 도 허투루 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 이 나라는 이대로 무너지 지 않을 거다!
전명헌은 돈을 벌 거라는 유재원 의 말도 응원으로 들었다.
백호펀드로 수익이 나온다는 말 은 곧, 지금 다 죽어가는 기업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과 같았다. 일 각에서는 유재원이 백호펀드를 가 지고 한국 경제를 다 집어삼킬 거 라고 우려하는 소리가 컸다.
특히 진보적인 경제학자들은 이 제까지 봤던 재벌들의 규모를 뛰어 넘는 초거대 기업이 탄생해서 한국 제계를 완전히 집어삼킬 거라고 했다.
전명헌으로서는 그게 무슨 상관 이냐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IMF 를 탈출하고, 죽어가는 기업들이 살아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 이다.
-미국에서도 이번 일로 말이 나 오는 거 같은데 말이다. 그건 괜찮 으냐?
오히려 전명헌은 미국서 큰돈 가 져오는 유재원에 대한 걱정이 있었 다.
"아? 그것도 아셨어요?"
유재원은 전부터 백호 펀드에 대한 구상을 이야기했다. 그때는 별 말이 없었는데, 이번에 ID 인베스 트먼트에서 나스닥에 있던 자금 중 에 230억 달러를 빼서 한국에 넣 자, 본격적으로 비토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글로벌 스탠더드로서 자본의 이 동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미국이었지만, 정작 자기 시장에서 돈이 빠져 나가는 건 또 싫었던 모 양이다. 게다가 나스닥에서 이렇게 나 많은 자금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건 처음인지라, 살짝 충격이 있기 도 했다.
탄탄한 상승세를 유지했던 나스닥의 대형 IT 주식들이 일제히 하 락 반전으로 마감되었으니 말이다.
"걱정 마세요. 미국도 똑같이 경 제 위기가 오면 제가 제일 먼저 나 서서 도와주겠다고 했으니까요."
클린턴 대통령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한 게 아니라, 최근 들어온 기자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응?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이 미국인데, 무슨 경제 위기란 말이 냐?
전명헌의 물음은 이 시대의 상식 이었다.
그런데 사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진 미국의 경제도 그다지 좋은 건 아니었다. IT라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견했고, 적극적으로 밀어줬다. 덕분에 전 세계의 IT 혁 명을 주도하면서 지금과 같은 경제 성장률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미국에는 경제 위기 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 만 미국의 경제가 완연하게 회복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지금, 미국 중 산층을 파탄으로 몰고 갈 독버섯이 빠르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개 입하기 위해서는 백호 펀드가 무조 건 성공해야 한다.
"그나저나, 할아버지는 괜찮으세 요? 경제 개혁 작업에 태클이 이만 저만이 아니던데요? 할아버지를 저 격하는 찌라시까지 돌고 있던 거 같던데."
그렇기에 유재원은 전명헌을 자 극했다.
-나를 물로 본 거지. 전명헌이가 살아 있다는 걸 똑똑히 보여주마.
전명헌도 이를 갈았다.
전후에 생겨난 산업화 세대의 화 신과도 같은 전명헌에게는 이 정도 스캔들 따위에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았다. 대신 대호 그룹은 단단히 찍혔고, 개혁에 반대하는 구태 세 력에 대해서도 독이 바싹 올랐다.
-음, 그런데 말이다. 재원이 너 는 그 기사에 대해 궁금하진 않은 거냐?
전화 통화가 거의 마무리될 때, 전명헌 할아버지는 뜬금없이 그 스 캔들에 대해 물어봤다. 아무래도 민망한 사건인지라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럼요. 저는 언제나 할아버지 편이니까요.
반면 유재원은 이 사건에 대해선 한참 전에 인지하고 있었다. 마음에 짐이 있는 걸로 치면 유재원이 더 컸다. 더욱이 유재원은 전명헌 에 대해 완전무결한 도덕성을 바라 지도 않았다. 전명헌에게 안겨준 시대적 사명을 깔끔하게 완수해주 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 역시 재원이 너는 그리 말해줄 줄 알았다.
전명헌은 유재원의 대답에서 뭔 가 힘을 얻은 모양인지,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 딱 3일이 지났을 때, 전명헌의 포문이 열렸 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 분, 전명헌입니다."
전명헌 대통령이 카메라 앞에 섰 다. 표정은 매우 굳어 있는 상태로 온기는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였 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준비된 카메라는 넥스트컴 사이트에 개설 된 대통령과의 대화와 연결된 게 아니라, 공중파 방송용 카메라였다. 그것도 생방송이었다.
"먼저 저의 부도덕한 과거 뉴스로 국민 여러분께 불쾌감을 드렸던 것에 대해 사과를 드립니다. 부덕 의 소치로서 입이 백 개라도 할 말 이 없습니다."
전명헌은 깔끔하게 스캔들에 대 해 사과했다.
그 모습에 기자들은 깜짝 놀랐 다. 기자들에게 먼저 나눠준 보도 자료에는 스캔들에 대한 사과는 전 혀 언급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예상치 못한 사과로 입을 연 전명헌은 준비된 연설을 시작했 다.
"요즘 언론에서는 대호 그룹의 처리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대마 를 죽이면 안 된다거나, 대량의 실 업자가 양산되어 겨우 회복하던 경 제가 파탄이 날 거라고 합니다. 저 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명헌은 딱 잘라 말했다.
"현재 정부에서 파악 중인 대호 그룹의 분식회계 규모는 16조 원입 니다. 며칠 사이에 또 6조 원이 늘 어난 겁니다. 분식회계라는 것에 대해 매우 가볍게 생각하시는 분들 이 많은 것 같은데, 이는 자본주의 의 바탕인 신용을 해하는 매우 심 각한 범죄입니다. 말 그대로 대호 그룹 전체 자산 중에 16조 원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말입니 다."
대놓고 대호 그룹을 저격하는 전 명헌이다.
청와대야말로 한국 정보 조직들 의 꼭대기에 있는 조직이었다. 그 러니 최근 전명헌을 곤욕스럽게 만 든 스캔들 사건의 뒤에 김오중이 있다는 건 진작에 파악했다.
동시에 전명헌 한쪽에 켜진 스크 린에는 대호 그룹의 자산과 부채 항목이 간단히 나와 있었다. 자산 이 자본보다 매우 적은 격차로 우 위에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전명 헌이 분식회계 규모가 16조원이라고 말하는 순간, 자산 항목에서 16 조 원이 사라졌다. 그러자 대호 그 룹은 부채가 아득히 높아졌다.
"이런 대호 그룹을 살리기 위해 서는 국민의 피인 혈세가 무제한적 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회생 가능 성도 희박한데, 천문학적인 혈세를 써야 한다는 것에 저는 반대합니다. 무엇보다 혈세를 써서 대호를 살리 면, 다른 대기업에도 나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우려도 큽니다. 방만 하게 경영해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 려놓고,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 우는 소리로 징징거리며 살려 달라 하는 건 제가 확실히 끊겠습니다.
설사 미래 그룹이라고 해도 제 생 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전명헌의 얼굴엔 비장함이 가득 했다. 미래 그룹을 언급할 때는 살 짝 눈빛이 흔들리기도 했다.
"동시에 경제사범에 대한 처벌도 지금보다 한층 강화하는 법안을 국 회에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