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권 22화
무슨 말이냐 하면, 티파니의 지 질 데이터 분석으로 유력한 후보지 하나가 나왔다. 이미 유정 개발이 상당히 완료된 텍사스 지역이었는 데, 이미 다른 회사들이 한 번은 홅고 지나간 지역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티파니가 주도적 으로 이끄는 데이터 분석 팀에서 그곳이 유력한 유전 지형이라는 결 과가 나온 것이다. 본래보다 더 깊 게 파고 들어가야 한다는 제약이 있긴 한데, 기술이 발전해서 지금 은 큰 문제가 없었다.
티파니의 공인데도 유재원이 먼 저 챙기는 건, 티파니가 사용한 데이터 분석 기법의 최적화나, 수만 대의 PC를 이용한 병렬 처리 시스 템 설계에 유재원의 도움이 지대했 기 때문이다.
유재원의 도움으로 분석 시스템 의 퍼포먼스가 확 올라가자 티파니 가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런 티파 니를 보고 유재원은 말로만 고맙다 고 하느냐 타박했다. 진한 키스나 받아보자는 생각이었는데, 티파니의 반응은 유재원의 예상과 달랐다. 바로 프레더릭에게 달려갔던 것이 다.
프레더릭의 반응도 기대 이상이 었다.
일단 셰브롱의 지질 분석을 위한 차세대 컴퓨터 시스템은 ID 테크놀 로지가 따놓았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 티파니가 찾은 후보지에 대 해 연방 정부의 탐사 허가를 받았 고 곧장 시험 채굴을 시작했다. 심 지어 시추공을 하나만 뚫는 게 아 니라, 수십 대의 장비를 동원해 동 시에 뚫어보고 있었다.
"흠, 아직까진 짠내나는 진흙뿐 이라 하더구나."
프레더릭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 답했다.
아무래도 시험 채굴은 실패로 보고 계신 모양이다. 하지만 기존보 다 훨씬 빨라진 지질 데이터 분석 속도에는 분명히 만족을 표시했다.
덕분에 유전이 터지지 않더라도 셰브롱의 차세대 컴퓨터 시스템은 ID 테크놀로지가 따놓았다.
"실망할 것도 없다. 원래 유전 개발이란 10,000번 시도해서 한 번 성공하면 되는 사업이니까."
설마 성공 확률이 만분의 일일까 싶다.
단지 유전 개발이 그만큼 어렵다 는 걸 말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유재원은 이번 채굴이 실패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후보지 탐색 의 규모가 커지자 유재원은 귀중한 미래 지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귀한 미래 지식을 티파니 하나만 보고 셰브롱에 상납한 건 아니었다.
"자, 이제 바다낚시라는 걸 제대 로 해보자꾸나."
이후 유재원은 티파니, 프레더릭 과 함께 본격적인 여가를 즐겼다.
그렇게 원 없이 휴가를 즐긴 유 재원은 일상으로 돌아왔고, 오랜만 에 한국에 입국할 준비를 시작했다.
김포공항 국제선 입국장의 현재 상태는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유재원의 입국 사실을 어떻게 알 게 된 모양인지, 몇 시간 전부터 취재진으로 입국장은 몸살이었다. 포토라인이라는 게 만들어지긴 했 는데, 아직 과도기인지라 그게 잘 지켜지지도 않았다. 정보팀의 보고 로 공항의 사정을 알게 된 황재홍 이 경호팀을 몽땅 파견하고서야 그 나마 질서가 잡혔다.
또한, 입국장에선 사진만 찍고 기자회견은 김포공항 운영에 차질 이 없도록 구석진 자리에 빈 공간 을 만들어 진행하기로 했다.
이러한 사항들도 황재홍이 나서 서 교통정리를 했다. 원래는 ID 그 룹의 동아시아 최고 책임자는 최강 욱이니, 최강욱이 나서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최강욱이 백호 펀드까지 맡게 되면서 그의 존재감 은 유재원에 버금갈 정도로 성장했 다.
이 자리에 최강욱이 나타나면 그 것도 엄청난 뉴스였고, 아수라장이 더 심해질 판인지라 황재홍이 움직 이게 된 것이다.
참 안타깝게도 이러한 사전 설정 은 유재원이 입국장에 나타나자 무 의미해졌다.
"회장님! 한국 경제에 대해 한마 디만!"
"8시간 노동 운동을 ID 그룹을 통해 시작한 선구자인 회장님께서 전명헌 대통령의 결정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치신 게 사실입니까? IT 와 다른 산업의 차별성은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일괄 적용하는 게 타 당하다고 보십니까?"
"백호 펀드에 대한 투자 문의가 많습니다. 민간 모금을 시작할 생 각은 없으신지요?"
"회장님, 백호 펀드가 제일은행 인수도 사실…… 야! 밀지 마! 후배 놈이 위아래가 없어?"
"웃기네, 언제부터 인터넷 찌라 시가 신문이 됐지?"
처음엔 좀 괜찮은 질문이 나오는 가 싶더니, 이제는 기자들끼리 막 다투는 지경이었다. 특히 종이 신 문의 새내기 기자와 인터넷 신문에 서 나온 기자 사이의 다툼은 좀 거 리가 떨어진 유재원의 귀에도 그대 로 들렸다.
역시 한국답다.
미국에서 인터넷 미디어와 종이 미디어 종사자의 싸움은 한참 전에 시작된 일이었다. 미국을 빠르게 답습하고 있는 한국도 마찬가지였 던 모양이다.
한심하다는 표정이 절로 지어졌 고, 그 모습이 기자들에게 가감 없 이 그대로 찍혔다. 가짜 뉴스가 범 람하는 시절이라면 표정 하나로 온 갖 루머를 양산할 수도 있지만, 지 금 그랬다간 난리가 나니 큰 문제 는 아니었다.
단적으로 지금의 신문사들은 심 각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바로 광고 기근이다. 신문이나 방송사들이 창출할 수 있는 가장 큰 수익은 광고 판매였는데, 광고 를 걸어주는 회사들마다 어렵지 않은 곳이 없었다. 회사 사정이 어려 워지면서 광고 비용도 덩달아 줄어 들었다. 그야말로 긴축 정책이 뭔 지 확실히 보여주는 중이었다.
반면 신문사들은 더 많이 늘어났 다. 특히 오마이를 대표로 하는 여 러 인터넷 신문사들이 우후죽순 생 겨났다. 일단 언론사로 등록이 되 면 넥스트컴에 기사를 올릴 수 있 고, 그러면 클릭 수에 따라 수익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먹을거 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당연히 미 국에서처럼 기존 기자들은 인터넷 매체 기자들을 같은 기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정치 성향도 정 반대인지라 이처럼 대규모로 모일 때면 분위기가 매우 안 좋아진다.
그나마 다행히 임시로 만들어진 기자회견장에서는 질서가 잡혔다.
유재원이란 존재는 이제 한국에 선 없어선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 백호 펀드에 의해 회생 절차에 들 어간 기업과 백호 펀드의 선택을 받지 못한 기업의 처지는 그야말로 극과 극을 달렸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대호 건설과 대호 자동 차만 봐도 명백해진다.
대호 건설의 경우 부장 이상의
임원들은 대부분 사직서를 받았지 만, 일부는 살아남았다. 그 아래 직 급들은 생존율이 훨씬 좋았다. 오 너들이 저지른 횡령이나 배임 등에 적극적으로 연관되어 있지만 않으 면 고용이 승계되었다.
월급도 따박따박 나왔다. 심지어 원래 받았던 것에서 1원도 줄어들 지 않았다.
반면 대호 자동차는 아직도 백호 펀드의 눈에 들지 못했다. 실사를 받긴 했지만, 여러모로 부족한 점 이 나와 보류 결정이 난 것이다. 이대로라면 새로운 주인 찾기에 나 서야 했는데, 이는 혹독한 가시밭길과 같았다.
그나마 매수에 관심을 보이는 곳 은 모두 세 곳이었다. 일성 자동차, 미래 자동차 그리고 GM이 있었는 데, 세 회사 중 하나가 인수한다고 하더라도 극심한 구조조정을 예고 한 상태였다.
백호 펀드의 선택 하나로 거대한 기업의 운명이 바뀌니 기업인들은 물론 전 국민의 시선이 유재원에게 쏠렸다.
덕분에 기자회견장은 어마어마한 인구밀도에 비해 무척이나 조용했 다.
"안녕하세요? 유재원입니다. 저 의 입국에 대해 이렇게나 많은 기 자님이 관심을 주실 줄은 몰랐네요.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다만 제가 바빠서 질문을 많이 받지는 못할 겁니다. 딱 다섯 개의 질문만 받겠 습니다."
유재원의 발언이 시작되자 기자 들은 수첩을 꺼내 적고, 노트북에 타이핑을 시작했다. 다섯 개라는 소리에 아쉽다는 탄식이 나오기도했다.
"그러면 저기, 남색 양복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쓰신 기자님부터 시작 할까요?"
"넵! 문화 신문의 박재철 기자입 니다."
박재철이란 기자는 문화 신문이 라는 소속에 힘을 줬다.
그도 그럴 게 다른 신문사들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혹독한 겨울을 나는 중이었지만, 문화 신문은 예 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전명헌의 대통령 프로젝트를 위해 갑자기 탄 생한 신문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신문사 기자들에겐 근본이 없 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그런데 전명헌이 대통령이 되면 서 그 없었던 근본이 드디어 생겨 났다. 정부 광고, 미래 그룹 광고, ID 그룹 광고가 끊이지 않았고 다 른 기업들도 전명헌이 대통령이 되 면서 문화 신문을 다른 신문보다 더 챙겼다.
다른 신문사에선 월급을 줄이고, 기자도 줄이는 상태였지만, 문화 신문은 오히려 발행지면을 확대하 고 기자를 더 채용했다.
덕분에 다른 기자들은 문화 신문 을 고깝게 보는 경향이 컸다. 게다가 선천적으로 친정부 성향이 강했 으니, 문화 신문 기자들이 없을 땐 어용 기자라고 폄훼했다.
"대마불사 한국에서 대호 그룹도 무너졌습니다. 회장님께서 타임지와 의 인터뷰로 예견하셨던 그대로 말 입니다. 그런데 그때, 대호 그룹뿐 만이 아니라 일성 그룹도 언급하셨 습니다. 그 견해에 지금도 변함이 없으십니까?"
역시 문화 신문이었다.
어쩜 그리 유재원의 입맛에 콕 맞는 질문을 이렇게나 잘 찍어주는 지 모르겠다. 혹시 최강욱이나 황 재홍이 슬쩍 말이라도 해준 건가 싶을 정도였다.
박재철에게 몰렸던 기자들의 이 목이 다시 유재원에게 몰렸다. 일 성이라면 미래 그룹과 한국 1등을 다투는 대재벌이었다. 그런 일성이 위험하다는 건 대호 사태와는 차원 이 다른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불도저 전명헌처럼 유재원도 후 진 없이 달리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는 말로 운을 떼자마자 기 자회견장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경제 전문가들이 일성을 두고서 상 황이 위험하다 아니다 말을 할 때 조금씩 기사화는 되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기사는 대부분 주장의 강도가 약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기자들을 더욱 어렵게 만든 청탁금지법 통과 와 함께 가짜 뉴스 금지법도 통과 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볍게는 정 정 보도 정도에서 끝나지만, 큰 사 고를 치면 벌금으로도 끝나지 않을 수준인지라, 신문사들은 예전처럼 독한 기사를 멋대로 쓸 수 없었다.
경제 기사를 쓸 때, 신문사들의 입을 대신해 주었던 전문가들도 마 찬가지였다. 주로 대학 교수들이나 경제 연구소 연구원들이 그 역할을 맡았었는데, 한국 경제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성 그룹의 눈 치를 보느라 망하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를 감히 입에 담지 못했다.
"1년 전만 해도 일성 그룹의 전 체적인 펀더맨털은 매우 양호했습 니다. 그런데 일성 자동차의 출범 으로 사정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유재원이 언급하자 무게감 이 달라졌다.
"그냥 자동차만 출범했으면 좀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일성 의 순환출자 구조를 자동차를 중심 으로 무리하게 바꾸는 과정에서 탈이 좀 났습니다. 이유는 여러분들 이 다 알고도 말 하지 않는 3대 승 계에 있죠."
유재원에게 한국의 불문율 같은 건 전혀 통용되지 않았다.
지금 언급한 승계 문제도 웬만해 선 언급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하 지만 일성 그룹의 부실에 대해 설 명하기 위해선 승계 문제를 언급하 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성 전자만 해도 그렇습니다. 일성 그룹의 대표적인 캐시카우였 지만, 지금은 애물단지로 전락했습 니다. 아시다시피 PC의 세대교체가 끝나면서 디램의 수요가 크게 줄어들었죠. 그런데 일성 전자에는 당 장 갚아야 할 회사채가 수십억 달 러나 됩니다. 일성 전자가 이 회사 채를 어떻게 처리할지가 관건이겠 죠."
회사채란 바로 ID 인베스트먼트 가 가지고 있는 20억 달러치의 채 권을 말하는 것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일성 전자에 서는 회사채 만기 연장을 위해 ID 인베스트먼트의 사무실 문턱이 마 르고 닳도록 드나들고 있는 상태였 다. 하지만 유재원은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 10%가 넘는 만기 이자까지도 알뜰하게 받아낼 작정이었다.
유재원이 말이 이어질 때마다 기 자들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대호 그룹의 몰락으로 한국 땅에 서 대마불사의 신화는 끝났다는 걸 전 국민이 다 인지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대호 그룹까지만 이라는 생각도 한편에 있었다. 그 이상의 상황은 상상하기도 싫었으 니 말이다.
그러니 일성 그룹도 단순한 우려 가 아니라 진짜로 위태롭다는 유재 원의 말에서 오는 충격은 대단히 컸고, 현실적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을 지금 인터뷰 하는 시간이 금요일 늦은 오후라서 증권거래소 문이 닫혔다는 점이라 고 할까. 물론 오늘의 여파는 월요 일 주식시장에 그대로 반영될 테지 만, 그래도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반면 유재원으로서는 뭐래도 상 관없었다.
일성 전자로 20억 달러짜리 채권 의 만기가 찾아오는 날은 이제 한 달 남짓 남았을 뿐이다. 최현희 회 장이 이를 막아낼 수 있을지, 어떻 게 막을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회귀로 압도한다